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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통증

2005.05.23 13:5705.23

통증
痛症




6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금세 더워진다. 책장 위에 늘어진 긴 창문으로 햇살이 물결쳐 들어와 까만 책상 위를 달구고 있었다. 강한 햇빛 때문에 오븐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실내는 세게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책들을 그러모아 가방에 집어넣다가, 따끔함을 느끼고 손을 끄집어냈다. 콧등을 찌푸리며 손가락 끝을 들여다보았다. 지문 사이로 한 줄 수직선을 그리며 갈라진 피부가 보였다. 손톱으로 꾹 누르자 살껍질 밑으로 피가 배어나왔다.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세게 빨았다 끄집어냈다. 상처 위에 얇은 살껍질이 하얗게 떠 있었다. 살짝 건드리자, 순식간에 상처에서 다시 피가 스물스물 새어나와 피부 위로 새빨갛게 퍼져나갔다.

「카샤, 아기처럼 뭐하는 거니?」

손가락을 빠는 시늉을 하며 옆에 있던 여자가 웃는다. 인도네시아 계의 가무잡잡한 흑갈색 피부가 주름지며 곡선을 그려 친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잠깐의 공백 후에 매주 수요일에 글자를 가르쳐 주는 도서관 사서임을 기억해냈다. 『아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과는 이야기해도 괜찮다. 긴장을 풀고 그녀에게 손을 펴 보여 베인 곳을 보여주었다.

「베였어요.」
「괜찮아? 피가 많이 나는걸. 잠깐만 기다려봐.」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자는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후에 되돌아 온 그녀는 분홍색 토끼가 그려진 하얀 반창고를 들고 있었다. 손을 앞으로 내밀자 여자의 손이 베인 손가락 끝을 잡았다. 피부에 닿는 따스한 감촉에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짙은 흙빛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내밀어진 손 끝에 반창고를 감았다. 낯설은 두근거림 사이로, 따끈한 것이 뱃속을 울렁였다.

「자, 다 됐다.」

갑자기 강제로 밖으로 떠밀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손에서 떨어져나가는 살갗의 체온에 아쉬움을 느끼며 여자를 올려다본다. 유리구슬처럼 둥글둥글하고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웃고 있다. 호의적인 상냥하고 친절한 눈동자. 이렇게 다정한데도, 낯설기 짝이 없는 눈동자.

고맙다고 인사하고,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질질 끌며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을 나서자, 차가운 에어콘 공기에 익숙해 있던 피부가 여름의 무더운 공기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피부에 닿는 햇살이 간지러워, 반창고를 붙인 피부 근처를 박박 긁으며 걸었다. 세 걸음을 걸을 때마다 계속해서 같은 곳을 긁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가 금세 발갛게 부어올랐다.

모퉁이 끝에서 슈퍼마켓을 지나칠 때쯤에,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자 우체국 제복을 입은 배달원과 뚱뚱한 중년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몸은 꼬챙이처럼 가느다란 배달원의 두세배쯤 되어보였다. 여자가 뒤뚱거리며 다가와 뭐라고 말했다. 그녀의 코맹맹이 같은 말소리는 시끄럽고, 뭔가 입안에 넣고 말하는 것처럼 발음이 명확하지가 않았다. 몇몇 단어는 들리지만 한 문장으로 연결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 대신, 블라우스의 가슴 부분에 달린 단추에 신경을 돌렸다. 금박장식이 다 벗겨지고 실오라기가 풀린 단추는 옷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카샤, 내 말 듣고 있니? 카샤!」

시끄러운 목소리가 파리처럼 앵앵거리며 귀찮게 들러붙는다. 『대화』중이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대답했다.

「네, 마리아」

『네』라고 대답하면 모든 대화가 쉽게 끝난다. 마리아는 만족한 듯이 웃더니 배달원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뭐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마리아의 단추에서 배달원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마리아보다 키가 크고 날씬하지만, 눈매가 닮았다.

「…내 아들 허먼이야. 허먼 기억하지? 얼마 전에 귀향했단다. 앞으론 여기서 살거야.」
「안녕, 카샤?」

배달원이 모자를 벗고 인사하며 웃음짓자 한쪽 볼에 보조개가 패인다. 보조개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살 속에서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모양이다. 살이 이그러질 것 같다. 이상해. 이상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저, 이제, 가야돼요. 안녕히 계세요.」

뱉어내듯이 『인사』를 쏟아내고 등을 돌리는데 어깨를 잡혔다. 경직하며 돌아보자 허먼이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잠깐 기다려봐. 너희 집에 온 우편물을 줄게.」

허먼이 우체국 차로 돌아가서 우편물 묶음이 가득 담긴 박스를 몇 개 끄집어내더니 주소를 물어왔다. 마리아가 대신 대답해주자, 묶음 중 하나를 풀어 뒤적였다. 「드웨이…이건 아니고. 오스랜토… 라이트… 오스랜토… 가르시아…」오스랜토의 이름이 적힌 봉투가 나올때마다 그가 하나씩 끄집어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다 인것 같구나. 댄에게 안부 전해주렴.」

주어지는 호의에, 수줍음과 동시에 몸 안 어딘가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갈색 눈이 휘어지며 친근하게 웃고 있다. 황급히 눈길을 낮춰 제복칼라에 달린 마크에 시선을 돌렸다. 보조개가 다시 보일까 두려웠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또 보자.」

등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도망치듯이 걸었다. 마리아와 허먼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야 서서히 발걸음을 늦춘다. 손에 쥔 봉투를 가방 안에 대충 쑤셔넣고 신경질적으로 반창고 주변을 긁었다. 몇걸음 못가 피부가 다시 발갛게 부었다. 얇은 헝겊으로 감싸인 가방 끝은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끌리며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얀 햇살이 거실에 깔린 빛 바랜 양탄자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있다. 노란 얼룩이 진 달력에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 안의 날짜는 이미 며칠 지난 것이다. 낡은 스탠드와 TV만이 놓여있는 황량한 거실 어느 곳에도 그림자는 없다.

오늘도 오지 않았다.

실망하며 열쇠를 단 목걸이를 벗었다.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쇠가 쇠사슬과 부딛혔다. 모래성을 쌓듯이 쇠사슬을 열쇠 위로 모아 신발장 위에 올려놓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어이! 지금 오냐?」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돌아보았다. 건너편의 벽에 달린 창문에서, 입술과 귀에 금색 피어스를 잔뜩 달고, 목에는 금색 목걸이를, 팔에는 악마 날개의 문신을 하고 있는 남자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스탠이다.

「오늘은 어땠어? 애들이 별 짓 안했고? 괜찮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스탠이 손가락을 딱 튀겨보였다.

「거봐, 내 자장가만 있으면 내가 별일 없을거라 그랬잖아. 내 노래는 효과가 끝내준다니까. 저 노망난 할아범은 가는귀가 먹어서 내 노래의 진면목을 모르는 거야.」

얼마 전 윗집에 사는 월콧씨에게 시끄럽게 군다고 잔소리를 들은 것에 꽤나 마음이 상했는지, 그가 주먹을 휘둘러가며 투덜댄다. 스탠의 목소리는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발랄하고, 즐겁고, 행복하다.

「댄은?」

고개를 젓자 사탕 하나가 날아들어왔다. 딱딱한 노란 사탕이 무릎에 부딪혔다 바닥에 떨어졌다. 껍질을 까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연락은 없고?」
「없어」
「하긴, 그 녀석은 늘 그렇지.」

댄을 잘 아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갑자기 그 말에 불쾌한 기분이 들어 창문을 닫았다. 스탠이 놀란 듯이 이쪽을 보았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곤 창가에서 사라졌다. 창문에는 벽과 빈 방의 풍경만이 남았다.

혼자가 된 것에 안심하고, 발돋움해 하얀 크리스탈 수반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크리스탈 너머로 바닥에 쌓인 유리구슬과 조그만 금붕어가 보였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수반을 끌어당겼다. 납작한 수반 안에서 넘칠 것처럼 물이 출렁였다. 손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창가로 다가가 수반을 내려다보았다. 수반의 무게에 팔이 저리고, 움직일 때마다 수반에서 물이 넘쳐 옷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반과 물을 통과해 바닥에 고이는 빛의 물결에 빠져든다. 금붕어는 수반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손가락을 휘저어 구슬을 움직이자 금붕어가 놀란 듯 도망치고, 빛의 물결도 따라 도망쳤다. 댄은 「자꾸 귀찮게 하면, 물고기가 스트레스 받아 죽는다」고 하면서 『하지마』라고 했었지만, 그 말을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반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롭고 반짝이는 빛의 파도를 보고 있으면 배가 부른 것처럼 만족스럽고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말을 듣지 않았다는 걸 알면 화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만두기 싫었다.

하지만 괜찮다. 댄은 지금 여기에 없다.

숨쉬기가 괴로워졌다. 가슴이 따끔따끔하고, 담배연기가 뱃속에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이 아팠다. 뭔가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수반을 세게 끌어안았다. 물이 출렁이며 금붕어가 젖은 티셔츠쪽으로 허우적허우적 떠내려왔다.

