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R & J-2

2004.10.12 15:2410.12

“돈이 없어요.”
그는 무릎을 꿇고 양 손을 깍지 낀
자세로 애걸했다.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지.”
무명천으로 만든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신은 한 손에 거대한 빗자루를 들고 거트루드를 근엄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만든다......?”
“한번 내리칠 때마다 2슌은 나올 것이다.”
신은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번쩍이며 빗자루의 손잡이를
양 손에 거머쥐었다. 흡사 타자의 배팅 포즈와 같은 그 모습에 그는 두려워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고작 2슌?”
“쉽게 버는 장사 없다하지.”
그는 잠시 머릿속으로 암산을 하더니 고개를 절래 흔들며 다시 애원했다.
“제발......이번 달 말일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젠다 아주머니! 어떻게든 구해 볼 테니 그것만은......!!”
“한대 당 2슌이니 총 1253대가 되는 군.”
“그런......! 방세는 40슌 인데다가 아직 석 달밖에 안 밀렸는데!”
“신의 말씀에 토 달지 말지어다.
털어 돈 안 나오는 놈 없다하였으니.”
“말도 안 돼~~!!!”
처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집채만 한 빗자루가 그를 내리치려는 순간
우렁찬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잠깐~잠깐~!!!”
“......뭐냐?!”
“내가~내가~ 대신~대신~ 돈을~돈을~ 내어~내어~ 주겠소~ 주겠소~!”
눈을 질끈 감고 꼼짝없이 들이닥칠 고통을 기다리던 거트루드는
눈물 맺힌 얼굴을 들어 구세주를 영접했다.
“당신은......?”
“그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금수강산을 다 돌아 다녔다오.”
“......”
신의 빗자루 질을 저지한 사람은 중년의 사내였다.
두루 뭉실한 체구에 턱수염을 기른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다만 탭댄스용 구두와 번쩍이는 무도회복을 입고 입에는 장미를 한 송이 물고 있다는 게 문제랄까.
“......존슨 씨 그 모습은 대체 뭡니까......?”
거트루드는 얼이 빠진 양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빗자루의 신조차 별안간 나타난 사내 때문에 놀랐는지 콧잔등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진 안경을 고쳐 올려 쓰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이 녀석 대신 돈을 내겠다고?”
“그렇소이다~!!”
미스터 존슨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며
다이아몬드 스텝으로 신에게 다가가 입에 문 장미를 미시즈 젠다의
입술에 끼어 넣었다.
붉은 장미를 물게 된 신은 두 뺨이 붉게 물든다 싶더니 얼굴을
빗자루로 가리고 지평선 너머로 도망쳐 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거트루드가 여전히 꿇어앉은 자세로 존슨 씨를
바라보자,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날리며 거트루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함께 탱고를.”
“탱고??”
“시작은 언제나 갑작스럽지. 리듬에 몸을 맡기고 무작정 스텝을 밟으면 된다네.”
“스테엡~~?!”
“우리 딸내미는 탱고의 여왕이라오.”
“잠깐, 존슨 씨, 잠깐만......”
“미스터 잠꼬대, 일어나요.”
“전 춤은 그다지......”
“뭐야, 디스코라도 추고 있나?!그만 일어나라니까!!”
코를 세게 잡고 비트는 바람에 거트루드는 헉, 숨을 토해내며
두 눈을 동시에 떴다. 콧잔등의 주근깨. 렌지 아웃의 웨이트리스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아......”
“아는 무슨 놈의 아! 빨랑 꿈 깨요. 당신 여기 놀러왔어?”
“디디, 너무 다그치지 마라,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하셨겠지.”
꿈, 인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목덜미가 땀에 흠뻑 젖었다. 베개에 묻은 저 액체가 제발
소화 흡수를 촉진시키는 '그것'이 아니기를.
두 개의 등불이 실내를 어둡지 않다 싶을 정도로 밝히고 있었고
거트루드가 악몽을 꾼 침대 주위에 예닐곱 명 정도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물론 코를 잡아 비튼 건 웨이트리스 디디겠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디를 다독거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악수를 청했다.
“잘 오셨소. 하룸의 농촌진흥회장을 맡고 있는 벤틀러 라고 합니다.”
“아, 거트루드입니다. 저......변변찮은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 면목이......”
“허허, 괜찮소이다. 그럼,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벤틀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거트루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노인은 지팡이 따위는 쓰지 않고 허리가 구부정하지도 않았다.
호리한 몸은 비록 나이를 먹었다 해도 다부졌고 걸음도 힘찼다.
벌써 밖은 땅거미가 깔려 어스름했다.
적막한 정적. 귀뚜라미인지 여울인지 모를 울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온다.
11시에 보자고 했으니 아마 그쯤 됐을 것이다. 꼬박 8시간 이상은
잔셈이군. 하품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더 이상은 위험, 위험.

