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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R & J-1

2004.10.12 15:2310.12

   R & J


   시작은 갑작스럽다.
   기억은 불현듯 떠오른다.
   인간은 모두 거짓말쟁이.


1장. 도착

먼 거리를 달려왔을 터인 네 마리의 말들이 갈기를 천천히
좌우로 휘저으며 편자가 달린 발굽으로 땅바닥을 구른다.
푸르륵 거친 콧김과 함께 뜨거운 침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도 없이 그들의 발길질을 당해 온 대지는
황토색의 모래구름을 토해낸다. 그것은 굳이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건조하고, 황망하다.
장시간의 운행에 지친 마부가 감각이 없는 엉덩이를 자리에서 떼어
천천히 마부 석에서 내린다. 오전부터 마차를 기다려온 인부들은
말의 고삐를 풀어 역 뒤 켠 마구간으로 끌고 간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크고 작은 짐 꾸러미를 손에 들고,
또는 바닥에 닿을락 말락 질질 끌기도 하면서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10인승 장거리운행 마차.
내부는 달랑 3인용 좌석 세 개와 짐칸으로 꽉꽉 채워져 있고,
그나마 창문이 달린 것은 두 개 뿐이다. 딱딱하기가 돌덩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좌석은 장시간 앉을 경우 반드시
치질전문의를 방문해야만 하며 실제로 뒷부분에 병원의
광고스티커가 붙어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통행료가
싼 듀플 대로의 울퉁불퉁한 길을 휴게소도 들리지 않고
줄창 달려대는 이런 마차로 대륙 동부에서 서부까지 험난한
여행을 감행하는 사람은 필시 두 부류일 것이다.
정처 없는 떠돌이, 그리고 없는 살림에 절약정신으로
똘똘 뭉친 자린고비. (그들에게 엉덩이신의 가호를.)

짐이라고는 때 묻은 날씬한 륙색만을 등에 메고, 정오의 햇살이
눈에 부신 듯 살짝 왼쪽눈썹을 찌푸리며 맨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자신의 낡아빠진 가죽부츠를 역의 계단에 내딛었다.
밑창이 거의 닳은 부츠는 걸을 때마다 삐적 삐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앞서 내린 승객들이 스탬프를 찍기 위해
줄지어있었다. 동부와 서부의 경계를 지날 때는 반드시 모든 여정을
정부에 낱낱이 신고할 것. 아리안으로 대량의 불법 체류자가
밀려들자 키린은 궁여지책으로 국민들의 이주와 여행을
통제하는 법을 만들어 냈다.
서부 아틀란카 역시 아리안의 통치령이었으나, 아리안과 아틀란카의
오랜 반목 속에서 생겨난 지역차별은 확연히 존재했다.
서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생동안 수도 키린을 꿈꾸지만,
말 그대로 꿈이나 꾸고 말 일이었다.
어이, 촌뜨기- 꼬랑지 내리고 빨랑 고향으로 꺼지라구.
아리안과 아틀란카는 대개 구분이 쉬운 까닭에 어렵사리
동부로 진출한대도 이내 뼈 속 깊이 사무치는 차별과 무시를
감당치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외견만으론 아틀란카 임이 분명한 청년은, 그러나 타루렐 시의
스탬프가 찍혀 있는 수첩을 내밀었기에 역무원은 잠시 놀란
토끼눈을 하고 말았다.
곧이어 하룸의 인장-상수리나무 옆에 작은 참새가 그려져 있는
-이 수첩 하단에 날짜와 함께 찍히고, 긴 여행의 마무리 수순이 끝마쳤다.
그는 출구를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정오를 약간 벗어난 시각,
앞머리를 살랑대는 산들바람,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9월의 어느 날
거트루드 M. 시즈텔은 타루렐에서 남서쪽으로 4500레일 이상
떨어진 서부의 한적한 시골 하룸에 도착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입구에 매달린 방울이 딸랑 딸랑 울린다.
유선형의 날렵한 동선을 그리는 바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너 명,
이른 시간부터 술잔을 홀짝이고 있는 모양이다. 나머지 테이블에는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띤다. 어두운 조명 아래
어둑어둑한 사람들의 표정은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가느다란 빛의 실타래.
가게 안을 가득 메운 희뿌연 공기는 필시 매캐한 담배연기 탓이겠지.
서부 사카 고원 산 담배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공기 중에 마냥 떠돌고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그래, 마당에 널었던 이불이 비에 젖으면서 밴
흙먼지 냄새라고나 할까. 그는 빈자리에 앉아 주위를 스윽 돌아보았다.
다른 손님들은 낯선 놈의 등장에 관심 없는 척 옆 사람과
낄낄대고 잔을 비우면서도 슬쩍 곁눈질로 체크를 하는 통에
얼굴이 따가웠다.
이런 행동을 '시골의 매너'라고 부르는 것이다.
절대 남을 이리저리 훑지 마라. 점잖지 못하단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콧물 질질 흘리는 꼬맹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들의 훈계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단, 곁눈질은 오케이. 원님나리도 궁금증은 참고 못 배기니까.

