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덮어씌우기

2011.12.14 17:0012.14

일요일 밤. C는 회사택시를 몰고 갈대밭 사이로 난 이차선 도로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없는 텅 빈 도로였다. 시커먼 먹구름이 달을 가리자 도로는 금세 어두워졌다.
C는 무의식적으로 상향등 조절장치로 손을 뻗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해본 후에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대신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한 시간 만에 벌써 반 갑이나 피운 터라 맛이 텁텁하고 목구멍이 칼칼했지만, 이렇게 줄담배라도 태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전날 밤이었다. 초저녁에 하우스에 들어간 C는 언제나처럼 3시간도 채 못돼서 가진 걸 모두 날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서 기다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볼튼과 토튼햄의 경기를 보고 있던 눈썹이 짙어 인상이 매서워 보이는 하우스 관리인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그를 쳐다보았다.
“끝났어?”
교도소에서 알게 된 하우스 관리인이 물었다.
택시회사 유니폼인 주황색 셔츠를 입은 C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관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이.”
하우스 관리인이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스포츠토토 잡지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C를 불렀다. C가 멈춰 서서 뒤돌아보자 하우스 관리인이 소파에서 일어나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기름 값 해라.”
C는 느릿느릿 손을 내밀어 돈을 받아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말없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평범한 2층짜리 주택에서 나온 C는 손에 들고 있던 쥐색 점퍼를 걸치고 주택가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골목 끝에서 코너를 돈 후에 호주머니에 든 돈을 꺼내 보았다. 10만원이었다. 하우스에 들어갈 때는 같은 주머니에 5만 원 권 백장이 들어있었는데. 기분 같아서는 10만원을 들고 다시 하우스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폭력배 출신인 하우스 관리인한테 실컷 얻어맞고 쫓겨날 게 뻔했다. 항상 그렇듯이 그 날도 맨 정신으로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토요일이라 시내 포장마차는 술꾼들로 가득했다. 구석자리에 앉아 닭갈비 한 접시와 소주 한 병, 그리고 맥주 컵 하나를 주문했다. 맥주 컵에 소주를 3분의 2정도 채워서, 그걸 단숨에 훅 들이키고 오이 한 조각을 씹었다. 빈속이라 술기운이 금방 퍼졌다.
C의 옆자리에 부부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이는 중년 커플이 나란히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자기보다 덩치가 더 큰 여자의 코끼리 다리만한 허벅지를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못생긴 얼굴에 두껍게 화장을 한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경찰은 뭐하는 거야? 무서워 죽겠어.”
남자의 손이 여자의 두꺼운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걸 본 C는 남자의 손이 허벅지 사이에 짓눌려 종잇장처럼 납작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니, 내가 있는데 뭐가 겁나? 나 해병 418기야.”
남자가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6개월 사이에 벌써 4명이라잖아.” 여자가 퉁퉁한 손으로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자기, 오늘 나 집까지 데려다 줄 거지?”
“아, 당연하지.”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연쇄살인사건. C도 잘 아는 얘기였다. 요즘은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어딜 가나 저 얘기뿐이니까. 이제는 지겨울 정도다.
옆에 앉은 씨름꾼 같은 여자가 괜한 걱정을 하는 동안 C는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병째를 깠다. 그리고 한 병을 더 까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도로에는 유흥을 즐기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노름판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지만 스페이스, 하트, 클로버, 다이아몬드가 아직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술이 부족했다. C는 점퍼 깃을 세우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석 달 전부터 살기 시작한 여인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혼자 갈 만한 술집이 눈에 띄면 들어갈 생각이었다.
C는 걸으면서 오늘은 그만 여인숙으로 돌아가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돈이나 좀 꾸러 다녀볼까, 생각했다가 금방 접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이상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새삼 기분이 울적해졌다.
