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R & J-3

2004.10.12 15:2610.12

2장. 괘

“들어오세요.”
막 세수를 마친 등 뒤로 노크소리가 들렸다.
삐이걱 문이 열리고, 구두가 바닥을 둔탁하게 울린다.
“아침 가져왔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거트루드가 인사했다.
디디는 입을 비죽였다. 아직 심통이 덜 풀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탕 소리 나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계란과 햄, 양상추와 얇게 저민 사과가 든 샌드위치.
이 지방 사람들은 토마토 대신 사과를 넣는 모양이군.
갓 짜낸 우유와 사과 두 알이 아침메뉴였다.
의자에 앉아 잔에 우유를 가득 따라 한 모금 마셔보았다.
도시에선 맛 볼 수 없는 가공하지 않은 우유의 비릿하면서
진한 구수함이 강렬하다.
샌드위치를 한 점 베어 물고 다시 우유를 마시는 동안,
디디는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거트루드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어제보단 부드럽지만 굳건한 심지가 엿보이는 눈이었다.
어두울 때라 잘 몰랐지만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한 디디의 머리칼은
진한 밤색이었다. 다갈색의 눈동자와 썩 잘 어울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샌드위치 4개와 우유 2리터를 모조리 해치우고 행복한 포만감에
젖어있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내가 못미덥나요?”
“......못미더운 건 당신이 아니라 우리 아빠죠.”
“존슨 씨가 무슨......?”
“아빤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이번에도 한 건 올렸군,
그렇게 생각했어요.”
부녀간에 사이가 별론가. 디디는 타루렐에서 존슨에게 들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존슨은 딸을 ‘상냥하고 재치 있고 온유하며 영민하기까지 한,
신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아이’란 긴긴 수식어로 표현했다.
딸 자랑에 열중할 때 그의 눈은 얼마나 빛나고 생기 넘쳤는지!
일의 의뢰보다 딸 얘기에 열띤 모습에 뭐야, 팔불출 아버지잖아,
하면서도 왠지 모를 흐뭇함을 느꼈는데.
그는 어쩐지 서글퍼졌다.
“봐요, 멀쩡한 젊은 사람들 놔두고 굳이 자기가 가야만
한다고~한다고 고집 부려, 까마득한 옛날에 것도 딱 한 번
동부에 가봤다는 걸 내세워서는.
그래놓고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 한 번 없었다고요!
모두들 얼마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
게다가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 줄 알았더니, 달랑 편지 한 통으로
당신을 찾았으니까 하룸에 당도하면 뒤를 부탁한다?!
진짜 창피해, 집안망신이야~!!”
...... 역시 두 사람 닮았어. 드러내는 스타일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일순이었지만 존슨을 동정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멍충이, 아직도 나는 멀었나보다.
“그러면 결국 존슨 씨는 ......”
“뻔해, 총본산으로 가고 있겠죠.
분명히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가 겨우겨우 키린에 도착할 테고.
으휴, 그 속을 내가 왜 몰랐을까, 좀만 생각하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걸!”
말하다 흥분하면 팔을 공중으로 마구 휘젓는 것도,
오른쪽 눈썹을 치켜뜨는 것도 영락없는 판박이.
“내게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자신은 정교 총본산에 가서
직접 탄원서를 제출할 거라고.
그런 연유로 동행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촌구석 아저씨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글쎄요...... 내가 존슨 씨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던데요.”
“으~~돌아오기만 해봐, 아주 그냥-.”
속에서 열불이 나는지 디디는 거트루드의 잔을 뺏어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실례. 먹던 거 남이 입대는 거, 싫어해요?”
“아뇨, 저언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입니다.”
거트루드가 도리질하자 디디는 헤헤, 멋쩍은 웃음소리를 낸다.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눈 꼬리가 갈매기모양으로 휘어지는 게 마치 고양이 같다. 꽤 귀엽잖아.
