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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옛 하늘

2005.05.25 03:3305.25






  노을 붉고 바람 차웁던 날이었다. 능림성이 자화국의 군사에 둘러싸인 뒤 항복을 강요받은 지 이미 한 달이더라.
  한 달간 아침에는 성벽을 타고 오르는 이들을 떨쳐내기 위해서 성 안의 모든 이들이 나서 싸웠고, 저녁에는 시체를 불태우고 쌀을 끓이며 보냈다. 악사들은 매일 저녁마다 노을을 등진 채 거행되는 초라한 장례 의식을 위해 노래해야 했는데, 더러는 싸우다 죽고 더러는 병들어 죽어 남은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러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사자를 위한 노래는 더는 아니 부르겠다며 고개 저으며 한탄하였다. 울음을 간신히 삼키던 악사 곁에서 제문을 적어 내려가던 문사는 함께 울었는데, 눈물이 흘러 글귀에 닿아 종이에 넓게 번졌다.
  저녁은 망자들을 위한 시간이었으므로, 능림과 자화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전투를 그치고 시신을 수습해 돌아갔다. 자화국의 군진과 능림성에서 동시에 시체 불태우는 연기가 올랐고, 노래와 화덕 연기가 그 뒤를 따랐다. 병사들은 시체 탄 냄새와 쌀 익은 냄새를 함께 들이마셨다. 군사를 따라온 악사가 소리를 길게 뽑아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침략해온 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쌀죽을 삼켰다.
  통곡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노래가 끝나면 능림성주의 아내는 직접 북채를 들어 북을 쳤다. 능림과 함께 살아온 오랜 북은 온몸을 떨며 길게 소리하였다. 무당들은 북소리를 듣고도 그것이 길한 소리인지 불길한 소리인지 가리지 못했다. 능림의 무당들에게 신이 내리지 않은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었고, 사람들은 영험을 기대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무당들은 긴 소맷자락을 잘라내고 맨손으로 돌을 나르거나 창을 휘두르며 싸웠다. 보통 사람들과 함께 부상을 입었으며, 또한 죽었다. 무당들은 저녁이 내려 시신을 수습할 때 동료의 시신을 발견하면 다른 이들과 같이 옮겨다가 불질렀다. 솟아오르는 것은 같은 연기와 같은 먼지였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신의 법이 무너진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무당들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다. 신을 받지도 못하고 전쟁의 승패 혹은, 기후의 변화조차도 예측하지 못하는 무당들이로니. 그들은 배신하지 않았음에도 영험을 잃고 성에 갇힌 채 질 것이 뻔한 싸움을 했다.
  배신함으로써 힘을 얻은 거짓 만신들은 자화국에서 내린 비단과 구슬에 감싸인 채 이길 것이 뻔한 싸움을 구경하였다. 성은 무너지리라. 성주가 죽음을 당했듯 저 고집센 성주의 아내 또한 죽을 것이라. 이제 능림을 끝으로 늙은 세계는 다 무너지리라. 불의 임금께오서 대지를 정돈하고 물길을 바로잡아, 새 세상과 새 하늘을 이룩하실 것이라.
  불의 무당들은 능림이 무엇 때문에 항복하지 않고 버티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이미 대세는 기운 지 오래이고 능림의 성주는 죽었다. 성주가 섬기던 사바라의 바람 임금조차 죽었고, 혼이 봉인되어 영영 풀려나지 못한다. 설령 군사들을 물리친다 하여도 이미 천하에서 고립되어 다른 지역과 왕래할 수도 없다. 반항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사태가 그러하다는 것을, 자화의 무당들은 능림 측에 번번히 지적하여 알려 주었다. 능림은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능림의 백성들은 먼지와 재로 검게 변하다시피한 백색 포를 걸치고 시체들이 연기로 화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싸움을 그치자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죽음은 저녁마다 불에 타서 날아갔다. 노을이 다 지고 밤이 찾아오면 더 이상 무당이 아닌 이들이 모여앉아 돌무더기와 피로 다음날의 길흉을 예측하려 애썼다. 돌 위로 핏방울이 떨어지며 남기는 흔적이 무슨 뜻인지 읽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주의 아내는 북 곁에서 남편의 포를 뒤집어쓰고 말뚝잠을 잤다. 악사들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백성들은 한 곳에 모여앉아 더러는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고, 더러는 소리죽여 울며 밤을 새웠다.
