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미팅(meeting)

2005.05.09 20:0105.09


....그리고 사물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 다 됐습니다 "

안경점 주인이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허벅지는 어울린다며 건성으로 내 물음에
대답했다. 콘택트 렌즈를 낀 내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봤지
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noting, 이 부질없는 짓거리가 다 그
놈의 미팅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눈이 좋지 않았다. 국민학교(그땐 그렇게 불렀
다)를 졸업할 무렵에는 안경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
었다. 하지만 정말로 문제가 되었던 건, 형편없는 시력보다 더 형편
없는 존재감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조숙했던 얼굴과 조숙했
던 여드름과 분비물.. 점점 투명해져가는 그것들을 보며 나는 결심
했다. 안경을 바꾸기로. 그 촌스럽고 낡은 뿔테안경을.


점점 투명해져가는 내 몸과, 마음과, 미래들을 확인하는 것 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주위의 반응보다, 더 어린 나를 괴롭
혔던 건 내 무겁고 촌스런 안경이었다. 조금씩 세상의 이치와 욕망
을 깨달아가던, 그렇다고 믿었던 그때엔 나는 나와 세상과의 근본적
인 문제가 어떤 안경을 쓰는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
은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였다.


거리는 어색하고 무표정했다. 여전히 퉁명스런 허벅지와, 퉁명스런
인파와 퉁명스런 길을 얼마동안 걸어 녀석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배꼽은 어딨어?_라고 나는 물었고 손가락이 초조한 듯 숟가락을 만
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 XX. 안 나온데, 귀찮다나.
얼마간의 얘기 끝에, 나는- 안경점에서 준 케이스에 넣어뒀던- 안
경을 꺼냈다. 내가 그것을 들고 1인 2역을 하기로 한 것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무책임한 배꼽에게 욕을 하던 우리들
은 약속된 술집으로 들어갔다.


책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잔뜩 빌려서 집으로 가는 도중의 일이었
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나에게 진한 마스카라가 말
을 걸어왔다. 만화책이 아니라 안경에 미소를 둔 채. 처음에는 당황
했지만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나는 그녀가 고등
학교 때의 그 체육복 바지임을 알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재단이었지만 사실 다른 학교나 마찬가지
였던 남고와 여고가 합쳐졌다. 약간의 기대와 냉소 속에서 조심스러
웠던 우리들 사이에서 초록 바탕 검은 줄무늬의, 촌스런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에 뜨였다. 남자 바로 옆에 붙어있던 여자 화장
실을, 복도를, 혹은 그녀의 교실을 활기차게 드나들던 모습이 기억
난다.


"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

" 그래.. "

나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 없는 체육복이 나를 알고 있다
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너무도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이 원숙한 마스카라가 그녀라니.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고, 얼떨결에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고 말았
다. 꼭 연락하라며 수다스럽게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니, 예전의 그
걸음걸이가 생각이 났다.


" 꼭 연락해, 휴학생이 시간도 널럴하잖아. 군대가기 전에 미팅 한번
은 해 봐야지. 니 친구들, 다 품질보증 되겠지? .. "

녀석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은 무진장 기대하고 있었
나보다.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마라 라고 했는데, 대답했던 대로 한
녀석은 배꼽뿐이다. 하긴 워낙 게으르고 폐쇄적인 놈이니까.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아닌 척은 하지만 손가락 녀석은 계속 그
지긋지긋한 숟가락을 조물락대고 있었고, 신문지는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빠듯빠듯했다. 발바닥은 계속 화장실을 왔다갔다한
다. 머리카락 녀석은 머리를 감고 온 것만도 놀라운데, 그 곱슬머리
가 펴져있었다.

어, 스트레이트. 싼 거야_내 지적에 머리카락이 겸연쩍은 듯 말했
다. 계속 뚱하니 앉아있던 허벅지가 비아냥거렸다 ̄그런 너는, 왜
아까부터 자꾸 거울을 보냐, 벌써 몇 번짼 줄 알아.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데, 그녀들이 들어왔다.


