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배달의 기수, 강필중

2011.11.17 21:3511.17


1.

그 날은 유난히 일이 적어서, 택배기사 강필중씨는 평소보다 일찍 본래 담당 구역을 다 돌고 부탁받은 잔무에 착수할 수 있었다. 아내가 아프다며 조퇴한 동료기사 박씨가 담당하는 택배들이었다. 갑작스런 부탁에 터미널까지 돌아가서 상차까지 끝낸 짐들을 도로 옮겨 싣느라 대낮부터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른다. 그는 땀을 닦으며 무심코 핸드폰을 열고 첫 택배 수취인의 전화번호를 찍어 넣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작을 멈췄다. 핸드폰 액정에 새겨진 번호의 모양새가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눈에 익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필중씨는 머지않아 해답을 찾아냈는데, 그 해답이란 것이 전혀 엉뚱한 기억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자동차에 올라타는 일도 잊은 채 잠시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트럭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6년 전에 헤어진 마지막 애인의 전화번호였다.
사실 강필중씨도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모를 우연을 막기 위해 그는 되도록 그녀와 마주칠 지도 모르는 동네 인근에는 발을 붙이지 않았다. 처음엔 몇몇 특정 동네만 피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특별한 땅에 서린 추억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사람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6년간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옮겼으며 직장을 잡았다. 이따금 원치 않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거나 주변에서 전해들을 때마다 서울에는 강필중씨가 발 디딜 수 없는 땅이 늘어갔다. 그저 버스나 전철 창밖에 그려진 풍경, 금지된 땅.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따금 피치 못하게 금지된 땅에 들어서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단 한 모금 들이쉰 공기에서도 행복하거나 씁쓸했던 추억들이 바이러스처럼 자라나 온 몸을 파고들었다. 이별의 기억과 맞물려 기괴하게 오염되고 변형된 추억들. 그렇게 오염된 추억과 다시 마주한 날이면, 강필중씨는 몇 날이 지나도록 갖은 후회와 원망에 사로잡힌 채 좀처럼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이었다. 오염된 추억을 회피하는 일은 흡사 급격히 번지는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는 작업과도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망령에서 안전한 곳은 점점 줄어들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것도 없이 결근한 동료가 담당하는 동네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도 안전지역이었던 것이다.
강필중씨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언젠가는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됐든,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은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저 지워버려야만 하는 기억, 돌이킬 수 없는 심리적 내상일 뿐이었다.
택배 수신처에는 그녀의 이름 대신 ○○대학교 부속 연구소 이름만 적혀 있었다. 발신처는 외국이었다. 아마도 연구소 일로 발송된 물건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이곳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처음 헤어졌던 날, 강필중씨도 당장 전화번호부터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미련이 그를 붙잡았다. 결국 핸드폰이 네 번 바뀔 동안 번호만은 바뀌지 않은 채, 헤어졌던 그 날 그대로 남게 되었다. 과연 그녀는 어땠을까. 당장 전화만 걸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과거의 흔적이 문득 강필중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6년간 연애했다. 하지만 알고 지낸 것은 훨씬 오래된 일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단순한 친구와 엄밀한 애인의 경계는 다가올 스무 살의 또렷한 정의만큼 분명하지 못했다. 강필중씨는 그저 고 1인지, 고 2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어느 해의 가을에 그 경계가 무너졌다고만 기억한다. 때문에 그녀가 첫 키스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그렇게 어중간하게 대답하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실망할 만한 대답을 들은 그녀는 그렇다면 그냥 지금 하는 걸 첫 키스로 삼자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재수생, 그녀가 의대 초년생이었던 해, 어느 초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강필중씨는 이 날 낮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그녀의 어머니를 업고 병원까지 전력으로 달렸던 참이다. 덕택에 그녀의 어머니는 살아났고, 그들은 눈물과 환희와 키스가 섞인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부터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강필중씨는 공부를 싫어했다. 그리고 가난했다. 조금은 멍청하기도 했다. 