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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남가일몽(南柯一夢)

2005.06.02 17:1906.02

충청도 산골에 3대째 진사에 그친 양반 집안이 있었다. 4대째 독자 역시 진사시에 무난하게 급제하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인 김진사와 구분하기 위해 독자를 김선비라 불렀다.

식년시의 방이 전국에 나붙자 김선비는 작심하고 봇짐을 꾸렸다.

“아버님, 소자는 급제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사옵니다.”

김진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에게 말했다.

“지나친 집착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소자는 더 이상 진사 집안이라 불리기 싫사옵니다.”

김선비의 고집은 단단했다. 김진사는 한숨을 쉬며 아들을 떠나 보냈다.

걸음을 재촉한 선비는 경기도로 접어드는 고개의 턱에서 땀을 식히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여름 초입이었다. 한 노인이 정자에 홀로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노인이 선비를 보았다.

“이리 올라오시게.”

복건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르신.”

선비는 정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노인이 권했다.

“상대해주시지 않겠는가? 고된 길의 심심풀이가 될 것일세.”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소생의 길이 머옵니다.”

노인이 선비의 얼굴을 흘끗 보고 바둑알을 내밀었다.

“헛걸음 도중에 심심풀이 시간이 무어 나쁘겠는가? 사양 마시게.”

선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헛걸음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문기(文氣)는 있으나 관운(官運)이 없거늘, 헛걸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선비는 입술을 사려 물었다.

“아니됩니다, 어르신! 소생, 집안의 숙원을 걸머졌사옵니다!”
“허나 없는 관운을 어찌 만들어내겠는가? 불철주야(不撤晝夜) 정성이 있어도 간신히 잡을까 말까한 관운이거늘 무턱대고 간다고 어찌 생기겠는가?”

넌지시 운을 띄우는 노인의 말에서 김선비는 희망을 엿보고 달려들었다.

“가문의 숙원을 풀기 위해서라면 소생! 장작을 지고 불길에 뛰어들 수도 있사옵니다!”
“어허.”
“어르신!”

노인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선비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한 줄기 흘렀다. 구름이 흩어졌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네.”
“망극합니다.”

김선비는 고개를 조아렸다.

노인은 선비를 한 초가로 데려갔다.

“나무를 해 오게.”

선비는 3년 동안 나무를 했다.

“어르신, 관운이 트였습니까?”
“아직 멀었네. 물을 길어오게.”

선비는 3년 동안 물을 길었다.

“어르신, 이제는 관운이 트였는지요.”
“아직 멀었네.”
“어르신!”
“어허, 어찌 이리 성급한가? 자네의 공부가 모자란데 내가 어찌해줄 수 있겠는가? 불을 때게!”

선비는 3년 동안 불을 때었다.

“어르신, 이제 공부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멀었네!”

노인은 무릎 꿇은 선비를 내팽개치고 휭하니 나가버렸다. 선비는 아궁이 앞에 앉아서 장작을 집어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으흠, 으흠.”

선비는 나무를 마저 집어넣고 문지방을 넘어 나가보았다. 한 승려가 서 있었다. 승려는 인사를 하지도, 바랑을 내밀지도 않은 채 나온 선비의 얼굴을 곰곰이 살폈다. 구름 한 줄기가 사라져가도록 내내 살피는 눈길에 선비는 불쾌해졌다.

“무슨 일이시오?”

승려는 가만히 섰다가, 벼락같이 노성을 터뜨렸다.

“이놈! 그만 깨지 못할까!”

선비는 맞받아 화를 냈다.

“뭐요!”
“언제까지 홀려서 여우잠을 잘 셈이냐!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승려는 지팡이를 들어 선비의 정수리를 후려갈겼다. 선비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해는 아직 쨍쨍 밝았다. 승려가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비는 고개를 돌렸다.

갓 쓴 여우 한 마리가 캥캥 웃으면서 도망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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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도중에 거울에 여우이야기가 올라올 줄이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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