농촌진흥회장 벤틀러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변에 서서, 또는 아무데나 걸터앉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디디는 흔들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그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 시선이 매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감점을 당해버린 것이다. 위험, 위험.
얘기에 앞서 나머지 사내들이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진흥회 서기 얀톤, 진흥회 총무 라이트, 진흥회 청년단장 욥,
진흥회 청년단 오락부장이자 사셋 과수원집 아들인 파올로 등등,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이 하룸 농촌진흥회의 회원들이었다.
“여기 사는 남자들은 대부분 농촌진흥회원이라오. 어릴 때부터 가입해
마을의 모든 대소사에 참여하고 있지.”
“그렇군요.”
벤틀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디디를 향하며,
“저, 이 분은?”
“나? 디디에요. 우리 아버지, 만났죠?”
“존슨은 진흥회의 부회장이오. 디디는 존슨의 외동딸이고.”
우리 딸내미는 탱고 퀸이지. 꿈속에서 존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디디는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따졌다.
“왜 정한대로 대답하지 않았죠? 내가 ‘주는 대로 먹어’라고 하면-.”
“백여우 스테이크 웰던, 플리즈-였죠.”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
“왠지 바보 같단 생각이 들어서-.”
이런, 아직 잠이 덜 깼나보다. 본심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
그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것도 펄펄 끓어 넘치는.
디디는 윗입술을 깨물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풋, 하고 젊은 하룸 청년단 몇 명이 실소를 흘렸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마이너스 이 천점. 렌지 아웃이 아니라 게임 아웃?
“흠, 흠...... 디디, 그러다 사팔뜨기 되겠구나.
귀한 손님께서 곤란해 하시잖니.”
“귀한 손님은 무슨~! 할아버지, 전요, 이 사람 우리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가요. 아빤 편지만 한 통  달랑 보내고 아직 돌아오지도 않고-
무엇보다 너무 어리잖아요!!”  
아아, 드디어 나왔다. 어느덧 익숙해진 상황, 익숙한(지겨운) 의심.
그는 디디가 제기한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물론 이런 때에는 당황하거나 말을 더듬어선 안 되며,
담담한 어조로 침착하게 설명해야 한다.
흥분은 금물.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라는
이해와 관용이 철철 넘치는 미소를 짓는 게 포인트다.
“존슨씨도 처음 절 보시곤 많이 놀라셨죠. 따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역시 부전여전일까요-, 하하. 우선, 저는 여러분이 찾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벤틀러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주위의 진흥회 사람들이 술렁이고, 팔짱을 끼고 입술을 비죽이던
디디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바로 이 순간, 이 허점을 노려야 난관을 벗어날 수 있다.
거트루드는 헛기침을 한 번 크흠, 내뱉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원하신 거트루드 M.시즈텔은 제 아버지이십니다.
저 역시 거트루드 M.시즈텔이고, 제 할아버지도 같은 이름이셨죠.
말하자면 간판이라고 할까요.
삼대에 걸쳐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꾸준히 일이 들어올 수
있게 죽 하나의 이름을 물려받고 있어요.”
“도기장인, 같은 건가.”
사셋 과수원의 파올로가 중얼거렸다.
거트루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시늉을 했다. 빙고, 라는 의미였다.