여인숙이 가까워오면서 길거리에 네온간판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행인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깜빡깜빡하는 맛이 간 가로등이 서 있는 모퉁이를 돌아 들어서자 징, 하는 소음이 귀에 들려왔다. 색이 바란 노래방 간판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C는 그 앞을 지나가며 노래방 입구에 어떤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필터만 남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치마를 입고 있어서 팬티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C는 몇 걸음을 더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노래방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검은 미니스커트에 헐렁한 회색 후드티를 걸치고 때가 묻은 흰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처음에는 옷차림과 왜소한 몸집을 보고 술 취한 10대라 생각했지만 가까이 가서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허옇게 분칠을 하긴 했지만 눈가와 팔자 주름이 선명하게 패여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30대 후반 정도?
황홀한 표정으로 필터가 타는 연기를 들이마시던 여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리고 C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일어섰다.
“오빠.”
술 취한 여자가 아니라 좀 모자란 여자였다. 웃어서 얼굴 주름이 더 깊게 패였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C의 시선이 여자의 미니스커트 밑으로 뻗은 두 다리로 향했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멍이 들고 살이 터있었지만 군살 없는 매끈한 다리였다. C는 티 안 나게 침을 삼키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길에는 그 두 사람뿐이었다.
“여기서 뭐해?”
C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반말로 물었다.
“오빠, 오빠.”
여자가 손바닥 두 개를 포개 앞으로 내밀며 다가왔다.
“담배?”
C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주자 여자가 받아 물었다. C는 한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여자는 담배연기를 마시며 다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마약이라도 하는 것처럼.
“집이 어딘데?”
“저― 어― 기.”
여자가 손가락으로 밤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혼자 있는 거야?”
여자가 코로 연기를 내 뿜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C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밥 먹으러 갈래?”
“밥?”
“그래, 배 안 고파?”
“술, 술 마실래.”
“술? 그래, 그러지 뭐.”
C가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리자 여자가 바닥에 내려둔 학생들이 맬법한 책가방을 둘러매고 따라나섰다.
어둠 속에서 C의 손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켜자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다가 불이 켜졌다. 서랍장을 겸하는 텔레비전 받침대와 오래된 금성 냉장고가 전부인 초라한 방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에는 군데군데 퍼런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뒷골목 쪽을 향해 난 금이 간 창문에는 청 테이프가 아무렇게나 발라져 있었다. 구린내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 사온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술이 들어가자 여자는 실실거리며 두서없는 얘기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C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헐렁한 후드 티 안에 감춰진 여자의 가슴 사이즈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사타구니가 빳빳해진 C가 여자의 말을 끊었다.
“재밌는 거 볼래?”
“재밌는 거?”
C가 무릎으로 기어가서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 버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잠시 후 화면에 포르노 영화가 나왔다. 여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밌지?”
여자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서는 금발머리의 여자가 가지만한 남자의 페니스를 뻑뻑 빨고 있었다.
“저런 거 할 줄 알아?”
여자가 이번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C가 바지 지퍼를 내리며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봐.”
두 사람은 한 바탕 요란하게 일을 치룬 뒤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더러운 이불을 몸에 감고 잠이 들었다.
C는 술을 마시면 잠을 오래 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투통 때문에 잠든 지 3시간 만에 눈을 떴다. 형광등 불에 눈이 부셨다. 정신이 멍멍하고 목이 말랐다.
그 때 무슨 소리가 났다. 쇳조각 같은 게 짤랑거리는 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가 그가 벗어놓은 바지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짤랑거리는 소리는 벨트 버클 소리였다.
여자는 바지 호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자신의 책가방에 재빨리 집어넣었다.
“이런, 씨발년이.”
여자가 뒤돌아보는 순간 C가 주먹을 날렸다. 여자는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바닥에 팩 고꾸라졌다.
흥분한 C가 씩씩거리며 여자의 학생가방을 집어 들고 바닥을 향해 거꾸로 뒤집어 털었다. 지폐 몇 장과 원통 모양의 물건 몇 개가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졌다.
“불쌍해서 한번 데리고 놀아줬더니, 내 돈을 털어? 어? 날 호구로…….”