갑자기 따르르릉, 하고 커다랗게 전화벨이 울렸다. 정확히 세 번을 울린 다음, 자동응답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개자식,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아무리 도망다녀도 소용없어, 그건 내 꺼라구. 알아들어? 그 머저리한테 나오는 돈이 얼만데! 감히 누구 돈에 손대는 거야? 응?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아, 이 도둑놈아!』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응답기를 통해 화난 듯이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가장 무섭고, 공포스러운 목소리. 온몸이 차가운 바늘로 꽃힌 것처럼 꼿꼿하게 얼어붙었다. 멍하니 응답기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참 씩씩거리더니 거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정한 어투로 말을 시작했다.

『카샤. 거기 있지? 대답하렴, 귀여운 아가. 아빠야.』

수반이 품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금붕어가 물컹한 느낌을 남기며 다리에 부딪혔다 바닥에 떨어졌다. 꼼짝도 못하고 굳은 채 젖어들어가는 카펫 위에서 금붕어가 팔딱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몸 위를 갈겨왔다.

『버러지 같은 것, 지금 당장 대답하라고 했잖아! 두들겨 패줘야 그 느려터진 입을 움직일거냐?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배신을 때려? 한번 크게 혼나봐야 말을 듣지, 그렇지? 매를 맞아야 뭐든 제대로 하겠지!』

현관에서 쾅쾅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강제로 열려고 하는 듯 문이 계속 들썩이자 자물쇠가 삐걱이며 흔들린다. 문이 흔들릴 때마다 피부 아래서 근육이 굉음을 내며 뒤틀리고 부서져간다. 발가락과 손가락이 오그라들며 아픔을 호소했다. 꼼짝할 수가 없다. 너무나 아픈데, 움직일 수가 없다. 춥다. 끔찍하게 춥고 아프다. 냉장고 안에 갇혔을 때처럼.

죽을거야.

콧속이 지끈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앞이 새빨개진다. 갑자기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숨쉬는 게 힘들어졌다. 공기덩어리가 빳빳하게 굳은 빵처럼 목에 틀어막혀서 호흡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다. 바늘로 찔러대는 것처럼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임을 알지 못했다. 자물쇠의 걸쇠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카샤!」

뺨을 때리는 통증에 입을 벌린다.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에 서 있다. 댄이다. 댄이 찡그린 얼굴로 술 취했을 때처럼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숨을 쉬어, 멍청아! 숨을 쉬란 말야!」

댄의 손이 아플 정도로 팔을 죄어왔다. 물로 젖은 낡은 카펫과 금붕어와 수반이 시야를 어지럽히며 사방으로 헤맨다. 그의 손에 다시 한번 얻어맞았을 때, 막혔던 숨이 식도를 타고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기진맥진한 듯이 가냘프게 떠는 금붕어 위로 분홍빛 띄는 하얀 토사물이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맙소사, 카샤.」

창백한 얼굴로 댄이 외쳤다. 덜덜 떠는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다.

핏덩어리 섞인 토사물 속에서, 금붕어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듯이 아가미를 떨고는 축 늘어졌다.



「…기에 혼자서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뭘 해도 상관없지만 저 애 입은 막아버리라고! 낮이고 밤이고 시끄럽게 구니 어디 신경쓰여서 살수가 있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스탠드의 주홍 불빛 위에 화난 듯 그르렁대는 월콧씨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웅대고 있었다. 그가 한마디 말할 때마다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혀 시계처럼 딱,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그에 대답하는 댄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낮고 속삭이는 것처럼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물론 그렇지야 않지만.」

월콧씨의 목소리도 댄을 따라 낮아진다. 「…신경통… 노인네들에겐 안 좋아…」이젠 둘의 말이 뒤섞여서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도로 눈을 감았다. 창문 밖에서 스탠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홉시이리라. 그는 그때쯤에 연습을 하다가 한 시간 후에 클럽으로 가서 새벽 두시까지 연주를 한다.

노래가 한창 절정에 도달했을 때에,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시끄럽다며 고래고래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탠의 방 위층에 사는 호세다. 스탠의 기타소리가 멈추자 다시 창문이 드르륵 닫혔다. 「개자식.」 쿵, 벽이 걷어차는 소리가 났다. 소리죽여 킥킥 웃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댄의 발이 쿵쿵 바닥을 울리며 침대가로 다가왔다.

「카샤? 일어났어?」

살짝 실눈을 뜬다. 까만 티셔츠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구가 보였다. 『Dreams Come True』 조금 시선을 올려 댄의 얼굴을 본다. 희미하게 웃고 있다. 왜 늦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거운 돌이라도 얹어놓은 것처럼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아직도 속이 안 좋아?」

댄의 손이 몸을 끌어당겨 안는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따끔따끔하게 조여온다. 목에 둘러진 팔에 얼굴을 묻고 볼을 부풀렸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다. 땀으로 젖은, 열 오르고 있는 피부에 닿는 그의 손은 서늘해서 기분이 좋다. 하지만 서늘한 감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뜨겁게 변해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더워.」
「열이 올라서 그래. 자고 나면 나아질거다.」

댄의 몸이 옆에 파고든다. 배 위로, 안전벨트처럼 묵직하고 두꺼운 팔이 둘러졌다. 마치 정신을 현실에 묶어주는 닻이라도 되는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팔을 붙잡고 눈을 감는다. 이 팔이 있으면 악몽의 바다에 표류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사실에 안심한다.

새벽 두시 쯤 잠에서 깨었다. 아랫집에서 파티라도 하는 듯 활기찬 멕시코 음악이 희미하게 바닥을 비집고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 밖에서 배어드는 어두운 빛에 의지해 옆을 살펴보았다. 몇 번이고 옆에 누워있는 것이 댄임을 확인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흔들리는 버스의 움직임에 맞추어 발을 흔든다. 아침 열 시 반의 햇살은 눈부시고 따뜻하다. 다른 아이들은 지금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특별하고 잘난 느낌이 들었다. 방학은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지만,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학교가 싫은 게 아니다. 일상과 색다른 것이 특별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가는 내내 댄은 얼굴을 찌푸리고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화난 듯한 얼굴이 무서워,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모난 유리창에는 반짝거리는 색색깔의 빌딩들이 하나 가득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그것들 중 가장 반짝거리는 메디컬 센터 건물 앞에서 버스가 멈추었다.

더러운 운동화로 밟기가 미안할 정도로 반짝이는 대리석 복도와 까만 남색빛 유리문을 지나, 소독약 냄새가 나는 복도로 들어섰다. 전혀 아파보이지 않는 어른들이 소파에 몰려앉아 잡지와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댄이 접수처에서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창문처럼 생긴 얇은 길다란 수조를 들여다 보았다.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들이 해초 사이사이를 헤엄치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을 불려, 진찰실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에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책장이 있고, 나머지 벽에는 이상한 사람들의 사진과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끄적이고 있던 의사는 고개를 들더니 빙긋 웃었다.

「오랜만인데? 놀랍다, 네가 나한테 다 오고?」

댄은 떨떠름한 태도로 의사에게 인사하고는, 자신의 어깨를 잡아 의사 앞으로 끌어당겼다. 댄과 굉장히 닮은 얼굴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래, 이 애가 카샤인가 보구나? 안녕, 카샤?」

목을 움츠리며 우물우물 대답하자, 댄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낯을 좀 가려.」

의사는 힐끗 댄을 보고는 놀려댔다.

「네가 보모 노릇 하는 걸 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됐으니까 뭐가 잘못됐는지나 좀 봐.」
「어이, 전화로 들은 것만으론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어. 의사는 신이 아니란 말이다.」

의사는 차트를 꺼내 새 페이지를 펴면서 묻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이번이 처음이야.」
「폐나 심장에 병을 앓았던 적은?」
「없어.」
「위염 앓은 적도 없고?」
「없어. 없을거야! 젠장, 내가 그런걸 어떻게 다 알아?」
「뭐?」

의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댄은 말문이 막힌 듯 어물거렸다.

「내 말은, 카샤는 아직 어리잖아.」
「그래서?」
「그런 늙은이나 앓을 병 같은 건 없었을 거라구. …이때까진 병원에 간 적도 없었는걸.」
「확실히 말해. 병원에 간 적이 없는거야, 아니면 모르는 거야?」

댄은 한참 우물거리더니 발로 책상 끝을 세게 걷어찼다. 의사는 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낮게 속삭였다.

「같이 산 게 도대체 언제부터냐? 이렇게 되기 전에 분명 아프다고 이야기 했을텐데 병원에 데려가 보지도 않았어? 너, 저 애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게 있긴 한거야?」
「젠장, 내가 알게 뭐야? 쟨 내 친 동생도 아니야. 브리가 전 남편 애를 데리고 와서 꼰대랑 같이 산 건 겨우 3개월이었고, 꼰대가 뒈지고 나서는 둘 다 코빼기도 본 적 없었어. 그리고 이게 왜 다 내 잘못이야? 나한테 가보라고 시킨건 형이잖아!」
「너에게 말해보라고 부탁했던 건 어머니였어.」

댄은 멍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난폭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어머니 나름대로 널 걱정하고 계시는 거야. 넌 어머니가 아버지랑 이혼한 후로 어머니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고…」
「잠깐, 날 만나고 싶지 않아했던 건 그쪽이야. 나한테 화살 돌리지 마.」
「어머니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네 아버지는 널 만나지 못하게 하지 넌 어머니를 싫어하지―」
「난 이제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도 않아!」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댄은 신경질을 내며 작게 욕을 내뱉고는 자신을 흘끗 보더니 의사에게 속삭였다.

