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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주종말동아리

2007.07.27 19:3107.27

우주종말동아리



1

“우주는 발산할까, 수렴할까?”

마치 일제시대나 유신시대의 취조실 같은, 침침한 갓 전등 하나만이 대롱거리는 콘크리트 방에서 녀석은 취조하듯 물었다. 창문도 없는 이 방에서는 수시 때때로 드나드는 비행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우리 학교에서 한 눈에 닿을 거리 김포공항이 있어서 비행기소리가 시끄러운 편이다. 그래서 공항 측에서 문을 닫고 수업할 수 있도록 냉방설비를 지원해 줬지만, 녀석이 멋대로 만든 이 방에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꽉 막힌 이 방은 아예 찜통이었다.

“발산하든 수렴하든.”
“그게 너희들 사유의 한계지. 우주 속에 살면서 그것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깍지 낀 손을 가만히 책상위에 두고 턱을 당기고 눈동자를 살짝 위로 올려다보는 녀석의 모습은 분명 위압감을 주려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 모습은 영화나 소설을 따라하려는 것같이 어설프게만 보였다. 나는 땀을 닦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짜증나는 심기가 표정에 드리우도록 신경 쓰면서 말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아득했다.

“그래서, 그런 얘기 하러 날 여까지 끌고 온 거야? 근데 난 우주가 어떻고 도가 어떻고 하는 거 관심 없거든? 너네들 끼리 모여서 외계인을 부르든 푸닥거리하든 난 빼주란 말야.”
“나도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뭐가 어쩔 수 없단 거야? 왜 날 끌고 온 거냐고.”
“그러니까 지금 말하고 있잖아. 한번 이야기를 들어봐. 납득하고 안 하고는 그 다음에 정해도 늦지 않잖아?”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래 한번 해 봐라. 어휴, 정말.”

싸이코들. 하고 속으로 삼켰다.

녀석들은 학교에서도 유명한 괴짜 패거리이다. 어딜 가나 한 둘씩은 꼭 있는 자기의 기묘한 정신세계를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녀석들. 개중에서도 이 녀석들은 정말 이상한 놈들이었다. 일부러 나서거나 남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지만 그들은 어딜 가든 눈에 띠었다. 언제나 구석에 모여 알아듣지 못하는 토론이나 일삼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문 따위를 중얼거리고 학교 곳곳에 주술적 인형이나 문양 따위를 도배하는 등 도저히 상식적인 놈들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내 눈 앞에 앉아있는 천미루라는 녀석은 이 패거리를 창설한 핵심적 기인이었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우주종말 동아리라는 괴 집단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학교에서는 그들을 위해 내가 지금 잡혀있는 이 동아리실까지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모님의 재력이 학교에 영향을 미친다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 동아리에는 타 학교 녀석들도 드나들었다. 중학교 때의 활동이 이어진 모양인데 학교는 역시 이것도 묵인해주고 있다. 2학년이 되어 녀석과 같은 반이 된 것이 이제까지의 생애 중 가장 큰 불운이었다.

녀석은 말을 이었다.

“우선 대답해 봐. 우주의 끝은 뭘까. 이미 140억년이나 진행된 역사가 계속 이어질까, 어느 순간 끝이 나버릴까?”
“난 문과야. 그딴 걸 알 리가 없잖아. 어디서 듣기로는 팽창할 대로 팽창하다가는 다시 수축해 빅뱅 이전으로 돌아간다고도 하던데.”
“빅 크런치 말이지. 그럼 인로 넌 우주의 끝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 생각 없다니까! 몇 십 억년 후의 일 따윈 관심 없다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그렇게 될지 봐봐.”

녀석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엄밀히 말해 수학적으로 적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수렴한다는 것은 우주와 시간의 끝이 존재한다는 걸 말한 거야. 우주의 끝은 계속 팽창하다가 최대 밀도에 다다라 그대로 멈춰버린다는 것, 빅 크런치로 오그라든다는 것, 엔트로피의 완전 평형으로 암흑과 고요만이 남게 된다는 것 등의 가설이 있어.”
“그러니까 뭐 어쩌라고. 짜증나게 하지 말고 원하는 걸 똑바로 말하란 말야.”
“너, 우리가 누구라 생각하니?”

선문답을 원하는 것인가? 하지만 난 정확한 답을 알고 있었다.

“병신들.”
“우리 동아리 말야.”
“찐따 싸이코들 덕후 놀이 동아리.”

녀석은 짜증날 만치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는 우주 종말 동아리야. 종말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단체야. 우리는 단순한 동아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적 단체야. 너는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또 이름 대면 너도 알 만한 저명한 전 세계 인사들이 함께하고 있어. 나는 그것의 간부이기도 하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저들끼리 무슨 공상을 하든 어떤 역할극을 하든 그것은 자유인 것이다. 지금처럼 애먼 사람 붙잡고 강론하지만 않는다면야. 그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오랜 연구를 했어. 과학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신화나 예언, 심지어는 SF소설까지 말이야. 종말이 어떻게 될까. 끝은 어디인가. 각종 종말론을 현실에 대입해 미래를 외삽해나갔어. 미래학적으로는 우리의 연구가 현 학계보다 수백 년은 앞선다고 확신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종말의 구체적 모습을 알아내는데 실패했어. 그런데 말야. 최근 놀라운 실마리를 잡았어. 우리와 같은 모임이 이미 기원전에도 있었다는 거야. 기원전 이천년 전 바빌로니아에서 말이야. 기존 알려진 신화 말고도 또 다른 원형의 신화를 찾아낸 거야. 그 내용은 지금 우리 단체의 목적과 놀랍도록 일치해. 현실적 삶의 행복을 생각했던 수메르인들 중 이상하게도 그들은 종말에 집착했어. 바빌로니아의 신화를 알아?”
“아니.”
“음, 그래?”