C가 원통 하나를 집어 들며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만 원권 지폐다발을 둥글게 말아 고무줄로 튕겨 놓은 것이었다. 고무줄을 뜯어보니 두께가 백 장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지폐다발이 모두 여섯 개였다.
“뭐야 이거?” C가 지폐다발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어?”
여자는 말이 없었다.
C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정지 된 두 눈동자가 맞은 편 벽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야, 야.”
여자의 몸을 흔들자 팔 하나가 힘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지막하게 끽 소리를 내며 택시가 멈춰 섰다. 오른쪽에 갈대밭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나 있었다. C는 도로 앞뒤에 다른 불빛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핸들을 꺾어 샛길로 들어갔다. 전조등이 양옆에 빽빽하게 늘어선 갈대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비추었다.
C는 도로에서 10미터 쯤 들어간 곳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그리고 전조등도 껐다. 달이 아직 구름 뒤에 숨어 있어서 사위가 캄캄했다. 어두운 차 안에서 담뱃불이 타 들어갔다. C는 코로 연기를 내뱉고는 꽁초를 침과 가래와 다른 꽁초로 가득한 종이컵에 쑤셔 넣었다. 열린 차창으로 갈대가 서로 몸을 비비는 스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C는 조수석에 놓아둔 새 목장갑을 손에 끼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차 뒤로 돌아가서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는 노름꾼의 개평을 노리다 목숨을 잃은 여자가 다리가 접힌 채로 누워 있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어차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트렁크에서 시체를 들어냈다. 영화나 소설에서 말하는 것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시체를 안고 가슴 높이까지 자란 갈대밭으로 들어가서 시체의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몇 주 전, 동료기사가 해준 얘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 동료기사는 6개월 전부터 시작된 연쇄살인사건의 4번째 피해자를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 외곽 도로를 달리다 소변이 마려워 도로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갈대밭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 며칠 후 그는 역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기사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본 것을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지루한 참이었던 택시기사들이 반가운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 C도 있었다.
C는 이미 신문을 통해 동료기사가 시체를 발견한 네 번째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앞의 세 건의 살인사건과 똑같았다. 피해자는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여자고 둔기에 의해 얼굴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 성폭행 흔적은 없었고 경찰 수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얼굴에 피범벅이 된 팬티를 덮어쓰고 있더라니까.”
제보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팬티? 신문이나 뉴스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
기사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제보자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경찰이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니까.”
“왜?”
기사 중 또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참, 답답하긴. 모방 범죄 때문이지, 뭐 때문이겠어?”
제보자가 반문했다.
기사 중에 몇몇은 음,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몇몇은 눈만 끔뻑거릴 뿐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C는 시체의 옷을 모두 벗긴 후에 트렁크에서 마른 수건과 분무기와 검은 비닐봉지, 그리고 알루미늄 야구배트를 꺼내 왔다.
먼저 분무기와 마른 수건으로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구석구석 닦았다. (중간 중간 미어캣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런 다음 팬티를 제외한 나머지 옷가지와 신발과 검은 비닐봉지에 담고, 팬티를 시체의 머리에 덮어 씌웠다.
C는 바닥에 둔 야구배트를 집어 들고 시체 머리맡에 섰다. 그리고 이건 고깃덩어리일 뿐이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야구배트 끝이 부르르 떨렸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이를 앙 물고 야구배트를 자신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뼈와 살과 근육이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흰색 팬티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매질을 끝낸 C는 숨을 헐떡이며 트렁크에서 시체 밑에 깔아놓았던 군용 배낭을 꺼내 피가 묻은 야구배트와 옷가지를 담은 비닐봉지와 나머지 도구들을 그 안에 넣고, 군용 배낭을 다시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타서 오른팔로 조수석 머리받침을 잡고 후진을 했다. 택시가 다시 비포장도로를 지나 외곽 도로로 나왔다. C는 그곳에 차를 세우고 손전등과 빗자루를 챙겨 다시 시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흙길에 차 바퀴자국이 두 줄로 선명하게 나 있었다. C는 가급적이면 바퀴자국을 밟으며 걸었다. 이제 시체가 있는 곳에서 뒷걸음으로 빗질을 하며 택시로 돌아가면 더 이상 현장에서 할 일은 없었다.