「누가 말했건 간에, 난 거기서 쟤를 데려와야만 했어. 내가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라는 작자가 애한테 하는 꼴을 봤는데 어떻게 내버려둬?」
「그래, 애 아버지에 대해서는 변호사한테 이야기 들었다. 하지만 네 하는 꼴도 그리 잘하는 건 아닌 것 같구나.」

의사는 한숨을 쉬고는 댄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가죽의자에 털썩 앉더니 의자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댄보다는 네게 묻는게 낫겠다. 소화가 잘 안된다거나, 아침에 일어나서 가슴 아래쪽이 찌르듯이 아프다거나, 안 먹으면 속이 쓰리다거나 한 적 있니?」

『대화』는 싫다. 늘 잘 모르는 것에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야 한다. 대답을 하면, 서투르다거나 버릇없다고 혼이 난다. 망설이며 댄을 쳐다보자 빨리 대답하라고 손짓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는 다시 물었다.

「얼마나 자주 그랬지?」
「……」

긴장하며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상냥해보였다. 하지만 안경렌즈 너머의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눈은 엄하기 그지 없었다. 땀이 배인 손바닥으로 의자 끄트머리를 꼭 움켜쥐었다.

「댄이… 없을 때 사나흘에… 한번쯤, 먹으면 기분이 나빠서.」
「너 또 내가 없을 때 안 먹었었어?」
「그러는 너는 어딜 나돌아다녔길래 애가 뭘 먹는지도 몰라?」
「형, 그건 내 문제야.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마,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한다구.」

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벽에 기대었다. 의사는 다시 질문했다.

「언제부터?」
「원래 그랬어요… 아빠랑 같이 살때도 그랬고.」
「그럼 어제도 아침에 속 쓰리고, 그런 증상이 있었어?」

불쾌한 기분이 점점 크게 자라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인사』를 되돌려 『대화』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대답은 점점 느려지고, 침묵도 길어진다. 의사는 참을성 있게 관심을 기울이며 느릿하게 돌아오는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계속되는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이 끝나자, 그는 차트에 다시 지렁이같은 단어들을 적어넣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깍지를 끼며 댄을 쳐다보았다.

「흉부 엑스레이랑 내시경 검사를 해야 할거야. 내시경 검사는 예약을 따로 해야 하니까 접수처에서 이야기하도록 해. 자, 잠깐 저기 가서 간호사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하고 올래? 괜찮아, 별거 없어.」

의사가 주머니에서 노란 사탕을 하나 꺼내어 쥐어주더니 문 밖에 서 있는 간호사 쪽으로 등을 밀었다. 혼자 『낯선 사람』과 있어야 한다는 것에 놀라, 항의하듯 올려다보았지만 댄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간호사를 따라 진찰실 반대편의 긴 복도를 걸었다. 익숙치 않은 일의 연속에 초조해져, 손톱 끝을 몇번이고 쥐어뜯었다. 그런 자신의 기분과는 아랑곳없이, 간호사가 생글거리며 물어왔다.

「몇 살이니?」
「아홉… 두 달 뒤에 열 살이 돼요.」
「정말? 더 어려보이는데. 자, 여기야. 들어가렴.」

따뜻한 손이 어깨를 잡고 방안으로 밀어넣었다. 녹색 커튼 뒤에서 다른 간호사 둘이 잡담을 하다가, 이쪽을 보고는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떨리는 발로 몇 걸음 걷는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문이 닫혔다.



댄의 뒤를 따라 낯선 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었다. 금방 다리가 아파와 칭얼거렸지만 손도 잡아주지 않았고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지쳐서 멈추고 주저앉았다가도, 거리가 많이 벌어지면 허겁지겁 뛰어 따라잡았다. 따라가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바닥에 버리고 갈 것 같았다.

바싹 말라 버석거리는 여름공기 탓에 금방 어지러워졌다.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멀어져가는 등이 조금씩 흔들려 보였다.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비비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졌다. 몇걸음 뒤에 댄이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부딛혀 시큰거리는 무릎도 무시하고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댄은 까진 무릎을 보더니, 자신의 팔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해 걸어갔다. 또 넘어질 것 같아 그의 걸음에 맞추려고 애를 쓰면서 물었다.

「댄, 어디가? 여기 우리 집 가는 길 아니잖아.」
「시끄러워.」

퉁명스러운 면박만이 돌아왔다. 차가운 대답에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물자 댄은 굳은 얼굴로 더 빠르게 걸었다. 중간에 가다가 발견한 길거리의 농구장에서는 남자들이 잔뜩 모여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스탠과 허먼도 보였다. 우체부 제복 셔츠로 땀을 닦는 허먼의 뒤로 길거리에 주차해 둔 텅 빈 우체국 차가 보였다. 허먼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더니 스탠을 불렀다. 스탠이 댄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지만 댄은 쳐다보지도 않고 빠르게 지나갔다. 별수없이 혼자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댄의 뒤를 쫓아가야 했다.

뛰다시피 해서 어느 아파트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온몸이 땀으로 절어있었다. 댄이 벨을 누르고 스피커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팔을 붙잡힌 채, 빨간 창살 문을 지나 어둡고 퀘퀘한 냄새가 나는 아파트 안으로 질질 끌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간 댄은 302호실의 문을 두 번 두드리더니 열었다.

그 집은 댄의 집보다 조금 더 컸다. 현관 입구에는 노랗고 빨간 구슬들을 잔뜩 달은 발이 걸려있었고 발 밑으로는 노란 햇살로 물든 양탄자와 알록달록한 가구들 끝이 보였다. 댄은 발을 들추고 거실로 들어갔다. 왜 왔는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데 반짝이는 귀걸이와 길다란 목걸이를 한 집시 같은 차림의 여자가 나타나 댄을 끌어안았다.

「꺄아, 댄이잖아! 왠일이야 여길 다 오고?!」

여자는 댄의 목을 끌어안고 한참동안 시시덕거렸다. 쪼옥하며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댄이 그녀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자신을 가르켰다. 여자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화를 냈다.

「말도 안돼! 나도 바쁘단 말이야!」
「오늘 당장 나가봐야 되는데 아픈 애를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부탁해, 응?」
「하지만 나도 이번주엔 파티가 있고 해서 바쁘단 말이야-」
「제발, 이번 한번만. 이틀 뒤에 데리러 올게.」

여자는 있는대로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그럼 이번 주말 만이다. 더는 국물도 없어. 알았지?」
「That's my girl! I love you-」
「꺅, 그만둬!」

댄이 키스하려 하자 여자는 웃으면서 댄의 얼굴을 밀었다. 멍청히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자니, 댄이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며칠간은 여기 있어. 마리아 말 잘 듣고.」
「걱정마. 우린 사이좋게 잘 지낼거야. 그치 꼬마야?」

여자의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이 코 앞에서 싱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아빠같다. 웃고 있지만 진심으로 웃는 게 아니다. 울음을 터트리거나 화를 내기 직전에 아빠도 이런 얼굴로 웃었다.

짙은 화장품 냄새나는 품에 끌어안고, 여자가 바이바이-하고 자신의 손을 잡아 댄에게 흔들어보였다. 댄은 문 밖으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금방 돌아올게.」

거짓말. 그는 한번도 제 때에 온 적이 없다.




여자의 집에는 반짝이는 것들이 무척 많다. 창가에 단 커튼 끝의 구슬들, 현관에 달은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구슬로 만든 발, 천장과 문에 달은 딸랑거리는 작은 은빛 모빌, 색구슬을 깔아둔 화분들, 꽃이 꽂힌 작은 화분. 여자의 손에도 귀에도 머리에도 옷에도 반짝이는 것들이 달려있다. 비닐끈으로 만든 빨간 링 귀걸이, 호박을 박은 금반지, 인디언 깃털을 단 조잡한 파란 토파즈를 박은 목걸이, 모조 다이아몬드와 은으로 만든 머리핀. 마치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소꿉장난을 할 때 인형에게 입히는 물건들 같다. 라틴계의 까만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가무잡잡한 피부 사이에서 그것들은 모두 별처럼 반짝인다.

「그래서, 네 아빠는?」

고급 식당의 테이블보는 너무 하얘서 건드리는게 무서울 정도였다. 옆에 놓인 다른 식기가 흐트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종이 냅킨 위에 놓인 나이프를 들다가 에, 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그녀의 귀걸이가 귓가에서 반짝이며 흔들렸다.

「어디있는지 몰라?」

입 안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씹는 척하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한참동안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부정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아, 하고 다시 눈을 빛내며 질문해왔다.