입이 마른지 책상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거기에 따르면 짠물의 신인 티아마트는 마르두크와의 싸움에서 져 두 동강나 반쪽은 하늘이 되고 나머지는 땅이 됐대. 그 신이 부리던 괴물 킹구의 살은 인간이 되고. 그런데 우리가 발견한 점토판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가 있는 거야. 킹구의 피가 되살아나고 하늘과 땅이 다시 맞붙을 때, 티아마트가 부활하고 다시 주신들을 무찌르고 태초로 되돌린다는 거야. 그게 뭐겠어.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거 아냐.”
“뭐야, 그런 종말론은 얼마든지 있잖아.”
“일반적 멸망신화는 대개 재생이나 영원회귀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근데 자세한 내용을 들어봐. 티아마트는 오래전 죽은 아푸스를 살려내고자 한 대. 그러려면 수많은 신들이 사는 신들의 사회를 없애고 태초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거야. 아푸스와 티아마트만이 있는 무의 세계 말야. 이건 존속에 대한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신화라니까. 오로지 멸망만을 말하는 신화라고. 라그나뢰크 같이 멸망을 그린 신화 역시 여럿 있지만 그것들에는 ‘그 다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정화와 새 시대가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게 있다고.”
“그게 뭐가 이상하단 거야.”
“고대 사회에서 신화의 역할을 생각해 봐. 신화는 구성원의 의식 세계를 구성한단 말야. 특히 지배계급과 결부되어 종교나 이데올로기 이상으로 고대인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기능을 한다고. 우린 현지에서 그 신화를 새긴 문명의 흔적을 찾아봤어.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기존 연구와 비교해 봐도 점토판을 고증해 봐도 이 신화를 근거할만한 문명이 나타나지 않은 거야. 아무런 흔적이 없어. 마치 사막 한 가운데 버려져 있는 신화 같았어. 그 뒤로 중동 땅에선 이들의 흔적이 티끌만큼도 나타나지 않아.”
“그럼 그게 가짜일 수도 있고.”
“아냐, 점토판에는 조작이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이렇게 결정 내렸어. 고대에 이 설화들은 국가의 큰 행사 때 낭송되고 공연되곤 했거든? 이 신화도 똑같은 지위를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면 결과는 충분히 예측되지. 티아마트를 섬기는 집단과 주신을 섬기는 집단은 적대 관계, 아니 그걸 넘어서 서로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 못 하는 피와 칼로만 맺어진 관계, 과거 냉전 시대의 남북 관계보다도 더욱 험악한 관계였을 거라고. 그리고 마르두크가 이긴 거지. 패배자는 승자의 영양분이 되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거나 흡수됐을 거야. 다시재생하지 못하게 철저한 응징을 받고서 말야.”

물론 충분히 가능하다. 상반되는 두 신을 섬기는 집단은 공존할 수 없다. 그것은 현대에서도 인종청소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멸망당했다’라는 주장만으로는 근거가 성립하지 않는다. 일본이 사료를 없애 버렸다는 것을 근거로 드는 머저리 같은 인터넷 민족주의자들처럼.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 녀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든 헛소리든 녀석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될 일이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예비종이 울렸다. 이제까지 녀석은 나를 이리로 데려온 목적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잘 들었다. 이제 종쳤으니 가 봐도 돼지?”
“이야기가 그만 길어졌네. 오후 수업 끝나고 다시 와줄래?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어.”
“생각나면.”

다시 녀석들이 붙잡지 못하게, 서둘러 그 침침한 방을 빠져나왔다. 물론 다시 돌아갈 생각은 머릿속에 상정하지도 않았다.

천미루는 수업종이 치고도 몇 분 지나서야 들어왔다. 5교시 6교시가 가는 동안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교시가 끝난 청소시간은 20분이 주어진다. 미루는 애써 외면하는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마저 끝내자고 말했다. 적당히 둘러대며 빠져나가려 하는데 패거리 열댓명이 몰려와 교실을 둘러싸며 무언의 압박을 가해왔다. 두 녀석이 내 양쪽에 붙어 잡아끌었다. 하지만 같은 꼴을 두 번 당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리실로 가는 복도에 교무실이 있었다. 그 안으로 재빨리 미끄러져져 들어갔다. 제 아무리 정신 나간 놈들이지만 교무실까지 들어와 난동 부리지는 않았다.

“박인로. 무슨 일이냐.”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리려 했다. 이상한 놈들이 나를 끌고 가 별 해괴한 소리를 귀에다 박아댄다고. 그렇게 뭐라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마침 잘 왔다. 선생님 심부름 좀 해라.”

하며 열쇠 꾸러미를 건네준다.

“이거 갖고 과학실 가서 문 열어 보면 컴퓨터가 탁자에 있을 거야. 그걸 컴퓨터실에 갖다놓고 오면 돼.”

나는 쭈뼛거리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교무실 밖에는 아직도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과학실 문 잠그는 거 잊지 말고. 거기 보면 ‘과학실’이라고 견출지 붙어 있을 거야.”
“저기, 선생님. 그런데요, 저 밖엣 놈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자꾸 귀찮게 해서요.”
“그으래? 아니, 천하의 박인로가 괴롭힘을 당한단 말이냐?”

장난조로 웃으며 말하셨다.

선생님은 밖으로 나가 놈들을 쫓아냈다. 나는 뒤통수에 느껴지는 시선을 뒤로 하고 재빨리 과학실로 갔다.