“아무튼, 어젠 미안해요. 이 기집애 뭐야, 했겠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녀의 멋진 웃음에 답하여, 거트루드 역시 최고로 상쾌하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선보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요? 오후엔 가게에 나가봐야 하지만,
낮에는 도와줄 수 있는데.”
“먼저 지형도를 만들까 합니다.”
“......? 지도, 있잖아요.”
디디가 의아해 하면서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그건 쓸모가 없어요. 일을 시작하려면 마을과 산맥, 강을 빠짐없이
그려야 합니다.”
륙색을 열어 장비를 하나씩 꺼내어 살펴본다.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디디가 까치발을 하고 등 너머로 구경을
하려 들지만, 딱히 대단한 것은 없다.
나침반, 측량 도구, 펜과 종이 그리고 ......
“이 돌은 뭐죠?”
표면이 반질반질한 둥근 돌을 손에 쥐어 본다.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쥐었다 폈다 하면서.
붉은 반점이 불규칙하게 박혀있는 불투명한 원석이었다.
거트루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을 건네받아 빌로드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제일 중요한 물건입니다.”
“비싼 거?”
대답대신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 꺼내었던 것들을
다시 륙색에 쓸어 담은 뒤 부츠의 끈을 공들여 묶었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치자 준비가 끝났다.
“가볼까요.”

하룸의 지형을 북고 남저라고 설명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북고고 남고'가 맞을 것이다.
룬덴바움 강 하류 지대가 낮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북쪽의
룬덴바른 산맥에 비해 낮다는 뜻이며, 어지간한 지역의 고원에
필적하는 경사를 이루고 있다.
참고로 룬덴바른 산맥의 최고봉 룬디바르는 남서부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었다.
꼭 등산하는 기분이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려도 이마는
금세 또 흥건히 젖고 만다.
조금씩 속도가 쳐지다가,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따라오고 있는
디디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중얼거렸다.
“모자 갖고 올걸......”
“이 쪽으로, 꺾어지면, 강, 강 둑,이 나오는 거, 맞나요?”
발걸음을 하나씩 떼면서 문장을 끊어 질문하자 숨찬 목소리로 디디가 외쳤다.
“그럴, 거, 에요, 아마.”
논 지대를 걷고 있는데도 이렇게 힘들 줄이야.
다음번엔 산맥을 타야 한다는 사실에 거트루드의 하반신이 풀릴 뻔 했다.
근력운동을 해놨어야 했어. 오두막을 출발해 한 시간이 못 되게
걷고 있지만 느낌은 마치 한 나절을 내리 걸은 듯하다
“왜, 이렇게, 높, 높은, 곳에 농사, 를 짓는 건가요?”
“자꾸 물어, 보, 지 말아요! 힘들어~! ...... 저수, 지, 를 ......
만들데, 가......마땅히 없, 거든요.”
마침내 풍차바퀴가 보인다. 거트루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멈춰  서서 디디가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나침반으로 방위를 확인하면서.
“후아~간만에 땀 빼네.응? 이상하게 생긴 나침반이네요.”
손바닥을 부채처럼 파닥거려 얼굴의 열기를 식히며, 숨을 고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트루드는 웃으면서 나침반을 디디한테 건네주었다.
그것은 분명히 여느 나침반과는 달랐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표시가 있는 게 아니라, 검은 막대가 여러 개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세어보니 모두 24개였다.
그 중 끊어진 모양의 막대도 눈에 뜨인다.
막대들은 가로로 세 개씩 행을 지어 여덟 묶음으로 나뉘어 있는데,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었다.
“아, 어지러워.”
정신을 집중하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일어나
디디는 휘청거렸다. 그녀는 나침반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저수지가 꽤 넓네요.”
“증축을 계속 하고 있으니까요. 내년 봄이 오기 전에 또
공사할거에요.   풍차를 하나 더 짓자는 말도 있는데 그건 무리 같고......”
풍차는 저수지로 끌어 모은 룬덴바움 강물을 논둑에 대는 역할을
하는 하룸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였다.
