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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게이트에 이르는 이치

2011.11.24 22:4111.24

요즘 들어 나그는 심장에서 두근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순리에 따라 게이트로 떠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게이트로 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명계에서 태어난 그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지만, 생계에서 태어난 부모들은 나그의 죽음을 슬퍼할 것을 나그는 바라지 않았기에,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게이트에 가고자 하는 충동은 계속해서 커졌다. 낮에 일을 할 때면 저절로 게이트에 눈이 갔고, 밤에는 마음이 향했다. 침대에 앉아 충동을 억누를 때면 나그는 자신이 죽인 바란씨를 떠올렸다.
바란씨는 나그의 부모와 같은 생계 출신이었다. 그는 나그가 7년 전까지 옆집에 살았다. 그는 살아있을 때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쳤는데, 그 버릇인지 어린 나그에게 생계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린아이가 적은 명계에서 바란씨는 나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그의 부모도 바란씨와 친하게 지내, 종종 함께 식사를 하고는 했다. 그들은 친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란씨가 무신론자인데 반해 나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이 결정적인 차이 때문에 그들은 거의 20년 가깝게 온갖 논쟁을 반복했다. 그들은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나그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논쟁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건 나그에게 있어 즐거운 일인 동시에 가끔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몇 백번씩 들으면 질려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자주 하는 논쟁의 주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이었다. 나그의 부모는 나그에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가르쳤지만, 바란씨는 그의 집에 놀러온 나그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최초의 간단한 생물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인간과 같은 복잡한 생물이 되었다고. 이에 대해 나그의 부모는 돌연변이로는 눈이나 면역시스템 같은 복잡하고 완벽한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반박했으며, 바란씨는 다시 신체의 불완전함에 대해 역설했다. 신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수준 낮은 신체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10살 무렵의 나그는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했고,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인간 이외의 생물을 본적이 없는 그에게는 진화론도 창조론도 똑같이 허무맹랑한 망상일 뿐이었다.


두들리와 처음 만난 그 날, 나그는 집에서 의자를 고치고 있었다. 의자의 다리 두개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다리를 찾지 않고 새로운 다리를 붙이기로 했다. 순리에 의해 사라진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란씨는 불가능 하지 않고 어려울 뿐이라고, 물리학과 통계학을 내세워 주장했지만, 나그는 물리학을 믿지 않았다. 그가 신뢰하는 것은 물리 법칙 뿐이었다.
붙인 다리의 미묘한 길이차를 조정할 때,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괴상한 소리를 들렸다. 본능적으로 불쾌함을 주는 소리였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바란씨가 역풍을 맞으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계단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는 손에 줄을 들고 있었고, 줄은 한 번도 본적 없고, 뭐에 쓰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 분홍색 물체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소음의 근원인 듯 했는데, 0층에서 주워온 생계의 물건인 모양이었다.
“나그, 이것 봐라!”
나그를 알아차린 바란씨가 외쳤다. 나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집 밖으로 나갔다. 바란씨에게 다가가자 소음은 더욱 커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분홍색 물체에는 구멍이 있었는데 거기서 소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거 뭐예요?”
“응?”
나그의 물음에 바란씨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호기심 번뜩이는 눈으로 나그를 주시했다.
“뭐인 거 같아?”
“으음…….”
또 시작이구나, 나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분홍색 물체를 쳐다봤다. 울퉁불퉁하다 못해 난수적인 외형에서는 용도에 관한 직관을 얻을 수 없었다. 세부를 살펴봐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구멍이 몇 개 뚫려 있고, 눈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것에 달린 네 개의 짧은 원통이었다. 이것들이 움직이면서 물체를 옮기는 듯 했다. 바퀴와는 다르지만 지면에 대한 마찰력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였다. 어쩌면 교통수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울퉁불퉁하고 낮아 타기에 좋은 형태가 아니고, 연비가 나쁜데다, 느리고, 무엇보다 시끄러웠다.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형편없는 탈것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
“아직 모르겠어?”
바란씨는 웃으며 말했다. 모르겠다고 말해도 답을 알려주지는 않을게 뻔하다. 나그가 고민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것이다.
“생각하는 중이예요. 방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순간, 나그의 머리에 통찰의 순간이 도래했다. 어떤 논리나 과정도 없이, 정답에 관한 영감이 번뜩인 것이다. 이 악취미적인 조형, 소음, 비효율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움직임. 이것들은 결코 우연한, 실패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은 이정도의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이정도의 실수를 하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모든 열등함은 의도된 산물이다. 이 모든 요소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알았어요. 이건 예술, 추상예술이에요. 아마도 열등함과 비효율이라는 개념을 구현한 조각이겠죠.”
나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바란씨를 쳐다봤다. 바란씨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답인가, 생각한 순간 바란씨는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예술, 추상예술이라니. 정말, 설마, 그런 대답이라니. 말도 안 돼. 아하하, 그런 답은 상상도 못했어. 정말 깜짝 놀랐다.”
나그는 김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 찾아온 위대한 통찰의 순간이 사실은 착각임을 깨닫는 것은 허탈한 일이었다.
“……그럼 정답은 뭔데요?”
나그는 무심하게 물었다. 바란씨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돼지야 돼지”
“돼지?”
돼지. 그것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부모가 돼지고기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고기는 음식의 일종이고, 음식이라는 것은 먹는 것이며, 먹는다는 것은 유기물을 섭취, 소화해서 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보통 음식은 생물이며, 생물은 다른 생물을 먹고,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생존하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복잡하고 뛰어난 구조체라던가.
“그게 이거라고요?”
나그는 손가락으로 돼지를 가리켰다.
“그게 이거야. 어때?”
바란씨는 끄덕였다.
“뭐……. 잘 만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렇게 말하며 나그는 돼지를 다시 살펴봤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바란씨, 이거 혹시 얼굴인가요?”
돼지에는 눈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살펴보면 아래에는 코나 입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인간의 것과는 크기도 색도 달랐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진화론을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느꼈지만, 자신이 이 기괴한 것과 닮았다는 사실은 꽤나 착잡한 것이었다.
그러나 돼지에 대해,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감상 또한 느꼈다. 이 돼지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물과 다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돼지의 움직임은 용수철의 움직임처럼 주기적이지도 않으면서도 나름의 질서 안에서 움직인다고 느꼈다. 마치 인간처럼.
“이게 생물인가요?”
“그래”
“저를 닮았네요.”
“진화의 계보에서 비교적 가까우니까”
“신이 있다면 때려주고 싶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신은 없다고.”
그렇게 대답하는 바란씨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바란씨가 가져온 돼지는 나그가 키우기로 했다. 바란씨는 돼지에게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돼지는 돼지인데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는지 나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바란씨는 종과 개체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그 설명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주일에 걸친 바란씨의 설명에 지친 나머지 나그는 말했다.
“그냥 나그씨가 지어주세요”
“두들리.”
즉답이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이상으로 괜찮은 명사는 없을 거라고 느꼈다.
“좋아요. 이건 앞으로 두들리예요.”


