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열꽃

2011.11.15 00:2211.15

열꽃

붉었던 꽃은 이제는 시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것은 우리 부부가 결혼을 앞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샀던 꽃이었다. 물을 주지 않아도 큰다는 아주 신기한 꽃이라고 해서, 동물이나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라 할지라도 이 꽃이라면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사기였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붉었던 꽃이 지금은 시들어버려 자신의 붉은 빛깔을 잃어버리고 만 것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이해는 갔다. 그때 사면서 꽃을 팔던 사람이 내게 해준 얘기가 있었다. 저 꽃은 연인의 사랑을 먹고 산다고. 그래서 사랑이 식어버리면 꽃도 비실비실 죽어간다고 그러다가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리면 꽃은 죽어버린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무언가를 키우는 걸 싫어하던 아내가 저 꽃을 사달라고 했던 게 아닐까 한다. 저 꽃만 있다면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저 꽃을 사지 않았어야했다. 저 꽃이 시들었다는 것은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니까. 그것을 저 꽃이 대신 증명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아내는 얼마 전 딸을 출산했다. 딸을 출산했는데, 그 딸이 나와 아내를 꼭 닮아 있었다. 그런 딸이 얼마나 예쁘던지, 그런 딸을 낳아준 아내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의아할 뿐이었다. 머리로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몸으로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거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친정집으로 보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최근에 잠자리에서 아주 괴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인지도.
꿈에서 나는 딸아이와 아내와 함께 지금 이 집에서 아주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딸이 누워있는 아기침대로 다가가 딸을 바라보며 딸의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를 쓰다듬다 이내 딸의 목을 내 두 손으로 목을 조른다. 한없이 나약해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내 딸은 그런 나에게 아주 괴로운 표정을 하다가 죽어간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본 아내가 달려와 나를 말려보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내를 밀쳐버리고 딸의 목을 계속 조르는데, 꼭 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불안한 눈동자로 내 주위를 내 손을 바라보고 내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정말로 내 딸을 죽였는지, 정말로 아내를 밀쳐냈는지. 하지만 항상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 손에도 딸아이의 피 같은 걸로 보이는 액체도 묻어있지 않았다. 꿈이었다. 꿈. 정말로 다행스러운 꿈. 만약에 정말로 내가 그런 짓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영원히 속죄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함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그 꿈을 꾸고 나면 내 팔로 내 몸을 항상 껴 앉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다.
오늘도 일어나면서도 그 꿈을 꾸고 내 두 팔로 내 몸을 껴안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그것은 꿈이었다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걷지 않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항상 커튼은 아내의 손으로 걷혔고, 걷힌 커튼 사이로 세상의 빛이 나의 아지트로 들어와 방을 밝혔다. 나는 싫다고 커튼 좀 치라고 말해보았지만, 아내는 안 된다면서 제발 빛 좀 쐬고 밖에도 나가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렇지만 나는 나가는 게 두려웠다. 물론 나도 나가보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현관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현관문의 손잡이도 잡을 수 없었다. 무엇도, 그 무엇도 나를 문 너머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나는 현관문에 서서 눈을 감고 눈물 없는 울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아내는 그런 내 팔을 붙잡으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보려 했지만, 나는 그런 아내의 손을 뿌리치며 완강히 거부했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던 밖의 빛은 눈이 부셔서 내 눈을 가렸고, 나는 그 빛에서 도망치듯 침실로 뛰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내가 그런 내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오빠,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제발 단 한 발작이라도 좋으니까. 현관만 벗어나자. 제발…”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내게 애원했다. 애원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내게 다시 부탁을 했지만 번번이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러던 나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 이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전에는 일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신경써주지 못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배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나는 내가 비로소 이렇게 되어버리고 난 후 임신한 아내에게 신경 썼다. 그때는 아마 아내가 임신한지 3개월이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 아이 낳을 때까지는 친정에 가 있어.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자 아내는 내 제안을 거절하면서 끝까지 내 옆에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내 옆에 있고 싶다던 아내를 기어코 친정으로 보냈다. 아내를 보낸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아기와 아내를 생각해서 친정으로 보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나는 나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사람을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붉은 꽃은 어쩐지 처음 샀을 때보다 많이 색이 퇴색되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쭉 물을 주지 않았었는데도 꽃잎에는 생기가 돌았었다. 하지만 기억 속 그때의 꽃은 그런 생기 같은 것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거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시끄러웠다. 제발 그 전화벨 소리 좀 어떻게 했으면 싶었다. 계속 내 귓가에서 울며 나를 괴롭혔다. 시끄럽다. 시끄러워!
하는 수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제야 전화벨 소리는 자신의 임무를 끝마치고 침묵을 가져왔다.

