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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여신女神



효정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나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만월이었다. 만월이면 우울해진다고, 어쩐지 무언가를 부숴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했던 녀석이 있었다. 열혈인 녀석답다고 말하고 웃어줬었지만. 뭐하고 있는지, 이런 가을의 만월에는. 아파트 입구를 지나 우리 동으로 들어오는 걸음에 문득 궁금해졌다.

"누나?"

아파트 정문 앞에서, 압축유리에 쇠손잡이가 둥글게 달린 그 육중한 문 앞에서 쭈그리고 있던 그림자가 푸슬거리며 일어나 나를 쳐다보았다. 만월의 달빛에 녀석의 얼굴이 유난히 훤하다. 어쩌면 경비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일까, 말라 보이는 건. 180이 넘는 키에 꽤나 다부진 몸집이라고 느꼈던 녀석의 후드 티셔츠 차림이 추워 보이는 것은.

"전화 하고 오지 그랬어."
"꺼져있던데."

쑥스럽게 완이 웃었다. 영화관에 들어서면서 꺼놓은 전화, 아직 켜놓지 않았었구나.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완은 바닥에 내려놓은 대학교 쌕을 집어들고 지퍼를 열었다. 네모진 상자가 반짝이면서 쌕 밖으로 나왔다.

"뭐야, 이건?"
"시험, 잘 치라고."

시험 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말한 적 없는데. 아는 것은 어머니뿐인데. 전화했었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든? 아무리 그래도 뭐 하러 이런 걸 사오니. 뭐 대단한 거라고. 다 늦은 시험에. 이런 말들이 한꺼번에 입 밖으로 나오려다가 도리어 입을 막았다. 멍한 얼굴로 나는 괜시리 어깨의 가방을 고쳐 매었다. 어색함.

"고마워…."

한참만에 그 말을 할 때까지 완은 그대로 서 있다가, 싱긋 어색하게 웃었다. 그 기간동안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혜정이…"
"시현형은…"

동시에 우리는 말을 꺼내고, 동시에 말을 거두었다. 홀수는 불안하고 짝수는 안정적이라고 혜정은 말했다. 지금 우리는? 머뭇거림 속에 조금 시간이 흘렀다.

"시현씨랑 화해했니?"
"……."

완의 성격이라면 절대 얼굴도 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굳이 물은 것은 완의 말 때문이었다. 내 말과 부딪혀 묻혀버린 시현이라는 이름. 그 이름을 꺼낸 이유가 궁금해서.

"누나한테는 연락…해?"
"아니. 바다넷에서 못 만났니?"
"채팅실에서 자주 보이던 사람인데… 요즘은 거의 못 봤어. 쓰던 글도 얼마 전에 중단하고."

어쩌면 니쪽에서 피해 버렸을지도 모르지. 너는 싸움을 걸기는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신경에 거슬리는 일은 언제나 불같이 일어나지만,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으려 드니까.

"들어갔다 가. 엄마가 너 보면 반가워 하실 거야."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완의 배에서도 같이 대답소리가 들렸다.

"배고팠나보네."

통화할 수 없었던 시간 중에 언제부터 완이 전화를 걸었던 것인지, 언제 완이 이리로 왔는지조차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뒤를 따라오는 완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를 덮도록 앞으로 드리워졌다. 달은 만월. 경비실의 아저씨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동안 나는 거울에 비치는 완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부스스한 저 머리는 변함이 없다. 대책없이 뻗치는 굵은 머리카락은 어떻게 손을 볼 수도 없다고, 스트레이트라도 해야 하려나 하고 머리를 긁적이던 것이 새내기때의 완이지만 지금도 저 머리는 그대로다. 하지만, 너 왜 그렇게 말랐니. 달빛 탓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불빛에도, 엘리베이터를 나온 복도의 백열등 빛에도 완이 그 사이에 마른 것은 눈에 띄었다.

"나야, 엄마."

인터폰 너머로 어머니가 그래- 하고 곧 문을 여셨다. 어머니는 이내 내 뒤에 머쓱하게 서 있는 완을 보고 반갑게 환히 웃었다. 완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셨습니까."

"요즘 왜 안 왔어? 마침 잘 왔네. 오늘 이상하게 튀김을 많이 만들고 싶더니."