그저 체력만은 남보다 좋은 편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게 합쳐졌으니, 대낮부터 술 먹다가 집에 돌아오던 재수생이 장보고 돌아오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쓰러지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던 탓에 무려 십오 분 동안 그 사람을 업고 병원까지 달려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어머니는 정신을 차린 뒤 강필중씨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도, 강필중씨 본인도 둘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여자의 집안은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넓은 자기 집에 지내며, 살림도 남부럽지 않은 편이었다. 반면 강필중씨는 여자의 집 반의 반 칸도 못되는 월세집에 살고 있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운 채 강필중씨를 향해 ‘요즘 보기 드문 청년’ 이라 말해 줄 때, 그 따뜻한 말과 온화한 미소 한구석에는 강필중씨가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벽의 굳건함을 느낄 때마다, 강필중씨는 필시 자신의 연애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짐작이 들어맞아 실제로 그들이 오래 가지 못했다면, 연애 이후의 상처도 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하게만 새겨졌을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너무 오래갔다는 점이다. 그들은 동네에서 같이 자라며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였던 만큼, 사귀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돌아설 일이 없었다. 서로를 너무나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연애의 진행에 방해가 된 적도 있었지만, 약간의 행운이 함께한 덕택에 결과적으로는 관계를 더 깊은 곳까지 진행시키는 데에 촉매가 되어 주었다. 둘의 사이에 방해로 작용했던 것은, 여자가 학교를 다니며 점점 바빠지는 동안 남자는 삼수까지 실패한 후에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해 버렸다는 것 정도였다. 곧 강필중씨는 입대해야 했고 여자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학업이 너무 바빠서 남자나 만나고 다닐 시간도 없다고 했다. 강필중씨는 안심하고 입대했다. 그리고 전역할 즈음에는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세워 놓은 굳건한 벽도 무너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강필중씨가 미처 몰랐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벽은 그녀의 어머니가 홀로 세워놓은 옹벽 따위가 아니라 보다 넓은 세상의 수상한 질서에 의해 세워진 장벽이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바쁜 학업이 이어지는 학교 울타리 안에도 여자가 만나고 다닐 남자는 수두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는 물론 강필중씨보다 멋지고, 똑똑하고, 돈이 많은데다가, 강필중씨를 방해하는 장벽을 굳이 부술 필요가 없는 사람도 많았다. 남은 것은? 그녀의 마음뿐이었다. 그것이 이들의 연애를 6년이나 지속시킨 유일한 동력이었다. 다만 그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동정이었는지, 아니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는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미안하다고만 했다. 속여 와서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그건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고, 강필중씨는 생각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여자는 그저 다른 남자에게 떠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강필중씨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새로운 남자가 강필중씨의 오랜 이름 중 하나를 가져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여자의 어머니가 강필중씨의 등에 업혀 입원했을 때 수술을 집도한 의사였다. 그래서 여자의 어머니는 그를 ‘생명의 은인’ 이라고 불렀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이후로도 두세 차례 수술을 더 해야 했고, 그 남자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수술을 집도했다. 그리고 여자의 어머니는 건강해졌다. 그가 정말로 실력 있는 사람이란 증거였다. 그랬으니, 결국에는 강필중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바닥에 실신한 사람을 업고 십오 분간 뛸 수 있는 능력이 그 사람의 배를 열고 아픈 부위를 꿰맬 수 있는 능력보다 나을 게 없다 치자. 하지만 모자랄 건 또 뭐란 말인가?
어떻게 보자면 강필중씨를 괴롭힌 것은 똑같은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너무나도 달랐다는 점 보다는, 오히려 헤어지던 날 여자가 했던 말들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부연설명도 없이 야속한 상처로 남은 말이란 늘 무가치한 억측을 낳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 아냐. 그 사람 만난 지 오래됐어.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을까, 아마도 말실수였을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강필중은 따져 물었다. 군대 있을 때? 입대했을 때? 삼수했을 때? 이어지는 채근에도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무수한 계절의 맥들을 짚어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던 그는 결국 양보할 수 없는 지점과 마주했다.