풍차의 열쇠는 벤틀러 씨와 청년단장 욥이 여벌열쇠를 갖고 있을 뿐
이라고 디디는 말했다.
두 사람은 잠시 저수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물잠자리가 수면 위를 닿을락 말락 스쳐 지나간다.
물이 얕은 곳에는 왜가리 두세 마리가 한 발로 서서 물고기를 사냥하고 있었다.
“타루렐, 살기 좋아요?”
거트루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잠깐 회상했다.
아가씨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도 태연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저녁 8시를 넘겨 피아노를 치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한테 연행되는 곳.
“그럭저럭 살만하죠.”
집세 걱정만 없다면 말이지.
이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실은, 칼루스에 살았어요, 3년간.
아주 정착한 건 아니고 유학이랄까.”
디디는 발끝에 닿는 조약돌을 차 저수지로 날려 보냈다.
시선이 먼 곳을 향하고 있지만, 추억을 그리워하는 표정이 언뜻 스쳐 지났다.
“무슨 공부를?”
“......운이 좋았지, 지원서는 냈지만 거주 허가를 받을 거라곤
기대 안했거든요. 아주 안했다면 거짓말이고, 그냥, 될 대로 되라~정도?”
거트루드한테 하는 말이라기 보단, 혼잣말에 가까운 어투였다.
여전히 그리워하는 눈매로, 저편을, 하늘 저편을.
“거기서 지낸 3년이 인생에 있어 제일 행복한 시절이에요.
아빠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아침에 눈뜨면 하루가 또 시작된다는 게 너무 즐겁고,
막 가슴 뛰고 ,노을이 지면 어쩐지 아쉽고......난 그랬어요.”
“......”
“......그런데 돌아왔더니 고향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을 줄 누가 알았담.”
아까부터 발에 차이는 조약돌을 모조리 강물로 던져버리던
그녀는 마지막 문장과 함께 거트루드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니까, 당신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 안 둬요. 알겠어요?!”
“......네.”
말의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틀러의 손이, 그 감촉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얇은 피부 거죽이 비늘처럼 갈라져 있고, 자글자글 주름투성인
손은 단단했지만 차가운 땀이 배어있었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측량계를 설치하고 나서 한참을 그 기묘한 나침반을 들여다 본 다음
그는 스케치를 시작했다.
도울 일이 없다는 말에 디디는 그늘에 앉아 기지개를 한껏 펴고
길게 하품을 했다.
그녀는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거트루드의 작업을 구경했다.
간식이라도 싸올 걸.   쯥, 기다리는 건 너무 지루했다.  
따사로운 햇살에 꾸벅꾸벅 졸음이 올 무렵, 거트루드가 스케치한
종이를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디디가 앉아있는 그늘로 돌아왔다.
돌아갈까요, 그의 말에 디디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 들려 점심 먹고 가요.”
“아, 배고프네요. 갑자기.”

마을 시내로 내려오면서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디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거트루드는 타루렐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들을 들려주었다.
대부분의 화제에 디디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재미있어했다.
특히, 시청 앞을 지나던 할머니가 시장한테 길을 양보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쳐 작은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점점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마치 죄인 심문하듯 시장을 정좌시킨 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불만사항을 목청껏 소리 높이던 중 순찰하던 경찰이 나타나
시장이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경찰 역시 시민무리에 가세,
연간 지급되는 구두를 두 켤레로 늘려 달라고 요구하는 대목에선
겔겔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웃다가 배가 아프다며 주저앉아버렸다.
“......그래서 결국 시장님은 시 최고의 구두장이 리들이 만든
구두를 해 마다 두 켤레씩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제야 모든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경찰은 시장님을 모시고 자리를 떠났죠.”
“우히힛, 끅......아, 배 땡겨~.”
“그 뒤로 그 경찰관은 구두의 네고시에이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으흑, 그만, 그만~.날 죽일 셈이에요?!......풉!!”
괜찮아졌다 싶어 몸을 일으키던 디디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귀 뒤까지 새빨개져서는, 눈물이 두 줄 뺨으로 흘러내린다.