바란씨가 다른 생물을 데려온 것은 그로부터 2개월 뒤의 일이었다. 나그는 두들리의 우리를 수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들리의 목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막기 위한 닫힌 형태였는데, 천장의 일부가 순리에 의해 소실해 버려서 나그의 방에 소음이 그대로 들려온 것이다.
코로 무릎을 툭툭 쳐대는 두들리의 방해를 무시하며 겨우 수리를 마쳤을 때, “나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바란씨뿐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바란씨가 역풍을 맞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두들리를 얻은 날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예요?”
“이거 봐라”
바란씨는 뚜껑이 덮인 유리병을 내밀었다. 병 안에는 원통형의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용수철과 비슷한 움직임이라고 느꼈다. 일반적인 용수철과는 달리 나선형으로 말려있지는 않았지만, 수축과 팽창에 의한 탄성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묘했다. 그것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용수철이라면 마찰에 의해 에너지를 잃고 곧 정지해 버릴 터였다.
“뭐예요 이거?”
나그는 흥미가 생겼다. 마찰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장치가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대기 중의 미미한 에너지를 흡수해 구동하는 민감한 시스템일까? 나그는 후자 쪽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물체가 서로 충돌하는 이상 마찰을 줄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은 간단하다. 바람은 언제나 부니까.
“지렁이라고 하는 거지.”
“지렁이? 어떤 원리로 구동하는 건데요?”
나그의 질문에 바란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같은 일을 겪은 듯 했다.
“설마 생물은 아니겠지요?”
나그가 말했다.
“설마 획기적인 용수철이라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바란씨가 받아쳤다. 훌륭한 통찰력이었다.
“이게 생물이라니…….”
나그는 생물의 개념이 혼란스러워졌다. 지렁이는 인간과 닮지 않았고, 생물이라는 직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특이한 용수철로만 보였다. 나그는 바란씨에게서 유리병을 받았다. 지렁이를 하나 꺼내 손에 올려놓았다. 지렁이는 출렁거리며 움직이더니 손의 가장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순풍을 받으며 계단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지성이 없는 생물이기에 순리에 저항하지 못하고 게이트로 향해버리는 것이다. 나그는 계속 지렁이를 꺼내 바닥에 놓고 관찰했다. 그가 마지막 지렁이를 꺼내들었을 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두들리의 우리가 무너졌다.
순리 때문에 기둥이나 어디가 망가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에 다가갔을 때, 무너진 자재들 사이에서 두들리가 튀어나왔다. 두들리는 나그와 바란씨가 어쩔 엄두도 못 낼 기세로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순풍을 받으며 지렁이들을 지나치는 그 뒷모습에서 나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생물은 스스로 게이트를 향한다.