“누구세요?”
“오빠, 오늘 기분은 좀 어때? 애가 이제 붙기가 빠졌는지 귀여워졌어. 얼른 오빠한테 보여주고 싶은데, 혹시 우리 아기 보러 올래?”

아내의 전화였다. 고개를 숙이면서 꼬여있는 수화기선을 검지손가락으로 감는다. 가고 싶어, 지금 당장 너하고 그 애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어.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요즘 꾸고 있는 꿈을 아내에게 말한다면? 그런 아내가 나를 딸아이의 곁으로 오게 하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니, 오늘 기분이 영 아니 여서. 다음에, 다음에 보러 갈게. 그때까지 우리 아기 잘 부탁할 게.”

나는 그 짧은 몇 마디를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내가 다급하게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 옳은 선택이다. 옳은 선택일 것이다.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처음 내가 이렇게 되고 나서 밝았던 아내의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졌고 눈 밑에는 전에는 없었던 다크서클이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나는 어떻게든 원래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음과 몸은 따로 놓았다. 나는 아내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동반자. 머리칼이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를 아끼겠다는 결혼서약. 그녀는 그 서약을 지켰고 지키고 있지만, 나는 그 서약을 지키기는커녕 내 고통을 아내에게 가중하고 있었다.
정말 부끄러웠다. 오래전 읽었던 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보다 더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적어도 인간실격은 스스로가 살아가면서 느꼈던 수치심과 방황, 사랑 때문에,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주인공은 결국에는 방황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은 그쪽보다 내가 훨씬 나빴고,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 그 책임을 회피하기까지 했다. 그런 내가 인간실격의 주인공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 주인공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나는 더욱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것이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우울증에 빠져있다. 그래서 자살을 할 수 없었다. 자살을 한다면 나를 믿고 자신의 인생의 절반을 내게 맡긴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방법을 선택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다자이가 그랬듯이,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사랑에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래, 적어도 나는 아직 사랑을 잃지는 않았다. 더 나쁘게 내가 사랑을 버려 스스로 사랑을 실패하게 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아직 사랑에는 실패하진 않은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현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현관. 그녀가 나를 얼마나 저 밖으로 보내려고 했던가. 하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했고, 그것은 내가 사랑을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회상했다.