“밥?, 술?”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묻는다.
상냥함이라곤 쥐똥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말투.
“메뉴를 보여주세요.”
“주는 대로 먹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압적인 목소리가 날라 온다. 포니테일,
흰색 에이프런, 날씬한 몸매. 그러나 아래는 유감스럽게도
평범한 면바지이다.
오른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다갈색의 눈동자는 위풍당당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기백에 눌려 눈을 내려 깐다.
“추천 메뉴는?”
“마늘 수프, 식어빠진 딱딱한 티본스테이크, 김빠진 맥주가
우리 집 유일메뉴지.”
“......이가 약해 딱딱한 것은 별루입니다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웨이트리스는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고, 주방 너머로 총총히 사라졌다.
번개 같은 솜씨였다.

“주문한 음식.”
십오 분 쯤 지날 무렵 그녀는 다시 돌아왔고, 테이블 위에
따끈한 김이 나는 수프와 알맞게 익은 스테이크를 내려놓았다.
물론 잔 표면에 송알송알 물방울이 맺힌 시원한 맥주까지.  
“감사합니다.”
그는 꾸벅 목례를 했다. 웨이트리스는 무표정하게
반대편을 응시하면서 예의 그 빠른 손놀림으로 에이프런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에 닿았고, 그는 그녀의
콧등에 흩뿌려진 주근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디디, 한 조끼 더~!”
“대낮부터 작작 좀 마셔라!”
바에 앉아 있던 사내에게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려 작게 속삭인다.
“오늘밤 11시에.”
“디디~~.”
“간다구, 가!!”
홀로 남겨진 거트루드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것은 은색으로 빛나는 열쇠였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열쇠의
매끄러운 앞면을 그는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수프 맛이 썩 괜찮았다. 스테이크는 나쁘지 않았고,
맥주는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근사했다.

하룸 역전 유일한 주점 ‘렌지 아웃’을 나온 그는 마을지도를 펼치고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며 현재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아까 역에서 산 지도는 최신판으로, ‘아름다운 내 고장
하룸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 합니다.’라는 문구가 프린팅 되어있다.
거리는 인적을 느낄 수 없이 황량했다.
이따금 새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질 뿐, 흔히 길모퉁이에
배를 깔고 누워있을 개 한 마리도 눈에 띠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어깨에 축 늘어진 륙색을 다시 고쳐 멘 다음,
바닥에 흙이 붙어 찌걱 찌걱 잡음을 내는 부츠를 끌며
마을 북쪽에 있다는 상수리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하룸의 상징인 상수리나무는 그 위상을 자랑하는 거대한 크기와
웅장한 울창함을 지닌, 마을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지도의 앞머리에 써져있다.
과연 오랜 세월동안 마을을 지켜온 터줏대감답게 멀리서도
쉬이 눈에 띠는 그 나무는 온 마을을 굽어다보는 둔덕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다시 지도를 꺼내어 나무의 위치를
체크하고 자신이 가야 할 장소를 찾아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렸다.
길 찾기란 언제나 고역이다. 비단 길이나 건물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찾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챙기고, 찾고, 정리하는 일 따위보다 흩트리고, 잃어버리고,
헤매는 것이 그에겐 당연한 일상이었다.
한참을 끙끙대며 지도와 씨름한 끝에, 마침내 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첨탑을 발견했을 때 얼굴에 절로 씨익 미소가 번지고,
이마에 흐른 땀을 손으로 훔친다.

그는 하늬바람에 등을 떠밀리다시피 둔덕을 내려왔다.
청명한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머리를 마구 뒤엉키고 달아난다.
하늘은 팔을 뻗으면 구름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낮고 선명하게 푸르렀다.
하룸을 병풍처럼 둘러 에워싼 룬다베른 산으로부터 강줄기가 시작되고,
마을의 아래로 평평한 논지대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대륙 서부의 북고 남저 지형.
사람들은 산기슭 밑에 촌락을 이루고, 강 하류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
문명이 낙후된 아틀란카는 아직도 농업이 대부분의 생업이었다.
특히 하룸은 주민의 70%가 농사를, 20%는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라고 지도에 써져 있었다. (과수업 농가도 많아 사과의 명산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설명이 곁들어져 있었다.)
그가 도달한 곳은 마을의 외곽, 룬덴바움 강의 상류부근에
위치한 작은 교회였다. 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던 것은 첨탑에 달린
정교의 상징 '은 여우'였다.
오랫동안 손보지 않았는지, 비바람에 칠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녹이  슬었지만 정교의 상징물이 으레 그렇듯 오만하게 고개를
하늘높이 쳐들고 태양을 향하고 있다.
그는 렌지 아웃에서 건네받은 열쇠로 교회 옆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서자 최근 누군가 정돈을 했는지 포푸리를 말린 향긋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침대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시트와 베개가 가지런히 놓아져 있고,
그 옆에 흔들의자가 있다.
그는 의자를 살짝 밀어보았다. 삐걱 삐걱.기름칠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외에도 간단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을 화덕과 가재도구,
자그마한 목재테이블 등 한 명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게끔 구성된 공간이었다.
륙색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후줄근한 코트를 벗었다.
시큼한 땀 냄새. 창문을 열자 어둑하던 방 안이 금세 환해지면서
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 바람에 실려 온 강물과 물풀의 냄새를 음미했다.
그제야 누적된 여독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쏟아지는 피로에 저항할 힘이 더 이상은 나지 않았다.
누런 먼지진이 찌든 부츠를 힘겹게 하나씩 벗겨낸 다음
아무 생각할 겨를 없이 침대에 몸을 내던지듯 쓰러져서는
금세 얕은 숨을 내쉬면서 깊숙한 잠에 빠져들었다.


an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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