“......4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이라면...... 네, 제 아버지 거트루드가
해결하신 게 맞습니다. 정확히 연쉰력 317년 2월 9일부터 2월 27일까지
있었던 사건이죠. 앙투예 황제 치세시절이더군요.”
“그럼 아버지께서는......”
“이미 작고하셨습니다.”
벤틀러의 질문에 거트루드는 짧게 답했다.
그러나 고인에 대한 언급치곤 어쩐지 심드렁한 어조였다.
“여러분이 40년 전의 거트루드 M.시즈텔을 원하신다면, 전 돌아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에 발생한 재앙을 근절하기 위한
전문가-를 찾는 거라면야, 굳이 아버지만을 고집하실 이유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는 생애동안의 일지를 남기셨고, 거기엔 모든 기록이
낱낱이 적혀 있죠.
원인, 과정, 물론 해결까지도. 저는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때의 일지를 읽어보았고, 비슷한 사건을 맡아 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문제된다면-.”
청산유수와 같이 달변을 늘어놓으면서, 그는 슬쩍 디디를 곁눈질했다.
디디의 안면근육이 움찔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 점 만회? 여기까지는 만족할만한 반응들이다, 모두.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내게 집중하고 있다.
좋아, 여세를 몰아서~.
“전 7살 무렵부터 이 일을 배웠습니다. 13살 때 아버지가 몸져누우신
후로 지금까지 혼자서 일을 해 왔구요.
저는 전문가입니다. 풋내기가 아닌 경력이 10년 넘는 베테랑 풍생사죠.”
자, 어떻게 할까요. 겉으론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태연한 척 답변을
기다리고 있지만, 사실 그는 벤틀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함에 따라
미칠 듯한 속도로 질주하는 초특급 열차를 타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제발...... 파기는 안 돼!! 돈은 벌써 다 써버렸단 말이야~.
거트루드의 속마음이 울부짖었다.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또르르
허리로 떨어져 내린다.  

타루렐에서 존슨을 만나 계약을 수락한 뒤 받은 돈은 그날 전부
절대무적이자 냉혈을 자랑하는 미시즈 젠다의 금고 속으로
퐁당 다이빙 하고 말았다.
아주머니, 차비는 주셔야죠~~.거트루드의 애절한 간청에
젠다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면서 입술을 굳게 앙다물었다.
그녀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35슌을 꺼내었을 때 거트루드는 넙죽 엎드려
감사의 큰절을 올렸고, 이 장면은 여행 내내 그를 자기혐오의 수렁에
밀어 넣어 끝을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눈시울을 적시게끔 만들었다.
한 대에 2슌! 젠다의 환청이 들리는 착각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게 살짝.
벤틀러는 즉각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름에 잠겼다.
청년단도 구석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웅성웅성 떠들고 있다.
그는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뭔가 유쾌한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길가다 돈을 주웠던 일, 달걀에서 노른자가 두 개 나왔던 일......
디디의 반응이 제일 궁금했지만 그녀는 그의 뒤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결심했다는 굳은 의지가
벤틀러의 얼굴에 떠올랐다.  
눈주름이 그득하지만 흐릿한 기운이 조금도 없는
맑은 두 눈은 거트루드를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로, 확실하게, 우리 마을을 구해낼 수 있소?”
얼마나 이 말을 기다렸던가!
거트루드는 만세를 부르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물론 환희의 표정도 드러나지 않도록 어금니를 악물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그는 고객을 안심시키는 접대용 스마일을 지어보였다.
이 웃음은 실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해 보이곤 했다.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소의 허풍과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문장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벤틀러의 두 눈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거트루드는 눈치 챘다.
고희를 넘겨도 한참은 넘겼을 법한 노인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거트루드의 두 손을 힘주어 꽈악 움켜잡았다.
못이 박혀 단단한 손바닥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an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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