나는 작가였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작품들을 발표하고 출판하며 살아왔었다.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나 사람들이 내 이름만 대면 아, 그 책을 내신 그 분 맞으시죠, 따위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작가정도였다. 그래서 그리 많은 원고료는 아니지만, 적어도 넉넉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은 벌었었다. 그러다가 나는 아주 정말 자신 있는 작품 하나를 써냈는데, 그 작품은 내가 여태껏 써왔던 작품들 중에서 내가 뽑기에는 최고라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을 펴낸다면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고, 내가 낸 책은 인터넷서점 종합차트 4~5위부터 시작했고 소설부문에서는 2~3위 정도를 차지했는데, 그 성적은 내가 책을 내고 얻은 성적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나를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그 소식에 문자와 전화로 내게 “이제야 독자들이 자네를 알아주는구나.” 라는 등의 축하를 보내주었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일일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축하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전했는데, 한 주 한 주가 지나면서 인터넷서점 차트에서 순위가 한 순위 식 올라가는 것을 보자 혹시 이거 베스트셀러를 넘어 밀리언셀러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들게 했다. 그리고 그런 꿈에 들뜨고 있던 나와 함께 내가 낸 책은 당당히 인터넷서점의 종합차트와 소설차트에 올라 두 부문에서 1위를 거머쥐게 되었다. 내 생 최초 작가가 되고 난 후 가져본 1등의 자리였다.
1등이 된 그 날 나는 모든 지인 분들을 불러 모아서 술자리를 가졌고 거기서 그동안 못 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며 한 참이나 떠들어댔고, 다음 날 숙취에 고통을 호소하며 일어난 나는 신문을 펼쳐 읽었다. 신문은 항상 내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하나의 창이었다. 나의 많은 작품들이 그런 신문에서 소재를 얻어 탄생시킨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신문을 읽지 않고 넘어가는 날은 몸이 너무 아픈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신문은 내게 하나의 소재창고였다. 여럿이 공유하면서도 내 혼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창고.
그런데 그 날 신문 1면을 보고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문 1면을 장식한 기사가 나와 관련된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중견작가가 요즘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책을 냈을 쯤에 불거진 표절시비가 내게까지 번졌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기사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랬다. 내가 이번에 낸 책이 내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멘토로 생각하던 작가분의 작품 중 하나랑 비슷하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분의 작품을 어떻게 표절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내가 아무리 멘토로 생각하는 작가님이어서 그의 작품들을 필사하고 공부를 해서 그 분의 정서 등이 비슷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표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금방 수그러들 줄 알았다. 나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내 책이 표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나를 두고 표절작가다 아니다 라는 논쟁이 일었는데, 그런 논쟁이 지속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내가 표절했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표절작가로 전락해갔다.
결국 나는 내 입으로 해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독자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힘을 빌려 내가 나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싸움만 일으키고 만 것이 되었으니까. 내가 직접 나서서 해명해야 했다. 그 분의 작품과 내가 낸 책의 차이점들을 조목조목 짚으면서 그리고 내가 그 분을 존경해서 작가데뷔 이전에 그 분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 분의 느낌이 내 작품에 녹아있는 것일 거라면서.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끝까지 꺾지 않았고 급기야 카페까지 개설해 내가 낸 모든 책들에 대한 불매 운동과 절판 운동을 벌였다. 나도 그런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를 잘 아는 동료작가들의 입을 빌려 내가 표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렸지만, 그런 동료들의 수고도 헛수고였다. 최소한 나는 존경하는 그 작가님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표절했다는 신문기사가 터지고 나서 며칠 후 존경하는 그 작가님이 내게 연락을 해 자신이 직접 내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셨던 적이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제가 금방 해결하겠습니다.” 라 말하며 거절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때 그 도움을 거절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그때 도움을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을 텐데. 하지만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그 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후였다.
아내는 표절시비 때문에 고생하는 나 때문에 잠을 설치고도 괴로워하는 나를 위로해줬다. 정작 괴로웠을 것은 아내 본인이었을 텐데. 그리고 자신이 임신을 한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있었을 텐데. 표절시비 때문에 괴로워하는 통에 병원에도 가지 못한 불쌍한 나의 동반자. 내가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사죄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 때문에 내 아이는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그 분께서 주겠다는 도움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면서 거절하고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도움을 청하는 염치없는 나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시지 않았다면, 그 이후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미쳐버렸을 지도. 괴로움에 미치다 정말로 자살했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그 분께서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셨고, 그 문제의 여론이 급속히 내 쪽으로 기울면서 내 누명이 벗겨지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내가 표절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후로도 얼마동안 그런 주장제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전처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는 자신이 입덧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산부인과에 들려 임신 3개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고, 그 사실을 즉시 내게 알렸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기뻐할 기력 같은 것은 내게 남아있지 않았고, 사람들의 이중 성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는 게 싫었다. 어쩌면 저 사람 내가 여전히 표절작가라고 손가락질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신 3개월의 아내가 나를 데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지만 딱히 나의 대인기피증은 나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붉은 꽃은 자신의 붉은 빛깔을 잃지 않았던 때여서 그런지 아내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만 나를 밖에 돌아다니게 해서 대인기피증을 고치려고 하자, 나는 그런 그녀가 귀찮았고, 나는 그녀에게 고성을 지르고 물건을 던지기는 등 여러 가지로 그녀를 괴롭혔다. 지금도 조금은 그런 그녀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처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내를 귀찮다고 생각하고 고성을 지르면서 물건을 던지는 등의 행동을 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나는 아내의 곁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 꾸게 된 그 꿈. 그 꿈 때문에 아내와 아이의 곁에 있기가 두렵다. 그 꿈이 꿈일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만에 하나 그 꿈에서의 일을 내 가족들에게 하게 된다면 그 누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두려워 아이와 아내의 곁으로 갈 수 없었다.
눈이 감기려고 한다. 또 다시 그때의 꿈을 꾸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눈이 감기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 커튼이 처진 창문을 보았다. 창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햇빛은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부디 저 빛이 눈을 감으면 꾸게 될 악몽을 잠재웠으면 하는 바람을 하며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겨울이라서 그런지 해가 일찍 자취를 감춘 후였다. 게다가 커튼까지 치고 있어서 침실은 어두컴컴하게 어둠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달빛 하나 커튼 사이로 스며들지 않고 있었다.
눈은 금방 어둠에 적응해 앞을 바라보는 것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추위였다. 내가 도피하고 있는 이 침실은 작년 겨울에도 춥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다. 밤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방금 막 깬 잠에서 꾼 꿈 때문인 것일까. 확실치는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보일러를 확인했다. 보일러는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다. 또 아내가 출산 후 혹시라도 내가 추운 겨울에 집 안에서 덜덜 떨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사람을 시켜 채운 기름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아서 추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 또한 내 추위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이 집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어졌고 집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집 또한 내 추위의 원인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가 방금 꾼 꿈이 원인이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
방금 꾼 꿈.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악몽은 아니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꿈은 아주 행복한 꿈이었고, 나는 그 꿈에서 정말로, 정말로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는 것과, 그래서 딸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같이 산책을 하고 아내의 잔심부름을 들어주고 같이 한 침낭 아래에서 잠을 자는 모습 정도만이 그 꿈에서의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꿈을 꾸는 동안 몹시 따뜻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꿈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입고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아직 꿈속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인 것인가. 그래서 잠에서 깨고 나서 몹시 추운 것인 것일까.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몹시 아내가 보고 싶었다. 아내가 보고 싶었고 아직 보지 못한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 둘을 내 팔로 껴안고 싶었다. 눈물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두 팔로 아무리 흐르는 눈물을 닦고 멈추게 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고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없이 눈물을 얼마동안 쏟아낸 나는 진정을 하고 전화기 앞에 섰다. 전화기 앞에 섰지만 수화기를 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렇지 않은가. 오늘 아침에 전화로 다음에 만나자고 했는데, 반나절 만에 그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일은 예외일 것이다.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만나지 말자고 했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 해서 그것이 상대에게 실례되는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몹시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된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고 아내의 친정 전화번호를 눌렀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수화기에서 삐 삐 삐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든 번호를 누른 후 통화음이 흘러나왔고 나는 통화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통화음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얼굴에는 땀들이 방울방울 맺혀 조금씩 흘러내렸다. 혹시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화나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어떡할까. 그런 온갖 걱정들이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통화음이 머지면서 수화기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장모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장모님께 문안을 여쭈었는데, 장모님은 오랫동안 연락 한 번 없던 못난 사위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으셨다.

