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여신이가 내게 내밀었던 그 숨막히던 소설 중의 하나는 그렇게 시작되어 있었다. 나는 그 구절을, 지금 바로 앞에 그 대학 노트를 들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되뇌었다. 그래서 그 애의 소설을 읽는 것은 질색이었다. 1인칭밖에 쓰지 못하던 여신이. 그 '나'라는 말이 정말로 여신이 자신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금방 숨이 차오곤 했다.

신이의 글을 혜정이가 갖고 있었다고. 내게만 보여주었으리라고 믿고 있었던 그 글을 혜정이가 보았고, 공개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를 제외한 그들만이 공유하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 바다넷에서 나 외의 네 사람은 모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나는 몸을 떤다. 상관없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나한테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 단 한번도 없지 않았나.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들, 내게 뻗어오는 손 모든 것이 내게 도리어 부담스럽지 않았었나. …그게, 아니었던 건가.

신이의 소설을 나만이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혜정이가 어떻게 말을 했든지,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 애가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남겨야 할 것을 생각할 만큼 모질지도 못한 아이였다. 지독하게도, 나를 질식하게 만들 것 같았던 그 아이의 말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가, 혜정에게, 이 글을 보여주는 것은 너 뿐이야 라고 말했다고 해도.

"무슨 소리야?"

완이 물었다.

"그게 누구 글이라고―?"
"신이 글."

나는 이내 말한 것을 후회했다. 완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싸늘하게 식어 버린 것이다. 화르륵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얼굴로 완은 거실의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갈게."

완은 어머니께 인사하는 것도 잊고 곧장 나갔다. 언제나 예년보다 낮은 기온이 며칠쯤 찾아오고 11월의 매서운 가을바람 사이로 완이 사라졌다.

현관문을 잠그고 나는 서랍 속에서 신이의 다이어리를 꺼내들었다. 고무같은 싸구려 겉표지는 내 것이지만 속지는 신이가 직접 상자의 바닥에 하나하나 붙여 온 것이다. 고등학교 내내 신이는 따돌림을 당하며 보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도 여신이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한다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적어도  그 때의 여자애들에겐 그랬다. 같은 처지라고 함께 묶을 수 없을만큼 그 애와 나의 따돌림은 달랐다. 그 집요함에 있어서야 공통점이 있을지 몰라도. 내가 나타나면 수다를 떨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흩어져서 제 자리로 돌아가거나 밖으로 나갔다. 아침에 실내화로 갈아신을 때와 저녁에 구두로 갈아신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그 안에 죽은 지네나 녹슨 압정, 죽은 파리 같은 것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면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자리를 비워서는 안되었다. 돌아와보면 밥통이나 반찬통이 엎어져 있거나 그 위에 어색한 나뭇가지나 쓰레기가 얹어져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여신이에 대한 따돌림은 좀 더 공격적이었다. 그냥 무리를 흩뜨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수없다거나 짜증난다거나 밥맛이라는 말을 한마디정도 쏘아붙이고 사라졌다. 교련시간에 쓰던 여신이의 붕대는 몇 번이나 불태워지거나 찢어졌다. 내 것이 기껏해야 둘둘 엉켜서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청소시간에 그 애가 끼곤 하는 마스크 때문에, 체육시간마다 교실에 남아있기 때문에, 한 살이 많아 선생님들이 종종 챙기는 말들을 했기 때문에, 학급 어느 무리에게도 먼저 손을 뻗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울 때조차 검은 가죽 다이어리를 꼬옥 끼고 다녔기 때문에, 이야기를 언제나 듣고만 있었기 때문에. 그 애에 대한 말들은 그렇게도 많았다. 나는 어땠을까.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생각을 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의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것이 맞는가? 아니 그건 오히려 내가 다른 아이들 모두를 따돌린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june400 말을 걸어오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걸 알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있구나.'

'추리소설에 대한 이야기. june400 , 마음사랑 , 한님나라'

다이어리 앞부분엔 짤막한 메모들이 있을 뿐이었다. 처음의 반가움 때문인지 june400, 시현의 이야기들이 가끔씩 적혀 있었지만 그 내용들은 몇 년 전과 그리 달라져 있지도 않았다. 다이어리라는 이름이 그저 일기장의 영어단어로 통했던 89년의 봄. 그 시절에 신이는 유일하게 가죽 다이어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무엇이 그렇게 쓸 말이 많았는지. 하루 하루가 똑같은 시간에 시작되고 똑같이 반복되는 고등학생이라는 시절에.