「혹시 친척이라면 하나 정도는 있지 않니? 댄 말고, 삼촌이라든가, 고모라든가…」

칼질을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젓자 여자는 한숨을 쉬면서 정말이지 도움되는게 없다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다시 음식에 신경을 집중했다. 웨이터가 내오는 음식은 색깔은 이뻤지만 맛은 없었다. 서툴게 고기에 칼을 넣었지만 잘 잘리지 않았고 접시 위에 놓인 야채는 폭탄이 떨어진 폐허마냥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거 맛있어?」

여자가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보다가 접시를 보고 질린 듯이 말했다. 맛있다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까만 끈샌달을 신은 날씬한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싫으면 억지로 안 먹어도 되니까 거짓말 하지마.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해서야 천국 못간다, 너.」

이 나이에는 학교 선생님도 그런 말투로 달래지 않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자 여자는 이래서 애랑은 상대 못하겠다니까 라면서 툴툴댔다. 그녀와의 대화는 힘들고 싫었다. 대답을 할때마다 늘 싫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끝내려고, 맛 없다고 말하고 예쁜 세공이 새겨진 은수저를 내려놓았다.

「뭐야, 비싼 음식점의 음식도 못먹고, 패스트푸드나 근처 싸구려 식당의 음식도 못 먹고. 먹을수 있는게 도대체 뭐니? 내가 이 나이에 직접 요리까지 해줘야 되는 거야?」

그녀는 험한 어조로 투덜대면서 까만 가방에서 팁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둘러 컵에 남은 소다를 마시고 그녀의 뒤를 따라 고급 음식점을 나왔다. 퇴근하는 사람들의 물결로 시내는 바글바글했다. 어둑어둑한 저녁 거리를 지나 집에 돌아오자 여자는 짜증을 내며 부엌에 들어가 찬장에서 음식을 잔뜩 꺼내서는 뭔가 만들기 시작했다. TV를 보다 졸려서 쇼파에서 자고 있자니 전혀 안어울리는 바보같은 노란 앞치마를 한 여자가 깨워왔다.

「이것 먹어봐. 라자냐 좋아해?」

그녀가 내밀은 포크 끝에 찍힌 라자냐 조각은 맛이 있었다. 여자는 만족한 듯 식탁 위에 더 있으니 먹으라고 말하곤 빨간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늘 밤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어디론가 나갔다. 그리곤 새벽이나 아침이 다 되서야 돌아와 대낮까지 늘어지게 잤다. 잘 때 깨우면 화를 내기 때문에 저녁을 제외하고 식사는 스스로 챙겨먹어야 했다. 여자의 언니가 찾아와 벨을 눌러대는 바람에 아침 8시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주었을 때에도 여자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라는 뚱뚱하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는 매일같이 그녀의 집에 놀러왔다. 멍하니 포스트를 부은 그릇에 숫가락질을 하며 TV앞에 앉아 만화를 보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가 그녀에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농담이 아냐. 저 애를 언제까지 맡고 있을 작정이야?」
「꽥꽥대지 좀 마. 어제 새벽 네시에 들어왔단 말야. 골이 울려…」
「이틀 뒤라고 해놓고선 일주일이 다 되가도록 안오잖아. 애 내버리고 그냥 도망가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알아! 짜증나 죽겠어. 하지만 댄이 부탁한건데 어떻해?」
「남자친구라고 믿을거 못된다, 너. 허우대 멀쩡하게 생겼지만 하는 짓은 이 동네 건달 애들이랑 다를바 없잖니.」
「그래도 댄이 제일 잘생겼잖아. 다른 놈하곤 잘 마음도 안 들어. 남자가 아니라 호박이나 가지나 오이로 보인다니까.」
「어머나, 그게 그렇게 좋아?」

까르르 심술궂은 웃음소리가 터지며 부엌을 울렸다. 그녀의 언니가 이웃에 대해 이런 저런 험담을 하는 동안, 여자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릇을 비우고 개수대에 가져다 놓으려고 부엌에 들어갔을 때 여자는 벌써 맥주 캔을 세 개째 따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가 어머나, 하고 말했다.

「넌 친구도 없니? 토요일 아침인데 TV는 그만보고 나가 놀지 그래?」
「관둬, 관둬. 성격 자체가 칙칙한 꼬마거든. 하는 짓 보고 있으면 음침하기 짝이 없어서 기분이 나쁠 정도라니까. 아무리 잘해줘도 웃지도 않아. 짜증난다구. 그래도 똥오줌은 가리니 아주 귀찮진 않아서 다행이지.」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킬킬 웃는다. 그녀의 언니도 같이 웃어댄다. 미묘한 분위기와 대꾸할 수 없는 말들 사이에 끼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여자의 태도는 혼란스럽다. 감정이란 이름의 옷을 몇번이나 겹쳐입은 것처럼, 하나를 벗으면 다른 하나가 드러난다. 『적의』인지 『호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고, 스스로에게 납득갈만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여자는, 밥을 해준다. 잠을 재워준다. 옷을 입혀준다. 자신을 돌봐준다. 옛날에는 엄마도 여자와 같은 행동을 했다. 하지만 여자는, 『엄마』가 아니다.

여자에 대해 생각하기 싫었다. 필사적으로 다른 것을 생각했다. 몸에 익은 것, 익숙한 것을 찾아 눈을 굴렸다. 현관 근처 구석에 구겨져있는 가방이 보였다. 현관으로 가 가방을 들자 여자의 언니가 소리쳤다.

「꼬마 삐졌니? 쌀쌀맞기는. 어디 가니?」
「…도서관에…」
「칙칙하기 짝이 없다니까. 이 화창한 날에 도서관이 뭐야? 도-서관이.」

밖으로 나서는 순간, 묘하게 비꼬인 여자의 말 끝이 뒤통수에 찐득하니 달라붙어왔다. 한참동안 닫힌 녹색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 느릿하게 댄의 집 쪽으로 발을 돌렸다. 댄은 언제 돌아올 지도 모르고, 여자 집에 계속 있어야 한다면 읽을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돌려주는게 나을 것 같았다.

안에 가득 찬 책 때문에 가방은 굉장히 무거웠다. 들 수가 없어서 바닥에 질질 끌고 가야만 했다. 문을 잠그고 나와 현관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아이들이 공차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키가 크고 가무잡잡한 얼굴을 한 상급생 세 명이 섞여 있었다. 일주일 전에 같은 반 아이 하나가 얻어맞고 장난감을 빼앗긴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눈에 뜨일까봐 황급히 주차장을 지나 건물을 뱅 둘러 뒷문 쪽으로 돌아갔다.

뒷문은 사람 한명 정도가 빠져나갈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열쇠로 녹슨 철문을 열고 손목에 가방끈을 감아 계단 위로 힘겹게 끌어올렸다. 얇은 헝겊으로 감싸인 가방 끝이 지직거리며 끌려올라왔다. 간신히 문턱을 넘어오는 순간, 가방이 부욱 하고 바닥에 책을 와르르 토해냈다.

당황해하며 멍청히 서 있는데 까만 손이 불쑥 튀어나와 가방을 주워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 밑이 퀭한 흑인 여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1층에 사는 아델라다. 가끔 세탁장에 가서 빨래를 할 때, 아줌마들과 이야기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까만 얼굴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한번에 너무 많이 넣고 다니면 찢어져. 튼튼한 걸로 사든지 적게 넣고 다니든지 하렴.」

얼떨결에 따라 웃자 아델라는 바퀴가 달린 빈 바구니에 쏟아진 책과 가방을 주워 넣고 손잡이를 내밀었다.

「오늘은 여기에 가지고 갔다가, 다음에 세탁장에서 돌려줘. 알겠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담배 냄새가 나는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뺨에 키스해왔다. 가느다란 등이 휘청이며 차가운 빛깔의 건물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주인 없이 남겨진 바구니의 손잡이를 쥐어보았다. 따뜻했다.



웃음소리와 음악소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뒤엉켜 집안을 가득 메꾸었다. 여자의 반짝이는 집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로 가득하다. 얼굴이 벌건 어른들이 새벽 2시가 가까이 되도록 잠은 안 자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이상한 놀이를 한다. 시끄러워서 잠도 오지 않아 책을 보려고 했지만 술취한 손님 하나가 휘청대다가 무릎에 술을 잔뜩 쏟아버려 포기했다. 손님을 일으켜세우며 여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흘끗 보았다.

「기생충 같으니.」

같이 이야기 하던 이들이 핀잔을 준다.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거야? 여자는 신경질을 내며 대답한다. 저 밥버러지 때문에 댄이 딜러를 그만뒀단 말야. 위험부담도 적고 수입도 높은데 뭣 때문에 그만둬야 했겠어?

차가운 말에 움츠러들자 여자는 가서 잠이나 자라며 쇼파에서 밀쳐냈다. 빨갛고 파란 조명 속에서 어른들이 낄낄대며 심술궂게 웃었다. 뭣 때문인지 누구를 향한 웃음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웃음이다. 재미있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여자는 초조한 얼굴로 사람들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야기한다. 문이 열릴때마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실망하고, 다시 웃으며 인사한다. 잘 지냈어요? 우리도 잘 지냈어요. 그 옷 너무 예쁘다. 지난 주말에 시내에서 샀지. 반복되는 대화 속에서 여자의 웃음은 점차 일그러진다. 손님들은 그녀의 뒤에서 심술궂게 속삭이며 웃는다. 저 혼자 착각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그녀에겐 관심도 없다고. 증거? 그가 그녀의 파티에 온 걸 본 적이 있어? 그는 그녀와 같이 살지도 않고 보러 오지도 않아.