막 빗질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멎은 갈대밭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C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버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기세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적.
갑자기 꼬리가 뭉툭한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갈대를 헤치고 흙길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손전등 불빛을 보고 놀라, 맞은편 갈대밭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 버렸다. C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C는 서둘러 발자국과 바퀴자국을 지우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외곽 도로를 달리면서 혹시 실수는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없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린 끝에 택시는 인적이 드문 야산 입구에 도착했다. 가끔 괴로울 때 (빈털터리가 됐을 때.) 찾아오는 곳이었다. C는 트렁크에서 군용 배낭을 꺼내 메고 한손에는 삽을, 다른 한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캄캄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턱까지 오르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C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에 군용 배낭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삽으로 주변의 땅을 쿡쿡 찔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곳을 파기 시작했다. 40분쯤 파자 깊이 1.5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군용 배낭을 그 안으로 던져 넣고 그 위에 지포라이터 기름을 뿌린 후에 불붙인 종이를 떨어뜨렸다. 역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불꽃이 타올랐다. C는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불꽃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삽으로 구덩이를 메우고 산을 내려왔다.
여인숙으로 돌아온 C는 공중전화부스만 한 욕실에서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피곤한 하루여서 베게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다. 동이 터올 무렵에 일기예보대로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날 C는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자고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택시를 몰고 영업을 나왔다. 일요일이지만 아직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어서 시내에 손님이 좀 있었다. 5명을 태웠는데 그 중 3명과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손님들은 나다니기 무섭다느니, 그런 놈은 사형시켜야 한다느니, 터가 안 좋은 곳이라서 그렇다느니……. C는 불안감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손님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비가 그치자 손님도 함께 뚝 떨어졌다. C는 기사식당으로 가서 설렁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하우스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3시간 후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하우스를 걸어 나왔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택시를 몰고 밤길을 달렸다. 패배감과 허무함이 명치 부근에 걸려 기분이 답답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 하우스 매니저를 보고 있어서 개평도 없었다. 개털이었다. 여인숙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C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라디오에서 무뚝뚝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최근에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다섯 번째 피해자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체가 오늘 오전 10시경에 외곽도로 갈대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현장에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여자의 시신이 발견된 건 사실이지만, 조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연쇄살인사건으로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단독으로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오늘 갈대밭에서 발견된 피해자는 얼굴에 본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속옷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손가락 하나가 절단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전에 세 명의 피해자들도 같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는지에 대한 저희 기자의 질문에 경찰은 아직은 신중해야할 시기라고만 답했습니다.
현재 경찰은 지난 네 번째 연쇄살인사건 발생 직후 체포한 용의자 박 모 씨에 대한 추가 수사를 계속 진행할 것으로…….”
손가락?
C는 여인숙으로 가는 내내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골목에 차를 대고 여인숙 계단을 오르면서 머릿속으로 갈대밭에서 본 고양이가 시체 손가락을 오독토독 씹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역겨웠다.
C는 방문을 열고 벽을 더듬어 방에 불을 켰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방에 웬 낯선 여자가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손발이 묶인 채로 누워 있었다. 그를 본 여자가 낑낑거리며 몸을 새우처럼 앞뒤로 움직였다.
C는 등 뒤에서 방문이 달깍 닫히는 소리를 들었고,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뒤통수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이 얼굴로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일요일 밤에 R은 갈대밭에 서 있었다. 그는 바지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운동화 끝으로 흙바닥을 문지르면서 몇 주 전 그곳에서 자신이 벌인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벌거벗은 사냥감의 겁에 질린 두 눈이 떠오르자, 당시의 쾌감이 발바닥에서부터 무릎을 지나 그 위로 서서히 타고 올라왔다. R은 손으로 천천히 사타구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손이 점점 빨라졌다.
