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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심야자판기

2004.08.27 06:1308.27




'에엣, 뭐, 흑마법사들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어둠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아이템들이 시장에 유통되는 것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WMA(세계 마법사 협회) 위원장이

했던 말이라고 MSN투데이는 전하고 있다.


사실 신마법주의 선언 이후로 일반시장으로 침투한 마법아이템

중에서 불법적인 아이템들이 무시 못 할 규모로 늘어나 사회적 이슈가

되기 시작했고 WMA에서는 이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서

적절한 규제 내에서 유통시키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판단과 책임'에 신뢰를 표하는

신마법주의의 이념에 의해, 위험하지만 꽤나 인기리에

거래되던 '저주인형'- 그렇다, 미워하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심어

인형을 통해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인형이다! - 같은 것들도

의사의 처방전만 있으면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법안 통과가 일으킨 사회적 파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저주하는 인형의 경우, 초기 지푸라기 모델에서

디자인이 개선된 만화캐릭터 인형까지 출시되었고,

심지어는 '고통만 줄 뿐 실제 상처는 내지 않는' 아동용

인형까지 선보일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그해 히트 상품 중에

하나로 선정되었다.)


물론, 이런 흑마법아이템들이 비록 덜 끔찍한 편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역시나 쉽게 취급될 수는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보통 19세 미만에게는 판매되지 않았으며

만약 규정이 지켜진다면 자정이후에나 구입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 학교에 설치된 심야자판기는 물론 이런 조건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고, 설치 이후 학생들의 원인모를 자살이나

행방불명 등이 증가하여 학생회에서는 학교와 사업자 측에

철거 요구를 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심야자판기가 가동되는 것을

본 학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일주일 중에 하루, 자정부터 새벽까지

중에 몇 번만 판매가 된다고 자판기에 부착된 안내문에 써 있었고,

그 시간까지 학교 도서관에 남아있는 학생이 거의 드물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처럼 집 가깝고, 철야할 일이 많은 졸업반 예비역이 아니라면.



도서관 지하에 거피 자판기, 캔 음료 자판기와 나란히 설치된

그 자판기는 꽤나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달랑 버튼 하나와

물건이 나오는 곳으로 추측되는 부분 빼고는 도무지 기능을

짐작할 수 없는 것들이 달려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음침하거나

불길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동전투입구

같은 곳도 안보이고 도무지 무엇을 파는지도 모르겠고

켜져 있는 것을 보기도 어렵고 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심야자판기'라고 불렀다. '심야에는 켜지겠지, 뭐'

'그래서 장사가 되나?'



그 심야자판기에서 물건을 산 사람들이 분명 있긴 하다.

(그러니 얼굴이 창백하고 피냄새를 풍기는 검은 망토의

자판기 관리자가 물건을 채우러 가끔 나타나는 것이겠지.)

물론 그들 중에 여태껏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거기에 내가 아는 몇몇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도 구매자 중에 한명이다.



나의 첫 구매는 자정에 이루어졌다.

마지막 구매는 동트기 직전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자판기에서 산 물건은

꼭 잘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피도 채 굳지 않은

내 머리였다.



음. 아쉽게도 이번 이야기는 그에 대한 것이 아닌지라,

일단 저 얘긴 넘어가자.



나야, 지독한 당첨 운에 의해 그 자판기를 이용하게 되었다지만,

내 후배는 적극적인 구매의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실연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저주의 인형류를 사려고

했으니까. 발표과제 때문에 같이 밤을 세기로 했을 때

그 애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귀여운 편이긴

했지만 워낙 왈가닥이라 연애 담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후배였고, 또 누구누구와 연애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 실연은 고통스럽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간단하지만,

외로움도 견디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증오할 만큼, 파괴시키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순간이 있었던가. 운명적인 사랑이 범상한

나에게 어울리기나 하겠는가.

소개팅도 감지덕진데.




아무튼 내 후배가 자판기에서 뽑은 것은 인형이 아니라

크고 날이 거친 도끼였다.




내가 심야자판기에서 처음 뽑은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

기종은 듣도 보도 못한 '암네시아'(첨부된 설명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진에 별 관심은 없지만

디카는 갖고 싶었었다. 그런데 이게 왠 횡재람.

거피 뽑아먹으러 왔다가 우연히 판매시간에

딱 맞아버린 나. 희희덕거리며 꿈에 그리던

셀카를 찍어보고 싶어 폼을 잡았다.

오오, 이렇게 액정을 돌리고, 팔을 뻗으면 되는 건가?




그 디카는 미래를 찍는 거였다. 아닌가? 찍힌 것이

실현되는 것이었나? 이젠 아무렴 어때..




자판기가 놓인 복도는 깜깜했다. 자정 이후엔 웬만한 전등은

끄니까. 그렇다고 자판기에서 불빛이 나오는데 자판기를

등지고 찍을 수는 없지 않나? 에라이, 모르겠다.


번쩍.




사진에는 내 등 뒤에 도끼를 치켜세운 후배가 같이 찍혀 있었다.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둠뿐. 그런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후배일까.

과연 도끼를 들고 있을까? 아니 아직 도끼를 뽑진 않았겠지?

언제쯤일까. 그 사진에 찍힌 상황이 닥치려면. 해가 뜨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나...



아니, 그보다 궁금한 건..

우리는 언제 사랑하게 되는 거지?



번쩍.














mood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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