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충청도 산골 한 자락에 고지식한 선비 하나가 살았다. 성은 김이다. 홀로 닦은 학문이 높아 인근의 서원에서 추천장을 써주겠노라 일렀으나 군자는 정도를 걷는 법이라 하며 굳이 초시를 보았다. 여타의 급제자들과 달리 성균관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홀로 과거를 준비하였다.

  그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식년시가 치러지기 직전 임금께서 승하하시었다.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은 일제히 상복을 입고 과거 준비 대신 국상의 슬픔에 잠기었다.

  새로이 등극하신 주상께오서 지극하신 효심으로 인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유지를 받드시어 국상 중에도 식년시를 치르도록 하명하시니, 한성으로 상복입은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김선비의 아내도 서둘러 봇짐을 꾸렸다.

  “서방님의 급제를 오매불망 기도드리겠사옵니다. 부디 급제하여 돌아오소서.”

  아내는 저고리 밑에 은장도를 매어달고 선비를 배웅하였다. 선비는 비장한 각오로 길을 나섰다.

  “아이고매, 선비님, 요즘 저 고개에 범이 나온닥카지 않소, 예서 묵고 가시오-.”

  근처 인가에서 묵으며 길을 걷던 선비는 고개 앞의 주막에서 발을 붙들렸다. 해 질 녘 한사코 주모가 뜯어말렸으나 선비는 굳이 뿌리쳤다.

  “내 갈 길이 급하오.”

  해가 순식간에 떨어져 날이 저물었을 무렵, 애써 고개를 넘어가려던 선비는 결국 고개를 반도 넘지 못했다. 컴컴한 가운데 멀리서 인가의 불빛 하나가 반짝였다. 선비는 길을 벗어나 인가로 찾아가 대문을 두들겼다.

  “이리오너라-.”

  삐걱 열린 문 안에서 초롱이 보였다. 소복을 입고 곱게 쪽찐 여인이 문틈 사이로 선비를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던 과객이오이다. 날이 저물어 길을 잃었습니다. 하룻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죄송하오나 선비님, 저희 집에 귀한 분이 계시어 예를 갖출 여력이 없사옵니다. 예가 아닌 줄 아옵니다만 부디 다음을 기약해 주십시오.”

  유난히 흰 낯을 숙이며 여인은 정중히 거절했다. 선비는 당황했다.

  “밤이 깊어 고개를 넘어갈 처지가 못 됩니다. 그저 이슬을 피할 수만 있으면 되오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인.”

  여인은 당황하면서 망설였다. 그 때 여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니 손님을 맞으시지요. 주위에 인가가 없는데도 물리는 것은 예가 아니지 않겠소?”

  청아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나으리. 들어오시지요. 곧 상을 드리겠나이다.”

  여인은 선비를 문안으로 맞아들였다. 기와집은 낡았으나 정결하였고, 사랑채 앞의 대청마루에 한 사내가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사내가 손짓하였다.

  “이리 오시오, 달빛이 좋소.”

  산중 깊은 어둠속에서도 사내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선비는 그 위엄 앞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그와 마주 앉았다. 의젓하고도 유연한 힘을 갖추고 있는 풍채의 사내였다.

  여인이 상을 보아왔다. 뜨겁고도 쌀이 많이 섞인 밥이었다. 선비는 고개를 숙이며 밥상을 받았다.

  “청운의 뜻을 품으시었소?”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선비는 흠칫 놀랐다.

  “어찌 아셨습니까?”
  “눈빛에 먹이 배어 있구려.”

  사내는 빙그레 웃었다. 밥그릇을 비운 선비는 사내가 따라주는 잔을 받으면서 주위의 기척을 느꼈다. 너른 마당 어디에도 그림자 하나 없었으나 두런두런하는 기척이 적지 않았다. 선비는 사내를 재삼 살폈다.

  “예, 과거를 보러 가는 길입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식솔들과 함께 가려니 곳곳에 폐를 끼치게 되는구려. 나 때문에 하마터면 한데서 밤을 새우실 뻔했으니 미안하게 되었소.”
  “아닙니다, 덕분에 이슬을 맞지 않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고향이 충청이십니까?”

  사내가 잠깐 웃었다.

  “팔도 강산이 모두 내 고향이외다. 새로운 태양이 떴으니 어디 간들 어떠하겠소?”

  선비는 재삼 옷깃을 여미고 태도를 바로하였다.

  “승하하신 전하를 섬기셨사옵니까.”

  사내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술잔에 이지러진 달이 일렁였다.

  “어찌 성총을 받았던 몸이 같은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겠소? 섬기던 임금을 잃은 몸이 어디 간들 어떠하겠소? 초야에 몸을 묻으려 하오. 이러한 길목에 뜻을 세운 젊은이와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가 보오.”

  사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그는 다시금 선비의 잔을 채워주었다. 밤새도록 달빛과 더불어 술을 주거니받거니 하던 선비는 달이 기울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기분좋게 오른 취기로 잠들었던 그에게 나직한 당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디 급제하여 선정(善政)을 보필하시길 바라겠소.”

  선비는 일어서서 급하게 의관을 정제하며 방문을 열어 배웅하려 하였다. 해가 뜨기 직전, 흰 안개가 부옇게 깔린 새벽이었다. 열려있는 대문을 고양이들이 일렬로 넘어가고 있었다.  등이 누렇고 배가 흰 고양이가 그 대열을 맨 앞에서 선도하였다.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 고양이는 흘긋 선비를 돌아보았다. 멀리서도 눈빛이 또렷하였다.

  선비는 승하하신 임금께서 지극히 괴셨다는 고양이를 기억해냈다.

  선비는 손을 내밀다가 잠에서 깨었다. 이른 햇빛이 열린 방문으로 찬 공기와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

  한성의 과거에 있어, 선비는 겪은 일을 바탕으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발제로 한 명문을 썼으며, 장원급제하여 정승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훗날 사람들이 선비를 가리켜 고양이 정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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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임금님이 지극히 고양이를 이뻐하셨다는 얘기,
화가 변상벽이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이라 불렸다는 얘기.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듣고 썼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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