아침이 되었다. 나그는 등을 떠미는 바람을 맞으며 0층으로 향했다. 그것은 매일의 일과였다. 순리에 의해 건물도 가구도 조금씩 소실되기에 이를 보충할 물건을 찾아야 했다. 이 일과를 게을리 하면 곧 집이 무너질 테고, 언젠가 도시도 무너질 터였다.
0층의 바닥은 검고 매끄러웠다. 도시와는 달리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었고, 어떤 물질로 되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0층의 바닥은 무한하게 넓었다. 그 보이지 않는 끝에서 생계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게이트를 향해 왔다. 그것들은 스스로 움직이기도 했고, 바람이 운반하기도 했으며, 생물이 운반하기도 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저 끝을 향해 간다면 생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그는 생계를 향한 모험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자유의지인지 아니면 순리에 의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마음인지는 몰랐지만.
게이트는 옆면이 없는 원기둥 형태로 천문학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바란씨는 태양계보다 작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눈에는 거대한 원판이 높이 떠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중력에 의해 뚜껑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옆면이 문으로서 존재함을 누구나 알았고, 그것을 넘은 이는 결코 돌아오지 않음을 알았다.
생계에서 오는 모든 것은 제각각 다른 방향에서 게이트를 향해 움직였다. 인간의 행렬 바로 옆에는 돼지와 오랑우탄의 행렬이 있었고 그 옆은 자갈과 라디오의 행렬이 있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우연히 자신의 행렬을 벗어났다. 그렇게 이탈한 물건은 순리에서도 이탈했다. 그래봤자 순리의 집행까지 짧은 유예가 주어질 뿐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인간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물건들을 주워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살아왔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순리에 저항하며.
그러나 다른 생물보다 순리에 오래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이라도, 결과적으로 순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순리가 순리인 이유였다.
쓸 만한 것을 찾던 나그는 어느 순간 충동에 휩싸였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다. 저주에 사로잡힌 것처럼 의식을 게이트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게이트에 의식을 향하면, 머릿속에 간지러운 쾌감이 들었다.
전심전령으로 충동에 저항했다. 이성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슬퍼할 부모에 대한 죄책감만이 그의 의지를 붙들었다. 충동은 점차 강해졌고 결국, 그의 저항을 넘어섰다. 죄책감의 구명줄은 끊어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을 채우고 있던 감정들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조용한 이해가 대신했다.
――――삶은 죽음으로 통한다.
나그는 게이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유언을 남기고 싶었지만, 몸은 의지가 아닌 순리를 따랐다. 슬프고 쓸쓸했지만, 그 감정은 나그의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게이트까지 걸어가며 나그는 바란씨를 죽인 7년 전을 떠올렸다.