쉬는 시간이 거의 다 가서인지 놈들은 더 이상 나를 쫓지 않았다. 정말로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앞으로 반년을 그 녀석과 같은 반을 쓴다는 것이 아찔하기만 하다. 이리저리 돌려 가며 말하긴 했지만 놈들의 목적은 회원 확보일 터. 알량한 말빨로 시니컬한 척 하기 좋아하는 애들을 현혹시켜 끌어들이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나는 그런 머저리 같은 짓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재차 다짐을 하며 교무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수고했다며 커피 한 컵을 주셨다.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기껏 타주신 걸 마다할 수는 없었다.

“그래, 아까 무슨 말 하려 했더라?”

이제 와서 말하려봤자 그럴 시간도 없다. 나는 아니라고 하고 커피를 홀짝이며 돌아나갔다. 커피는 블랙은 아니었지만 씁쓰름했다. 막 교무실 문을 나서는데 붕 뜨는 느낌에 발을 헛디딘다. 머리가 땅으로 쏟아지는 느낌, 벽을 딛고 간신히 섰지만 눈병에라도 걸린 듯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듯하면서 나는 그대로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2

지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놓았다 반복했다. 그러다가 잠시 정신을 들었을 때의 느낌, 의자에 꽁꽁 묶여있는 상태를 기억하고는 머리를 흔들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나는 고개와 발목 말고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다음의 미싱피스는 인도에서 발견됐어. 티아마트의 문명은 파괴됐지만 후손들 몇 명은 히파로스의 바람을 타고 남인도의 촐라 왕국에 닿았어. 거기서 그들이 재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주세력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다만 그들은 바빌로니아의 흔적은 거의 남겨놓지 않았어. 우리는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 집중적으로 조사를 했어. 그런데 그게 기록이나 유물이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아서, 그러니까 그들이 인도로 이주했다는 몇 가지 정황증거와 심증은 있는데 이주세력이 그들은 맞는 건지, 어떤 세력을 형성 했는지는 알 수 없었어. 그래서 우리는 고대 문명에 대한 조사를 포기하려 했지 진전이 없이 몇 년이 흘렀으니. 그런데 더욱 뜻밖의 장소에서 단서가 나온 거야. 고대 인류의 세계체제를 연구하던 앤드류 군더 프랑크 교수의 연구팀이 놀라운 성과를 냈어. 한반도 남부에서 사로국을 세운 혁거세 세력과 김알지, 석탈해 세력은 이주세력일 거라고 배운 적 있지? 사실 그 세력은 인도에서 흘러왔다는 거야. 그 연구에 따르면 인도인들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일본까지 이어지는 바다 무역로를 이용하고 있었어. 그 해양 세력중 하나가 한반도와 일본까지 흘러 들어온 거야. 일본, 한국과 인도의 언어, 문화적 유사성이 연구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증명해낸 거야. 그리고 그 세력이 결국 바빌로니아에서 쫓겨났던 그 세력이라는 걸 알아냈어.”

아직 입은 열리지 않는다. 녀석은 내 머리맡에서 소설 읽듯 이야기를 계속 한다.

“여기서 우린 고민했어. 이제까지의 연구는 그 세력을 추적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지, 우주의 근본 비밀을 알아낸 건 아니었거든. 치나깐은 표범의 줄무늬에서 그걸 알아냈지만 우리는 어떤 계시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다시 지루한 조사를 시작했어. 거의 마지막 도전이었지. 한반도와 일본에 한해서 남아있는 바빌로니아의 후손들을 찾아 나섰어. 사상 유래가 없는 조사야. 두 나라의 모든 사람들의 계보를 조사하는 거야.”
"나, 난 못 참겠어. 지금 우리 밖에 없는데 미리 해치워 버리는 게 어때."

또 다른 목소리였다.

“안 돼. 규칙을 지켜야 돼. 규칙이야. 규칙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참을 수 있었던 거야. 이야기를 끊지 마. 모든 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이 애의 선택에 달렸다고.”

목에 서늘한 느낌이 데어졌다.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이대로, 살짝 그어 버리기만 하면 끝나는데…… 이걸…….”
“자, 자. 이야기를 마치자고.”

눈앞에는 빈 의자가 있었다. 녀석은 거기에 앉았다. 나는 힘을 쥐어짜내 말했다.

“말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눈앞에 실실 쪼개는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아른거린다.

“말했잖아. 세계의 종말.”
“그럼 너희들끼리 뭐라 지랄거리든지 왜 날 이렇게 건드리냐고! 당장 안 풀어 이거!”
“큭큭, 인로야. 네가 자꾸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니 이러는 거지. 네가 이야길 잘 들었어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커피에 생각이 미쳤다. 미루와 선생님과는 2년째 같은 반이었다. 각본은 처음부터 짜여 있었다. 녀석은 다시 말했다.

“우리는 또한 신라시대부터 박씨의 모든 가계랑 보학을 연구했어. 비밀은 거기 있던 거야. 박인로 너는 아달라왕계의 경명왕과 그 아들 밀성대군, 그리고 난계공으로부터 이어진 박씨 비밀 혈통의 직계 혈손이야. 그동안 아무도 알 수 없게 방계의 방계와 수많은 분파 속에 네 핏줄을 감춰두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너는 고대로부터 이어온 우주의 비밀을 보존하고 있는, 우주를 지키는 영웅으로 태어났단 말이야. 이걸 봐. 현재 존재하는 모든 박씨의 가계와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족보야. 박씨가 뭔지 알아? 한국 3대 성씨라고. 그중에서도 조선말 위조된 성씨랑 계보까지도 수두룩하다고. 우린 그 속에서 널 찾아냈단 말야. 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있는 종이뭉치를 내 내 눈앞에서 흔들어대더니 얼굴에 던져버린다. 수많은 종이가 흩날려 떨어졌다.

