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R & J-5

2004.10.15 00:2010.15

“네,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왜 도둑고양이마냥 몰래
이 마을에 들어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거리가 텅 빈 까닭도 모르고, 사교가 이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무엇보다 처음 만난 아가씨가 어째서 날 치한처럼 쳐다보는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내 탓만은 아니죠!”
그는 벌컥 성을 냈다. 어제부터 줄곧 미궁을 헤매는 기분이다.
자기들끼리 사태가 심각하든 어떻든, 알게 뭐람. 적어도
돌아가는 정황은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취하니까 무섭네요.”
거트루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 디디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 스스로도 놀랄 따름이라고.
거트루드는 이렇게 화를 내는 게 얼마만인지 가늠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소리를 지른 때가 언제였더라?......기억나지 않는다.
그녀 말처럼 난 지금 취한 걸까. 그는 고개를 돌려 블라인드 너머
노을이 지는 광경을 응시한다. 또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난 걸지도 모르죠.”

그는 예상을 깨고 조용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지도 않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을 뒤집지도, 심지어 디디한테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막내딸-아마도 이름은 콘스탄스-을 끌어안고
온몸의 정기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쪼그라들었을 뿐.
“마스터......죄송해요, 마스터?”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자, 디디는 청소용 대걸레를
마스터한테 내밀며 눈을 질끈 감고 비장하게 외쳤다.
“각오는 되어 있어요! 감히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요,
자아, 모질게 때려주세요!!”
그러나 미스터 자켄은 그저 하염없이 ‘콘스탄스......’를 되뇔 뿐,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 장사 접자......”
“에?!”
잘못 들었나 싶어 디디가 반문했다.
자켄은 힘없이 일어나 탁탁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여전히 콘스탄스를 소중히 끌어안은 채.
“어차피, 손님도 없을 텐데.”
마스터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디디는 아하, 하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어쩐지, 아무도 안 들어온다 했네.”
“무슨 까닭이 있습니까?”
거트루드가 묻자 자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은 '애교 날' 이라우.”
“애교 날?”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를 뇌까려 본다.
자켄은 상심에 젖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남자들이 마누라한테 온갖 아양을 다 떨어야 하는 날이지.
옆에서 보자면 참 불쌍하고 아니꼽지만, 별 수 있나.
다~ 살자고 아등바등하는 거 아니겠소.”
자켄이 푸념을 늘어놓는 사이 디디가 거트루드한테 눈짓을 했다.
그녀는 종이에 그려진 날개 달린 뱀을 가리켜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거트루드는 어렴풋이 어떤 가닥을 잡은 기분이 들었다.
실마리의 끝을 잡고 계속 따라가면-.
“그-'루데아' 때문에?”
“게 아니면 또 뭣 때문에 사람들이 마누라한테 깨갱거리겠소?!
술도 못 마셔, 담배도 못 펴, 노름도 안 돼,  
집에 들어가선 애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줘......
그 놈의 잘난 여신 덕에 사람 여럿 죽어나지, 암.”
자켄은 말하던 도중 부아가 치미는지 투덜댔다. 엉뚱한 데에
화풀이하는 구석이 엿보였지만, 얘기를 계속 하면서  그는
생기를 조금씩 되찾았다.