바란씨는 나그의 마음을 진화론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지만, 신의 부재를 믿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신의 부재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연 현상에 의지가 없다는 기계 주의적 자연관은 단순한 망상처럼 보였다. 생계는 어떤지 몰라도 명계의 물리법칙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어나는 듯 보였다.
게이트를 향한 행렬이 그랬다. 어린 아이도, 동물도, 물건조차도 게이트를 향한다. 바람도 그렇다. 모든 것을 게이트로 몰고 가려는 듯 게이트를 향해 분다. 순리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물건은 어느 순간 순리에 따른다. 움직일 수 없는 물건들이 말도 안 되는 우연에 의해 게이트로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은 대게 그 과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순리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목격 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치 누군가가 운명을 조작하는 것 같았다. 이 현상들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바란씨는 게이트를 향하는 행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람에 대해서는 게이트 안에 음압을 만드는 장치가 있을 거라는 그럴 듯한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순리에 대해서는 있을법한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나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란씨가 신의 부재를 이상할 정도로 고집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그가 22살이 될 때까지 물리법칙과 신에 관한 논쟁은 계속됐다. 같은 주장을 셀 수 없이 들었다. 그 정도면 바란씨를 논파하려 마음먹은 나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그는 0층에서 일하면서 인간 이외의 생물을 접하게 됬고, 그 와중에 한 가지 착상을 얻었다. 민들레 씨앗은 공중에 뜰 정도로 가벼웠다. 씨앗을 허공에 흩뿌리면, 바람이 불어 씨앗을 게이트로 빨아들였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자연 법칙을 검증할 도구를 만들었다.
그것은 콜라캔을 이용해 만든 간단한 도구였다. 캔 안에 민들레 씨앗을 넣고, 캔의 입구를 게이트의 반대방향으로 한다. 기계론적 법칙 하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론적 법칙 하에서는 민들레 씨앗을 게이트로 가져가기 위해 바람이 분다. 즉, 캔 안에서 밖으로 바람이 불고, 내부의 압력이 낮아진 캔은 찌그러진다.
기본적인 원리는 간단했지만, 몇 가지 변수를 고려해 설계를 변경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귀찮지만 곤란한 일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바란씨에게 배운 지식들이 도움이 됐다.
“재밌어 보이네.”
바란씨는 나그의 제안에 흥미를 보였다. 둘은 며칠 동안 실험 계획을 검토했고,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완성된 콜라캔을 고정시켰다. 늘 부는 바람에 의해 캔이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캔의 입구가 향하는 각도를 조정한 다음 민들레 씨앗을 넣었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 아직 목적론적 법칙 가설이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순리에서 한번 벗어난 것은 순리가 집행될 때까지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두 사람도 조금은 피곤해졌다. 여섯 시간이 지나자 피로는 극에 달했다.
“아무래도 내 가설이 옳은 것 같은데?”
바란씨가 말했다.
“그런가보네요”
나그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피곤하기는 싫었기에 납득한 척 했다. 그 때, 보이지 않는 손이 쥔 것처럼 캔이 찌그러졌다. 캔 입구에서 여러 개의 민들레 씨앗이 튀어 나왔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게이트를 향했다.
“……!”
바란씨는 당혹하며 캔으로 달려갔다. 그가 캔을 뒤집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가위로 캔을 잘라봤지만 민들레 씨앗은 없었다. 바란씨의 가설은 깨졌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나그는 뽐내며 말했지만, 곧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바란씨의 얼굴에 놀라움이나 경악을 넘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좌절이었다.
그 이후로 바란씨는 나그와도 나그의 부모와도 논쟁을 하지 않았고, 늘 어두운 얼굴을 했다. 바란씨는 온갖 방법으로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목적론적 법칙 가설을 증명할 뿐이었다. 반년동안 그런 생활을 계속하더니 바란씨는 돌연 사라졌다. 순리 혹은 자의에 의해 게이트를 향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바란씨의 집도 순리에 의해 해체되더니, 어느 날 마지막 흔적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바란씨의 부재가 나그는 쓸쓸했고 그 이상으로 슬펐다. 나그는 기계론적 가설이 틀렸을 때, 바란씨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만약 바란씨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해서 그런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 없었다. 나그는 바란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분명한 진실이 바란씨를 잃은 것보다 괴로웠다.


나그는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문의 존재를 느꼈다. 문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너머가 보였지만 인식할 수 없었다. 문이 존재하는 탓이었다.
문을 넘으면 돌아올 수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있는 것은 의문뿐이었다.
이 안에는 뭐가 있을까? 생계에서 사계로 오는 것처럼 다른 어디로 가는 걸까? 신이 없다면 어떨까? 신이 있다면? 신이 자신을 구원하는 걸까?
나그는 발을 내딛었다. 순간 그는 문 너머에 들어와 있었다. 그곳은 광대한 원통형의 공간이었다. 천문학적으로 거대했기에 인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벽은 제대로 있었고, 문은 없었다. 죽은 이가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문을 넘은 이는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한발자국 앞에 거대한 나락이 있었다. 나그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함을, 그것이 진정한 죽음임을 이해했다. 나락에서 희미한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천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음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그는 허리를 숙여 나락 아래를 들여다봤다. 그곳에 죽음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분쇄기였다. 나락의 중심에는 거대한 축이 있었고, 축을 중심으로 날개들이 상대론적 속도로 돌고 있었다. 벽과의 틈은 전혀 없었다. 이곳에 떨어진 것은 확실히 분쇄될 터였다.
이 훌륭한 장치는 명백히 인위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신뿐이었다. 신은 인간의 종말에 그들을 폐기처분하는 분쇄기를 내밀고, 그곳에 스스로 뛰어들게 한다. 신의 구원을 믿는 부모가 게이트를 넘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바란씨는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나그는 드디어 바란씨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대한 슬픔과 기쁨에 오열하며, 나그는 나락으로 뛰어내렸다.

olib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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