“자네 이제 좀 괜찮아졌는가? 오늘 아침에 그 애가 전화를 했는데 많이 안 좋다고 하던데 말이네.”
“네, 한 숨 자고 나니까 괜찮아졌습니다. 그나저나… 저…, 저기….”

나는 아내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장모님은 그런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그 애 찾는 겐가?”

라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장모님은 아내를 불러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장모님께 괜찮다고 하면서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씀드리고는 황급히 수화기를 내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내 숨은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면서 가슴팍을 때릴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그 정도로 나는 떨렸던 것이다. 혹시라도 아내가 전화를 받을까 하는 마음에, 그런데 아내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로 받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아침에 전화를 끊고 난 후 화가 난 아내가 장모님께 내 전화 오면 딸아이 재우고 있다고 말해달라면서 말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바보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면서도 전화를 하다니… 정말 바보였다. 앞으로 아내에게 전화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고 침실로 가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가 울리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전화가 울려. 받아야 하는 거야? 받지 말아야 하는 거야?
내게 전화기의 울음소리는 마치 전화를 받아달라는 재촉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아주 낯익으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엄마가 그러는데 오빠가 전화했다면서. 왜? 우리 딸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내가 내게 물었다.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아침에 마음대로 전화를 끊은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아내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전화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내게 부푼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아내는 기대에 차거나 기쁜 일들이 있을 때면 조금 오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 전 데이트할 때마다 아내는 내게 많은 애교를 보여줄 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멋쩍게 대답했다.

“으응? 으…응. 그게 말이지, 사실은 말야. 둘 다 보고 싶어서. 당신하고 우리 애하고 말야. 지금, 지금 보고 싶어서.”
“하지만, 어떡하지? 우리 애는 벌써 재웠는데, 게다가 밤늦게 데리고 나갈 수도 없잖아. 하지만 말야.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우리 애는 날 밝으면 보고 지금 만날까?”

