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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람 부는 날

2005.05.10 18:2605.10


딩딩딩딩.
일주일 중 여섯 날이 항상 그러하듯 단조로운 종소리를 기점으로 붉은 벽돌 건물에서 아이들이 꾸역꾸역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즐겁게 떠들며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각종 군것질 거리로 입을 채운 아이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홀로 교문을 빠져나온 I는 집이 아니라 학원을 향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이들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날씨는 매우 더웠다. 잠시 쳐다본 하늘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그나마 간신히 부는 바람도 습하고 찐득여서 오히려 짜증을 부추겼다. 7월 중순.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평범한 여름날이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징후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짙은 녹색의 가로수 잎사귀는 약한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고 I의 발치에 녹아 떨어진 짧은 그림자는 옷자락의 흔들림에 따라 조심스럽게 움찔댈 따름이었다.
I는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 발만 열심히 놀렸다. 순간 더위때문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격한 짜증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불행하게도 땅에는 I의 발에 차여줄 돌멩이는커녕 그 흔한 콘크리트 조각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것은 찝찝한 베이지색의 크림이 말라붙은 아이스크림 껍데기뿐이었다.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쳐다보던 I는 조금 망설이다가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발로 톡, 건드렸다. 그것은 때맞춰 불어온 바람에 떠밀려 I의 다리를 스치고 뒤쪽으로 날아갔다. I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약간 기묘하다고 할만한 것이 I의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껍데기는 분명 흔들거리며 I가 지나온 곳, 학교를 향해 날아가는데 검은 무엇인가가 그 반대방향으로, 바로 I를 향해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I는 검은 물체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동네 슈퍼나 시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깃구깃한 비닐봉지였다. 잠시 후, 바람이 멈추자 비닐봉지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러면 그렇지, I는 피식 웃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I는 익숙하게 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향했다. 파랗고 까만 철제 대문들이 밀집한 회색빛 골목은 거미줄처럼 뒤엉킨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I는 자신의 집과 학교를 연결하는 두어 개의 길만을 알고 있었다. 골목으로 들어가 세 번째 대문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10여 미터를 걷다가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는다. 직진, 직진, 우로, 우로, 좌로. 골목은 바람이 거의 없어도 짙은 그늘로 인해 시원했다. 땀을 식힌 I는 다시 따가운 햇볕 속을 걷기 위해 마음을 다졌다.
골목을 빠져나온 I는 도로를 뛰어 건넜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는 섬뜩함에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도로 건너편, 골목을 빠져나오는 검정 비닐봉지가 보였다. 그것은 곧 달려오는 차 때문에 일어난 바람에 휘말려 팽그르르 회전하며 떠올랐다. 무의식중에 양손이 어깨의 가방끈을 꼭 움켜쥐었다. I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빨리 했다. 어쩐지 뒤에서 스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I는 아파트 단지를 끼고 난 아스팔트 길에 접어들었다. 평소 같으면 담장 대신 쳐진 철망을 타고 올라온 철지난 넝쿨장미의 흉한 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었겠지만 평소와 같은 여유를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뛸 수도 없었다. 뒤에서 오고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긍정하는 행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것쯤은 괜찮겠지. I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아직 거기 있었다.
I는 걸음을 빨리 했다. 이젠 보이지 않을 거야. I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I는 조그만 빌라단지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우측 두 번째 통로 1층이 I의 집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열 걸음. 아홉 걸음. 여덟 걸음. 일곱 걸음. 다섯. 넷. 셋. 둘. 하나.
I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득 바람이 자신을 향해 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닐봉지가 I의 발목을 덮쳐왔다. 맨 종아리에 미끈거리는 비닐이 와 감기고 외마디 비명이 I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비닐 봉지는 발목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와 I를 지나쳐 날아갔다. 그건 그저 평범한 비닐봉지였던 것이다. I는 그제야 가방끈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통로를 따라 올라갔다.
"다녀왔습니다!"
초인종을 누르는 I의 목소리엔 이해할 수 없는 진한 기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비닐 봉지는 어느 청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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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아마도) 여름. 노트에 쓴 것을 2005년 5월에 옮깁니다.
ad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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