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회한의 궁정

2011.11.15 22:1711.15

  사내는 고개를 들어서 사람의 말로는 이름 지을 수 없는 형상과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는 색채를 응시하고,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 뒤,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곳은 시간의 가장자리, 지나가버린 역사의 잔영, 침묵하는 기억, 넘어가버린 책장, 잊혀진 묘비였다. 수많은 이들이 이 곳을 향해 마지막 여정을 떠났건만 돌아온 이는 없었기에 그들이 원하던 것에 도달했는지, 혹은 탐색에 실패하고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곳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설이라고 할 수 없고, 이 곳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였기 때문에 신화라고 할 수 없었다. 되돌아 나오는 발걸음 없이도 그 문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 이따금 찾아드는 용감하거나 혹은 무모한 방문객들을 언제까지고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다리면서.
   그러나 사내로써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렇다면 그는 망설이기보다는 기꺼이 그것을 택하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사내는 이 곳을 찾은 다른 모든 여행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행해온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려놓고, 깨져버린 것들을 다시 아물게 하고, 결코 그치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 말고는 아무도 대신 짊어질 수도 없고 아무도 더 이상 그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말해줄 수도 없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작열하는 생으로부터 돌아서 고요한 죽음과 같은 평온을 얻기 위해서, 사내는 이제껏 자기 자신이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외로운 구도자처럼 위태롭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갔다.
  문 안 쪽은 끝없는 주랑이 펼쳐져 있었고, 모든 방문객-구도자-청원자들은 그가 원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 시험이란 단순히 중간에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고 복도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방문객들은 매 발걸음마다 가장 엄중한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이 시험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오직 발을 내딛는 이만이 알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이것이 회한의 궁정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죽을 운명을 지닌 채 이 곳에 이른 모든 인간은 그가 이제까지 저질러온 모든 행위의 결과들을, 그 자신의 역사이자 자신을 이루어온 모든 것을, 자신의 죄과와 그로 인한 고통과 가책을 걸음마다 다시 직면하게 되어 있었고, 그 모든 광경을 스스로를 증인 삼아 지켜본 후에야 알현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면 회한의 궁정에 죄와 무죄를 판단하는 어떤 신적인 시각을 지닌 심판관이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곳을 찾아온 이들은 오직 그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기에 그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불러일으킨 장면들만을 다시 볼 수 있었으므로, 청원자의 심판관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자, 이제 사내가 복도를 나아가는 것을 보라. 그를 사로잡은 환영은 오직 그의 기억 안에서만 생으로 돌아오기에 우리는 그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종이 위를 달리는 펜에게서 약간의 특권을 빌려, 여기에 지금 그를 전율케하고, 심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함을 지르게 하고, 곧바로 떨어져 내리는 피처럼 눈물 흘리게 하는 광경을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보면서 사내가 내지르는 절규가 주랑을 따라 깊숙한 곳까지 울려퍼지고, 그가 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가린 채 헐떡이는 광경을 그의 기억, 행위, 과거의 환영, 망령, 죄들이 둘러서서 내려다보는 것을 본다면 독자들이여, 그에게 자비심을 갖도록 하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오로지 그 자신만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 역시 모두 자신의 참회와 고백이 미치지 않는 더 깊숙한 곳에 흡사 궁창의 수원과도 같이 도사리고 있다가 회한의 궁정에서 비로소 다시 마주하게 되면, 감히 고개를 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독자들은, 아마 아직은 회한의 궁정을 전설이나 신화로만 여기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 육중한 문은 잠자코 그 자리에 서서 언젠가 자신-그 문, 또는 자기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만 말해 두겠다.
  그러나 사내는 입술을 짓씹고, 가슴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영원한 벽을 내리치면서도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멎지 않고, 매번 들이킬 때마다 마지막 호흡처럼 거칠게 드나드는 숨도 멈추지 않으며, 탄식도 한숨도 비통도 그 주위를 두터이 감싸고 돌아 질리지도 않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 배우처럼 그의 심장을 찌르고, 찌르고, 다시 단검을 들어 올리고 보이지 않는 관중을 향해 긴 독백을 읊은 뒤 다시 찌른다. 그 자신의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오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닥에 길게 쓰러진 사내 주위에 엄숙히 늘어서 합창하는 것이다. 우리를 잊지 말라, 그대로 하여금 이곳까지 이르게 한 우리를 잊지 말라,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서 우리들을 다시 목도해야 하는지, 어째서 살해당한 이는 또다시 살해당하고 눈물 흘리는 이는 또다시 눈물 흘려야 하는지 잊지 말라고. 그러면 사내는 다시 시체 같은 몸을 일으켜 한 걸음을 내딛고는, 엄습해오는 적의 희미한 그림자에 둘러싸여 난자당하고 바닥에 쓰러진다. 고통은 영겁, 죽음은 찰나.
  하지만 이 일인극에 관해서 계속 써내려가는 것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미 지루한 일일 것이다. 벌써 몸을 꼬고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연기는 어느 세월에 끝나 예의바르게 갈채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무대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가장극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자신은 아직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희곡은 재상연되기 위한 것이고, 영원한 것은 지금 열연을 펼치는 배우도 펜을 달리는 작가도 아니요 되풀이되는 이야기뿐인 법이다. 그러므로 독자 제군들이 쉽게 싫증내든 혹은 성실해지려 애쓰든 우리의 관심사는 배우나 작가, 무대나 소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언제나 회한의 궁정을 찾아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떠나온 여행자들이 비극을 다시 펼쳐 보일 터이고(언젠가 여러분 중 누군가도 무대 위에 서게 되리라), 그러니 다만 하나의 배우에 지나지 않는 사내와 한 번의 공연에 불과한 시험보다는 지금 그가 찾아온 회한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영겁과 찰나가 지나가고, 사내는 마침내 알현실에 이르렀다. 그의 뒤를 따라 흩어지지 않는 한숨처럼 지울 수 없는 가책처럼 길게 늘어선 그 자신의 회한들. 끝없는 방의 한 가운데에 거울로 된 옥좌가 놓여 있고, 사내 그 자신이 옥좌에서 일어나 청원자를 내려다보았다. 옥좌의 주위에도 사내 뒤에 늘어선 것과 같은 환영들이 주군을 모시는 가신들처럼 둘러 서 있다. 서로를 응시하는 쌍둥이 같은 영상들.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대는 신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어떤 마법인가, 잊혀진 신비인가, 고대의 정령인가? 그 형상을 몸에 두르고서 나를 조롱하듯, 혹은 동정하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나는 그대 자신이다. 나는 그대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이다. 그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이다. 나는 그대의 그림자이고 반영이고 죄과이다. 그대가 이곳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곳에 앉아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대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방문객들이 이곳에 이르러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처럼.”