나는 아내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든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내는 내가 하고팠던 말을 대신해준 것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듣지도 보지도 않고 알고서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망설이지는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정말 하고픈 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에게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우리 거기서 보자.”
“거기?”
“응.”

그렇게 우리는 짧은 대화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곧장 오랫동안 묵어놓았던 먼지들과 수염들을 내 몸에서 때어냈는데, 그것들을 때어놓으니 한 결 기분이 좋아졌고 몸이 가벼워서 어디로든지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는 옷장에서 외출복을 꺼내 갈아입고 패딩을 위에 걸치고는 아내가 불러준다는 택시를 기다리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기 전 거실에 놓인 붉은 꽃을 보았는데, 붉은 꽃이 오늘 아침과는 다르게 뭔가 미묘하게 색이 변한 것 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미묘하게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꽃은 붉은 빛을 잃어버리고 죽은 것 같았으니까. 나는 현관문을 열고 오랜만의 외출을 했다.


밖은 꽤 쌀쌀했다. 집 안에만 있다 보니 온실의 화초처럼 되어버린 건지 이런 겨울 기온을 견디기란 무척이나 버거웠다.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밤하늘은 여전히 별 하나 없이 삭막한 하늘이었다. 그런 하늘까지 보니 추운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빨리 택시가 와서 나를 태우고 약속장소에 데려다 줬으면 싶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기분이 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진 기분이었다. 이래서 아내는 나를 밖에 내보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내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아내에게 미안함 마음들이 밀려들었다. 아내를 만나러 가려는 지금도 그런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가보다. 아니면 그 마음은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계속 내게 오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러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밤이어야 하기 때문인 것인지 침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택시를 타고 조용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직까지는 아내 이외의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택시가 도착하고 택시기사에게 조심스럽게 목적지를 말한 나는 등을 시트에 기대고 하염없이 창문 밖 밤풍경을 바라보았다. 택시기사는 그런 나에게 몇 번 마을 걸다가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가 택시에 탈 때부터 듣고 있던 라디오를 들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웃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택시기사가 무엇에 그리 웃는지 궁금해 창밖을 계속 바라보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택시기사는 내가 모르는 뜻의 단어가 나오는 부분에서 웃었는데, 그 부분에서 웃는 것을 보니 아마도 최근에 유행하는 유행어인 것 같았다. 유행어라… 최근에는 미디어를 보지 않아서 그런 유행어를 접할 기회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유행어를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무리겠지만, 아내를 계속 만난다면 그런 유행어들을 알아가지고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찼다. 혀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창밖의 밤풍경에 집중했다. 택시가 시내로 들어서니 네온사인들이 화려하게 거리를 수놓았다. 언젠가 나는 저 거리를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적이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여러 색들을 뽐내면서 다른 색으로 옷을 바꿔 입는 거리. 그때는 오늘처럼 추웠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아내는 춥다며 내 오른쪽 팔에 자신의 팔을 걸면서 내게 바짝 붙었다. 그러자 팔에서 팔로 온기가 전달되면서 나는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춥지 않았다. 추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나는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아내가 더 추울까봐 걱정이었는데, 내가 아내에게 춥지 않느냐고 물으면 항상

“오빠 팔에 내 팔을 걸어 팔짱을 끼잖아. 그러면 오빠 온기 때문에 하나도 안 추워. 그럼 오빠는 추워?”