모든 욕망은 기대에서 온다. 현실은 기대보다 초라하기 마련이다.
눈과 코와 귀와 입술이 줄줄이 들어와 우리 앞에 앉았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들도 그러했으리라. 마스카라가 눈웃음을 지
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안경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점잖게
내 안경을 흔들어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인사라고 받아들였다.
붉은 입술이 말했다.


" 어떻게 된 거죠? 한 명이 모자라는군요. "

" 저는 여기 있으니, 우리는 다 온 셈입니다. 그쪽이야말로 두 명이
나 부족하군요, 어떻게 된거야? "


내 시선에 대해 마스카라는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스타킹이
수줍게 다리를 모으고 앉아있었다.


체념의 마음에서, 긴장이 풀어진 상황에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갔
다. 나는 내 본성인 경박함을 발휘하여, 내 노력인 박학다식함을 이
용하여 쉴 새없이 떠들어댔고, 역시 언제나처럼 별 호응은 없었다.
그저 온건한 미소, 과장된 따스함이 불안하게나마 자리를 유지시키
고 있었다. 힘빠진 미소, 예의에서 우러나오는 집중력... 우리들은 온
갖 쇼를 다했는데-말 그대로 쇼, 손가락은 예의 그 숟가락 구부리기
쇼를 보여줬고 역시 절망했다- 그저 '재밌군요'가 반응의 전부였다.
그나마 입술이 가장 말이 많았다. 아니 너무 많았다.


" 이 분은-이제 말을 놓아도 되지-, 얘는 말이 원래 이렇게 없어?"

내 안경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마스카라의 말을 가로채며 재빨리 대답했다.

" 원랜 아닌데, 자식이 긴장했나봐. 하여튼, 어디까지 했었지? 아,
보르헤스가 마침내 눈이 멀었을 때....



얼굴이 들어왔다.

BGM: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



늦게 온데 대한 사과와 변명들도, 자기 소개도 이름도 그 무엇도 내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넋을 잃고 그 얼굴을 바라봤다.
확실히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물론 내 취향과도 일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매혹시킨 건 그 실재성이었다. 그 눈과 코와 귀와
입술과 그 보드라운 살결들이 은유가 아닌, 은유를 가능케하는 바탕
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존재하고 있다니, 그건 말이 안 된다. 실재하
고 있다니 그건 불가능하다. 이 세계에서는 파편이 아닌 방식으로,
조각난 채가 아니고서는 '현실적'일 수 없다. 나와 내 친구들은 한
'신체'에 대한, 그 손상된 실재에 대한 은유일 뿐이며 파편일 뿐이
다. 그녀들도 모두 합친다고 해서 결코 전체가 될 수는 없는, 복원
되지 않는 '인간'을 의미하는 언어일 뿐이다. 그런 허구여야 한다.
그런데 이 얼굴은 뭐지?


그녀와 나는 파트너가 되었다. 짝짓기의 결과에 지극히 만족해하는
입술에게 안경을 던져 놓고, 재빨리 그녀와 나왔다. 잠시동안의 사
소한 이야기, 잠시동안의 사소한 진실, 잠시동안의 사소한 웃음 뒤
우리는 마침내 침묵에 도달했다. 자신만만한 서류가방들과 조금은
어깨가 굽은 넥타이들과 자꾸만 뒤쳐지는 여러 색깔의 구두들이 거
리를 분주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화장은 완벽했다. 그녀의 화장은 대학
교 2학년의 그 어설픈 것이 아니었다. 통제할 수 없는 세월에 지친,
그런 원숙한 솜씨도 아니었다. 그 눈과 눈썹과 볼과 모든 얼굴이,
단지 조금 진하다는 것만 빼면, 실재에 근접해 있었다. 즉 실재의
조잡함까지도 재현하고 있었다. 약간의 주근깨와 피로가 완벽성을
완성시켰다. 얼굴보다는 약간 다른 수준의, 다른 방식으로지만-개인
적으론 실망스러웠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자란 없는 것이다-
그 외 다른 부분도 분명 현실감을 갖고 있었다. 내추럴한 베이지 치
노 스커트와 하늘색 니트. 니트 4만 원대 , 스커트 4만 원대.


