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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노을은 결코 붉지 않다

2005.05.08 12:1405.08

그렇게까지나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되어 놀랐다는 듯, 싸늘하게 식은 거리에서 조심스레 서로 안면을 주시하던 것도 잠시. 어느덧 우리는 마주앉아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소주병을 바닥내고 있었다. 졸업 이후로 들이닥친 세월의 발걸음으로 인해 연락이 뜸해진 수많은 친구 중 하나가 아닌, 학창시절 때부터 제대 후로도 계속 여러모로 나와 의기투합하여 그리 순진하지만은 않은 장난을 일삼던, 지겹도록 정이든 녀석이었다. 고민 끝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며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고 중얼거리던 모습이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눈앞에 아른하는데, 십칠 년이라는 세월은 참 우습기도 하지, 강산도 쉽사리 변케 한다면서 결국 우리는 결국 십칠 년 전 풋내나던 모습 그대로 소주잔을 앞에 두고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늘 지겹도록 책만 잡고 있던 그 박아무개 녀석이 서어 년 전 케임브리지 교수가 되었다는 등, 그토록 여자만 밝히던 송아무개는 어느덧 프랑스에서 이름을 날리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 떵떵거린다는 등, 혹 놀랍긴 하면서도 그렇게 뻔할 수 없는 시시한 잡설만 오가던 중이었다. 갑작스레 진지해진 표정으로 뜸을 들이던 그가 던진 한마디에, 금세 비워버린 내 술잔이 엷게 떨렸다.

"나... 실은 아내가 죽었어..."

그 사이 알딸딸해진 머릿속으로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그가 결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약간의 침묵 후 힘겹게 입을 벌려 몇 마디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중얼거린 듯하지만, 결코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 나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는 엉뚱한 말을 던졌다.

"너 그거 아냐? 난 항상 미국의 하늘은 어떤 색일까 궁금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소리야? 되물어볼까 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말은 이어졌다.

"갑자기 그렇게 가버리고는. 멍하더라고... 한참 방황했지... 그나마 사업이랍시고 경영하던 그 코딱지만 한 비지니스 마저, 그렇게 어영부영 문을 닫아버리고 말야... 그땐 정말 발 앞 한치도 그리 깜깜할 수 없더라."

끊임없이 입에 소주잔을 가져가는 나에 비해, 그는 이제 잔을 더 이상 건드리지조차 않고 있었다. 먼 허공을 향해 탁하게 드리워진 그의 눈은 왠지 감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메말라 있었던 듯 하다.

"모든 걸 잃는다는 것 말야, 참 순식간인 것 같더라. 어느 순간 길거리에 나앉게 될지 모르는 상황까지 뒷걸음치고 나니까 그 다음부턴 오히려 평안해지던걸."

이 녀석... 혼자 그렇게 힘들었던 것 이었나... 하는, 약간의 죄책감이 뒤섞인 후회가 잠시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여전히 술에 젖은 채로 오가는 단어 하나하나에 부여된 의미를 분석할 수 없던 상태였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 온 지도 이제 두 달 정도 지났나. 결코, 동생네 집에서 눈치 보며 살 생각은 없었는데 이쯤 되니 딱히 다른 방도가 없더라. 그래도 오랜만에 어머니 얼굴도 뵙고, 모국에 돌아오니 그나마 반갑고 아늑해서 좋네."

그는 말과 함께 엷은 미소를 흘렸지만, 어쩐지 만족스러움의 겸손한 표현이라 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서 비롯된 씁쓸한 그 무언가만이 나의 눈에 비추었다.

"워싱턴에 하나 있는 아들놈한테는 차마 말을 못했어, 워낙 제 살 일도 바쁜 놈이라서. 실은 지 애미가 죽었다고 해도 눈 깜짝할 놈도 아니고 말야..."

순간 숨이 멎었다.

"하하.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 웃기지... 그땐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악착같이 매달린건지..."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왜 이리도 머리가 안 굴러갔던 건지... 결국 굳게 다문 입술을 열고, 뭐에 그리 악착같이 매달린 거야? 라며 꼬인 혀를 굴려 던진 한마디가 기억난다. 나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은 성의없는 질문이었건만, 그의 대답은 당시 몽롱했던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체 굳어버렸다.

"...노을은 붉은색. 바다는 푸른색. 숲은 초록색...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달려들어 일생을 바치며 외우고 머릿속에 가두어버린 지식이 결국 저것뿐이 되지 않더라. 한없이 깊고 장엄하며 변화무쌍한 노을의 색채를 단지 '붉다' 라고 뿐이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는... 처음부터 우리가 자신의 과시를 위해 뽐내려 만들어 놓은 울타리일 뿐, 결국 그것에 갇혀서 허둥대는 것도 자신인걸...  그렇게 한 인간의 사용가치를 판단하는 법이 존재하기 전에, 우선 하나의 인간이 되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무시해 버렸는지 몰라. 하하, 참 당연한 사실을 어째서 그때는 그리 외면했는지... 너, 그거 알고있냐? 미국에서도 노을은 붉더라....."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와의 예정치 못한 만남을 보내고 열흘 즈음 지난 후, 여느 때처럼 출근길 버스에 앉아 신문을 펴든 나의 눈이 하나의 자그마한 기사에 머무는 순간, 난 잠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나라의 수많은 중대사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 그 신문의 구석진 한 모서리에 간결히 나열되어있는 누군가의 자살 기사는, 한 시대를 빛내보려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갔을 한 장엄한 인간의 사라짐을, 평방 5센티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마구 구겨 넣고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 창밖의 하늘에는 잔잔한 노을이, 마침 저물어가는 태양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었던 것 같다. 노을은 여전히 붉었다.
미하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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