그 날 병원에서?

그렇게 마지막이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2.

결국 강필중씨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그는 택배를 트럭 깊숙한 곳에 밀어넣고 다른 지역만 돌아다니다가 퇴근해 버렸다. 짐을 옮겨 실을 때 따로 바코드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아직 담당 택배기사로는 자신이 아니라 동료 박씨가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늦어지더라도 곧바로 확인전화가 걸려 오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 강필중씨는 내일 출근하거든 동료에게 택배를 반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연이 없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납득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씨는 다음날 아침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물류터미널 행정실을 통해 알아보니 아내가 많이 위독해져서 병원에 입원한데다가 간호하던 동료 본인까지도 몸이 안 좋아져서 생각보다 오래 쉬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어제도 필중 씨가 대신해 주셨죠? 죄송하지만 오늘도 좀 부탁드릴게요. 수당은 계산해 둘게요. 행정실 여직원의 부탁에 도리질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강필중씨는 핸드폰에 찍힌 번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락해도 괜찮을까, 목소리를 들어도 견딜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또 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두서없이 깨어난 오래된 기억들은 그의 현실을 타고 넘어 꿈결까지 지옥으로 만들 기세였다. 강필중씨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회사에 반납하면 다른 기사가 맡아 가기라도 하련만, 괴로워하면서도 고집스레 택배와 전화번호를 쥐고 있는 그의 마음도 참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뉴스는 서울 시내에 퍼지기 시작한 괴질 소식으로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강필중씨는 상차작업을 하러 영업소 물류터미널에 도착해서야 괴질 소식을 접했는데, 사람들이 박씨의 아내와 박씨가 그 괴질에 감염됐다며 수군거렸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상차 작업을 잠시 미루고 사무실에 모여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봤다.
뉴스는 괴질의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감염 후 24시간동안 고열과 급성탈수증 등 신경이상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이성을 잃고 일종의 환각상태에 빠져서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급격히 증가하는데, 이 공격성이 일시적으로 인간의 근력을 극한까지 발휘시킬 만큼 맹목적이기 때문에 환자 본인 이외에도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감염은 환자의 타액이나 혈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며, 당국이 초기 대응과 격리에 실패한 탓에 서울 거리 곳곳에 감염자들이 출몰해 행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속보도 뒤따랐다.
생각보다 워낙 험악한 소식에 강필중씨와 동료들은 넋을 놓고 사무실에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오늘 일 쉬어야 되는 거 아냐?
에이, 위험하면 경찰이 통제를 하겠지. 아직 그런 소린 없잖아.
아니, 객관적으로 위험해 보이잖아? 정양, 거 소장님한테 말 좀 해봐요.
소장님 아직 출근 안하셨어요. 집에 전화할까요? 화내실 텐데. 성질 알잖아요.
나 참. 아니 배달할려구 돌아다니다가 덥석 잡혀서 물리면 어쩌라고. 박씨나 박씨 와이프도 물렸다는 거 아녀? 저, 저 봐. 지금 저 동네가 박씨 담당 구역이잖아. 저 동네가 위험하다는 거지, 지금? 오늘 저 동네 가는 기사분 누구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어수선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쏠렸다.

강씨 아녀?

강필중씨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 네. 그렇네요. 그러는 동안에도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불길한 소식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간밤의 목격담에 따르면 감염자들은 떼를 지어 지나가는 시민을 습격했다고 하며… 사람을 습격해 죽인 후 그 시체를 뜯어먹는 엽기적인 광경도… 경찰청은 곧 소문의 진위를 판단하는 한편 전염병관리본부와 협조 하에 국가 재난상황 선포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동료들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강씨, 오늘은 쉬지? 동네가 저렇다는데 저길 어떻게 가…