“아~지각이잖아요, 덕분에. 마스터가 뭐라고 하겠네.”
“이 참에 근무환경과 처우에 관한 협상을 벌이는 건 어떨까요.”
“아하하~~. 차라리 그래버릴까.”
“어머, 돌로레스 아니니?”
별안간 낭랑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관통하고 지났다.
거트루드는 디디의 얼굴이 일순 굳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디디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자신을 부른 상대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게. 돌로레스잖아.”
또 하나의 목소리.
종전의 것보다 하이 톤으로, 돌로레스를 힘주어 발음하는
어투가 어쩐지 빈정댄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 내 이름은 돌로레스지. 불러줘서 고마워.
이 시간에 웬일이니? 둘 다.”
디디는 차분한 태도로 상대한테 물었다.
근육을 한껏 움직여 마구 웃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늦어서 급하게 가던 중이야.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네.”
대답한 사람은 첫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목 칼라가 있는,
기장이 무릎까지 오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소매단과 치마끝단의 검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온통 하얗다.
흔한 자수문양 하나 없이 유행을 벗어난 단순한 복장이 검소하면서도
청초한 분위기를 풍긴다.
나이는 디디와 엇비슷하리라.
윤기 나는 검은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양손을 모아 책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단아했다.
그 옆으로 똑같은 차림새, 똑같은 책을 들고 있는 여성은 타는 듯
붉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복장에서 눈에 띠는 유일한 장신구는 가슴팍에 드리어진 묵주였다. 둥글고 납작한 펜던트를 검은 구슬로 엮은.

검은머리가 별다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반면, 붉은 머리 쪽은
노골적으로 디디한테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검은머리의 시선이 디디를 무심히 지나 거트루드를 발견하자,
붉은 머리가 그녀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귓속말이 끝나고 다시 거트루드를 향하는 눈동자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생겨난 듯 했다.
그것은 경계의 눈초리였다.
“돌로레스, 소개도 안 시켜줄거니? 네 친구 분.”
“......거트루드씨, 인사하세요. 이쪽은 마리엘라, 그리고 힐데 양.”
“처음 뵙겠습니다, 거트루드 M.시즈텔 입니다.”
“......서부 분이 아니시군요.”
거트루드가 풀 네임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검은머리-마리엘라-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동부 분이 어쩐 일로 이런 데까지 오셨을까.”
힐데-그녀의 머리칼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가
킥킥 웃으면서 종알거렸다.
마리엘라 보다 좀 더 작은 체구에 머리칼과는 대조적으로 창백한 피부,
푸른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그런 걸 궁금해 할-.”
“아, 전 풍생사라서요.”
디디가 발끈하며 쏘아붙이려는 찰나,
거트루드가 간단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풍생사......?”
“최근 하룸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런 악재를 없애기 위해 왔습니다.”
“아~그러시군요.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이네요.”
마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를 입가에 댔다. 거트루드한테
흥미를 보이는 것은 그녀뿐, 힐데는 디디-돌로레스-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누가 봐도 쉽게 눈치 챌 정도로 무시무시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참 큰일이죠. 어떻게 되려나 걱정하던 차에, 잘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허리를 숙여 예의바르게 인사한다. 우아한 동작이었다.
“아, 아니 그러실 것 까지-.”
“모쪼록, 일을 잘 매듭지어 쓰잘 데 없는 모략만 일삼는 무리들에게
혜안을 깨우쳐 주시길.”
“......네?”
“그럼 저흰 미사에 늦어버려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만나 뵈어서 반가웠답니다, 거트루트 씨. 힐데, 가자.”  
디디와 팽팽한 접전을 치루고 있는 친구를 재촉하고는,
마리엘라는 거트루드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리엘라와 힐데가 목에 걸고 있는 묵주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그가 관찰할 여유를 두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잠깐의 스침으로 판단하건대 그것은 정교의 묵주가 아니었다.
“저--.”