“알겠지? 우리가 왜 그러는지. 넌 세계를 구할 영웅이고 우린 악당이라고. 큭큭. 이제 알겠나? 너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데 그만 그걸 알기 전에 먼저 붙잡혀 버린 거야.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내 머리를 움켜잡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생님도…… 너도 완전히 돌았어.”
“너희들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미쳤고 안 미쳤고는 너희가 정하는 거니까. 하지만 두고 봐. 진짜 진실이란 누가 함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좋아. 그럼 어쩔 생각이지? 그 칼로 그어버릴 거야? 기회를 잡았으면 빨리 처치해야지. 어느 영활 봐도 주인공은 멍청한 악당의 여유를 통해 부활 하잖냐.”
“그럴 순 없어. 규칙이거든. 대신 너한테는 기회가 주어져. 너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돼. 그리고 우리와 손잡는 거야. 네가 우리 편이 되고 고분고분 따라온다면 더 이상 괴롭게 하지는 않을게. 너만 얻는다면 우리의 염원과 계획이 완성되는 거야.”
“근데 난 세상을 구하고 어쩌고 할 생각이 없거든? 왜 너네 멋대로 멀쩡한 사람 영웅이다 어쩐다 하고 몰아가는 건데?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쩔 거야?”
“그러면 우리 일이 끝날 때까지 널 감금할 수밖에 없어. 어차피 결과는 같아. 네 의지가 세상을 바꾸느냐, 끌려 다니느냐의 차이지.”
“그럼 가만히 얘기해 보자.”
“그래.”
“내가 영웅이라고?”
“그래.”
“가계니 뭐니 하는 건 그렇다 치고, 그럼 너흰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건데?”
“할 수 있으니까. 아주 사소한 권력욕이야. 우리의 의지로 우주의 가장 큰 일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 말야.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면서도 오만한 존재니.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자신들의 우스운 권력 행사에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단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게 인간이야. 사회로써가 아니면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게. 이럴 바엔 우린 우리 의지로 끝을 맞이하자고 한 거지. 우리의 뜻으로 가장 큰 절대존재를 끝내자는 것 이게 우리에게는 최선의 주체성을 찾는 거고 의지를 가진 자로써의 존엄성을 찾는 거라 생각해.”
“그럼 어떻게 멸망시키겠다는 거지?”
“아직 말 못하는데. 곧 알게 돼. 자. 우리가 이 밧줄을 풀 수 있게 도와줘.”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어보였다. 저들의 논리는 완벽했다. 왜냐하면 나는 신화나 역사, 가계에 대한 반박을 하지 못했고 피차간 증거를 검증할 방법이 없고 무엇보다 여기는 밀실이고 나는 감금당해 있기 때문이다. 이 침침한 방, 그들의 무리 속, 그리고 그들만의 세계는 밖으로 소통할 길 없는 내적으로 완전한 또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세계는 외부 세계와의 접변이 없는 한 거의 영원히 유지된다. 사이비 종교단체의 광기처럼. 적당히 순응하는 척 하며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는 것이 상책일까? 아니, 여기는 결국 학교 안이니 저들도 끝까지 이 안에서 날 잡아 두지는 못할 것이다. 학교도 저들과 한 패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글세, 난 영웅이고 악당이고 관심 없거든? 그러니까 날 그냥 놔주는 게 어때.”
“그렇겐 못해. 너한텐 그 두 가지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 운명을 거부할 순 없어. 그나마 네 의지로 네 삶을 살 수 있는 건 우리와 함께 하는 거야.”
“뭘 어쩌자고! 진짜.”
“응, 그리고 아니. 대답만 하면 돼. 종말은 사실 아무 것도 아냐. 죽음은 우리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돼. 정 힘들면 천천히 생각 해. 어차피 네가 대답 못하면 계속 묶여있을 거고 우리를 따르겠다고 하는 순간 풀려날 거니까.”

다시 종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녀석은 나의 눈을 천으로 감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했다.

“오늘 수백 명의 동지들이 모여 회의를 할 거야. 그리고 향후 네 처분이 결정 될 거야. 시간은 그때까지 밖에 없어. 내가 다시 왔을 때 대답을 못하면 거부한 걸로 간주하겠어.”

그리고는 선생님과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조금 전의 빠진 이야기를 보충하자면, 나는 선생님의 심부름을 갔을 때 과학실에서 담당 선생님을 만났었다. 그 선생님은 과학실 키를 분실해서 여벌 키를 만들 때까지 마스터키를 써야 하니 과학실 열쇠는 빼서 그 선생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말하셨다. 그래서 담임선생님한테 돌려준 키 뭉치에는 하나가 빠져있었고 그 키는 내가 쥐고 있었다. 키를 반납할 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그리고 내가 기절했을 때 손을 꼭 쥐고 있던 것은 천만의 행운이었다. 나를 묶은 끈은 노끈이었다. 팽팽하게 조여진 끈 하나를 십분 정도 긁어서 어렵지 않게 끊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나는 방 안을 뒤져 빠져나갈 데 쓸 만한 도구가 있나 찾아보다 괜찮은 물건을 집어 들었다. 나는 나무 배트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수위 아저씨가 절단기로 자물쇠를 끊고 나를 구해주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야자 시간이었다. 이제 그들에 대해 알아보고 학교 차원의, 여의치 않다면 공권력의 제제를 가하는 것과 무시하고 계속 피해가며 지내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병이라고 치면 너무나 심각하고 놀이라 치면 너무나 악랄한 자들이다.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갇혀 있었다는 것만 해도 학교에 알려진다면 시끄러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까. 일단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교실에 가 보았다. 미루와 담임선생님은 보충시간부터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교무실에도 선생님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둘의 자리는 급하게 떠난 듯 정리되지 않은 그대로였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수업 들어가야 할 교실까지 확인하고는 다시 동아리방으로 갔다. 캐비넷에는 영어와 한문이 뒤섞인 문서와 몹시 낡아 보이는 고서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분석해 볼 여유는 없었다. 벽의 달력에는 여러 가지 표시가 되어 있었다. 오늘 날짜에는 크게 매직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고 ‘9:17’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이 녀석이 말한 회의시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인지는 방안 어디에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 비슷한 동그라미는 이번 달 여러 곳에 있었다.