강필중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럴 수 없죠. 다 헛소문일 수도 있고 경찰도 재난상황 선포를 고려한다고만 했지 진짜 선포한다고는 안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각자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뉴스는 호들갑떠는 게 할 일이고, 저는 물건 배달하는 게 할 일이고.
대충 이런 말이 생각날 수도 있었으련만, 정작 강필중씨가 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야겠네요. 걱정되는 사람이 있어서…

물론 동료들은 강필중씨가 박씨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빈 차에 물건도 싣지 않고 너무나도 허겁지겁 출발하는 강필중씨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다른 기사들은 섣불리 출발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뉴스를 주시하며 임시 휴무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갑론을박이 길어졌지만 소장의 출근이 너무 늦어지자, 결국 불안해진 기사들은 다 같이 퇴근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행정계 여직원 정양은 소장님이 화낼 거라며 불안해했지만 상사의 짜증보다 생명의 위협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강필중을 찾는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병원에 입원한 박 씨였다. 박 씨는 걱정스레 안부를 묻는 정양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내 앞으로 배정된 택배는 모두 배달된 거냐고 따져 물었다. 정양은 잠시 기록을 살펴보고는 다른 기사님들이 다 가지고 갔으니, 늦어도 어제까지는 배달이 다 되지 않았겠냐고 대답했다. 박 씨는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태도가 전에 없이 무례한데다가 퍽이나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몹시 나빠진 정양은 이 전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잠시 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조금 어려보이는 여자가 물류터미널 행정계로 들이닥쳤다. 두 사람 모두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눈동자는 터져버릴 것처럼 충혈 되어 있었다. 심상찮은 기색에 정양의 이맛살이 찌그러졌다.
두 사람 중 남자가 먼저 여직원을 발견하고 성큼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의사들이 입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가운 곳곳에 핏자국과 찌든 때가 가득한 걸로 봐서는 며칠간 응급실 당직이라도 마치고 온 것 같았다. 그것도 대형 교통사고 환자들이 들이닥친 응급실. 조금은 주눅 든 정양이 먼저 용건을 묻기도 전에 남자가 다짜고짜 말했다.

물건, 물건 찾으러 왔어요. 왜 이렇게 늦어요?
아, 배송지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여기서 찾으시면 안 되는데… 알겠습니다. 받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대학부속 특수전염연구소입니다. 빨리요. 급합니다.
잠시 만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 담당 기사분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나도 알아요. 내가 그 사람 담당했던 의사입니다. 다른 기사분이 맡으신 거 맞아요? 그 사람 누구에요. 배달 완료 확인했어요?
네… 어제까지 들어온 물건은 다른 기사 분들이 나눠서 전부 배송 완료했는데… 어머. 잠시 만요. ○○대학교면 주소가 어떻게 되죠? 기사 분들이 자기 원래 담당구역이 아니라 실수가 있었던 거 같아요. 잠시만요. 확인해 드릴게요.

남자는 이마에 손을 짚고 빠르게 주소를 불렀다. 그러는 사이 뒤쪽에서 숨을 고른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컴퓨터가 검색에 들어간 사이 여직원은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은 왜 멀쩡한 전화를 두고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얼마나 급한 사정이기에?

그런데 그 분 담당이세요? 지금 어떤가요? 많이 안 좋으세요?
죽었어요.
네?
죽었다고요. 뉴스도 안 봐요?
죽다뇨. 제가 아까 전화도 받았는데…
당장 텔레비전 켜세요. 라디오를 키던가. 머지않아 서울에 소개령 떨어질 거에요. 소개령 떨어지기 전에 폭탄이 먼저 떨어질 수도 있고. 좌우간 살고 싶으면 아무거나 듣고 있으세요. 아뇨아뇨. 지금은 일단 앉아요. 담당 기사님 누구냐니깐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TV를 켜려던 여직원은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불러드릴게요. 이름은 강필중이구요, 번호는…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이름이 뭐라구요?
…강필중이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야?
…설마, 아닐 거에요. 죄송합니다. 번호 계속 불러주세요.

