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R & J-4

2004.10.15 00:1810.15

디디는 ‘창피해! 쪽팔려! 낯 뜨거워~!’를 연거푸 외치더니
마침내 의자를 가져와 진열대 가장 높은 곳에 놓여있는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두 잔을 따랐다.
“마스터가 알면 죽이려 들겠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아무 생각이 안 나니까.”
자기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머지 한 잔은 거트루드에게.
머뭇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으윽!!!!!!!
“후하~~~~.”
“히~, 죽이죠?!”
“우유, 우유 줘요!”
“그런 건 안 팔아요.”
가슴속에 불이 켜졌다. 뼈까지 후끈 달구는 열기.
내장이 다 타버릴 거야!
거트루드가 괴로워 몸을 비트는 모습에 디디는 낄낄, 깔깔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잠시 후 취기가 달아오른 거트루드와 디디는 서로 별 시덥잖은
소리를(차마 대화라 부를 수도 없는)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손님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디디의 두 뺨에는 장밋빛 홍조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든 거트루드는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
너도 혀 꼬이니? 나도 그래, 그래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이해하지??
둘은 마냥 유쾌했다. 비바, 드렁큰!
“배달이요~. 윽, 뭐야 이건?!”
딸랑, 딸랑. 두 번 울리는 경쾌한 방울소리와 함께 박스를 두 개
어깨에 짊어지고 들어온 사람은 움찔 놀라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 어서 와~~.”
“......잘 한다, 아주. 크악, 냄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영하는 디디에게 가까이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코를 쥐고 비명을 지른다.
“우히히히~. 오늘은 일찍, 왔네.”
“저 쪽 배달이 빨리 끝났거든.”
그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내용물을 하나씩 꺼냈다.
유리로 만든 커다란 원통모양의 병 4개 .둥근 병에 든 액체는 물이었다.
“안녕하세요오~. 얼굴이 낯이 익은데~, 으음......”
“파올로 입니다. 어제 오두막에서 통성명했죠.”
파올로는 모자를 까딱 들어 인사를 했다. 그리고 험상궂은 얼굴로
디디를 노려보면서 입 모양으로
‘너 저 사람한테도 먹였냐?!’고 성질을 부렸다.
거트루드는 손뼉을 치며
“아~소고 농사하는~! 기억나요, 기억나.”
“......사과 과수원이유.”
혀가 꼬여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 거트루드를 기막히단 듯
쳐다보다가, 못내 디디의 양 볼따구를 쭈왁 잡아당긴다.
“마시려면 곱게 마시지, 제정신이냐?!”
“어우야, 아파~~.”
“으이구, 아픈 거 알긴 하냐. 자켄 씨 깨기 전에 얼른 정신 차려라, 엉?!”
“안 돼, 나는--, 난 네고시에이터가 되어야 한단 말야!!”
“네......뭐??”
“난-그동안-너~무 혹사당해 왔어! 담판을 짓겠다, 이 말씀이야!”
디디의 헛소리에 거트루드가 킬킬댔고, 파올로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는 바에 놓인 술병을 들어 라벨을 확인한 순간 끙, 입 밖으로
신음을 뱉었다.
“자켄 씨가 알면 길길이 날뛰겠구만.”

“으...... 나 죽어.”
“널 죽일 수 있는 게 세상에 있긴 하냐.”
“구박 좀 하지 마. 거기, 거기 두드려줘. 응~거기.”
요청에 따라 등 아래쪽을 두드리자 끄윽, 트림을 토한다.
파올로는 궁시렁대면서도 친구의 등을 자상하게 두드려주었다.
온갖 감정이 뒤엉킨 주먹에 힘을 불끈 쥐고서.
디디는 어이 없어하는 친구를 붙들고는 망가진 카세트처럼
‘난 말이지-괴로워-너무 괴로워-.’를 무한 반복하다가
괴로워......, 이 마지막 말을 내뱉고 급하게 복도로 내달렸다.
곧이어 꾸에엑, 내장을 쥐어짜는 고통이 실린 단발마가 여성만의
금단의 장소에서 새어나왔다.
“나야말로 괴롭다, 정말.”
혼자 실실 쪼개다 어느새 바에 몸을 납작 엎드려 잠든 거트루드를
보면서 파올로는 고개를 설래 저었다.