사내는 여전히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이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회한에 잠긴 끝에 자신을 있게 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시간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수히 갈라지는 갈림길로 이루어진 영원한 정원에서 다시금 가지 않았던 길의 교차로 앞에 설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판관이여, 잠들지 못하는 밤이자 지워지지 않는 피여, 나 자신이여,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영상이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영원한 정원의 갈림길 가운데에는 다시 그 입구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모든 선택에서마다, 옆을 돌아보면 거기에는 입구로 돌아가는 길이 열려 있다. 항상 그대는 모든 것을 뒤로 돌이킬 수 있고, 세상과 체스를 두면서 그대가 택한 모든 수를 다시 무를 수 있지만, 그 사실은 오직 이곳 회한의 궁정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장소이고, 역사에서 단절되어 있으며 인과가 닫혀 있기 때문에, 이곳은 회전하지 않는 원의 바깥이고 동시에 중심이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의혹에 사로잡힌 듯 눈을 찌푸렸다. 사내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해보고 영상에게 주의 깊게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지- 누구나 회한에 사로잡히고 이곳에 이르러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려고 할 텐데?”

“우주는 다중의 축을 가지고 있고, 굴대들은 서로 살을 겹치지 않은 채로 동시에 회전하며, 그대 역시 그대의 모든 선택과 행위와 인과로 이루어진 궤적을 자아내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고 회한의 궁정에 도달한 이에게는 자신의 운명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윤회전생을 역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우주가 그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응답한다. 물론 지금 그대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과거의 무수한 청원자들 역시 같은 기회를 얻었고, 그 때마다 세계는 이곳을 축으로 회전해왔다.”

  사내는 입을 다물고, 여러 가지를 혼자 생각했다. 영상은 변치 않는 시간처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좋다. 나 또한 이곳에 재귀를 호소하기 위해 왔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되돌이키고, 내 발자취와 내가 내뱉은 말들과 나의 죄를 무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이제 내가 그것이 행해지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 여행자여, 그것 또한 그대의 선택이다. 그대가 세상을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그대 역시 재생되어야만 한다. 우주는 그대를 위해서 다시 뒷걸음질칠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그대가 행해온 모든 것과 그로 인한 모든 결과가 그 대가로 지불되어야만 한다- 그대가 이곳에 이르게 한 그 모든 기억들마저 역시.”

  그 말에 사내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어렸고, 주저하면서 사내는 반문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회한에 잠기게 한 모든 기억들을 잃는다면, 그 갈림길에 다시 이르렀을 때에 내가 무엇을 다시 돌아보고 올바른 선택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곳까지 이르게 한 기억들을 잃고 나면, 내가 그 갈림길로 돌아갔을 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할텐데.”

