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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2011.12.24 19:5712.24

<토끼>
집에 도착한 동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발을 벗지 않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동규는 거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실험관을 바라보다 소파 사이에서 큼직한 봉투 여러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익숙한 동작으로 나무로 된 거실 바닥을 들어낸 뒤, 피복이 벗겨진 전선을 뽑아 실험관에 연결했다.
“…….”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실험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동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전선을 만져보았다. 예상대로 손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거대한 전지를 꺼냈다. 상당히 육중해 보였지만, 그는 용케 그것을 거실까지 날라 왔다.
딸깍.
동규는 플러그를 다시 전지에 연결하고 실험관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실험관 안에서 스멀스멀 가루들이 엉겨 붙기 시작했다.
“후우.”
동규는 걸쭉하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잠시 그렇게 누워 있는데, 갑자기 인터폴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그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토끼는 달에서 사람을 빻는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규는 인터폴을 쳐다보았다. 위아래 회색 추리닝을 빼입은 남자가 괴로운 듯 가슴을 쥐어뜯으며 호출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으레 그에게 약을 받으러 오는 호구들 중 하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에서 봉지를 꺼내 시험관의 가루들을 퍽퍽 퍼 담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테라스로 걸어가, 현관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그것을 투척했다.
퍽!
“윽! 으으, 뭐, 뭐……?”
“맛쵸, 마초우, 맨! 아이 갓 더 드림, 마쵸 맨!”
“…….”
비닐봉지에 얻어맞은 남자는 잠시 당황스런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곧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노래를 부르는 동규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자신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네 애인 거기 있다. 사라져.”
“고, 고맙다! 고마워!”
자기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아이라 불쾌할 법도 하건만, 남자는 모욕감도 느끼지 않는지 동규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남자는 동규가 던졌던 흰 봉지를 집어 들고 얼른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규는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그대로 다시 테라스 바닥에 널브러졌다. 호구가 나타난 여흥도 잠시, 금방 다시 권태가 몰려들었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공부나 할까?’
자기도 모르게 문득 그런 생각을 한 동규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쌓기 시작했다.
“하하하! 병신!”
공부는 무슨, 내가 배울 게 뭐 있다고. 동규는 소파에 푹 파묻혀 걸쭉하게 하품을 해댔다.
“…….”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동규의 눈이 깜빡깜빡 감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감기고, 숨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테라스의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퍽.
“하아, 하아.”
“끄으! 사, 살려, 제발……!”
동규는 말없이 들고 있던 유리관을 휘둘렀다. 으적. 복면을 쓴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쯧.”
동규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누군가의 부서진 몸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널린 것이, 가축 매몰지 마냥 지저분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용케 마약이 담긴 실험관은 멀쩡했다.
‘그 지랄을 하면서까지…….’
어이가 없었다. 육체적인 쾌락이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것인지. 물론 먼저 약을 준 건 그였지만, 그렇다 해도 한심한 건 사실이었다. 결국 눈앞의 쾌락에만 취해 제 인생을 걸레로 만든 건 그네들 자신이니.
동규는 이마에 묻은 핏방울들을 쓸어 넘겼다.
“후우.”
몇 분간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던 그는 불현듯 소파 쿠션 사이에서 렌즈를 하나 꺼내들어 눈앞에 갖다 댔다.
“그렇지. 생존 본능이란.”
그는 품에서 메스를 꺼내들어 발밑에 있던 시체에서 허벅지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동규는 발라낸 다리뼈를 틀어쥐고는 시체들 중 하나의 팔을 후려갈겼다.
퍽!
“아아악!”
시체인 척하며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사내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규는 그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다리뼈를 들어 보였다.
“허억! 사, 살려주시…….”
“살려줄게. 조건이 있어.”
“무, 무슨……?”
“니들 배짱으로 여기 쳐들어왔을 리는 없지. 너희들 심부름 시킨 놈에 대해 아는 대로 불어.”
