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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꿈에서

"어, 누나."

완은 놀란 눈으로 구석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구석자리. 작은 플라스틱 조명이 달린 저 자리에 높은 커피잔 하나가 놓여 있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그냥."

완의 앞에 앉아서 초코 라즈베리를 주문한다. 종업원이 돌아가고 이 커피점이 갑자기 너무나 조용하다는 것을 떠올린다. 오늘같은 날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평일 저녁, 해가 진 저녁무렵에 작은 커피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술 마셨니?"
"…조금."
"어쩐 일로."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에서는 술냄새가 옅게 풍길 뿐, 완이 취해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커피잔 하나가 놓여지고 달콤한 초콜릿 향이 라즈베리 향에 섞였다.

"…대타야?"
"그렇게 말하지 마."

완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뭐가?"
"…신이 누나 이야기 해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그만큼 흐른 것일까. 신이의 이야기를 내게 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괜찮을 만큼. 그것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완이기 때문일까.

"내가 고백하면 누나는 수줍게 웃으면서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연히 그럴 거라고."

흔들리는 음성으로 완이 말한다.

"날 사랑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을까."
"…글쎄."

나는 완을 올려다보았다. 흰자위가 붉다.

"넌, 그래서 신이를 좋아한 거니?"

침묵 속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만약, 신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넌 어쨌을까?"
"…설마."

완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믿지 못하지. 신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앞에서 반갑게 웃고, 그 품에 안기고 하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내 앞에서 볼을 붉게 물들이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던 신이도, 내가 상상하던 신이와 너무나도 달라 보였으니까.

"가끔 이야길 했었어."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여전히 떨리는 음성이다. 완에게 이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술을 마시고 이 렇게 흔들리고 있는 완에게 해도 좋은 이야기일까.

"바다넷에서 만난 사람같아. 나는 듣고 싶지 않았어. 통신 이야기는 못 알아들으니까."

"듣지 않았겠네, 그럼."

“신이가 그랬어. 통신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고, 이름도 말하지 않고, 그 사람과 이야기하면 즐겁다는 것,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통신상의 일들을 행복하게 말했어."

"누나는 누구랑도 즐거워했어, 통신에선!"

완의 음성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나는 완을 노려보았다.

"…이런 이야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나는 한숨을 조금 쉬고 일어나 완이 나간 그 문 밖으로 나갔다. 작은 계단 몇 개를 올라 지상으로 오르는 그 자리에 완이 붉은 얼굴로 서 있었다.

"신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 건 너였어."
"……."
"너는 내게 신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너한테 신이 이야기를 하면 안되는 거야?"

완은 감정이 없는 것처럼 차갑게 쏘아붙이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와도.

"누나는, 그럼 내가 혜정이한테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신이 이야기로 훨씬 더 아파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애는 신이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큰 눈 가득히 눈물이 맺힐 거라는 사실을 완도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그저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다. 누구도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섣부른 박애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내 이름을 원망하는 것은 질색이라서, 그래서 나는 june400이라는 사람이, 사백이라는 별명을 쓰고 있는 그가 신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거라고 단정 짓고 있는 거다.

"아파트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대."

완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신이, 아이 가졌었다니."

이상한 소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갑자기 뇌리에 스쳤던 말일 뿐이었는데,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던가. 왜 그 애가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인지, 왜 그 애는, 나보다 훨씬 더 이 세상을 사랑한 그 애는 죽음을 택했었는지, 그런 의문을 풀고 싶었던 내가 그 순간 만들어 낸 짧은 대답이, 사실인가.

"소문일거야."
"그럼 왜 넌 날 찾았니? 그렇게 술을 마시고."

완의 어깨가 떨렸다. 나는 완을 올려다보았다. 완의 붉은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완이 우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나보다 한참 키가 큰, 7센티 운동화를 신어도 나보다 한참 시선이 높은 사람이 울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꾸욱 쥐고 있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당황스럽다, 당혹스럽다, 지금을 수습할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죽여버릴 거야."
"……."
"누나 그렇게 만든 놈, 죽여버릴 거야."

언제부터인가 습관처럼 한숨이 나왔다.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완의 눈물 앞에서도 담담한 내가 섬뜩할 지경이다.

"일본에서는,"

완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에겐 어떤 죄도 묻지 않는다더라. 자살은 속죄를 뜻한다고."
"…신이 누나도 그랬다는 거야?"