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녀는 내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가 그녀의 온기와 섞이면서 겨울이었지만 마치 주위가 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리는 그 겨울이 아주 따뜻하게 보냈다. 그러고 보니 그때쯤에 집의 붉은 꽃을 산 것 같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와 아내는 그 겨울이 지난 다음 봄에 결혼했었는데, 그 전 겨울. 아내와 나는 여느 때 처럼 팔짱을 하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다 헤진 옷을 입은 노파가 우리를 불러 세워서는 좋은 꽃이 있으니 아내에게 선물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내는 딱히 꽃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아내에게 무언가라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가자는 아내를 겨우겨우 설득해 노파의 앞으로 데려갔다. 노파는 그런 우리에게 자신이 파는 여러 색의 꽃들 중에서 붉은 꽃을 권하면서 물을 절대 주지 않아도 되는 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럼 그 꽃은 무엇을 먹고 사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노파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랑이지. 이 꽃은 사랑을 먹고 산다네. 부부나 커플이나 가족의 사랑으로 말이지. 만약 꽃이 점점 시들어져간다면 그 커플과 부부, 가족의 사랑이 식었다는 걸 의미한다네.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부부나 커플이라면 이 꽃의 붉은 빛은 더욱 더 진한 색으로 변하는 아주 신기한 꽃이지. 세상에 몇 개 없는 꽃이라네. 하지만 아쉽게도 비싸게 팔고 싶지만 사정상 이걸 빨리 팔아야 해서 말이네, 그렇지 않은가 비싸게 팔면 아무도 안 사가니까. 그래서 어떤가? 하나 애인에게 선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때 노파의 말에 나는 우리가, 내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꽃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아내에게 준다면 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꽃으로 아내의 방을 인테리어 할 수 있으니 일서이조 아닌가.
나는 노파에게 그 꽃 하나를 달라고 하고 노파가 부른 3천원을 지불하고 그 꽃을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이런 꽃을 왜 주냐면서 사기성이 짙다면서 내게 투정을 부렸지만, 그래도 내심 내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꽃을 받고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내의 어깨에 살며시 팔을 얹히며 말했다.

“만약에 그 꽃이 시들잖아 그럼 내 집에 와서 날 마구 패줘도 돼.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건 두고 봐야지.”
“뭐야. 그 말은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보는 거야?”

그러자 아내는 알 수 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 생각에 피식 웃곤 말았다. 과연 나는 그때처럼 아내와 밝은 얼굴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어느새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택시에서 내려 조금을 더 걸어 어느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그 포장마차는 나와 아내가 연애를 하던 시절 자주 찾던 곳이었다. 포장마차로 들어서자 아내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려는데, 나를 알아본 포장마차 주인 이모가 내게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주인 이모에게 괜찮다고 애써 웃으며 말하고는 아내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조금 있자 주인 이모가 소주 한 병과 소주 병 두 잔을 우리 테이블에 놓고는 물었다.

“이전에 왔을 때 먹었던 걸로 주면 되나?”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인 이모가 가고 나자 고개를 숙여 내 발만 쳐다보았다. 차마 아내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말했지만 막상 이렇게 얼굴을 대면하니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 미, 미안해.”

아내의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들어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아니, 대체 왜! 아내가 울고 있단 말인가. 아내는 잘못이 없는데 대체 어째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울려고 하는 걸까.

“아냐, 왜 당신이 내게 미안해 해. 다 내 잘못인데, 내가 못난 녀석인데. 그깟 표절시비 때문에 대인기피증에나 걸려버리고. 이런 못난 놈이 무슨 작가고 남편이라고 그동안 날 간병까지 하고. 당신이, 당신이 미안해 할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 말을 끝내자 눈물이 울컥했다. 아내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의연한 태도를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아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이 내 감정이 눈물을 모두 담아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눈물은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쉼 없이 펑펑 쏟아졌다. 아내도 그런 나와 같이 울었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가 우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참을 울던 우리는 눈물샘이 말랐는지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그러자 어느 정도 진정 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가 울어가지고 부은 얼굴을 보고는 웃었다.
얼마 만에 되찾은 웃음이었는지 배꼽이 빠질 뻔했다. 정말 오랜만의 웃음이었다. 그동안 못 웃은 웃음을 모두 웃은 것 같았다. 그리고 웃음이 머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의 등 뒤로 다가가 섰다. 아내는 여전히 내 부은 얼굴 때문에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두 팔로 껴안았다. 아내가 순간 움찔하며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나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몸을 내게 맡겼다.  
나는 아내의 등 뒤에서 껴안으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지금 이 말은 말 뿐이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 난 네게 최고가 되고 싶고, 그 어떤 것이라도 바꾸어서라도 당신이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 지금은 어렵지만, 지금은 많이 어렵지만 그래도, 그래도 당신이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 만약에 그게 안 되는 일이라면 세상을 바꾸어서라도 말이지.”