그들의 묘연한 행방과 말의 진위 여부가 머릿속에서 멀미할 듯 뒤섞이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믿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미쳤든 제 정신이든 그들은 분명히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모임을 갖는다는 것도 사실일까? 9시 17분이라면 30분이 조금 넘게 남았다. 녀석의 성격과 중책을 맡고 있다는 증언을 토대로 녀석은 늦어도 아홉시까지는 그 곳에 도착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녀석이 간 장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의 차를 타고 갔다고 가정한다면 8시부터 9시까지의 반경을 그릴 수 있다. 또 나는 세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회원이라는 증언에 집중했다. 그 말의 진실성이 어느 정도든, 그 말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다면 검토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의 말대로 저명한 인사가 다수 모인다면 그 자취가 완전히 가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빠르고 적절한 방법을 찾아 아는 PC방으로 갔다.

광활한 공간에 너부러져 있는 정보 사이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첫 번째로 입력해 본 키워드는 ‘방한’, ‘내한’ 이었다. ‘깜짝’, ‘은밀’, ‘비밀’ 등 그 밖에 저명인사가 남 몰래 혹은 뚜렷한 목적이나 행로 없이 방한한 사실을 포착했을 때 기사로 나올만한 어휘는 총동원해서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결과는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내 가정(혹은 녀석의 증언)이 틀렸다든가 그들의 움직임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였다. 다음엔 국내 인사의 수상한 동향이 있나 찾아보았으나 그도 실패하였다. 녀석의 말을 망상환자의 헛소리로 믿어버리고 조사를 포기하려는 찰나, 나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단서를 찾아내었다. 한 익명 게시판이었다.

-실종된 샘 월튼이 한국에 나타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소만, 지금 찾으려니 간 데가 없소. 또 그걸 말하는 사람도 어디에서도 안 보이오. 어떻게 된 것이오? 네이년이 기사를 삭제하는 거요?

그 밑에는 이렇게 댓글이 달려 있었다.

-나도 그걸 봤소... 위클리뉴스의 박영효기자라는 건 기억하오만, 그 정도면 헤드라인에 뜰 만한 뉴스던데 어디서도 그런 기사가 안 보이니 수상하오. 혹시 음모가? 아니면 망측하리만한 오보라 부끄럼을 알고 자삭 했다든가.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우선 나는 샘 월튼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기사를 검색해본 다음 신문사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박영효기자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예전에 개인적으로 신세진 일이 있었는데 제보할 게 있으면 그에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는 핑계면 충분했다. 신호음 다섯 번만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박영효기자님이시죠?”
-네. 무슨 일이시죠?
“샘 월튼에 대해 여쭐 것이 있는데요.”

당황한 듯 잠시 우물거리더니 말한다.

-샘 월튼은 왜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기사가 삭제된 걸 봤습니다. 그 뒤로는 샘 월튼에 대해선 흔적도 안 보이고요. 전……”
-전 할 말 없습니다. 정 궁금하면 본사에 문의하세요. 그럼.
“아 잠깐만요! 진상이나 뭐 그런 걸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의 소재에 대해 아는 것만이라도 좀 알려주세요. 알고 싶은 게 그거니까.”

다시 뜸을 들인다.

-나도 무슨 일인지는 몰라요. 그 사람에 대해서 나온 기사는 모두 누군가에게 검열됐어요. 포탈에서 그랬는지 그 사람 쪽에서 손을 썼는지 정부에서 건드리는지 몰라요. 전 그냥 샘 월튼이 그랜드힐튼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 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랜드힐튼호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정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무얼 더 알아낼 수 있을까. 전화해서 물어본다고 가르쳐줄 리도 만무하다. 호텔과의 거리는 한 시간이 넘는다. 아마 샘 월튼은 진작 호텔을 나섰을 것이다. 그 시간만 알 수 있다면 범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호텔을 떠난 시간을 알아내려면 직원으로부터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장애물은 나.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나’를 바꾸면 된다. 다행히 나에게는 ‘나’를 대체할 만한 뒷 배경이 있다. 나는 카운터로 갔다.

“오늘 야자는 안 하냐?”

경상도 억양이 녹아있는 중년 남자. 그리고

“아저씨, 제 만랩캐릭 사고 싶다 하셨죠?”
“그래, 그래. 이제야 팔 맘에 생겼나.”
“그냥 줄게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정말이가? 그래. 그게 뭔데?”
“경찰 사칭 좀 해 줘요.”
“뭐라고? 뭐 하는데 그래? 잡히면 어쩌려고.”
“내 핸드폰으로 해요. 아저씨가 걸릴 일은 없어요, 그럼.”

잠시 실랑이 뒤에 내 계정을 통째로 내주다시피 하고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나는 종이에다 대사를 써 주었고 아저씨는 그것대로 호텔에 이야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아저씨의 목소리와 말투는 딱 경찰의 그것이었다. 만사에 호기심을 잃은 공무원의 말투. 그것은 학교 선생님에게도 발견되는 메마르고 무심한 말투이다.