“아~아, 말짱 도루묵이네.”
“네?”
“댁 말이에요. 기껏 숨겨왔는데 다 들통 나버렸다~.”
“저기......”
“어쩐다~? 이틀은 버틸 줄 알았는데. 아냐, 힐데년이 하는 걸로 봐선
벌써 알고 있던 것도 같고......”
“디디 양?”
디디는 말을 거는 거트루드를 본체만체하고 혼자 중얼거리다,
이윽고 생각이 정리됐는지 고개를 들었다.
“일단, 가게로 가죠. 가서 얘기하자구요.”

“사교?”
“아빠한테 다 들었을 거 아녜요?!”
디디는 약 십초 간 실눈으로 거트루드를 째려보더니,
쯧, 혀를 차며 허공에 대고 외쳤다.
“얘기 안 했군요. 젠장, 눈물 나게 고마워요 아빠!”
“아까 두 사람, 처음 보는 묵주를 하고 있던데......”
“루데아.”
“루데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디디는 한숨을 폭 쉬고는, 펜으로
종이에다 날개가 달린 뱀의 그림을 그렸다.
“그 묵주에 새겨진 거.”
“......본 적이 없는 심볼이네요.”
“그~래~서, 사교라고 말했잖아요, 내가.”
렌지 아웃은 한산했다. 마스터는 주방 너머 골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고, 거트루드는 바에 앉아, 디디는 맥주잔을
닦으며 방금 전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흐음......그는 디디가 그린 그림을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어깨인지 허린지, 아무튼 몸통 상단에 날개를 단 뱀.
“그런데, 이게 제 일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후~,내가 미쳐...... 우리아버지께서 도대체 댁한테 어디까지
얘기를 해주셨을까?!”
디디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는지 조금만 건드리면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꼿꼿이 세우고 파지직 뇌전을 뿜어낼 것만 같았다.
거트루드는 그녀의 박력에 밀려 존슨이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세상은 썩어 있소!!!”
“네, 네.”
“아니, 인간이 썩어 있지. 고매한 정신을 야금야금 좀먹는
타락과 향락에 빠져 가장 존귀한 가치를 잃고 있어.
그게 뭔지 아시겠소?!”
“하하...... 글쎄요, 뭘까......”
거트루드는 눈앞의 커피를 찻숟가락으로 천천히
휘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존슨은 차마 입에 담기엔 너무나 신성하고 거룩한
그 어떠한 대상을 감정에 복받쳐 조심스레 불러본다는 식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주어 읊조렸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단어가 남기는 여운에 취한다.
“아하, 네, 그거로군요. 역시~.....그런데 존슨 씨,
이제 그만 앉으시는 게......”
이미 늦었다. 송구스럽게도 까페의 모든 이목을 한 몸에 받고 말았다.
그는 ‘하하하! 우린 지금 연극 연습중이거든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수치심 따위, 내 인생에 티끌 한 점 없노라 자부하며 살아왔건만
지금은, 확실히 알겠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숨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무수한 눈동자에 그만 몸이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흠, 흠......주책을 부리고 말았구먼. 미안합니다.”
“아뇨,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앉아주세요! 거트루드의 간청이 통했을까,
아니, 역시 따가운 눈총들을 눈치 챈 존슨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힐끔거리는 눈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비로소 거트루드의 폐에도
신선한 공기가 가득 들어왔다. 후우, 살았다.
“......어디까지 얘길 했더라.”
“제 주소를 알아내신 부분을......”
“아, 맞아, 그렇지.”
존슨은 온몸의 열기를 식히는 차원에서 물을 꿀꺽 꿀꺽 마셨다.
거트루드는 대략 100회째 차갑게 식은 커피를 휘젓고 있었다. 빙빙, 뱅뱅.

“우리아버님의 여동생 되시는, 그러니까 내 고모님은-이졸데 고모님이신데 -
도운으로 시집을 가셨다오. 피붙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곳에 혈혈단신으로
가셨으니 얼마나 적적하고 외로우셨을꼬.