여자가 뒤를 돌아보자 화제는 급격하게 바뀐다. 요즘 장난 아니야. 총소리 들었어? 스파이키가 그저께 당했다던데. 산산조각났어. 아쿠가 죽었으니 별 수 없지. 푸토는 모조리 쓸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니까. 밤마다 헬하운드가 방문하러 다니잖아. 푸토가 그런 녀석일줄은 몰랐는데. 뻔한 이야기지. 『선물』사러 갔더니 두배로 달라고 하더라. 영업장 늘리려고 그러는 거지 뭐.  헬하운드 때는 괜찮았는데. 아, 헬하운드. 그 녀석도 참 안됐지 뭐야. 푸토한테 하던 일 뺏기고 쓰레기들 사이에서 바닥이나 쓸고 다니니.

축축하게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어와, 기분이 나빠졌다. 신발장 구석에 넣어둔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화장실에는 빨간머리 여자가 변기를 끌어안고 토하고 있었다. 여자에게선 다리를 저는 들개처럼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힘이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세면대 위의 컵을 집으려고 애쓰기에 대신 집어주자 그녀는 킬킬대며 뺨을 꼬집어왔다.

「정말 못생긴 꼬마네. 찢어진 눈에 작은 코에 튀어나온 입. 이렇게 못생긴 애는 처음 봤어.」
「헬렌, 거기서 뭐해?」
「안녕, 마리아. 너 오늘 정말 못생겨보인다.」

빨간머리 여자는 무지개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노란 구슬로 머리를 가닥가닥 묶은 여자를 보고 웃었다. 여자는 빨간머리 여자에게는 신경도 안쓰고 자신의 어깨를 잡아챘다.

「넌 안 자고 뭐하는거야? 이건 또 왠 술냄새람! 정말 맹랑한 애네. 네가 끼어들어 놀 데가 아니야. 방으로 들어가.」

여자에게 어깨를 잡혀 방으로 끌려갔다. 옷에 배인 술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아져 여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은 나무처럼 억세었다. 여자는 거칠게 방문을 열었지만 곧 침대 위에서 엉켜있는 두 남녀를 발견하고 당황하며 문을 닫았다. 여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네가 일찍 자지 않으니까 침대를 뺏겼잖니!」

자고 있었는데 그 둘이 들어와서 뺏긴 거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여자는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았다. 별수없이 다시 여자에게 끌려가 알록달록한 구슬이 가득 매달린 발을 제치고 부엌으로 밀어넣어졌다.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떠들고 있던 약간 나이 든 여자들과 여자의 언니가 말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꼴도 보기 싫단 듯이 내뱉었다.

「기가 막혀서. 이 애 좀 봐. 잠깐 안보고 있었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잖아. 거기서 수다만 떨지 말고 파티분위기 망치지 않게 애 좀 지켜봐!」
「잘 놀다 말고 왜 심술이야?」
「지 남자친구가 안와서 그래. 이번주 파티에도 결국 안왔잖아? 채였다고 소문이 자자하거든.」
「몇주나 안왔다고? 그건 이미 채였네.」

아줌마들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던 여자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다 너 때문이야. 부엌 근처에 있던 손님들 몇몇이 험악한 분위기에 놀란 듯 부엌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별 것 아니라며 손을 내저어 구경꾼들을 내쫓은 아줌마들은 여자에게 달라붙어 다독였다. 여자의 언니가 난처해하며 자신을 보더니 부엌 안에 딸린 작은 식료품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옷이 젖었잖아. 갈아입는 게 좋겠다. 감기 걸려.」

울어대는 여자에게 아줌마들이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여자의 집에서 나왔다. 새벽 밤의 공기는 차갑고 서늘했고, 가로등 불조차 켜지지 않아 아무도 없는 거리의 주변은 온통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색 하늘에는 여자의 집에 잔뜩 달린 구슬 같은 별이 하나 가득 퍼져있었다. 저 예쁜 것들 사이에 자신이 있을 곳 하나 없다고 생각하니 슬퍼졌다. 담쟁이 덩굴이 잔뜩 얽힌 빨간 벽돌벽을 따라 걸어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침대에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
…샤.
카샤.


그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자 낯익은 주홍빛 스탠드의 불빛이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자 댄이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여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댄?」
「카샤, 너 왜 여기 있는 거니?」

쉬어터진 낮은 목소리로 댄이 말했다. 졸린 눈으로 그를 보며 왜 그가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왜 여기 있냐니. 자고 있으니까 그런거잖아. 자는 건 집에서 하는거고…

「카샤!」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화들짝 잠이 깨었다. 댄이 화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여자는 퉁퉁부은 눈으로 문 가에 서 있었다. 여자의 언니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역시 여기 있잖아. 이 밤중에 애가 갈 데가 어딨다고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여자의 언니는 움츠러든다. 여자는 이런 저런 변명을 하며 댄을 달래려 했지만, 펄펄 뛰며 화를 내는 댄에게 되려 잔뜩 혼나고 울음을 터트렸다.「할줄 아는 거라고는 엉덩이 흔드는 것 밖에 모르는 너 따윌 믿은 내가 잘못이지!」성을 내며 여자를 집 밖으로 몰아낸 댄은 자신을 침대에서 끌어내어 다짜고짜 집어던졌다.

「넌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 거냐? 새벽 3시에 널 찾아서 사람들이 온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잖아!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더니 왜 들어쳐먹질 않아!」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그는 듣지도 않고 화를 내며 문밖으로 떠밀었다. 바닥에 엎어진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얼굴에 옷이 날아왔다.

「내 눈 앞에서 네 그 생쥐같은 면상 집어치우란 말야! 꺼져버려!」

사납고 섬뜩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뱅글뱅글. 플라스틱 나비는 줄이 돌아갈 때마다 날개짓을 한다. 반짝이는 비닐종이를 입힌 그것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나비는 다시 날갯짓을 하며 돌아간다.

나비 밑의 테이블에는 유아용 장난감이 잔뜩 놓여있다. 촤르륵 하는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남자애 하나가 구슬이 잔뜩 달린 장난감을 건드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도망가 자기 엄마에게 달라붙는다. 남자애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한번 건드려보았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다시 나비를 올려다보았지만 남자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검사가 끝나자 간호사를 따라 댄의 형이라는 의사에게 찾아갔다. 의사는 뭔가 또 열심히 끄적이더니, 나중에 자신이 댄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의자에서 일어서자 의사는 서랍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쥐어주었다.

「또 보자.」

의사는 싱긋, 하고 깨끗하고 깔끔하게 웃는다. 의사의 웃는 얼굴은 의미가 없는 웃음이다. 즐거워서도 아니고 기분이 좋아서도 아니다. 입매 끝만 살짝 올라가 『웃는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동물이 미소짓는다면 의사의 웃음 같은 느낌일 것이다. 선의도 없지만 악의도 없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스탠이 병원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낯익은 것에 깜짝 놀라 멈춰섰다. 왜 그가 여기 있지? 그는 여기 있어선 안된다. 집에서의 그와 밖에서의 그는 다른 사람이다. 자신이 아는 그는 현관 근처의 창문에서만 있어야 한다. 아니면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거나…

자신이 만들어낸 혼란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스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가자.」

버스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탠은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담배냄새가 싫어 멀찍히 떨어져 서 있는데, 그가 갑자기 손짓했다. 뭘까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턱을 움켜쥐어와, 움찔하며 물러섰다. 『아, 미안』 하고 그가 말했다.

「아팠어?」
「…….」
「멍들었어. 거기.」

스탠이 자신의 뺨을 툭툭 쳐보였다. 욱신거리는 뺨에 차가운 손을 대봤다가, 아릿아릿한 느낌에 깜짝 놀라 손을 뗐다. 그는 주머니 안쪽에서 얇은 소다캔을 꺼내서는 뺨에 대주었다.

「엉망이다, 너.」

자신은 모르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리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스탠이 물었다.

「댄이 그런거냐?」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해진 지폐를 밀어넣었다. 스탠은 자신이 앉은 의자의 옆을 지나쳐 앞자리에 앉았다. 그가 기다란 다리를 밖으로 내놓고 자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가슴께에서 반짝이는 것이 흔들리며 아래로 무겁게 기울었다. 호기심에 손을 내밀어 잡아당겼다.

금목걸이에 매달린 그것은 손가락마디만한 금색 천사상이었다. 조그마했지만 얼굴에는 부드러운 코와 타원형의 눈이 새겨져있었다. 스탠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본다. 어색함 속에서 메마른 입을 열었다.