“강서경찰서 강력1팀 박노계형사입니다. 에, 샘 월튼씨로부터 신상 보호 요청이 들어왔는데요. 지금 통화할 수 있습니까? 네, 외출중이라고요. 몇 시에 나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네네. 7시 50분 말이죠. 알겠습니다. 경찰이 보호해야 하는데 아시겠지요? 신원에 대해 각별한 주의 부탁합니다. 들어오시거나 행방을 알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 주십쇼. 네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 버렸다. 7시 50분. 나는 그것을 토대로 예상 도착 시간의 범위를 그릴 수 있었다. 도로 사정에 밝은 아저씨의 도움으로 영역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었다. 서대문을 기점으로 한 호텔의 원과 학교를 기준으로 한 미루의 원이 접하는 부분, 부천과 광명시를 잇는 그 일대가 그들이 모일 장소임이 분명했다. 물론 이는 샘 월튼이 녀석과 한 패이고 그들이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는 가정이 전제돼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홉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남은 것은 발로 뛰며 가설을 검증하는 단 한 번의 기회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이크라이더였다. 나는 내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바이크를 몰고 다녔지만 나는 어린애일 뿐이고 길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PC방에서 인쇄한 지도를 보며 추정지역에 들어섰다. 하지만 부천은 하나의 도시고 길은 서울 못지않게 많았다. 유명 인사들이 비밀 회담을 갖는다면 어떤 지역에 모여야 할까? 몇 명이 모이는 지 쉬 짐작되지 않아서 어디를 타겟으로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택시 운전사, 각종 배달원, 트럭 장돌배기, 그리고 단속중이거나 순찰중인 경찰이나 또래 라이더가 적당했다.)에게 막무가내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성과는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차, 외국인이 혼자 운전하는 리무진, 정장을 빼입은 중년 남성을 가득 실은 봉고차 등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 가정, 그리고 녀석의 말이 맞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헤매기를 한 시간 정도. 확실히 수상한 차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타고 있는 버스 하나가 그 노선과 전혀 상관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버스를 쫓았다. 버스는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3

버스는 인가가 없는 한적한 길가에 섰다. 사람들을 내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 버렸다. 나도 멀찌감치 내려 그 사람들을 쫓았다. 내가 추정한 지역에는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그들은 두런두런 떠들며 점점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길도 밭도 비닐하우스도 없는 텅 빈 지역에 허리까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철근, 목책 등 폐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벌판 한 가운데 커다란 창고 건물이 있었다. 오래전 버려진 그 건물을 그들의 기지로 쓰고 있는 것이었다. 창고 가까이에는 수 십대의 차가 주차돼 있었다. 내가 쫓는 사람들처럼 단체로 온 자들이 많았는지 합승차나 심지어 트럭, 컨테이너 차량도 보였다. 다만 모두들 안에 들어가 있는지 밖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창고에서는 현악기 소리가 은은히 새어나왔다.

가만히 숨어서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데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늦으셨군요.”
“이제 도착했네. 아직 대회는 시작하지 않았는가.”
“이제 막 식전 행사가 끝났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선생님들 자리는 B-17구역에 있습니다.”

밖으로 나온 자는 담배를 피우고는 다시 들어갔다.

나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가를 피해 창고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1층의 입구 말고도 계단을 통해 2층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 거기로 올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창고 안은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고급호텔의 디너쇼처럼 번쩍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수백 어쩌면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연회 중이었다. 녀석의 말이 실체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음악이 멎었다. 조명이 조금 어두워지고 그들은 일제히 한 쪽을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쪽이 무대인 듯 했다.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174차 신 인류 전당대회에 참석해주신 지구의 귀빈 여러분, 곧 본 행사가 시작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목소리는 천미루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사실도 놀랄 거리가 되지 않았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켜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는 전파가 닿지 않았다. 동영상에 이들을 담기 시작했다. 의식용인 듯한 기묘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소리 내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각도를 잡기 위해 창가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차, 문이 열려 자빠지고 말았다.

“뭐야, 넌?”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사내는 내 얼굴과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는 나를 일으켜 건물 안으로 차 넣었다. 나는 두들겨 맞고 꽁꽁 묶여 어떤 방 속에 집어던져졌다. 이 방에서는 무대의 모습이 잘 보였다. 미루가 연설인지 설교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뻔하게도 우주 종말의 당위성 나부랭이였다. 기본적으로 내게 한 이야기에 역사, 철학, 과학 등 잡다한 개념을 접붙여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물론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가 멎어가고 미루는 말했다.

“다음은 처단 의식이 있겠습니다. 우리 회사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서 구 인류에 정을 떼지 못하고 망설인 자, 이적 행위를 목적으로 가입한 자, 품행이 불성실하여 회사의 발전에 해가 되는 자, 회사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자 245명에 대한 처형이 있겠습니다. 식은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무대에는 한국대표 박영효기자가 오르겠습니다.”

천장에서 철창이 내려왔다. 그 안에는 실신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 대고 보았다.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몹시 얻어맞은 듯 피투성이였다. 마음속으로 설마 이런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 하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곧 무대 양쪽에서 영국 근위대복 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 총을 들고 절도 있게 걸어 나왔다. 뭔가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머리가 하얘져서 뭐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소리에 그들은 총을 철창에 겨누었다. 또 다른 신호와 함께 동시에 울려 퍼진 총 소리가 창고 안을 메웠다. 피는 물 새듯 떨어졌다. 사람이 죽었다.