“……!”
그렇잖아도 크게 떠진 사내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듯 입을 우물거렸지만, 동규가 쥐고 있던 다리뼈를 들어 올리자 바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 사자입니다!”
“그래. 무슨 사자?”
“그러니까, 토끼를 먹는 사자라고……. 그,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그랬어요! 자기가 당신도 죽일 수 있으니 걱정 말라 했…….”
동규는 더 듣지 않고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엎드린 자세 그대로 절명했다.
‘……사자?’
동규는 자기도 모르게 킥 웃음을 흘렸다.
“그래, 놀아 보자. 내 인성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어디로 갈까?”
동규는 나직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얀 강아지가 동규의 말을 흉내 내며 멍멍거렸다.
“어디로 갈까?”
동규는 가만히 개를 쳐다보았다. 구강과 후두가 개조되어 흡사 사람 같은 두상을 가진 이 자그마한 강아지는 다름 아닌 동규 자신의 작품이었다.
“사자가 왔다는데…….”
“프헥, 케케켕!”
사자라는 말에 개는 옆으로 엎어져 마치 웃는 것 마냥 요상한 소리로 짖어댔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기가 막히는데! 죽고 싶어 환장했군?”
“그래. 어디로 갈까.”
“어디긴? 사자한테 가! 사람도 빻는 토깽이가 뭘 고민하고 그래?”
“수십 년 썩어 지내야 하는데 금세 게임이 끝나면 쓰나.”
“어? 아……. 사자가 최종보스인가?”
그러자 강아지는 앞발로 코를 비비며 잠시 묘한 눈빛으로 동규를 쳐다보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 그거 빼곤 정말 할 만한 게 없네. 네가 좀 감성이 없어야지. 감성 지수 제로니 뭘 하든 재미가 없을 것 같고.”
“할 일이 없으면 만들어.”
“이런, 노인네가 지루하다 못해 노망이 났……. 멍!”
투덜거리던 개는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 짖어댔다.
“그래! 노인네. 노인네 낙이라면 추억밖에 없지. 네 파란만장한 과거를 무대로 만들어 놀아 보는 게 어때?”
“그래.”
동규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뭐라 더 말하려던 강아지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고민 하는 척도 안하고. 괴물답다.’
“가자.”
“그랭…….”
동규는 옆구리에 강아지를 끼고 테라스로 향했다. 그는 창밖에 딸린 파이프를 타고 미끄러지듯 아파트를 내려왔다.
“푸픕?! 사, 살려! 케켁크켁! 켕켕! 헥! 헥! 헥!”
거의 떨어지듯 내려온 터라 강아지는 연신 숨을 헉헉거렸다. 동규는 비틀거리는 강아지를 멀뚱히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이렇게 늙었나.”
“컹! 늙기는 미친놈아! 이딴 식으로 내려오면 뭔 강아지든 질식할 거다! 그나마 나니까 이 정도인 거야!”
“그래.”
동규는 부르짖는 강아지를 목마 태우듯 어깨와 머리에 걸쳤다.
“푸르르. 좀 살겠네. 근데 어디 가려고?”
동규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아파트를 내려올 때와는 달리 약간 답답할 정도로 느린 걸음이었다.
“왜 대답을 안 해.”
그는 한참을 걸어 다니다 마침내 어느 학교에 다다랐다. 고등학교인지 대학교인지 애매하게 부지가 널따란 학교였다.
“사자 취향이 독특한가 봐. 이런 데서 놀고.”
“취향이 아닐 걸.”
“……?”
강아지는 의아함에 고개를 젖혀 동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입가에 나타난 웃음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동규에게서 떨어질 뻔했다.
“왜, 왜, 왜 웃어.”
“살려고 발버둥 치던 내 과거가 떠올라서.”
“그게 무슨 소리……. 잠깐. 너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게임을 시작하자. 토끼의 모든 인성에 불을 붙이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하지 않아?”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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