「예쁘다」
「어렸을 때 신부님한테 선물받은 거야」
「카톨릭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렇게 앉아서 천사상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이 조그마한 것에 옷자락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새겼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스탠은 느릿하게 허밍을 흥얼거리며 의자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엄마가 그립진 않아?」

『그립다』는건 보고 싶다, 라는 뜻이다. 하지만 『엄마』는 『없는 것』이다.

「볼 수 없어」

돌아온 대답에 스탠은 미간에 약간 주름을 잡고 갸웃한다. 『엄마』를 떠올리면, 엄마의 얼굴보다도 아빠의 우는 모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모두 안개처럼 희끄무레하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뭉퉁그레로 모아진 하나의 그림이다. 아프다고 병원에 간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울지 않아서, 몇번이나 『매정하다』『차갑다』고 들었다. 결국 술 취한 아빠에게 울때까지 맞고 나서 엄마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픔』은 『죽음』을 뜻하는 다른 말이었다.

「아빠는?」

손을 놓았다. 스탠의 까만 티셔츠 위로 작은 천사상이 매달린 금목걸이가 출렁거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돌연 그가 끔찍한 것을 물었다.

「너, 사실은 댄, 무서워하지?」

들이밀어진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듣고 싶지 않은데, 명확한 발음의 익숙한 목소리는 쉽게 넘겨지지가 않았다. 스탠은 계속해서 잔혹하게 말했다.

「그는 너한테 관심없어. 어린애 따위 짐일뿐이니까, 귀찮아하지. 한번 나가면 너 따윈 몇주일이고 잊어버리고, 화나면 두들겨패고.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되는거야. 맞는 거 그렇게 무서워 하면서 댄하고 같이 지낼거야? 녀석보다 너에게 잘해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댄을 나쁘게 말하지마.」

갈라진 목소리가 스탠의 말을 잘랐다. 그가 약간 의아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널 나쁘게 대하잖아?」
「댄은 나를 나쁘게 대하지 않았어. 그가 화를 내는 건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창가로 스며든 석양 속에서, 그의 얼굴이 여느때의 다정한 친구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스탠은 빙긋 웃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가 맞겠지.」



버스에서 내려 스탠과 헤어졌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에는 늘 뛰어다니던 아이들조차 없었다. 그림자와 발소리만이 열심히 자신의 뒤를 따라왔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 목에 건 열쇠를 끄집어냈다. 녹슨 문구멍에 열쇠를 꽃아넣으려고 손잡이를 잡았다가,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열린 문 틈으로 방에 켜진 불이 보였다. 댄이 집에 있는 듯했다. 때릴 정도로 화를 내면, 얼마간은 집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다. 화가 풀린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무섭고 긴장되면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그가 화를 내는 건 무서웠다. 때려도 화가 가라앉지 않으면, 어디론가 가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열쇠를 건 목걸이를 풀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방 안에서는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둑어둑한 집안에서, 불이 켜진 방만이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손으로 방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섰다.

「댄?」

바닥에는 옷과 잡다한 물건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서랍장을 뒤집고 있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키가 크고, 털이 많고, 충혈된 빨간 눈을 가진, 알코올 냄새나는 남자.

도망가야 돼. 도망가야 돼. 남자는 서랍장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온다. 도망가야 하는데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 없다. 눈을 크게 뜨고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아빠다.

몸을 묶어두던 무서운 마법이 풀렸다. 남자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현관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잡았다고 생각했다. 금방 놓쳤다. 뒤에서 당겨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끔찍하게 아파서 매달릴 수가 없었다. 커다란 손에 몇번이고 얼굴을 얻어맞았다. 심장이 커다란 망치에 두들겨맞아 눈깜짝할 사이에 펑, 하고 풍선처럼 터져버린다. 빌어먹을 새끼, 날 물먹이고 잘도 넘어갈수 있을거라 생각했지? 그르렁거리며 남자가 말했다. 그동안 처먹은 돈은 다 어다 감춰놓은거야? 서류는 어딨어? 어딨냐니까!
몰라요, 그런거 몰라요.
거짓말만 지껄이긴!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망할 녀석, 시끄러워! 닥쳐! 닥치라고 했잖아!」

울음소리가 새어나올때마다 커다란 몽둥이같은 팔이 날아들었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고약한 냄새가 풍기며 코를 찔러대 숨쉬기가 힘들었다. 머리서부터 시커먼 것이 스물스물 몸을 잡아먹는다. 불같이 뜨거운 것이 뱃속을 뛰어다니며 몸을 갈겨댔다. 누군가가 옆에서 속삭였다. 넌 죽을거야. 죽을거야.

목을 조여오는 손을 깨물자 남자가 화를 내며 자신을 집어던졌다. 어딘가에 머리를 쿵하고 부딛혔다. 괴물같은 남자가 널부러진 자신을 끊임없이 내리치는 환상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아니, 잃었다고 생각했다.

비명소리. 울음소리. 뭔가가 짓이겨지는 소리. 들릴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든다. 아픔에 점점 익숙해진다. 몸에 가해지던 통증은 천천히 사라지고,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렸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박자. 간간히 끼어드는 낯익은 소리. 이건 노래다. 노래는 노래인데 끔찍한 소리여서 노래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스탠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만둬, 멍청아. 그만둬!

「-----」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살을 파고들어가는 뜨거움과 아픔에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온 몸의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아프다. 너무 아파. 눈물이 줄줄 흘렸다. 댄이 부여잡은 손을 놓았다. 이그러진 담배꽁초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웨엑, 하고 막혔던 숨과 함께 토사물이 튀어나와 뚝뚝 떨어졌다. 피부에 닿는 거친 천의 감촉. 쉬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통증에,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렸다. 살이 타는 냄새가 흐릿하게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댄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댄이 경련하는 몸을 짓누를 듯이 세게 끌어안아왔다. 그가 어린애처럼 크게 울었다.

「Dan, are you OK?」
「Yeah, I'm OK. I'm OK…」



날은 맑고, 공기는 건조하다 못해 뜨겁다. 아이스크림은 냉동고에서 꺼내든지 몇분이 채 되지 않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담뱃불에 지져진 왼손은 아직도 쓰라리고 아프다. 반창고를 붙였지만, 간질거려서 몇번이고 문질렀다가 통증에 화들짝 손을 떼었다.

「빨리 먹어. 묻는다.」

댄이 물이 고이는 아이스크림 끝을 가르켰다.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자 지저분하다며 티슈를 뜯어주었다. 스탠이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다 됐다. 가서 볼래?」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밀어넣고 재빨리 뛰쳐나갔다. 천장 끝에 매달린 새모이집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문 사이로 고개만 슬쩍 들이밀고 댄이 투덜거렸다.

「새 따위, 귀찮다구. 저거 달아놓으면 이놈 저놈 다 날아와서 여기저기 똥 싸놓을텐데.」
「낭만도 없는 녀석.」

스탠의 핀잔에 댄은 툴툴거리며 선풍기 앞으로 돌아갔다. 스탠이 안들어갈거야? 하고 묻기에 새가 와서 먹는 걸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빨리 오진 않아, 그가 난처한 듯이 웃고는 댄의 옆으로 돌아갔다. 바닥에 앉아서 한참동안 새를 기다렸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우는 소리는 들렸지만 새는 오지 않았다.

유리문 너머에서 댄과 스탠은 머리를 맞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숨을 쉬지 않아서, 죽었는 줄 알았어.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쳐…네 아버지?…아니야. 그 놈은 브리의 셋째 남편. 카샤 친아빠는…브리는 자기 이야기를 안하는 사람이라…인디언이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원주민 핏줄에는 정부 보조금이 나오니까…그 놈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브리 병원비 대느라 전재산을 팔아치우고 나선 사람이 바뀌었……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침묵.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준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찔러대서 아프다. 신경질적으로 상처 주변을 후볐다. 반창고 아래로 피가 배어나온다. 까맣게 굳어가는 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쾅쾅쾅.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스탠이 서 있었다.

「나, 간다」
「아, 응」

커다란 발이, 고양이마냥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문 너머로 걸어간다. 고개를 돌리자 스탠이 댄에게 신발상자 같은 것을 넘겨주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스탠은 씨익 웃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댄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더니 떠났다. 댄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상자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신발장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도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해서 그 주변을 왔다갔다 했다. 문득, 그가 자신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사과 남았는데, 먹을래?」
「응」

네발로 거실 쪽으로 기어가 남은 사과 조각을 주워먹었다. 마지막 조각을 집었을 때, 댄이 상자를 다시 들고 와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 쪽으로 밀었다. 의아해하며 상자를 끌어당겨 뚜껑을 열었다.

상자의 안에는 까만 총이 있었다.

「네 거야.」

댄이 그것을 집어 손에 쥐어준다. 여기를 당기고 여기를 누르면 되는거야. 괜찮아, 지금은 장전된게 아니니까…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쇠의 무게과 함께 댄의 말이 어지럽게 섞여들어간다. 그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시리도록 선명해서 아플 정도로.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되는거야.

「이건 네 거니까, 네가 두고 싶은 곳에 놔둬.」

댄은 총을 상자안에 돌려놓고 뚜껑을 닫는다. 햇살 속에서 신발 상자는 여전히 그냥 조그만 상자일 뿐이다. 나뭇잎이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린다. 무서워? 댄이 고개를 약간 기울인다.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카샤.」

이건 뭘까.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 혼란. 모르겠다. 모르겠어.