지옥을 겪고 돌아온 디디는 파올로가 건넨 숙취 제를 후들거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는 자고 있는 거트루드도 깨워 같은 약을 먹였다.
“이놈의 가게는 장사 포기했나, 주정뱅이 종업원만 달랑 두고
태평한 주인이구만.”
“......좀 더 오른쪽.”
파올로의 핀잔 섞인 잔소리를 못들은 척 디디는 딴청을 부린다.
한바탕 게워내고 나자 속은 후련했지만 가슴이 울렁거려 등을
두드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잠이 깬 거트루드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종업원 바꾸자고 건의를 해야--.”
“헹, 나 자르면, 누구 구할 사람이라도 있어?!”
“나라도 하면 되지.”
“어이구, 다들 꽤나 좋아하겠네.”
좀 살만한지 디디가 이죽거렸다.
그러나 그는 즉각 응수했다.
“주정부리고 토하는 웨이트리스보다야,
사내들만의 낭만을 이해할 웨이터가 낫지 않겠냐.”
“핏.”
한 수 위. 멍하니 두 사람의 입씨름을 구경하던 거트루드는,
디디를 가볍게 눌러버리는 파올로의 입담에 혀를 내둘렀다.  
“어이, 어이. 자켄 씨 금지옥엽 막내딸 머리올린 이유나 들어보자.”
렌지 아웃의 마스터 자켄은 대륙 곳곳의 명주를 수집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특히 아끼는, 차마 마개를 따고 안의 것을 목구멍으로
흘러 보내는 상상만 해도 취해버리는 술이 세 병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사랑스런 내 딸들이라 불렀고, 십년 전에 큰딸을,
삼년 전 둘째를 시집보낸 뒤에 남은 하나를 닦고 불고하면서
‘이 아이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디디가 마셔버린 술이 바로 이 막내딸이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디디는 잇 사이로 짤막한 문장을 흘렸다.
“죽었다.”
“이제 알았냐.”
“......마리엘라랑 마주쳤어.”
“......”
“힐데도.”
“......한 대 정돈 대신 맞아줄게.”
“고맙다, 친구야.”
“나머진 요령껏 피해라.”
“응......”
두 사람 사이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거트루드는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파올로가 거트루드를 향해 말을 꺼냈다.
“참, 자정에 다시 뵙자네요, 회장님이.”
“왜 꼭 늦은 밤이죠?”
거트루드의 질문에 파올로는 쩝......입맛을 다시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몰래 집을 나오려면 별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어째서-으앗!!”
“미안, 미안해요!”
디디가 물을 엎지르는 바람에 거트루드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피했다.
디디는 행주를 들어 거트루드의 옷자락에 튄 물방울을 닦기 시작했다.
“별로 안 젖었어요.”
“쉿, 아무 것도 묻지 말아요.”
그의 귓전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속삭인다.
너무 가까이 숨이 닿는 바람에 거트루드는 얼굴을 붉혔다.
달콤한 분향이 주위를 맴돈다.
“칠칠맞기는.”
“시꺼. 너야말로 한가해 보인다? 남의 가게 걱정 말고 배달이나
마저 돌지 그래.”
“네, 네, 네.”
파올로는 모자를 고쳐 쓰고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내려섰다.
그는 거트루드에게 까닥 목례를 하고 유유히 렌지 아웃을 나갔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거트루드씨.”
“약 고마워요.”
멀어져가는 그의 뒤통수로 거트루드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파올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디디는 거트루드의 옷섶을
거세게 잡아 쥐고 무서운 기세로 쏘아붙였다.
“바보! 모두들 잔뜩 기대하고 있단 말예요.
혹시 머리 엄~청 나쁜 거 아녜요?!
아무리 이해력이 딸린대도 대놓고 멍청하게 아무것도 몰라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들이 제대로 말해주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트루드는 디디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anjai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5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9. 네트워크 먼여행 2004.10.01 0
2755 단편 십자가1 이원형 2004.10.01 0
2754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0. 꿈에서1 먼여행 2004.10.02 0
2753 단편 Secret Garden1 새벽별 2004.10.03 0
2752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1. 새로운 아이, 효정 (1) 먼여행 2004.10.06 0
2751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1. 새로운 아이, 효정 (2) 먼여행 2004.10.08 0
275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2. 여신女神 (1) 먼여행 2004.10.08 0
274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2. 여신女神 (2)1 먼여행 2004.10.09 0
2748 단편 죽음을 부르는 남자 이야기. 유키사마 2004.10.11 0
2747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3. CUT 먼여행 2004.10.11 0
2746 장편 R & J-1 anjai 2004.10.12 0
2745 장편 R & J-2 anjai 2004.10.12 0
2744 장편 R & J-31 anjai 2004.10.12 0
장편 R & J-4 anjai 2004.10.15 0
2742 장편 R & J-5 anjai 2004.10.15 0
2741 장편 R & J-6 anjai 2004.10.15 0
274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4. 경주, 어머니 (1) 먼여행 2004.10.15 0
2739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4. 경주, 어머니 (2) 먼여행 2004.10.15 0
2738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5. 적의敵意1 먼여행 2004.10.15 0
2737 단편 인생설계도 우울중독 2004.10.16 0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