하지만 이윽고 전화번호를 다 받아 적은 여자의 얼굴이 너무나 심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온 남자뿐만 아니라 이 여자를 생전 처음 보는 행정계 여직원까지도 강필중씨와 이 여자가 보통 관계가 아니란 것을 짐작할 만 했다. 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오지 않은 남자 대신 번호를 받아 자신의 핸드폰에 찍었으면서도 막상 직접 전화를 걸지 못했다. 남자가 눈을 힐끔 돌려 그녀의 핸드폰을 훔쳐보았다. 여직원이 방금 불러준 번호 아래쪽으로 방금 불러준 택배기사의 이름이 함께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번호와 이름을 함께 받아 쓴 것 같지는 않았고, 아무래도 이미 저장되어 있는 번호란 뜻이었다.

누군데?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3.

○○대학부속 특수전염연구소는 서울을 난장판으로 만든 괴질의 정체를 처음으로 밝혀낸 곳이다. 하지만 몇몇 시민들은 특수전염연구소가 그 기원이나 유행 시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의심할만한 것이, 최초형태의 백신 혈청은 서울에서 괴질의 첫 감염자가 발견되던 그 날에 이미 서울시내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도 특수전염연구소는 이 백신이 언제 개발되었으며, 연구소가 언제 괴질 유행을 예상하고 백신 연구에 착수했는지, 또 배송에는 어떤 방해가 있었는지 해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합리적인 이유를 두 가지 정도 떠올릴 수 있는데, 우선은 괴질 백신 연구가 애초에 연구소 자체 예산으로 진행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연구소가 풍비박산난 지금은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고, 다음은 의혹을 밝혀내야 할 사람들이 괴질 유행의 첫 단계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특수전염연구소 근처에는 ○○대학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서울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괴질 감염자들이 발견됐지만, 무슨 우연이었는지 이 병원만큼 많은 수가 한꺼번에 발견된 곳은 없었다. 오후 들어 심상치 않은 전염속도에 정신을 차린 특수전염연구소장과 병원장이 의료인력 대피와 병원 폐쇄를 지시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은 뒤였다. 감염자들은 격벽이 다 설치되기 전에 병원 전체를 휩쓸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특수전염연구소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시작해 파도처럼 서울 시내를 휩쓴 감염자들의 최초 타겟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인근 병동에 있던 의료관계자나 환자들의 경우 사전 대피 인원을 제외하고도 상당수가 살아남았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특수전염연구소 인력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도 의혹의 근거가 될 만하다. 이 건물 안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이라면 감염자들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혹은 감염자들을 뒤에 둔 채로 비겁하게 도망갈 수는 없다는 책임감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구원 두 명은 그 시각, 서울 외곽의 한 물류터미널에 있었다. 배송이 한 없이 지연되던 최초 형태의 백신 혈청을 직접 찾으러 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의도치 않은 사전대피에 성공했지만, 정작 그 시각에 그들이 찾는 백신 혈청은 위험지대 한복판에 들어가 있었다. 강필중씨의 택배트럭 짐칸 한구석에.
물류터미널에서 강필중씨가 출발하던 때만 하더라도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경찰도 지역 경계에 저지선을 설정하기 이전이었고 수방사도 아직 작전을 개시하지 않아서, 강필중씨의 택배트럭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차량도 자유롭게 오염지역과 안전지역을 오갈 수 있었다. 다만 강필중씨는 반대편에서 시내를 빠져나오는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문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쉴 새 없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차량 통행이 원활하지 못하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자가용 운전을 자제하시고, 침착하게 현재 위치에서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당국의 상황 발표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 방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방송 지시대로 대처한 사람은 거의 다 죽거나 감염됐으니까.
미친 듯 차를 몰면서도 강필중씨는 정작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12년 전, 사람을 업고 미친 듯이 뛰어갔던 병원도 같은 곳이었다. 그 때도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숨을 돌린 후에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에게 그녀의 이름을 말해준 것이 전부였다. 응급처치 후 정신을 차린 여자의 어머니는 강필중씨보다 의사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강필중이란 사람이 당신을 업고 십오 분 간 뛰었노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수술도 끝나고 마취도 풀려 커피 한잔을 마실 여유도 되찾은 후의 일이었다. 혹시나 그 때, 의사보다 강필중씨의 얼굴을 먼저 봤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강필중씨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옳은 일은 옳은 일 그대로 보답 받는 것이지, 그걸 전하는 방식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누군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였더라?