미간을 찡그리고 절정에 다다르려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불빛 두 개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R은 재빨리 몸을 수그렸다. 차 한 대가 외곽도로에서 갈대밭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R이 갈대밭에 몸을 숨기고 있는 곳에서부터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차 지붕에 볼록한 돔이 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런 걸 달고 다니는 차는 택시 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엔진 소리가 멈추고 전조등 불빛이 꺼졌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R은 땅에 엎드려 갈대 사이로 택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차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에서 나온 검은 실루엣이 차 뒤로 가서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트렁크 안에든 커다란 뭔가를 안아들고 R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R이 숨을 죽였다.
검은 실루엣은 R의 5미터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곳에 안고 있던 걸 내려놓았다. R은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돌멩이 하나를 잡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검은 실루엣의 잔뜩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추레하게 생긴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가 바닥에 내려놓은 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치마를 보니 여자였다.
남자는 여자의 옷과 신발을 모두 벗긴 후에 다시 트렁크로 돌아갔다. R은 그 틈을 타서 옆에 갈대가 좀 더 많이 우거진 곳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여자의 얼굴이 R이 이동한 쪽을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죽어 있었다.
R은 기회를 봐서 소리 없이 그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람이 갈대를 뒤 흔드는 타이밍에 맞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다시 돌아온 남자가 시체를 구석구석 닦은 다음에 시체의 얼굴에 팬티를 덮어씌웠다.
!
R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가 야구배트로 시체의 얼굴을 두들기자, R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매질을 끝낸 남자가 시체를 내버려두고 택시를 후진해서 다시 외곽도로로 나갔다. 그리고 외곽도로에 택시를 세워두고 다시 시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빗자루로 바닥을 꼼꼼하게 쓸기 시작했다.
R은 모방범의 괘씸한 행동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서 모방범이 빗질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갈대밭을 가로질러 자신의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갔다.
모방범이 외곽도로에 차를 세워둔 곳에서 도로를 따라 뒤쪽으로 8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이미 오래 전에 갈대가 메워 버린, 승용차 세 대를 나란히 주차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비상 갓길이 있었다. 갈대가 무성해서 낮에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그 곳에 R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R은 운전석 옆에 서서 어두운 도로를 주시했다. 잠시 후 전방에 붉은 불빛 두 개가 보였다. 브레이크등이었다. R은 운전석에 올라타서 택시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택시의 불빛이 도로 끝 커브 길로 들어가면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갓길에서 나와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R은 미행을 하면서 계획을 세워보았다. 머릿속에 대충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미행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택시가 도시외곽 야산 입구에 멈춰 섰다. R은 멀리 차를 세우고 택시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수풀에 몸을 수그렸다. 배낭을 짊어진 모방범이 손전등을 비추며 캄캄한 산을 올라가는 게 보였다. 범행도구들을 묻으러 가는 게 분명했다. R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1시간 반이 지나서야 모방범이 빈손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미행이 계속되었다.
R은 모방범이 허름한 여인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숙 창문 중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R은 조수석 수납장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불이 켜진 창문의 위치를 그리고 그 밑에 택시 차종과 차 넘버를 적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여인숙 주변을 빙 돌아보았다. 거지같은 간판이 비뚤하게 달린 정문 말고 다른 출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차로 돌아가서 계획에 필요한 준비물이 뭐가 있는지 수첩에 적어보고 있을 때 모방범의 방에 불이 꺼졌다. 기다려봤지만 모방범은 여인숙에서 나오지 않았다.
R은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카운터 유리벽에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가 하나 붙어 있었다. R은 계단을 올라가서 창문의 위치를 가지고 모방범의 방이 어딘지 확인해보았다. 206호였다. 다시 카운터로 내려가서 핸드폰으로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인 할머니는 전화를 받는 대신 호실 번호가 붙어있지 않은 카운터 바로 옆방에서 불쑥 문을 열고 나왔다. 206호의 옆방인 205호와 맞은편방인 207호가 빈방이었다. R은 현금으로 207호를 잡았다.