「카샤, 날 봐.」

댄의 손이 양 볼을 감싸고 세게 붙들었다.

「이 이상 네가 끔찍한 일을 겪게 두진 않겠어. 너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You promise?」

그가 자신의 손을 끌어 왼쪽 가슴에 얹고, 그 위로 그의 손을 포개었다. 손바닥 안에서 그의 심장이 고동친다.

「I promise.」



댄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벌거벗은 등과 허리쪽에는 둥근 흉터가 남아있다. 어깨 근처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바닥 어딘가에 널려있던 셔츠 중 하나를 집어 입는다. 서랍장을 밀고 벽붙이장의 손잡이를 찾아낸다. 그는 벽붙이장을 열고 어딘가에서 열쇠와 가방을 꺼내든다. 그것은 마법상자같다. 댄이 필요한 것은 뭐든지 꺼낼 수 있다. 그는 다시 벽붙이장을 닫고, 서랍장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는다.

신발끈을 매고, 현관으로 나가려다가 잠깐 멈칫한다. 다시 돌아와, 달력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넣는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그맣게 메모를 끄적인다. 댄이 없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이다. 그는 펜을 거실의 TV쪽에 던져놓고는, 밖으로 나간다.

철컹.

등쪽이 선뜻하다. 자신이 혼자있다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깨닫는다.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상자를 꺼내 끌어안았다. 차갑고 딱딱하고 뾰족한 상자가 몸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댄다. 돌덩이처럼 무감각해진 몸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인다. 이건 댄이다. 댄이다. 댄이다.

댄이 언제부터 일을 한다고 나가서 몇주일이고 돌아오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처음에 댄과 함께 이 도시에 왔을때는, 매일 밤 꼬박꼬박 돌아와줬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하지 않다. 댄과 함께 지낸 것이 몇 달인지, 몇 년인지, 혹은 몇주일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 전의 기억도 불확실하다. 『그런 건 다 잊어버려도 돼.』 그가 말했다.

들려주었던 주의사항들을, 기억한다. 『눈에 띄면 안돼.』 댄이 코트 깃을 여며주며 말했었다. 겨울이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도 안돼. 네가 눈에 띄면…』 침묵.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포옹해왔다. 명확한 발음과 낮은 톤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 내가 널 지켜줄게』

댄은, 안심되는 장소, 안전한 장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아무도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아프게 하지 않는다. 괴롭히지 않는다.

이불 속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자신에게 말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야.



세탁장에는 주부들 두셋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다.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고 세탁기 안에 빨래를 밀어넣다가, 어디선가 튀어나온 팔에 덥썩 붙들렸다.

「얼굴이 왜 그러니?」

움찔 긴장하며 돌아보자, 기억에 있는 흑인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아델라는 요모조모 흩어보더니, 혀를 찼다.

「퉁퉁 부었네. 얻어맞았구나? 학교에서 싸웠니?」

『학교』는 지금 방학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누가 때렸는지 왜 맞았는지 물어올 것이다. 대화란 그렇다. 누군가는 계속 질문하고, 누군가는 대답해야 한다. 싫은 대답이라도. 그게 어른들의 방식이다.

학교 빠졌구나? 아무리 그래도 학교는 제때제때 가야지. 그녀는 잔소리를 하면서 세탁기에 코인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위잉, 세탁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녀의 뼈가 불룩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델라와 같이 이야기하던 여자들 중 한명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는 애야?」
「아, 위층에 사는 애야.」
「어머, 애 얼굴이 왜이래?」
「그거, 그대로 두면 덧난다. 가서 약바르자.」

거절할 기회도 없이, 아델라의 팔에 붙들려 1층 복도 구석에 있는 파란 문으로 끌려갔다. 아델라의 집은 노란 바탕에 갈색 줄무늬의 벽지에 해바라기를 여기저기 장식해놓아 화사해보였다. 화장실 옆에는 아기용 오리 변기가 조용히 누워 있었고 현관 구석에 붙어있는 키재기 포스터에는 까만 매직으로 선이 몇 개 그어져 있었다. 아델라가 컵에 주스를 따라주는 동안 파란 카펫에 발을 딛고 부엌 카운터에 있는 큰 의자에 앉았다.

「아이, 있어요?」
「응. 이제 두 살이야. 지금은 자고 있어.」

그녀가 치즈 케이크 조각을 분홍색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주면서 말했다. 아이를 갖기에는 젊어보였는데.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델라는 몇살일까?

「구급상자가 여기 어디 있었는데… 아, 여기 있다. 얼굴, 이쪽으로 돌려봐.」

뼈마디가 튀어나온 긴 손가락에 붙들려, 톡 쏘는 냄새가 나는 약을 덕지덕지 얼굴에 발렸다. 상처 부분에 닿을때마다 아파서 몸을 뒤로 빼려 할 때면, 아델라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되려 더 아파지기만 해서 비명을 올렸다.

「엄살 부리긴.」

사투리 섞인 억양이 놀리듯이 머리 위에서 말한다. 아델라의 몸에서 풍기는 달착지근한 아기냄새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약간 신 맛이 나는 치즈케이크, 손 끝에 닿는 부드러운 수제품의 쿠션의 감촉, 이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그녀가 구급상자의 뚜껑을 닫자마자, 접시를 밀치고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빨래, 다 됐을테니까…」

듣는 둥 마는 둥 『인사』를 던지고, 현관문을 밀치고 도망나왔다. 혀끝에 남아있던 케이크의 달콤한 맛은, 금세 녹아 없어졌다.



12시. 점심시간과 동시에 자습이 끝났음을 알리는 시각이다. 도서관의 지도교사들을 밀치고 아이들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언제나처럼 도서관에서 문을 밀고 나와, 무거운 책을 끌어안고 걸었다. 여름방학 동안에는, 다들 도서관에 모여 여름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했다. 공부하는 건 재밌기 때문에, 여름학교에는 가지 않았지만 그 무리에 끼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중학교 교과서를 읽다가 사서에게 걸린 것을 빼면. 그냥 궁금해서 봤던 거라고 했으니까, 아마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분류된 라벨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다. 사서들은 그런 사실에 익숙하다.

골목에서 돌다가, 한무리의 아이들과 부딛혔다. 아파트 근처에서 언제나 놀고 있는 패거리다. 움츠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빠져나가려는데 키 큰 남자애가 붙들었다.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다냐? 자식이-」

그가 겁주려는 듯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후려치지는 않았다. 키 큰 남자애를 밀치고 무리 중 키가 작은 남자애가 끼어들었다.

「어? 나 이 녀석 알아. 걔잖아? ----의 동생.」
「----의 동생이라고? 얼굴이 하나도 안닮았는데.」
「다들 그렇지 뭘. 너희 집처럼 형제가 하나같이 호박인 줄 알아?」
「시끄러 마!」

불쾌한 내용인데도, 묘하게 발랄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거리에 퍼져나갔다. 주근깨가 있는 남자애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의 동생이라면, 손을 봐줘야지.」악의어린 사나운 눈길에 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외쳤다.

「어이, 거기 너네, 뭐하고 있는거야!」

남자애들이 움찔한다. 우체국차가 털털거리며 다가왔다. 허먼이었다. 그가 차에서 뛰어내려, 감싸주듯 자신 앞에 섰다. 주근깨 있는 남자애가 악을 썼다.

「지랄 말고 빠져, 허먼! 푸토 쪽 자식들은 다 죽여버릴거야!」

허먼? 감옥갔다왔다는? 갱이잖아? 하지만 그냥 별볼일 없어보이는데? 얼마전에 출소했대. 우리 엄마가 마리아랑 이야기하는거 들었어. 남자애들이 술렁였다. 허먼이 사납게 말했다.

「스파이키처럼 되고 싶은게 아니라면 빠져, 오토. 니 형 일은 푸토 권한이야.」
「형은 네 친구잖아! 왜 가만히 있는거야!」

허먼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차에 타라고 손짓할 뿐이다. 황급히 차에 올라타자 허먼이 차를 몰고 떠났다. 패거리는 겁먹은 듯 주춤해서 물러서있다. 뒤에서 남자애가 고함쳤다. 「그래, 그렇게 푸토 엉덩이나 핥고 살라구, 겁쟁아!」

차는 큰길로 나서, 고급 주택가로 들어섰다. 남자애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허먼이 차를 세우고 말했다.

「너무 싸돌아다니지 마라. 요샌 분위기가 안좋으니까.」

허먼의 굳은 얼굴을 보고, 설명은 없을거라는 걸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벨을 누른다. 쪼로롱 쪼로롱 하는 나지막한 새소리. 파란 문이 열린다. 아델라는 의아한 얼굴로 내려다본다.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 돌려주려고…」

그녀는 가만히 있다. 기억 못하는 걸까? 얼굴이 붉어질대로 붉어져서, 뻥!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괜히 찾아왔다고 후회한다. 몇분이 지났을까, 그녀가 천천히 웃었다. 「고마워.」

끄덕이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불러세웠다.