아마도 그녀였을 것이다.
라디오 안내방송에서 특이한 환자를 목격하면 특수전염연구소로 제보해 달라며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있었다. 강필중씨는 그 번호로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통화중이었고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신호조차 제대로 가지 않았다. 시내 통화량이 폭증한 탓이었다.
강필중씨는 결국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한 채 연구소에 이르렀다. 트럭 운전대를 잡고 목을 내밀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본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깨진 창문, 부서진 난간, 곳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몸을 떨고 있는 사람들. 차창이 부서지거나 보닛이 구부러진 차들이 주차장 곳곳에 제멋대로 멈춰 있었다. 어디선가 긴 경적소리가 불안하게 울려퍼졌다. 누군가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움직이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제일 정면에 높다랗게 보이는 병원에선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형체들이 뛰거나 기거나 걸어 다니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감염자들이었다. 싸늘한 감각이 강필중씨의 정수리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여기 누가 있건, 그가 제정신으로 살아있을 확률은 별로 높지 않아 보였다.
특수전염연구소를 찾아가는 동안, 최대한 불필요한 주의를 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차피 이곳에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차량은 강필중씨가 모는 택배차량 한 대 뿐이었다.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세차게 뛰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튕겨 날아갈 기세였다. 두 손으로 기도하듯 운전대를 부여잡은 강필중씨는 울상을 지은 채 이정표를 찾아 눈을 굴렸다. 연구소는 낮고 넓은 캠퍼스 교차로를 돌고 돌아, 참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강필중씨가 도착했을 때 연구소는, 이미 감염자들의 물결이 지나간 뒤였다. 살아있는 자는 모두 죽고 감염자들은 거의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연구소 건물을 바라봤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와 절망과 무력감이 강필중씨를 휘감았다. 그녀가 저 건물 안에 있을지, 있다 하더라도 제정신으로 살아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다리를 떨고 이를 딱딱거리고 운전대를 두드리며 한참동안 먼발치서 연구소를 바라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래, 전화를, 걸자. 그리고 여태까지 주저한 자신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번호를 향해 통화를 시도했다. 물론, 이미 무선전화망이 폭주한 탓에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응답을 기다리던 강필중씨는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차에서 내려 조심스레 연구소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 같은 시간에, 물류터미널에서 강필중씨의 번호를 넘겨받은 연구원들도 연구소로 돌아가는 동시에 그를 향해 맹렬하게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쨌든 양 쪽의 간절한 통화가 모두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던 셈이다. 시내에서 빠져나오는 내내 극심한 교통체증에 발목을 잡혔던 그들은 시내에 들어갈 때에는 경찰과 군의 저지를 받아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강필중씨보다 한참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특수전염연구소 피습 소식을 접한 군과 경찰은 감염자 전원 사살을 원칙으로 삼고 오염구역 초토화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전 개시와 동시에 경찰 저지선 내부에 있는 인명 보장을 중지한다는 뜻이었다. 저지선에서 연구소장과 통화를 시도하던 두 연구원은 곧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에 이르는 인명이 자신들의 지식과 강필중씨가 가지고 있는 택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운전대를 잡고 경찰 저지선을 강행 돌파하기로 했다. 길을 가로막은 바리케이트를 향해 시속 팔십 킬로미터로 질주한 연구원들의 자동차는 앞 범퍼가 찌그러지고 유리창에 금이 갔지만, 당장 달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자동차보다 더 큰 손상을 입은 것처럼 보인 것은 오히려 두 연구원의 심리상태였다. 당장 급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연구원일 뿐 액션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는 뒷자리에서 얼굴을 감싸 쥔 채 말을 잊었고, 새파래진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는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다.