나는 그들에게 협조하겠다고 말함으로써 빠져나갈 기회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공공연히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었다. 같은 편이 된다고 해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궁리를 했다. 식이 끝나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이 방과 계단은 죽 이어져 있으니 포박만 어떻게 한다면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물건이 있었다. 어두워서 처음엔 못 보았지만 상자들 뒤에는 LPG통이 잔뜩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건물이라 별도의 동력원이 필요했으리라. 가스를 살포하면 함부로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다. 2층 복도만 빠져나가면 바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서 뭔가 줄을 끊을만한 것을 찾으려는 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끌고 내려가 버렸다. 계속 뭐라 떠들고 있던 미루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여, 여러분! 방금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제가 잡아둔 구원자가 탈출했다 합니다.”

좌중은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 구원자가 바로 여길 찾아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올리겠습니다. 구원자 박인로입니다!”

이제껏 조용히 떠들거나 박수나 치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테이블까지 엎어 버리고 그들은 무대 가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 옆을 지나 끌려가는 나를 발견했고 더욱이 큰,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빨갛게 충혈 되었고 내게 쏟아질 것처럼 부릅뜨고 있었다. 나는 무대 위에 세워졌다. 침착해야 한다.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으나 심장은 주인 잃은 듯 그들과 함께 날뛰었다.

미루는 그들이 진정되기를 잠시 기다리더니 입을 열었다. 겉으론 침착해 보여도 그의 눈 역시 다른 이들처럼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열망을 억누르고 있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한 눈.

“자, 여기, 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구원자가, 바로 여기, 눈앞에 왔습니다. 전 세계에서 지켜보고 있는 신 인류여러분 여기 모인 여러분. 수 없이 많은 우주와 속박을 견뎌 온 여러분! 억겁이라는 단어를 감히 누가 쓰겠습니까!”

우리! 하는 하고 그들은 외친다.

“나유타라는 숫자를 감히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자 이제 순간이 왔습니다. 신인류의 오랜 숙원의 성취가 눈앞에 왔습니다!”

그는 내 밧줄을 풀라고 지시했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왔다. 결정해라. 우리와 함께 당당히 종말을 맞이할 거냐, 비굴하게 종말 ‘당할’거냐.”

어째서 같은 결과를 놓고 그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가. 그의 말대로 종말이 온다면 결국 모두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내가 도, 돕겠다면……,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는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당하게, 절차대로, 죽으면 돼.”
“뭐라고?”
“너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거야. 죽임 당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죽는 거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왜 아무것도 안한 날 이렇게 죽이려 하는 거냐고! 시발, 좀 말해봐!”
“넌 우주가 완전하다고 생각해?”

또 그놈의 산파법이다.

“우주가 탄생했다고 말하려면 말야. 하아…… 무의 공간을 상정해야 돼.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생겨. 무에서 유로 바뀌려면 그 작용을 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잖아. 그게 없으면 어떻게 탄생이 생기겠어. 하지만 그 순간 ‘무’라는 게 모순이 돼 버려. ‘우주의 탄생’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야.”

흥분에 겨워 호흡을 고르고는 다시 말했다.

“어떤 이론도 존재와 탄생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하지 못했어. 우주를 설명하는 모든 주장과 창조론은 본질적 차이가 없어. 우리는, 우주는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야. 우리가 보는 것, 마하는 것 모두가 가짜야. 있을 수 없는 존재라고! 근데 어째서 우리는 있는 거야? 왜 우리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거야, 왜! 우리는 원래 없어야 됐어. 왜 우주는 자꾸 생겨 나냐고! 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는 내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군중들은 무언가 구호를 외쳤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은 생태계에까지 이어지지. 생명은 먹고 생명을 낳고 또 생명을 먹어. 파괴와 탄생은 완전한 동의어야.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완전한 것을 추구해. 마치 자연 상태가 완전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는 것처럼. 그건 사실 끊임없는 모순의 균열을 땜빵해가는 과정인데 말야.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보장되고 뿌린 대로 거두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걸 바라잖아. 그래놓고 뭔가가 비틀리면 슬픔이라는 현상을 내세우고 고통이라는 자극을 떠올리고 그걸 고치고 바꾸려 들어. 그럴수록 우주의 균열은 더욱 커져만 가고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우주는 더욱 큰 모순을 품은 채 계속 존재하고 있어. 인간은 멍청하게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살아. 우주의 거대한 시간에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냥 사는 거야. 모순에 영원히 종속당한 채 말야.”