그러자 아내가 내게 괜찮다 말하면서 자신의 부드러운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아내의 손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전달되었다. 그때 연애를 하던 시절처럼 그녀의 온기가 내 몸을 데웠다. 아내는 마치 그 자체로 봄이었다. 겨울이었던 내게 봄이 다가와서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내가 껴안고 있는 여자의 남편이었으니까.
그때 손님 한 명이 포장마차로 들어오면서 주인 이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 밖에 눈 내리더라고요. 아, 정말이지 춥다 춥다했더니 정말로 추워서 눈까지 내리다니, 저 같은 솔로에겐 이런 날이 무지 싫어요. 이모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소주 한 병 서비스로 주시면 안 돼요?”

나는 손님의 그 말에 아내를 데리고 포장마차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서는 정말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네온사인 불빛을 배경으로 내리는 눈은 뭔가 모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둘이서 보는 눈도 참 오랜만이지?”

아내가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러네. 다음에는 우리 애하고 같이 봤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아내의 어깨를 다시 껴안았다. 눈은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며 땅에서 녹아 사라졌는데, 금세 내리던 눈의 세기가 강해지면서 녹던 눈들이 쌓였다. 아내가 쌓이는 눈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눈이 쌓이면 우리 애 데리고 쌓인 눈 구경하러 가자.”

나는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겨울 추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춥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온 집안에 쳐져있던 커튼을 걷는 것부터였다. 아내가 온 집안의 커튼을 걷자 커튼으로 막혀있던 햇살들이 집 안 가득을 돌아다니면서 묵었던 먼지들을 날리게 했다. 그리고 아내가 창문을 열자 바람이 불면서 먼지들을 모두 창문 밖으로 빨아들였다. 상쾌한 공기들이 그동안 먼지로 가득했던 먼지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자신들이 대신했다.
아내는 그런 공기들과 함께 집 청소를 시작했고 나도 아내를 도왔다. 그런데 그러던 중 거실의 붉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꽃이, 꽃이 다시 진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급히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내 부름에 내 곁으로 와서는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오빠.”

나는 그렇게 묻는 아내에게 손가락으로 붉은 꽃을 조용히 가리켰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본 아내는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붉은 꽃을 보았다. 문득 이 꽃을 사고 나서 돌아서려할 때 노파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젊은이들 그 꽃의 이름과 꽃말에 대해서 아나? 그 꽃의 이름은 열꽃이라 하지. 꽃말은 뜨거운 사랑. 꽃과 참 잘 어울리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어쩌면 그 말은 내가 겪은 시련들을 예견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이 붉은 꽃의 이름인 열꽃. 그리고 꽃말인 뜨거운 사랑. 처음 노파에게 꽃 이름과 꽃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우리 둘의 깊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뜨거운 사랑이라는 꽃말은 깊은 사랑이 아니라 뜨거울 정도로 아픈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열꽃의 붉은 색은 처음 꽃을 샀을 때보다 붉은 색은 더 붉었다.


inspiration by 타블로 '집, 밑바닥에서, Airbag'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13 단편 시메트리(symmetry) 술펀하루 2011.10.24 0
1312 단편 채취선 천공의도너츠 2011.10.26 0
1311 단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김진영 2011.11.02 0
1310 단편 한때 그곳에 심장이 뛰었다. 쿼츠군 2011.11.07 0
1309 단편 [엽편]해를 지키는 별1 먼지비 2011.11.10 0
1308 단편 Knights of Cydonia 빈군 2011.11.11 0
1307 단편 [엽편] 인어공주 황당무계 2011.11.13 0
1306 단편 [엽편]밤을 태우는 별 먼지비 2011.11.13 0
1305 단편 아내1 강민수 2011.11.14 0
단편 열꽃 김진영 2011.11.15 0
1303 단편 회한의 궁정 먼지비 2011.11.15 0
1302 단편 아이러니 쿼츠군 2011.11.17 0
1301 단편 배달의 기수, 강필중 빈군 2011.11.17 0
1300 단편 가치의 기준 이정도 2011.11.20 0
1299 중편 하마드리아스 -상-1 권담 2011.11.20 0
1298 중편 하마드리아스 -중- 권담 2011.11.20 0
1297 중편 하마드리아스 -하- 권담 2011.11.21 0
1296 단편 [해외단편] 미아 구자언 2011.11.22 0
1295 단편 게이트에 이르는 이치 윤소아 2011.11.24 0
1294 단편 안녕, 하루1 너구리맛우동 2011.12.01 0
Prev 1 ...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