“태고신이 첫 주에 땅과 바다를 만들고 둘째 주에 만물을 만들되
셋째 주 비로소 여신이 잉태하여 인간을 낳았다-바로 그 구절에서
셋째 주 금요일을 안식일로 정한 거죠. 그들은 여신을 루데아라고 불러요.”
돌아보니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그녀가 있다.
디디의 다갈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거트루드는 그녀의 두 눈에 가득 담긴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아리안과 정교를 떼어놓고선 그 무엇도 이야기할 도리가 없다.
아리안이 곧 정교이며, 정교가 아리안의 모든 것이다.
이념도, 역사도, 현세도 전부 정교로부터 시작하고 끝마친다.
이것은 아리안과 아틀란카를 구분 짓는 가장 커다란 존재이며
또한 차별의 수단이다.
아리안이 아틀란카에 배타적으로 구는 까닭은 아틀란카가
믿음이 없는 자들의 후예이기 때문이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물론 ‘아리안은 신의 구원을 받았다.’는,
짤막하지만 절대적인 힘을 가진 문장을 따르는 것이다.
아리안은 선택받은 신의 나라였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전쟁에 패해 아리안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아틀란카는
애시 당초, 어떤 발버둥을 쳐도 신의 구원 따윈 받을 수 없는 자들의 땅이었다.
신의 아들이자 정교의 창시자이며 만인의 구세주인
황제 아디난이 미천한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뒤, 6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
아리안은 전성기를 맞았고, 강력한 국력을 행사했다.
비단 속국인 아틀란카를 떠나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가 앞 다퉈
머리를 조아려 형제 국임을 자청했으며, 정교의 사제들을 초청해
국빈대접을 하여 정교를 전파 받았다.

무릇 넘치면 흐르며, 고이면 썩는 것이 만물의 이치이듯,
영원할 것만 같던 아리안의 영광도 조금씩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정교-아리안 정교가 공식명칭인-의 최고사제임과 동시에
아리안을 통치하는 황제(그들도 때를 맞이하면 아버지 곁으로
갈지어다. 그리하여 모든 아리안이 변치 않는 구원을 누리게 될지어다.)
는 아디난의 후손이란 점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세를 누려왔지만
6현제를 거쳐 2명의 황제가 황족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국정을
소홀히 하는 사이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급부상,
이들은 사사건건 키린의 통치를 거부하는 불온한 기운을 뻗혀 나갔다.
연쉰력 315년 호족세력 중 강대한 힘을 가진 수르카바가
마침내 봉기하여 아리안 남부 일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나,
황제 루투운이 갑작스레 아버지 아디난의 나라로 떠나고
(라고 쓰고 암살이라 읽는다.) 신 황제 앙투예가 분열된 황족들을
모아 전선을 재정비, 대장군 라희로 하여금 수도 키린의 경계에서
수르카바를 격퇴, 수장 산추라이의 목을 벤다.
앙투예 황제는 반란을 막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이후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것을 우려, 정교의 수호자 노릇보다
황제의 권력을 탄탄히 다지기에 치중하였다.
때문에 정교와 황제간 사이에 틈새가 생겨났으며, 비록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지방에선 변함없이 힘을 가진 호족들을 완전히
누르지도 못했다.

앙투예 황제의 치세가 끝나고 새로운 황제의 시대가 열릴 즈음에
이르러, 아리안은 황제와 황족, 정교, 그리고 호족의 네 세력이
엇비슷한 힘으로 자웅을 겨루며 대립하는 혼란 속에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조바심을 낸 건 위기를 느낀 정교였죠. 황제와 황족,
양쪽을 떠나 홀로 서기엔 너무 명분이 약하고, 여기저기
치이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하고......생각 끝에 착안해 낸 것이 바로-.”
“사교를 끌어안는다.”
거트루드가 디디의 말을 이어받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 정교는, 소위 말하는 6현제 시절-잘 나갈 때엔
토속 신앙이나,다른 신을 섬기는 소수 민족을 우상숭배니 뭐니
하면서 탄압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걸 잘 써먹으면
득이 되겠다는 계산을 했어요.
그들은, 그동안 박해를 받던 이교도들을 포용하겠다는 포고를
하는데-조건은 단 하나,‘섬기는 신을 정교의 성서와 교리에  부합시킬 것’
까놓고 말해 내 밑으로 들어와라, 이거죠.”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 정교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발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정체성 기저를 뒤흔들던 모순덕택에 별 무리 없이
관철될 수 있었어요.
그 모순으로 말하자면, 오직 태고 신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아리안 정교가, 창시자 아디난을 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라 칭하고,
아디난이 서거하여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으니 그 역시 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이후 아디난의 혈통인 모든 황제들을 사후신격화
시켰다는 점이죠.”
여기까지 말하고 디디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리안의 역사와 정교를 핵심적으로 정리해 설명하는 그녀는
노련한 강사처럼 보였다.
다만, 정교에 관한 얘기를 하는 내내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게다가 정교의 성서는 아디난의 7형제 역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추앙하고 있으니,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치곤 엄청난 숫자의
신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형국이어서 비판적인 신학자들의
공격을 많이 받았어요. 그들은 황제가 죽으면 곧 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라고 주장하죠.
아리안이 생긴 이래 3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정교는 이런 골치 아픈
모순을 늘 떠안고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이 모순이, 골칫덩이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됐으니.”
이런 게 인생무상, 새옹지마라고 하던가요? 하고 디디가 짧게 웃는다.