방에 들어가서 창문을 열어보니 여인숙 옆에 있는 주차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한 구석에 모방범의 택시가 세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날이 새기까지 2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R은 좁은 방안을 거닐며 이제부터 자신이 움직일 동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2시간이면 충분해 보였다.  
R은 방에서 나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복도에 감시카메라가 없는 지 확인을 하고 206호 방문에 귀를 붙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R은 방문에 노크를 하고 복도 끝 계단으로 소리 없이 성큼성큼 뛰어갔다. 계단에 숨어서 복도를 지켜봤지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R은 같은 식으로 두 번을 더 해보고 여인숙을 나왔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R은 주방으로 가서 냉동고를 열어 지퍼백 두 개를 꺼냈다. 하나에는 시퍼런 손가락 네 개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시커먼 피가 담긴 유리병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손가락과 유리병에 유성매직으로 1번부터 4번까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런 다음 속이 빈 배낭에 지퍼백 두 개와 가위와 나무배트와 빗자루와 커다란 비닐봉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킷호주머니에 새 라텍스 장갑 두 세트를 쑤셔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R은 차를 몰고 다시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까처럼 갈대로 뒤덮인 갓길에 차를 세우고 라텍스 장갑을 손에 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갈대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체는 그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일단 가위로 시체의 손가락을 하나 잘라서 지퍼백에 담았다.
그런 다음 야구배트에 피가 골고루 묻을 때까지 이미 피떡이 된 시체의 얼굴을 두들겼다. 그리고 야구배트를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고 빗자루로 자신이 걸어 들어온 길을 쓸면서 차로 돌아갔다.
여인숙으로 다시 돌아온 R은 창문을 열고 모방범의 택시가 아직 주차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소리였다. 살인자들이 좋아라하는 빗소리.
R은 모방범이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방문을 1센티미터 정도 열어두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꾸벅꾸벅 졸면서 꼬박 13시간을 기다렸다.
방문 옆의 벽에 기대 앉아 졸고 있던 R은 걸걸한 기침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복도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난 후에 바닥에 신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조금 더 열고 복도를 내다봤다. 누군가가 복도 끝에서 가래를 퉤, 뱉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R은 창문을 조금 열고 주차장을 내다보았다. 잠시 후에 모방범이 택시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택시 지붕에 주황색 등이 들어왔다.
택시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R은 방에서 나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혹시나 해서 206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이 열렸다. 방 구조는 207호와 똑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냉동실에 손을 집어넣어 잘 작동 되는지 확인한 후에 방을 나왔다.
R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머리가 띵 하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약국에 가서 타이레놀 한 상자를 사서 가까운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타이레놀 두 알을 삼키고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마시고 나니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스타벅스 밖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R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서 지갑을 꺼내 명함 몇 장을 꺼냈다. 명함들에는 야한 옷차림을 한 여자들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R은 부스 안에서 20분 정도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모두 아가씨가 없다고 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로 아가씨를 부르기가 힘들었다. 업소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인데다 가끔 장난전화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디든지, 지나친 경쟁심으로 상도덕을 어기는 업체가 한 두 개쯤은 있게 마련이다. 한 곳에서 아가씨를 보내 주기로 했다.
30분 후에 스타벅스 앞에 검은 승용차 하나가 멈춰 섰다. R은 스타벅스 안에서 벽 유리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승용차에서 짧은 치마 차림의 여자가 내려서 스타벅스로 걸어 들어왔다. 여자는 입구에 서서 매장을 두리번거렸다. R은 검은 승용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테이블 위에 말보로 담배 갑을 세웠다. 여자가 세워진 담배를 보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여인숙으로 갔다. R은 주차장에 택시가 없는 걸 확인하고 여자를 데리고 206호로 들어갔다.
여자는 주먹 두 방에 찍소리도 못하고 기절했다. R은 새 라텍스 장갑을 꺼내 낀 다음에 여자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방에 걸린 빨랫줄을 끊어 손발을 뒤로 묵었다.