고개를 저었다. 완의 눈동자가 물기로 어른거린다.

"신이는, 다른 사람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몰라."

그 애는 여신(Goddess), 인간의 기준으로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되었는지도 몰라. 우리 중 누구도 그 애를 소유할 수 없었는지도 몰라. 누구도 그 애를 아프게 해서는 안되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 다른 사람을 찾을 거야."

어쩌면 벌써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게 나인지도 모르지만.

"어 왜 나와 있어?"

흠칫, 몸이 떨렸다.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 적어도 오늘 하루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의 주인이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가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그 웃음이 소름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느낀다.

"나경이도 나왔네? 이 녀석 술 취해서 선배 부른 건 줄 알았더니 몇이나 부른 거야. 오랜만이다, 이나경."

시현이 내 어깨에 손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고 흠칫 물러섰다. 시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경아? 너 왜 그래?"
"손대지마."

시현도, 급히 돌아서서 눈물 자욱을 닦아내고 나를 보는 완도 당황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완은 수습하려 어렵게 말을 꺼낸다.

"아 형, 누나가 지금 좀 놀라서."
"…놀라?"
"죽은 친구가 아이를 가졌었다는데, 남자들이 좋게 보이겠어."

차갑게 뱉은 내 말에 시현이 놀랐다. 아니, 흔들렸다. 내 차가운 말 때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건 내 선입견 때문일까.

"신이가?"
"누구겠어."

날이 선 음성들. 시현의 앞에서만 유독 나는 이렇게 된다. 시현 앞에서 늘 이런 것은 아니지만. 완이나 헤정, 혹은 신이 누구 앞에서도 나는 이러지 않는데. 감정과는 거리가 먼 내가 유일하게 날이 서고 신경이 곤두서는 건 늘 이 사람이 앞에 있을 때다. 그래, 잊고 있었던 고질병이 갑작스럽게 발동해 버린 것도 이 사람의 앞에서였지.

"보기랑은 다르군. 여신이."

완이 시현을 쳐다보았다. 시현씨.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얌전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난다. 시현이 조금 비틀거린다 싶더니 쿠당,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완, 검도를 했다고 했던가. 시현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비슬비슬 몸을 일으켰다. 완은 여전히 굳게 주먹을 쥐고 있고.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있다.

"…너 취했냐?!"

이런 순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한쪽 뺨을 하고서도 주먹이 날아가지 않는 것은 시현이, 후배들 사이에서 공인된 멋진 선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완과 시현이 알고 지냈을 몇 년 동안에 완이 그에게 어떻게 대했을지는 나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과, 누구도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좋은 웃음을 하고 있는 완이니까. 그렇지만 때로 몇 번 기차를 갈아타고 서울의 최루탄 냄새를 묻혀 돌아오기도 하는 완의 모습을 안다면,  시현은 이런 것을 짐작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게, 그게 어쨌단 말야!"

나는 소리치는 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얇은 셔츠 아래로 거친 숨소리가 느껴지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완은 내가 손을 얹은 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이 시현을 노려보고 있다. 시현의 얼굴이 평정을 잃어 흔들리는 것을 보는 건 내게는 처음이다.

"그만해. 시현씨."

내 음성이, 내가 놀랄만큼 차가웠다. 시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완을 노려보았고, 휙 몸을 틀었다. 완이 성큼 그에게 가까이 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완을 가로막는다.

"그만해."
"…비켜."
"그만하라고 했어."

완의 붉은 눈이 나를 본다. 그가 한걸음 더 시현에게 다가선다. 나는 두 팔로 완의 가슴을 막는다. 쿵쾅거리는, 평정을 잃은 심장 박동이 손바닥에서 내 몸으로 그대로 전해진다. 멀어지는 시현은 어쩌면 나를, 완을 막아서고 있는 나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등쪽으로 따가운 시선이 꽂힌 듯도 하다.

"화도 안나?! 저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낼 겨를도 없었지. 니가 나보다 더 화를 내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나는 너 대신 네 머리가 되어 주어야만 하는 거지. 니가 내 감정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그만하자. 더 이상은…, 그 애가 입에 오르내리는 거, 그 애 아프게 하는 거… 이제그만하자."

담담히 내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완의 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완이 눈을 감았다. 나는 완을 막아선 팔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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