「케이크 먹고 갈래?」

머뭇거리며 파란 카펫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문이 열려있는 방 안쪽에는 아기가 장난감들 사이에서 잠들어있다. 가까이 가질 못하고 아기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자, 그녀가 살풋 웃는다.

「만져봐도 돼요?」
「깨우지만 않으면.」

아기는 정말 조그마했다. 손가락으로 그 작은 손을 건드리자, 손가락을 아플정도로 꼬옥 쥐어왔다. 통통한 볼과 작은 입술이 너무 귀여웠다. 잘때야 천사같지. 깨나면 악마가 따로 없다구. 부엌쪽에서 아델라가 농담하듯이 말했다.

다시 벨이 울렸다. 아델라는 케이크를 자르던 칼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누군지 알고 있던 것처럼 당연하게. 현관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거리낌없이 성큼성큼 집안에 들어왔다. 제가 집 주인인 마냥.

남자가 아기와 자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아델라가 방문을 닫았다. 방문너머에서 남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돈 좀 빌려줘. 안돼. 아델라는 거절한다. 네가 이때까지 꿔간 돈이 얼마인지 알아? 내가 호구로 보여? 저기 누워있는게 누구 새끼로 보여? 니 자식이야, 이 망할 개새끼야. 돈을 벌어오질 못할 망정 손을 내밀어? 꺼져!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 무언가가 부딛히는, 둔탁한 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비명소리.

창을 타고 햇살이 넘실거렸다. 방안은 조용하고 안전하기 짝이 없는데, 벽 너머에서는 끔찍한 소리만이 연달아 났다. 문 쪽에 뭔가 부딛혔는지, 쿵 하고 커다랗게 소리가 났다. 아기가 깨어나 울어대기 시작했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비명처럼 귓가에서 앵앵거렸다.

몸을 웅크렸다. 그저 벽 너머의 무언가가 자신에게 덮쳐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머리 구석에 있는 아픔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죽을지도 몰라.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뜨겁게 머리를 내리쳤다. 무릎을 끌어안았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방 밖으로 나가, 집으로 가서, 상자를 들고 오면 되는데. 그럼 그녀를 괴롭히는 괴물을 없앨 수 있을텐데. 그 간단한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우는 소리가 싸우는 목소리와 뒤섞여,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니, 막으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할 수가 없었다. 울면서 양 귀를 손으로 간신히 움켜쥐었다.
댄, 어디있어?

여름햇살이 미치도록 뜨거웠다.




더위에 잠에서 깬다. 이불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차갑게 베고 지나갔다. 댄은 여전히 일을 나가면 몇주일이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혼자있는 것에 천천히 익숙해진다.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내리고 화장실 밖으로 나오다, 발 밑에 노란 불빛이 고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을 건너 걸쳐진 불빛의 끝에는 스탠의 방이 있다. 방에는 여러명이 있는 듯 흐릿한 인영이 보인다. 창에 기대있는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 앞에 서 있던 피어싱 한 남자가 뭐라고 말한다.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창가에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자리를 떠난다. 곧 누군가가 다가와 총을 들이밀고 피어싱한 남자를 쏜다. 그는 계속 총을 쏘면서 창쪽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피어싱한 남자가 쓰러지자, 그는 마지막으로 총을 아래쪽으로 향하고 한번 더 쏜다. 고개를 들고, 창 안쪽으로 물러난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다.

댄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일을 나갔다던 댄이 왜 저기에 있을까. 혼란을 인식하기도 전에 총성이 한번 더 났다. 창 안쪽에서 일사분란하게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둔탁하게 총성이 연이어 울려퍼졌다. 그러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윌콧 씨마저도.

댄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난다. 허먼이다. 그가 하얀 봉투를 열어 안의 것을 맛보고는, 상자에 담아 어디론가 갖고 나갔다. 창가에 기대서 구경하고 있던 남자는 만족한 듯 웃으며 댄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남자의 가슴께에서는 낯익은 금색 목걸이가 반짝였다.

아무도 없는 침대로 돌아갔다.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이 흔들릴때마다 까만 그림자가 곰팡이처럼 천장을 구멍냈다.
푸토Putto는, 스페인어로 작은 천사(little angel)를 뜻한다.




실내용 음지 화초가 잔뜩 있는 커다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사는 댄과 같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보는 거니까, 나쁘지 않을거야. 의사는 곧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곧 돌아올게.」

곧 심심해져,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분수를 들여다보았다. 대리석 틈새 사이로 종이처럼 얇게 새어나온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분수라면 물방울이 튈텐데 코앞으로 다가가도 물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라도 씌웠나 싶어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가 차가운 물의 감촉을 느끼고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풋 하는 웃음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자 의사와 비슷한 연령대인 듯한,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서 있다. 이 애가 그 애야? 응. 그럼 부탁해. 의사는 손을 흔들고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친절해보이는 얼굴로 여의사가 웃었다.

「자, 그럼 우리 이야기를 해볼까? 난 낸시야. 넌?」
「카샤.」
「안녕, 카샤.」

여의사는 계속해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한다. 눈을 슬쩍 돌려 벽에 걸린 자격증과 사진과 그림들을 흩어보았다. 시선은 방 한바퀴를 돌아, 문 가 근처에 달린 하얀 포스터 세 개에서 멎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는 이들이 희망없이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세요

AIDS
어린 목숨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세요

사랑을 나누어주세요

사랑을

문득, 여의사의 상냥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사슴처럼 커다랗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갈색 눈동자.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랑』이 뭐죠?」




낮잠을 자다 깬다. 집안은 고요하다. 여의사가 준 약은 먹고나면 무척이나 졸리다. 하품을 하며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가, 난장판이 되어있는 집안을 발견한다. 피가 카펫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고, 물건들은 다 바닥에 떨어져있다. 활짝 열려있는 침실 문 너머로, 창문이 열렸는지 커튼이 펄럭이는 것이 보인다. 아빠일지도 몰라. 일상과 전혀 다른 모습은 언제나 아빠를 말한다. 공포로 몸이 굳었다. 문득 스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되는거야.

쇼파 밑에, 이불과 함께 굴러떨어져있던 상자를 집어들었다. 상자의 뚜껑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갑자기 전화가 따르르릉하고 울렸다. 움찔하며 굳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응답기도 돌아가지 않는다.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 상자를 열고 총을 꺼냈다. 묵직한 총의 무게가 손안에 드리워졌다. 떨리는 손으로 총을 부여잡았다.

벽에 가려진 침대 가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카펫 위로 다가오는 발끝이 보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네 흉터투성이 등과
내 얼룩진 머릿속과
네 무표정한 얼굴과
내 무감각한 신경과
네 우는듯한 신음소리와
내 무거운 침묵과
네 흐릿한 웃음과
내 일그러진 얼굴과


그는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물 밖으로 끌려나온 물고기 마냥, 숨쉬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식은땀이 뒤범벅 된 얼굴로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헐떡이는 숨소리에 간간히 섞여 나오는 말은 몇몇 단어만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반복해서 같은 단어를 말한다. 자신의 이름 같았다. 그가 다가오려는 듯이 발을 내딛으려다 휘청대며 옆으로 고꾸라진다. 흰 방문에 긴 붉은 꼬리를 그리며 그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 바닥에 부딪히며 묵직한 울림을 냈다.

태엽이 풀리듯이, 굳어있던 몸이 천천히 움직인다. 낯선 목소리가 벽에 부딪히며 뛰쳐나왔다.

「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얼굴을 감싸쥐었다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의 차갑게 늘어진 머리카락. 아직 따뜻한 가슴. 피로 굳어진 옷. 그의 희미한 웃음.


나는 다시 혼자가 됐어. 이제 어쩌면 좋지? 싫어. 이런 건 싫어. 나는 괜찮아 라고 다시 말해줘. 화를 내며 때려도 돼. 옆에 있어줘. 혼자 있는 건 싫어. 혼자는 싫어……





병원의 의자는 차갑고 딱딱하다.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사회복지기관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상냥하게 웃는다. 괜찮아. 우리가 널 보살펴줄거야. 넌 이제 안전하단다.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

간호사가 와서, 여자에게 뭐라고 이야기한다. 여자가 다가와 손을 잡는다. 의자에서 일어나 간호사가 가르키는 대로 복도를 따라 걷는다. 닫혀진 문 앞에서 여자가 손짓한다. 「아직 아파서 자고 있으니까 깨우면 안돼.」간호사가 주의를 준다.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운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에어컨디셔너 덕택에 병실은 약간 서늘하고, 창으로 새어들어오는 여름의 햇살은 따뜻하다. 칸막이로 나누어진 침대들 사이로 커튼이 자그맣게 춤을 춘다. 댄은 창가의 침대에 누워있다. 병실의 벽처럼 하얗고 창백한 얼굴이다. 자그만 차가운 손이 뻗어와, 댄의 눈을 덮는다.

Are you OK?


여기엔 아무도 없다.

손가락을 움츠려 주먹을 쥔다.
손끝에서 쿡쿡 쑤시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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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는 아닙니다만 장르제한이 없다는 공지를 읽고 망설이다 올려봅니다.
긴 글,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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