"이야- 어머님 튀김이 그리웠어요-."

이내 넉살좋은 아들의 모습이 된 완을 나는 무덤덤하게 쳐다보았다.

너, 왜 그렇게 말랐니. 그동안에.




밥을 먹고 나는 커피를 끓였다. 완은 어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집 안으로 내 이름을 대며 들어오는 몇 안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와 사이가 좋다. 그런 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나는 살가운 딸도, 정다운 딸도 되지 못하니까. 그들이 나대신 어머니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가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을 내가 싫어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비록 간혹- 저들이 어쩌면 저 자리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여신이와 어머니를 보면서 늘 느꼈던 그런 생각들이 나에게 떠오른다고 해도 말이다.

"뭘로 할래?"

불쑥 말을 꺼낸 건 심술 때문이다. 완과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가 너무나 밝아 보이는 데에 대한 속좁은 심술이다.

"뭐 있는데?"

"모카, 케냐AA, 만다린, 하와이안 코나, 콜롬비아, 블루마운틴. 초코 라즈베리, 자메이카."

"…나는 구별도 잘 못하는데, 하긴. 누나 좋아하는 걸로 줘."

/ 나는 나경이 커피가 좋아. 아무거나. /

완의 웃음이 누군가의 얼굴과 겹쳐진다. 자메이카의 원두를 앞에 놓고 환하게 웃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 아파트 28층에서 내려다보는 바깥이 섬뜩하다고, 그러면서 높은 것이 무섭냐는 물음에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던 누군가.

"그래. 엄마 커피?"
"그래- 나경아. 우리 자마이카 마시자."

짖궂게도, 이런 날에는 녹차를 끓이고 싶은 심술이 일어나지만, 뭐 어쨌든 좋겠지. 나는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불을 끄고 드립퍼 위에 원두를 놓았다. 자메이카의 원두 두 스푼 반을 깎아서 덜어낸다.

"그럼, 둘이 이야기 나누렴."

어머니는 커피를 받아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시간을 더 즐거워하는 것은 당신일텐데. 이 집은 왜 이렇게 휑하니 넓은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찾아오면 집이 휑하다는 것이 더 마음을 채웠다. 어머니와 나 단둘이 있을 때, 혹은 나 혼자 있을 때 집이 더 넓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일텐데도.

"맛있다."
"…커피 맛을 알기는 해?"

완은 히죽 웃었다. 그나마 아니라고 항변하지 않는 것이 완 답다.

"혜정이는 어떻게 지내니?"

완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효정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완이 안다면, 이 질문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 될까. 일주일에 몇번씩 효정의 집, 곧 혜정의 집으로 가는데도 그 애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는 것은.

"누나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못 만났어. 소식도 못 들었고."

완은 애꿎은 커피잔을 들여다보고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혜정이, 글동 시삽에 출마했어. 소설 연재 들어갔고. 어학원 다닌대. 2년 안에 어학연수 갈 거라고. 그 녀석, 완벽주의인 데가 있으니까."

"소설."

"응. '별빛 이야기'라고."

왜 웃음이 나오는지. 그 제목에. 피식, 하고 웃어버리는 것은 Starlight, 별빛, 이요. 라고 말하던 그 애 음성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별빛이 여신이를 뜻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좋았다. 적어도 그 애가 그런 제목을 아무 생각없이 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내가 알고 있으니까. 소설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헤정이는 그런 식으로 여신이에게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지. 여신(女神)은 하나로 충분해. 네 안에 그 애를 그렇게 억지로 잡아두지 마.

"열심인 녀석이니까. 뭐랄까― 갑자기이긴 하지만."
"신이 일 이후겠지. 안 그러니?"

완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소리없이 웃는다.

"아파트 27층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완이 중얼거렸다. 흠칫 하고 몸이 떨렸다.

"한 화면에 그 한 줄만이 보이도록 글이 시작했어. 통신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섬뜩하더라고. 그 녀석 장편은 처음이라."
"신이 소설이야."
"응?"

그랬다. 백지 한 장에 쓰여진 단락은 그게, 전부였다.

"이사를 온 이후로 나는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파트 28층에서 바라보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세상 풍경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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