남편분의 존함은 버트 씨인데, 나는 버트 고모부라고 불렀소.
버트 고모부께서도 어린 나를 아주 귀여워 해주셨지. 여름이면 언제나
불러주셔서 동생들을 이끌고 까무잡잡해질 때까지 실컷 놀다가 돌아오곤
했다오. 아~그 시절이 정말이지 잊혀 지지 않누만.
어쨌든 나는 해마다 거기에 놀러 다니곤 했는데...... 여기서부터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몇 년인가,고모부네 사정이 안 좋으니 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바람에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울고불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 나기도 하고. 아무튼--.”
“저, 여기, 물 한잔만 더 갖다 주세요.”
존슨이 헉헉 숨차 하기에, 거트루드는 황급히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냉수를 단숨에 들이 마시고는,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 고모부는 전처럼 나와 동생들을 불러주셨고,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도운은 변함없는 모습이었지.
우리가 여름에 가장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버트 고모부께서
엄청난 입담꾼이셨거든. 그 분이 입을 열었다 하면 아무도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밤새도록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도
끝이 없었지.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
거트루드는 과거의 향수에 젖은 존슨의 표정을 지켜보며,
어릴 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절절히 체감했다.
어린 존슨의 눈에 버트 고모부는 동경의 대상이었겠지.
그게 어떤 건지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우상을 고대로 닮아갈 필요는 없잖아?!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유독 잊혀 지지 않는 것들이 몇 개 있다오.
마치 신화와 같은, 마술 같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러나 버트 고모부께서는 언제나 정말 있던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거라고
강조하셨지.
나도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소.
그 이야기들 중에......굉장히 낯설고, 다른 것들과 전혀 다른,
영웅의 모험담이라기엔 너무 끔찍한, 그러면서도 가슴 찡한......”
“저, 여기--.”
몇 번째 인줄 알기나 해?!라는 몸짓으로 웨이트리스는 거칠게
냉수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시 벌컥벌컥.

“비록 고모부는 아무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알 수가 있었소.
그 얘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다름 아닌 도운이 겪은 것임이
틀림없다, 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난 알았지. 경험한 적 있소? 여기에서, 여기로.
우리 고장에선 ‘가슴으로 듣는다.’ 고 말하지.”
존슨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고, 이어서 거트루드의 가슴을 찌르듯 겨눴다.
“줄거리는 간단해. 한 마을이 있는데,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지.
그런데 어느 날 시작되는 거야. 악몽의 전조가. 불길함의 그림자가.
아이를 낳던 산모가 그만 죽고 마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아이 역시 구하지 못했고. 가족들은 상심에 젖고,
마을도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뭐, 당시에는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오,
그 산모 뿐 아니라 다른 산모들이, 임산부들이, 이상하게 조산을 하거나
사산, 아이가 죽어 나오는 거요. 한번, 두 번, 세 번......몇 번까진
우연이라 여길 수 있지만,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소.
딸을 낳는 산모는 멀쩡하다 이거야. 따져보니, 처음 사단이 난 산모는
사내아이를 낳다가 죽었더랬소. 그 다음도, 다음의 다음도......
이쯤 되면 온 마을의 임산부, 아니 젊은 부부들은 공포에 떨게 되지.
멀리 처가로 피신을 가거나, 아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거나.
도운은 점점 스산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소. 그러나 여기까지만이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었을지 몰라.
더 이상 죽어나가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쯤 되자, 이번엔 가축들한테
변이 생기게 된 거요. 마찬가지였지. 소, 돼지, 개, 말......
어떤 동물도 수컷을 낳을 수 없다는 거요. 단 한 마리도.
심지어 닭까지도 무정란만을 낳아댔지. 한 농부는 아예 다른 마을에서
이미 수태를 한 젖소를 사왔는데, 마을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별안간
주저앉더니, 죽은 새끼를 낳아버리기까지 했소.
새끼가 수컷임은 말 할 것도 없고. 믿어지겠소?