  노을 붉고 바람 차웁던 날이었다. 북채를 쥐고서 잠깐 잠들었던 성주의 아내는 성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무겁게 엉울져 가라앉은 바람 같기도 하였다. 거대한 물살 같기도 하였다. 피처럼 붉은 흐름이 성을 둥글게 채우며 솟구쳐 올랐다. 모든 죽음이 다 거기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 그 흐름을 타고 이제 태어나고 있었다. 광폭하고도 잔잔하고 어둡고도 눈부신 물무리가 몸을 부풀리다가 결국 성벽을 모조리 집어삼켰으며, 멈추지 않고 불어올라 세상 밖으로 온통 쏟아져 나갔다. 죽은 노래와 춤과 기원과 눈물도 다 그 안에서 피처럼 붉었다. 붉게 흐느끼며 멸망으로 번지고 있었다. 하늘의 노을이 무색하리만치 붉은 그것은 기어이 세상을 모조리 먹어치우려는 심산인지, 지평선 너머로 쉬지 않고 치달았다. 멀고도 먼 지평선에서 노을과 그것은, 서로 닿았다.
  다만 고요히.
  그이가 꿈꾸다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을 때, 악사들은 메마르고 지친 시선으로 시체 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성들은 성주의 아내가 북 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이는 어깨에 걸친 남편의 포 자락을 지그시 쥐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북채를 들었다. 이를 악물고 북을 쳤다. 허공을 울리며 북소리는 멀리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성주의 아내에게는 북소리가 눈물, 한숨, 죽음, 또다시 눈물이라고만 들렸다. 그래서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사람들은 피곤함에 질려 주저앉은 채 북에 북채가 닿으며 심장 고동소리와도 같이 우는 것을 그저 오래도록 들었다. 더 이상 하늘에 닿지 않는 소리였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소리였다. 시체가 다 타고 불길이 잦아들었어도 북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성주의 아내는 무당들에게 내일 성이 무너지리라 말했다. 무당들은 피를 내어 돌무더기 위에 뿌리는 대신 서로의 이마에 묻혔다. 손바닥을 마주 잡고 세상에 작별 고하는 무가를 웅얼거렸다. 더는 신이 귀기울이지 않는 기원이 손목에서 손목으로 이어져 둥글게 맺혔다. 무당들은 살해당한 바람 임금을 위해 마른 눈을 쥐어짜 간신히 눈물 흘렸으며, 닫힌 하늘을 바라보고 짧은 소맷자락 떨치며 춤을 추었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악사들은 잠에서 깨어 무당들의 춤을 보았다. 백성들도 일어나 앉았다. 무당들은 아직 이마에 묻은, 마르지 않은 피를 손가락으로 밀어 둥근 매듭 형상으로 그렸다. 우리는 이 세상이 다 지나가더라도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니라. 무당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악사들은 어느새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백성들은 물을 떠다가 서로 몸을 씻었다.