좀 더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까지 해야 돼?

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 사람을 꼭 만나야 돼요.
그래, 당장 사람 목숨이 많이 걸려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혈청은 다시 만들 수도 있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리고 여기 풍경 좀 보라고. 병원 감염자들이 다 탈출한 거야. 그게 얼마나 되는지 알잖아? 이미 늦었어. 내 생각엔 그냥 격리시키고 초토화를 시작하는 편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그게…

대답할 말이 막막해진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신호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잠깐만요. 신호가 가요!
세상에, 진짜? 진짜지? 만세…! 잠깐. 이거 왜 이러지? 어…?
조용히 좀 해 봐요. 아마 격리지역에 사람이 많이 줄거나, 조치가 취해졌을 거예요. 음질이 안 좋긴 한데 신호는 분명히 가고 있으니까… 아뇨. 계속 움직여도 괜찮아요. 차는 왜 세우세요? 저기 저 사람들 안 보여요? 감염자들 같은데요? 시동 끈 거에요 지금?
…내가 세운 게 아냐. 저절로 멈춘 거야. 시동이 안 걸려.

한편 적막한 연구소 내부를 숨죽인 채 움직이던 강필중씨는 전화 진동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너무나 익숙한 번호가 액정에 떠 있었다. 세상에. 혼자 중얼거린 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6년 만에 들려주는 목소리.

여보…세요?

대답은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강필중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꼬박 6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공연히 서둘렀다가 후회할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급박하게 몰아쉬는 숨소리와 그 숨을 틀어막는 감정의 격류가 전화기 너머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강필중씨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가 분명한 단어로 그 감정을 표현하기 이전까지는.

필중아. 살려줘…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느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거기 어딘데? 너 지금 어디 있는 건데?
지금 차 안이야. 너한테 가는 길에 차가 고장 났는데, 감염자들이 주변에 많아… 아니, 아니지. 필중아? 내 말 들려? 네가 가진 택배 있지? 그거 아직 가지고 있어? 필중아!

강필중씨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연구소 안에 아직 남아있던 감염자 한 명이 강필중씨를 뒤에서 덮쳤던 것이다. 감염자는 몸무게를 실어 강필중씨를 바닥에 쓰러트린 뒤 놀랄만한 힘으로 뒷덜미를 짓누르더니 고개를 숙여 맨살을 물어뜯었다. 강필중씨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전화기가 바닥에 뒹구는 소음에 깜짝 놀란 여자는 곧이어 둔탁한 비명이 먼발치서 들려오자 그만 전화기를 붙잡고 악다구니를 쓰고 말았다.

필중아아아악!

지금이라면 누구도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다. 감염자들은 큰 소리에 민감하다는 게 밝혀졌으니까.





4.