'11:30~3:24. 그 사람은 녹차를 좋아한다.'

'10:50~3:03. 내 글에 대한 이야기… 그 사람의 글도 좋아할 수 있어.'

'늦게 오다. 1:03~1:30. 왜 조금 더 있지 않는 걸까.'

한달 정도가 지나자 june400이라는 글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타나기 시작한 '그사람'이라는 말이, 또는 주어가 없이 쓰여진 것이 june400에 관한 이야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책상 서랍에 태평양의 현미녹차를 언제나 채워놓고 있다는 시현의 언젠가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런 작은 일들을 신이는 무엇 때문에 기억하려고 했을까. 왜 매일매일 그가 들어오고 나간 시간을 기록하고, 그와 한 이야기를 메모한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손 안에 놓인 다이어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종이를 찾지 않는 편이 나았다. 상자 밑바닥에 깔린 흰 종이는 그냥 무시해버리는 것이 옳았다. 어쩌다 눈에 띄었더라도 내용 따위, 그 낱장을 하나하나 떼어서 다시 모으는 일 같은 것,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 종이를 발견했을 때, 몰랐나? 왜 그 애가 내게 이런 것을 보냈는지. 이것이 그 애, 신이의, 내게 향한 마지막 증오라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단다. 왜 나는 안돼?'

…알고 있었던 거다, 시현씨가 내게 보낸 백합다발도 무척이나 그답지 않던 어색한 고백의 말도. 그래서 말하고 있는 거다. 바로 나 때문에 너는, 준을 잃었다고.

'병원. 어머니가 아시면… 우실까. 그 사람에게 말해야 하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원인도 결과도 나. 혼자 가슴앓이를 이젠 끝내자.'

비어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면, 언제나 피냄새가 난다. 피에 젖어있는 칼날이 언제나 그 안에 보인다.

/ 나경아! 너 왜이래! 왜이러니! /

누군가가… 흐느끼고 있었다. 내 손에서 그 칼을 빼앗으며 당신은 울었다. 정작 나는 아무 표정도 없는데, 당신은 울고, 운다.

/ 왜이러니… 니 탓이 아냐. 그건 사고야… 사고야, 나경아. /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아파. 꼭… 죽을 것처럼.

언제였더라. 흐릿한 영상과 흐릿한 음성은 어제 같기도 하고 또 아주 오래전 일 같기도 하다. 헝크러져 있었던 머리를 그 누군가가 떨리는 손으로 쓸어주었다. 시야를 덮었던 머리가… 단발이었나. 절반의 시야가 머리로 덮여 있다가 서서히 제 위치를 찾아가고 그 자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흔들리며 보였다.

/ 이러면 안돼. **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

지독하게도 슬퍼 보였던 그 사람의 표정은 느낌만으로 남아있고, 정작 그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누구였더라. 나보다 더 떨리던 손으로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던 가엾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 나경아… 여기 있어. 안 보이는거니? /

나는 그 사람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아니, 그 사람의 손이 내 얼굴을 끌어안았다. 답답하다. 따뜻하다.

/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이제는, 알았니? /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그저 묻어두자. 일어서서 나는 베란다로 간다. 예전에 용신이 살았다는 야산을 파헤치고 세워진 아파트는 바람이 불면, 꼭 힘껏 소리를 높여 바람이 울었다. 신이의 아파트는 30층이 넘었다. 그 곳에서도 바람이 울었을까. 멋스럽게 짓는다고 곡선형으로 설계된 베란다가 상징인 아파트에도 바람이 서럽게 울어댔을까. 바깥으로 붙어 있는 반구형의 채광창은 신이의 방에 붙어 있었다. 그 곡선이 일그러뜨리는 형상이 무섭다고 그 애는 말했다. 28층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게 무서웠다고. 그 무서운 세상으로 어떻게 너는 뛰어내린 것일까. 내 손가락의 작은 베인 상처도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던 네가. 겁이 그렇게 많던, 눈이 큰 여신(女神).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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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여행 04.10.09 11:55 댓글 수정 삭제
    며칠 아팠습니다. 이 곳에 글을 올리는 걸 깜빡 잊었었지요. 죄송합니다.
    서툰 이 글을 꾸준히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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