  영상은 아무 변화도 없이 답했다.

“방문객이여, 그것은 인과를 위한 규칙이다. 우주가 다중의 축을 지닌 채로 모순에 빠지지 않고서 회전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결과가 원인에 간섭한다면 그 모든 연쇄가 깨어지고 가능성과 개연성의 경계가 무너져 우주 밖의 혼돈이 우주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우주는 그대를 위해 다시 회전해 줄 수 있지만, 그 법칙마저 파괴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두 방문자가 다른 기억을 지닌 채로 다른 시점으로 세계를 돌이켰을 때 어떤 일이 생겨날지 생각해보라. 이 회전은 시간의 흐름이 나아가는대로 오직 차례로 일어날 뿐이기에 뒤틀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내는 침묵했고, 숙고했고, 고뇌했다. 영상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인내했다. 그 주위를 둘러선 과거의 환영들은 꼼짝하지 않고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고, 동시에 사내 또한 그 시선을 통해 그들을 그리고 자신을 응시했다.
  영겁과 찰나가 지나가고, 사내는 마침내 선택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좋다. 나는 나의 모든 행위와 그로 인한 모든 결과들을, 이 기억과 이 회오를, 고통과 번뇌를 그대의 손에 붙인다. 이것은 한 때 나에게 속한 것이었으나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요 인과 일체가 본디부터 그대의 것이었으니 이제 그 주인에게 돌아가리라. 나는 나를 부정하는 것을 선택하겠다. 내게 다시 그 때의 그 선택을, 그 교차로를, 회한의 궁정이 내 안에서 자라나기 이전의 시간을 돌려다오.”

  그 말이 떨어지자 한 줄기 전율이 맥동하며 궁정을 꿰뚫고 지나갔고, 둘러서 있던 과거의 환영들은 정지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회한의 궁정 전체가 진동하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한한 주랑의 먼 곳에서 기둥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균열이 벽과 바닥을 따라 달렸다. 사내가 손을 들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먼지와 파편들을 막으려할 때 영상의 목소리가 울렸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대의 모든 것을 대가로, 그대는 그 모든 것을 얻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주는 그대를 위해 회전할 것이고, 회한의 궁정은 시간의 앞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궁정의 천장이 무너지고 그 너머에서 시간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절규했다. 붕괴가 더욱 빨라지면서 윙윙거리며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모든 것이 정지했다가, 다시 쾅 소리가 울리면서 산산이 파열해나갔다.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모든 것이 모든 방향으로 찢겨져 나가며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고 질량은 급속하게 무로 수렴해갔다. 빛 또는 어둠 양자로 자신이 동시에 빨려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사내는 영상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대는 자신이 회한의 궁정을 몇 번째 방문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대는 또다시 이곳에 찾아오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소년은 유난히 큰 달이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밤의 들판의 모습에 매혹된 채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익숙해질 수 없는 배고픔은 다시 꾸르르 소리를 내며 창자 속을 타고 지나갔고, 옆자리에서는 잠시 뒤척대더니 다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얼마 전 영주님의 병사로 징용되어 집을 떠난 형이 보내온 편지를 생각했고, 자신이 이곳에 계속 남아서 무엇을 하게 될지 생각했다. 자신이 이 시간에도 깨어있는 것을 알면 아버지는 다음날 밭 갈 때 또 숨어서 졸 셈이냐며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길 것이다.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다시 한 번 뱃속의 느낌과, 벽에 기댄 보습의 무딘 날과, 그리고 반짝이는 달 아래의 밤을 내려다보면서-
  그리고 소년은 -아마 그는 알지 못하겠지만- 수천번째 해왔던 동작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고, 더 이상 숨소리를 죽이려 애쓰지도 않은 채, 창을 타넘고 담을 기어올라 뛰어내렸다. 몰래 짐을 숨겨둔 비밀장소까지 달음박질쳐가서 달빛 아래 허겁지겁 땅을 파내고, 단검과 동전 몇 푼이 든 꾸러미를 집어든 채 온통 은처럼 환한 들판을 가로질러 뛰었다. 흡사 허공을 붕붕 달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미래와 가능성과 모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하면서, 소년은 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자꾸만 더 빨리 발을 놀리면서 달렸다. 텅 빈 뱃속처럼 몸은 가벼웠고, 소년의 앞에는 끝없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 그가 택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고 그것은 다름아닌 회한의 궁정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소년은 결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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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한 장식적 문체로 써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마는, 어떤 선과 악이 상쇄된다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행위의 결과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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