그는 어느덧 다시 침착한 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우주는 자신의 구조적 결함을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 모든 균열을 한데 모아 생긴 거대한 틈을 메워줄 무언가를. 우주의 모든 모순을 한 곳으로 모아 어긋난 우주의 논리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프로세서가 만들어졌어. 모든 모순이 흘러들어가 세상으로 가는 통행증을 발급받아, 멀쩡하게 세상에 통용되는 거야. 우주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가 딱 하나 있어. 그것은 생명의 형태로 존재하고 그 생명이 살아있는 한, 우주는 구조의 모순에도 무너지지 않아.”
“그러니까…… 그렇다면…….”
“그래. 네가 바로 그 존재야. 바빌로니아에서부터, 아니 어쩌면 인류로 진화하기 이전부터 그런 책임을 맡아 핏줄을 이어온 그 존재가 바로 너야. 이 우주를 지킬 구원자이면서도 너와 함께 우주를 소멸시킬 수 있는 파멸자야. 알겠어! 네가 바로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의 모든 것이라고!”
“이게 뭐, 말도 안 되는…….”
“네가 죽어보면 되는 거야.”
“시끄러! 그럼 이 넓은 우주에 왜 인간에게 그런 게 있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우린 수많은 우주를 거쳐 환생해 왔어. 어느 날 한 우주에서 이 비밀을 알아낸 존재가 우주를 소멸시켰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의 세계에서 무한대의 시간이 지난 다음 또다시 모순이 탄생해. 또한 그 우주도 소멸했어.”
“웃기지 마!”
“그렇게 수천, 수만, 수억 번의 탄생과 죽음이 반복됐어. 이게 우주의 진짜 모습이야. 모순을 낳은 우주와 참된 주체성을 얻은 작은 존재의 끝없는 싸움이야. 어쩌면 우연히 우주가 종말 했던 때도 있었겠지. 정상적으로 혈육을 남기지 않으면 대가 끊기니까. 그 수많은 시행 끝에 지금은 인간, 그 중에서도 네가 선택된 거야. 그 장대한 운명의 고리를 자기 손으로 끊고 싶지 않겠어?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를 깨달은 거야. 그리고 널 찾을 때까지 수 없이 많은 이의 인생을 바친 거야. 넌 우리를 따라야 해. 인간의 수 단위로 판단할 수 있는 세월동안 진행된 일이 아니야. 이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의무를, 넌 견딜 수 있겠어? 집어던질 수 있겠어?”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저만의 말로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아무런 감각도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 많은 사람과 녀석의 말에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광신적 믿음 앞에 나는 도망갈 길 없는 희생양일 뿐이었다. 나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미루는 다시 내게 말했다.

“빨리 골라. 죽을래, 죽임 당할래?”
“꺼져! 내가 죽긴 왜 죽어!”
“죽어!”
“싫어!”
“뭘 고르든 넌 죽어!”
“안 골라 병신아!”

녀석은 다시 군중에 대고 말했다.

“대답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 뜻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함성소리와 스피커 소리, 그리고 녀석의 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와 함께 창고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바닥, 천장, 우주, 이 모든 것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축제였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구분이 없었던 그 무렵, 인간은 공포를 창조하고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는 그 대상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 것뿐이었다.

“자, 여러 분이 가입하실 때 발부받은 번호로 추첨을 하겠습니다. 뽑히신 분들은 최초로 구원자에게 칼을 쑤셔 넣을 영광을 갖게 됩니다. 역사여! 되풀이 된 운명이여! 가장 위대한 주사위의 신이여!”

천장에서 커다랗고 투명한 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 안에서는 수많은 구슬이 들썩이며 튀어 올랐다. 그리고 구슬 하나가 튜브를 타고 굴러 내려왔다.

“이백 칠십번! 이백칠십번 계십니까? 네, 일본에 계시다는 군요. 축하합니다. 다음은! 십구번! …….”

모두들 구슬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머리를 들어 슬며시 옆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 중 하나가 나를 지목했다.

“저기 도망간다!”

그러고 그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손에는 나이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닿기 전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뒤의 누군가가 연기가 나는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감히 규칙을 어기고 먼저 손을 대?”

그러나 그도 다른 누군가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쓰러뜨린 자는 또 다른 자에게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자는 다른 자의 발목을 붙잡아 다른 누군가를 무너뜨렸다. 누군가는 칼을 마구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다른 누군가는 사방에다 총을 난사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사람의 무리에 파묻혀 버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로 얽혀 먼저 나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미루가 규칙을 지키라고 악을 쓰며 외쳤지만 그는 구군가의 총알에 목을 관통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나를 에워쌌지만 서로가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를 공격할 뿐이었다. 창고 안은 총 소리와 고함 소리, 비명 소리가 가득 착 수라장일 뿐이었다.

나는 밀려 넘어지고 말았고 발길 새로 틈을 찾아 기어나갈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 한 자루를 주워들고 계단으로 달렸다. 계단 위에서도 많은 자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만 나의 머리칼을 움켜쥔 한 사내의 무릎에 총을 쏘고 말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굴러 떨어졌다. 계단 밑에서도 수많은 자들이 몰려왔다. 나는 위아래 고민하다 위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활로를 뚫지 못하고 복도 한 쪽으로 밀리고 말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각목으로 문을 막아버렸다. 각목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문이 열리고 달려오던 자들은 흠칫 멈춰서고 말았다. 방 안에는 이미 역한 냄새의 LP가스가 가득했다. 방안 모든 통의 밸브를 열어 버린 것이다. 나는 총을 통에 겨누고 외쳤다.

“다가오지 마! 폭파시켜버린다!”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게 바라는 바다!”

아차 그랬었지, 하며 그들과 통 쪽으로 총구를 번갈아 겨누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당황한 그들 사이로 틈이 열렸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떠올려 가며 다리를 쥐어 짜 달렸다. 계단을 굴렀는지 떨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그저 달릴 뿐이었다.



4

나는 귀청을 찢는 굉음에 넘어지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니 창고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솟고 있었다. 아니, 불길은 땅을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유황기둥이 쏟아진 듯, 창고를 휘감은 불길은 창고를 짓밟듯이 태우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었다. 그대로 소금처럼 굳어져 타오르는 불길을 멍히 보고만 있었다.

나를 깨운 것은 누군가였다. 그는 나를 들어 올리더니 그의 바이크 뒤에 태웠다.

“내가 멀쩡한 걸 보니 늦지는 않은 모양이네.”

나는 바싹 마른 목을 쥐어짜 말했다.

“누, 누구세요?”

남자는 말했다.

“파괴하려는 자가 있으면 지키는 자도 있기 마련이지.”

그는 담담히 말하고는 나에게 헬멧을 씌워주었다.

“난 운명을 믿진 않지만 너만큼은 그래선 안 될 것 같군.”

그의 바이크는 화마가 휩쓴 생지옥을 무심히 빠져나갔다.
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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