  기어이 이 세상의 멸망을 넘어 살아남을 자는 이 표식을 받으라. 저 배교자들의 세상이 기어이 죄를 받아 무너지고 다시 바람 임금이 중앙을 다스리는 날이 올 때까지, 죽지 않는 표식을 받으라. 우리는 절대로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악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높이 소리하였다. 무당들은 백성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이마에 둥근 표식을 그렸다. 사람들이 벗어던진 흰 포가 쌓였고, 성주의 아내는 그리에 불을 붙였다. 의복들은 불붙은 채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솟치었다. 성주의 아내는 춤과 노래와 비통함 속에서 무리에 섞인 채 춤추며, 끝없이 성이 무너지는 환영을 보았다.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열리고 자화의 무리들이 위풍당당히 그 더러운 발을 들이리로다. 열두 해 동안 싸워왔던 바람 임금의 잔재들은 그것을 끝으로 아주 스러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리라. 저들은 거짓으로 세상을 덮고 본래 주인인 양 행세하며 하늘조차 기만할 것이니라.
  우리가 멸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당의 피묻은 손을 이마로 받으며 성주의 아내는 죽은 남편을 떠올렸다. 칼이 배에 깊이 꽂혔기에 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서로 그것을 잘 알았다. 그이는 죽어가는 반려의 상처를 입술로 쓸었다. 다만 마주 잡은 손길이 지극히 다정하였다. 죽음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뿐이었다. 성주의 시신은 다른 이들과 함께 화장되었고, 유품이라고는 오직 겉옷 한 장만이 남았다.  
  피가 이마 한가운데서 지긋이 움직인다.
  단지 지키고 싶었소.
  무당은 벼랑같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였다.
  바라고 구한 것은 오직 그뿐이던데, 저들이, 우리 하늘을 훔쳐가서…!
  이런 붉은 마음이라니.
  무당은 그이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어찌하리까.
  
  자화 측 불의 무당들은 밤새 능림에서 피가 높은 물결을 이루어 성벽을 넘어 쏟아져내리는 꿈에 시달렸다. 꿈의 의미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아침에 전투는 재개되었다. 능림은 여느 때보다 훨씬 치열하게 대응해왔다. 그동안의 공세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성문이 마침내 부서진 것은, 막 노을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능림의 백성들은 성문으로 몰려들었다. 집어들 무기가 없는 자는 맨손으로 내달렸다. 성주의 아내는 무리의 가장 앞에 있었고, 누구보다 먼저 창에 꿰뚫려 전사했다. 더러는 죽었으며, 죽어가는 이들이 내쏟은 피를 뒤집어쓴 채 아직 목숨 붙은 이들은 싸웠다. 바람 무당들은 죽어가며 피바다가 세상을 휩쓰는 환영을 보았다. 악사들은 아직 부르지 못한 하늘 노래를 되새기며 온 힘을 다해 죽음을 맞이했다. 백성들은 죽어가며 싸웠다. 죽어가며 이미 빼앗긴 하늘의 환영을 보았다. 아무도 물러서거나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싸움이 끝난 뒤 능림의 시신들은 능림성 안에서 불타 스러졌다. 불의 무당들은 능림의 영물인 북을 찾기 위해 성을 샅샅이 뒤졌다. 그들은 엉망으로 찢겨 쓸모없게 된 북과 오래되어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더러운 북채를 찾아내었고, 시체들과 함께 불태웠다.

  첫째 불의 임금은 즉위 후 열두 해가 지난 뒤에야 능림의 멸망을 볼 수 있었다. 사보, 일립, 노릉 등이 즉위 초기에 줄줄이 함락되었던 것과는 달리 능림은 매우 늦게 무너졌다. 그는 성을 남김없이 부수고 불태우라고 명했다. 명은 곧바로 시행되었다. 초대 불의 임금이 옥좌에서 물러나기 일 년 전에야 비로소 자화는, 온전히 옛 것의 허망함을 벗을 수 있었다. 임금은 일 년 뒤 국호를 비사파로 바꾸라는 유명을 남기고 죽었다. 이는 둘째 불의 임금이 등극하자마자 곧바로 시행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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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쓰는 장편에 번외격으로 덧붙인 별전입니다. 세계관만 같..다고 할 수가 있으려나;
거울 단편란에는 처음이라 무지 긴장되는군요;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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