어쨌건, 결과적으로 그들은 수십만의 생명을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거기에는 다시 약간씩의 행운이 필요했다.
강필중씨에게 작용한 행운은 인근에 다른 감염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감염자가 근력을 극한까지 발휘한다고는 하지만 강필중씨도 힘으로는 누구에게 뒤지는 일이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격투 끝에 자신을 습격한 감염자를 제압하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도 한 번 연결된 통화는 그 때까지 두절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감염자에게 물어뜯기고 감염자의 피도 온몸에 뒤집어써야 했다. 하지만 강필중씨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두 연구원에게 작용한 행운은 경찰 저지선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점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열 명이 넘는 감염자에게 습격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상황을 파악하고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다만 남자 연구원은 여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감염자들과 격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감염자들의 피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가까스로 구조된 직후에도 넋이 나간 표정만 짓고 있었다.
여자는 전화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강필중과 통화를 시도했다. 당장 그가 가지고 있는 백신 혈청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둘러 연구소를 빠져나온 강필중씨는 곧 택배 트럭을 몰고 경찰저지선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임상 덕택에, 감염 1시간 이내에 백신을 접종하게 되면 성공적으로 항체가 형성된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었다. 슬프지만, 이와 함께 증명된 것은 감염 20시간 이후에는 백신을 접종해도 항체가 형성되지 않으며, 무슨 수를 써도 괴질의 진행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비극은 일정 부분, 강필중씨의 탓이기도 하다. 그는 통화에서 자신이 감염자에게 상처를 입었다거나 그 피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 의료진 입장에서는 두 명 분의 접종을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한 사람도 제대로 살리지 못할 확률이 높았고, 시간도 부족했다. 뜻하지 않게 선택권을 쥐게 된 여자는 뒤늦게 고민에 빠졌지만, 강필중씨는 이미 할 일을 다 끝내버린 반면 남자 연구원은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옛 애인과 현재 애인이라는 격차만큼이나, 두 목숨의 차이는 분명했다.
사실 그녀는 강필중씨를 다시 만나거든 꼭 끌어안아 줄 참이었다. 한 사람을 구하고 이어서 수십만을 구할 공헌을 세운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보상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어머니를 구했을 때에도, 그는 비슷한 형태로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에 대한 보상이었던 걸까? 그런 걸 따지는 게 중요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사소한 감흥으로 시작되더라도, 놀랄 만큼 순수한 열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게 사랑임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피투성이가 된 강필중씨가 트럭 문을 열고 무너질 듯 웃으며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따위 감흥은 미처 피어오르기도 전에 순수한 공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강필중씨는 영문을 모른 채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신속히 격리되었다. 그리고 감염이 더 진행되어 이성을 잃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전화통화만이 몇 차례 진행되었는데, 이때의 기록에 따르면 강필중씨는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왜 갇혀있는 거야? 내가 감염된 거야?
바보야. 물렸단 얘기, 왜 안했어. 일단은 거기 있어야 돼. 그래도 네가 가져온 백신이 있으니까, 금방 고칠 수 있어. 조금만 참고 있어. 알았지?
그게 중요한 거였구나… 금방 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래. 네가 구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 적어도 수십만 명이야. 백신이 대량생산되기 시작되면 초토화 작전도 중지되거든. 만약에… 그걸 다시 생산 하려면 몇 달은 더 필요했을걸.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네가 세상을 구했어. 이 바깥에선 전부 네 얘기뿐이야…
알았어. 내가 하긴 뭘 했다고… 만나고 싶다.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래. 곧 봐.
보고 싶었어. 넌 아니야?
…나도.
잘 안 들려. 뭐라고?
…….

두 연구원은 오늘날까지 괴질 백신과 치료제 개발자로 유명하다. 두 사람에게는 세상을 구했다는 수식어도 곧잘 붙는 편이다. 완전히 붕괴된 특수전염연구소를 대신해 괴질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그 두 사람 뿐이었기 때문이다. 최초 형태 백신 접종을 통해 최초 항체를 갖게 된 남자 연구원은 자신의 혈청 샘플을 바탕으로 스무 시간 만에 백신을 개발해 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결국 이 백신이 세상을 구하고야 만다.
물론 이 백신의 최초 접종자였으며 최초의 실패이기도 했던 강필중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택배기사에게 세상을 구했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조금 낯설지 모른다. 애초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배송지연도 사실은 그가 자초한 것이었으니까, 강필중씨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그가 세상을 구했다는 말에는 고개를 가로젓는 경우가 많다.
감염진행 이후 이성을 잃은 강필중씨는 극도의 폭력성을 보인 끝에 이틀 만에 사살되었다. 그가 사살되던 날, 그 대신 목숨을 건지고 세상을 구한 남자는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격벽 바깥에서 현장을 보고 있었다. 두 남자는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강필중씨는 이미 이성을 잃었으니까, 한없이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가까운 듯 멀리 있는 저 의사선생이, 어쩌면 이 상황이,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구했는지도 모를 택배기사 강필중은 끝내 넘지 못한 벽 안에서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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