“자신들의 종교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방법은 그동안의
억압과 학대가 억울할 정도로 쉬울 따름이었어요.
일단 정교의 성서와 기록을 모조리 뒤져서, 자기네 신과
비슷해 보이는 인물을 찾아내면, 물론 고증이랄까,
약간의 절차가 필요하지만 그리 까다롭진 않고-다음은
돈 보따리를 싸서 구비서류와 함께 총본산에 갖다 바치기만 하면 끝.
무수히 많은 종교가, 개종 아닌 개종을 하였고, 총본산은 앉아서
떼돈을 벌게 되었죠.
덤으로 이교도를 감화시킨 셈이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기사회생의 한 방과 동시에......종교가 사업으로 전환되는
역사적인 사건의 한  페이지라고나 할까, 후훗.”
자조와 함께 디디의 이야기는 끝났다.

“어어, 얘기 다 끝났나?”
꾸벅 꾸벅 졸고 있던 자켄은 괴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 더듬더듬 물었다.
“신학은 딱 질색이라서.”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나 거트루드는 한 가지 더, 물어볼 것이 아직 남아있었다.
“루데아를 믿는 사교-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줘요.”
“......나도 자세히는 잘 몰라요, 칼루스에 있는 동안에 나타났으니까.
내가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변한 뒤였어요. 단편적인 것만 몇 가지,
아버지와 친구들한테서 들었을 뿐.”
“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가 나타났지.
여기에도 왔었어. 저기 저 문을 열고. 아아, 꼭 어제일 같구만.”
“그 고매하신 분께서 술집엘 다 찾아 왔었다구요?!”
자켄이 추억을 떠올리듯 기억을 끄집어내자 디디가 처음 듣는
소린지 화들짝 놀랐다.
“왔었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얼굴만 빼곤 모두 폭이 넓은
사제 옷에 가려있었지. 곧장 저기를 지나 바에 있는 내게 다가와서는--.”

anjai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5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9. 네트워크 먼여행 2004.10.01 0
2755 단편 십자가1 이원형 2004.10.01 0
2754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0. 꿈에서1 먼여행 2004.10.02 0
2753 단편 Secret Garden1 새벽별 2004.10.03 0
2752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1. 새로운 아이, 효정 (1) 먼여행 2004.10.06 0
2751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1. 새로운 아이, 효정 (2) 먼여행 2004.10.08 0
275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2. 여신女神 (1) 먼여행 2004.10.08 0
274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2. 여신女神 (2)1 먼여행 2004.10.09 0
2748 단편 죽음을 부르는 남자 이야기. 유키사마 2004.10.11 0
274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3. CUT 먼여행 2004.10.11 0
2746 장편 R & J-1 anjai 2004.10.12 0
2745 장편 R & J-2 anjai 2004.10.12 0
2744 장편 R & J-31 anjai 2004.10.12 0
2743 장편 R & J-4 anjai 2004.10.15 0
장편 R & J-5 anjai 2004.10.15 0
2741 장편 R & J-6 anjai 2004.10.15 0
274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4. 경주, 어머니 (1) 먼여행 2004.10.15 0
273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4. 경주, 어머니 (2) 먼여행 2004.10.15 0
273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5. 적의敵意1 먼여행 2004.10.15 0
2737 단편 인생설계도 우울중독 2004.10.16 0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