이 모든 일들이 삽시간에 벌어졌다는 걸.”
“......”

거트루드는 아무 말 없이 존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수태와 관련한 저주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저주의 매개도 다양하다.
인간의 역사 뒤편 어두운 곳에서, 가장 오래되고 다방면으로 발달된
기술은 바로 수태 저주였다.
“마을은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았겠지. 각처에서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소.
그렇게 장장 3년이 흘렀다오. 3년. 조그만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되고도 남을 기간이지.
이젠 끝장이다, 선조부터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등지려던 그때,
그가 나타난 거요.”
“......”
“다음은 흔한 전개지. 그는 마을의 저주를 풀었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정든 고향을 지킬 수가 있었다오.
꿈결 같은 엔딩, 되찾은 평화.”
마지막 대목에서 존슨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그는 냅킨으로 코를 팽, 소리 나게 풀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이 이야기는 오싹하면서도 어딘지 사람을 유혹하는, 마력을 지닌
이야기였소. 며칠을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지.
꿈속에서 내가 그 마을사람이 되는 거야. 정말 끔찍한 악몽이지.
아무리 달려도 벗어날 수 없어.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버트 고모부님이 이승을 떠나고 내가 고모부님만한 나이를 먹게 되는 동안
이런 것들은 내 기억 한 편에 묵혀 있었지.
먹고살기 바쁜 탓에 추억을 반추하는 일 따윈 사치스런 일이었어.
그러나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단 말이오. 그 한여름의 툇마루와,
발등을 물어대는 모기들과 싸우며 정신없이 빠져들던 고모부의 이야기들을.
밀어는 놓고 있었지만 잊어 먹지는 않았어.”
거트루드는 존슨에게 휴지를 건넸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난 도운을 찾아갔지. 사촌이 날 반갑게 맞아줬다오.
그한테 부탁해 고모부의 물건들을, 창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그것들을, 모조리 다 조사했어.
노트 구석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하찮은 낙서까지도.
꼬박 4일 밤낮이 걸렸소.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쉴 수 없었어. 한시가 급하니까.
마침내 버트 고모부의 금전기록장부에서, 난 발견하고 말았다오.
그의 이름과, 지불한 금액, 그리고 구좌가 적혀있는 페이지를.
이것이 바로 당신을 찾아내는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지.
......그래야만 했는데......했는데......”
존슨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테이블보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온몸을 푸들푸들 떨며 그는 절규했다.
“어째서, 도대체 왜 누가 이런 짓을! 신의 가호는 정녕 없는 것인가!!
......어째서 우리 마을에, 이제는 얼굴도 희미한, 버트 고모부의
이야기 속에만 나오던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그런 건 한낱 이야기일 뿐인데! 헤매다 금방 깨어날 수 있는 악몽이어야
하거늘!!”
뺨에서 턱을 따라 미끄러져 테이블보를 한 방울 두 방울 적시는 눈물,
그리고 콧물까지 흘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
거트루드는 그를 다독이지 않으면 아까보다 더 큰 곤란이 닥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복받치는 설움을 못 이겨 흐느껴 우는 털보 중년남과
그 앞에 앉아 쩔쩔매는 자신이 사람들한테 어떤 관계로 비추어 질지
생각만으로 머리가 띵했다. 존슨은 마치 어린아이로 퇴행한 것처럼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거의 체념상태인 거트루드는
깨끗한 수건(아침에 집에서 다려 온, 나름대로 아끼는 물건이다.)을
꺼내 눈물콧물 범벅이 된 존슨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눈두덩에 가득 찬 눈물로 인해 뿌옇던 시야가 말끔해져 거트루드와
눈이 마주치자 존슨의 입에서 외마디가 새어나왔다.
“유일한 희망이 이토록 어린 애송이일 줄이야! 하늘도 무심하도다!”  

“으아......마지막이 아~주 아빠답네, 다워.”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그녀는 짤막한 소감을 밝혔다.
거트루드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부전여전이라고 했잖수.
an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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