그리고 차에서 배낭을 가져와서 현장을 꾸미기 시작했다. 먼저 지퍼백에서 피가 든 유리병 4개를 꺼내 야구배트와 모방범의 옷가지와 방과 욕실 구석구석에 쉽게 눈에 띄지 않도록 혈흔을 남겼다. 그런 다음 손가락이 든 지퍼백을 냉동실에 집어넣고 방을 둘러보았다. 텔레비전 받침대 밑에 볼링 핀처럼 늘어선 소주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R은 소주병 하나를 손에 쥐고 방에 불을 껐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그 방에서는 주차장 입구를 볼 수 있었다.
모방범은 자정이 지나서 돌아왔다. 택시가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는 걸 본 R은 모방범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방범이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 몰래 뒤따라 들어갔다.
방에 불이 켜지자 R은 뒤에서 방문을 닫고 소주병 밑바닥으로 모방범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찍었다. 그는 아, 하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는 정신을 차린 여자가 필사적으로 낑낑대고 있었다. R은 여자를 목 졸라 죽였다. 그리고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고 손발에 묵인 끈도 풀었다. 소주병은 여자의 지문을 묻힌 후에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려놓았다. 그리고 방에서 나오면서 방문을 잠갔다.
R은 집으로 가는 길에 공중전화부스를 발견하고 잠시 차를 세웠다.

C는 쾅쾅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가, 아니 어떤 이들이 문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욕하는 소리도 들렸다.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몸을 일으키자 뒤통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었다. 뒤통수를 만져보니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왔다. 그리고 옆에 대자로 누워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 밖으로 툭 튀어나온 혓바닥과 허공을 응시하는 빛을 잃은 눈. 시체.
의식을 잃기 전에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방에 누워 있던 묶인 여자와 방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침입자들이 방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C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뭔가를 밟고 넘어질 뻔 했다. 피가 묻은 야구배트였다. 그 야구배트를 집어 드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남자 세 명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다짜고짜 C를 덮쳤다. C가 몸부림을 치자 한 남자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가만있어!”
C는 수갑이 채워지고 나서야 그 사람들이 경찰이란 걸 알았다.
나중에 그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법원에 기소된 상태였다.  

몇 달 후. R은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일면에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법원 1심에서 연쇄살인범 C에게 사형 선고’
그 아래에는 연갈색 수의를 입고 모자를 코까지 푹 눌러쓴 C의 사진이 있었다.
기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킥킥거리던 R은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294 단편 재귀공방 윤소아 2011.12.05 0
단편 덮어씌우기 강민수 2011.12.14 0
1292 단편 <b>거울의 다섯 번째 소재별 단편선에 실릴 작품을 모집합니다</b> mirror_b 2011.12.22 0
1291 단편 [꽁트?] 육개산성과 전자레인지궁 김진영 2011.12.22 0
1290 장편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손님 2011.12.24 0
1289 단편 기억을 전이시키는 금색 시계 목이긴기린그림 2011.12.27 0
1288 단편 마왕의 태양 아래1 솔리테어 2011.12.29 0
1287 단편 세 번째 기적 너구리맛우동 2011.12.29 0
1286 단편 모든 것의 기적 윤소아 2012.01.01 0
1285 단편 유령마을 장피엘 2012.01.01 0
1284 단편 당신과 나의 고양이 쿼츠군 2012.01.07 0
1283 단편 사조백수전射鳥白手傳 dcdc 2012.01.08 0
1282 단편 강철괴물 솔리테어 2012.01.09 0
1281 단편 [탄생] 인큐베이션 황성식 2012.01.13 0
1280 단편 [해외단편] 새엄마 구자언 2012.01.15 0
1279 단편 이야기1 ladm 2012.01.25 0
1278 단편 그림자2 제퍼리 킴 2012.01.27 0
1277 단편 별똥별 브라질 산토스 2012.01.30 0
1276 단편 불멸에 대하여1 이정도 2012.02.01 0
1275 단편 초콜릿담배 김영광 2012.02.05 0
Prev 1 ...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