얼마간 걸었는지 모른다. 내 옆을 걷고 있는- 그 자랑스러운 이미
지의 이미지, 너무나 진짜같은 이미지 라고 생각하며-그 얼굴을 바
라보았다. 조급히 굴건 없다. 어딘가에 분명 흠이 있을 것이다. 정말
실재라도, 인간인 이상은 결여된 곳이 있을 것이다. 고랑처럼 깊게
파여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그러한 상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녀를 보고, 또 보고, 또 생각한다. 저 입술 근처의 희미한 주름은 아
까 음료수를 마실 때 지워진 부분이 틀림없다. 나는 발견한다. 저기
귀밑의 균열은 분명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부랴부랴 나오느라
화장의 마무리를 하지 못한 부분이리라. 아니면 습기에 눅눅해지고
여기저기 사소한 접촉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지워져버린 건지도 모
르지. 그 존재의 맹점인, 그 상처 속에서 흘러나오는 안개와 같은
것은 뭘까? 그 균열 속에서 들여다보이는, 유추할 수 있는 그 텅빈
공간은 뭐지? 저 삭막한 세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진부한
문장들 속에서-침묵 속에서 나의 실재성에 대해 의심하듯- 나는 그
얼굴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니 저 화장은 진짜이다. 저것은 진짜
사물이다. 저 두텁고 부드러운 갑옷- 나는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이런 은유에 도달한다-은 존재한다. 그렇
다면 저 얼굴이 바로 그녀이고,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공간적인 것일 뿐일까?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그녀인가, 화장인가?
: 그녀는 빨간통 파운데이션을 쓴다고 했다


내 몸을 탐내는 악귀들처럼, 나에게 들러붙은 관념에 지쳐 그 얼굴
의 균열 속으로, 상처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헤집어 버리고 싶은 충
동을 느낀다.








마침.

moodern
댓글 2
  • No Profile
    가연 05.05.09 22:40 댓글 수정 삭제
    오랜만에 글을 보네요. ^^
  • No Profile
    moodern 05.05.11 00:22 댓글 수정 삭제
    어엇. 기억해주시다니..요즘은 글이 안써져서..
    너무 뜸한 것 같아 옛날에 끄적거린 것을 올려봤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34 단편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2005.04.27 0
2033 단편 내 안의 산타클로스1 Nitro 2005.04.28 0
2032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환상, Fantasy 미소짓는독사 2005.04.28 0
2031 단편 정상과 비정상 왁슘튤람 2005.05.05 0
2030 단편 노을은 결코 붉지 않다 미하번 2005.05.08 0
2029 단편 발디엘 꼬마양 2005.05.09 0
단편 미팅(meeting)2 moodern 2005.05.09 0
2027 단편 바람 부는 날 adama 2005.05.10 0
2026 단편 초능력자들 moodern 2005.05.11 0
2025 단편 공부와 목숨과 꽃 2005.05.11 0
2024 단편 독수리 스아 2005.05.12 0
2023 단편 딸이 피는 뒷동산 pilza2 2005.05.13 0
2022 단편 통증 rav. 2005.05.23 0
2021 단편 햄릿 rubycrow 2005.05.23 0
2020 단편 옛 하늘4 amusa 2005.05.25 0
2019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철듦 미소짓는독사 2005.05.26 0
2018 단편 도시의 용 rubycrow 2005.06.01 0
2017 단편 남가일몽(南柯一夢)1 2005.06.02 0
2016 단편 잎글/ 불꽃놀이4 amusa 2005.06.03 0
2015 단편 괴물의 꿈 다담 2005.06.05 0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