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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무림괴수

2009.10.14 23:0610.14


“무료하군.”

한스 슈트리펠 소위가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바로 앞에서 술을 홀짝이던 동료, 유 소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호오, 그렇다면 같이 트럼프라도 치지 않을래?”

그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아니야! 다시 생각해보니 할 일이 생각났군! 오, 그래!”

괜히 이상한 말을 꺼냈다가 저 녀석에게 붙잡혀 소중한 휴식 시간 전부를 카드놀이에 허비한 것이 몇 번이나 됐는데 또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할 줄이야!
슈트리펠 소위는 서둘러 여기저기 뭔가 할 일을 찾아보았다.
바로 옆 탁자에 누가 읽고 그냥 놔두고 가버린 것 같은 책이 한 권 보였고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만만한 게 책이었다.
오, 이런!
유 소위는 벌써 카드를 꺼내들고 있었다. 분명 좋은 친구였고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카드놀이에 너무나 광적으로 미쳐있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자 가장 큰 흠이었다.
그는 서둘러 책을 집어 들고는 표지도 제대로 보지 않고 대뜸 펼쳤다.

“갑자기 책을 읽어야 되겠군. 하하하, 너무 재밌을 것 같아!”

라고는 했지만 문장을 빠르게 훝어 보니 그저 그런 삼류 판타지 소설이었다.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건만 유 소위는 여전히 흡사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읽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슈트리펠 소위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왜 이런 멍청한 소설을 읽는데 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되는가 하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이 흥미로웠던지 유 소위가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그는 깜짝 놀라 얼른 표정을 진정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음, 그러니까....20세기의 군인이 검과 마법이 지배하는 이차원으로 건너가 벌이는 모험 활극이군. 뭐, 시간 때우는데 제격인 물건이야.”

“호오, 시간 때우는 데는 트럼프가 더 제격이지 않을까?”

슈트리펠 소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저 친구의 말은 듣다보면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종종 ESP 능력자임을 의심한 몇몇 이들에 의해 강제로 검사를 받아보기도 할 정도였으니.
그는 저 친구의 말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듯 떠들었다.

“정말 말이 안 되는군. 과거나 미래로 이동하는 것은 몰라도 다른 차원으로 간다니! 정말 허황된 생각이야. 재미는 평균 정도는 있어도 설정이 정말 엉망이군. 하하하!”

그러자 유 소위가 흥미가 동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호,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다행히 주제를 바꾸는데 성공했다고 확신한 슈트리펠 소위는 서둘러 대답해주었다. 조금이라도 이야기의 맥이 끊겼다가는 꼼짝없이 트럼프를 칠 것만 같았다.

“하하하, 자네도 알다시피 이 세계는 하나의 직선된 시공간선을 가진 직선 세계이잖아! 시공간 분기점에 의해 다른 평행 세계로 분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솔리테어를 치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리던 그가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반박했다.

“흠, 자네가 말하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분명 우리들은 직선 시공간선을 가진 세계에서 시간을 보호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 시공간선과는 전혀 다른 개별적 시공간선을 가진 이질적 타 차원이 존재할 가능성은 분명 있어.”

슈트리펠 소위는 갑자기 분위기가 토론으로 흘러가자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친구라고 속으로 투덜댔다.

“그래, 그래. 말로는 그 누가 못해? 설사 있다고는 해도 어떻게 갈 수도 없는 그림의 떡, 아니 떡이 아니라 교묘하게 사람들을 노리는 덫이 될 수도 있는데.”

“타임 슬립 입자를 통한다면 충분이 차원과 차원을 넘을 수 있어. 이 망할 입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과거나 미래의 어느 장소로 우리들을 이동시켜주는 존재하는 모든 물리학을 초월한 성질의 것이지. 만약 우리들의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타임 슬립 시켜준다면....”

슈트리펠 소위는 코웃음을 치며 알 수 없는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동료의 눈동자를 약간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물리학을 초월한 타임 슬립 현상만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그 원인에 해당하는 정체불명의 입자들만 아니었더라면 시공 연속체를 수호하고 우연히 시간을 뛰어넘어 역사를 개변하려는 무장 집단과 전투를 벌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시공간을 보호하는 것만도 힘든 판국에 다른 차원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뭐, 이왕이면 예쁜 여자들로 가득 찬 차원이면 좋겠는데...”

자신의 가벼운 농담에 유 소위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대자 한스 슈트리펠 소위는 이 인간이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그리고 점차 불쾌감으로 물드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 미안! 미안! 설마하니 자네 아직도 모든 남성들의, 아니 이성애자 그룹만 국한해야겠군. 하여간 그들 모두가 천국으로 입을 모으는 그 시공간대로 못 갔단 말인가? 아, 정말 불쌍하군! 크하하하하!”

기분은 나빴지만 유 소위의 정보는 그의 흥미를 동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한스 슈트리펠 소위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시공간대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물어보려던 찰나 그들이 앉아 있는 간이 휴게실을 뒤흔드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 보호군 공군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그 뜻을 알 수 있는 신호.

“핫, 스크램블!”

“젠장! 무슨 일이지?”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문을 박차고 활주로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흡사 대지를 뒤흔드는 굉음, 그리고 청명한 푸른 하늘을 가리는 그림자.

“신이시야, 맙소사!”

귀를 뒤흔드는 울부짖음과 함께 언뜻 보자니 공룡을 닮았지만 결코 공룡은 아닌 거대한 파충류 비슷한 존재가 기지를 쑥대밭으로 휩쓸고 있었다.
슈트리펠 소위는 입만 딱 벌린 채 그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유 소위 역시 충격을 받긴 매한가지였지만 곧 재빨리 정신을 갈무리하고 한스 슈트리펠 소위의 등을 강하게 내리치며 외쳤다.

“정신 차려! 저 망할 놈이 우리 집을 쓸어버리기 전에 먼저 쓸어버려야 돼! 어서 활주로로 뛰어!”

“으...으음, 전투기들이 무사해야 될 텐데...”

슈트리펠 소위의 걱정대로 활주로 위에 무사한 기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기지 곳곳에는 수많은 이들이 동분서주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맙소사, 괴물이다! 다 튕겨낸다!”

휴대용 미사일을 연속으로 발사하던 어느 공군 사병이 경악과 공포에 찬 얼굴로 외쳤다.
슈트리펠 소위는 정말이지 한심하다는 듯이 그 녀석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괴물이니까 괴물이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 괴수라고 해야 되나?
유 소위는 어느 정비병이 미친 듯이 몰고 있던 자동차 앞을 막아서서 제2격납고로 태워다 주길 부탁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아무래도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순간 유 소위는 주먹을 휘둘러 정비병을 단숨에 때려눕히고는 차를 강탈했다.
정말이지 탁월한 협상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어서 타! 전투기만 타면 저 녀석을 통구이로 만들 수 았어!”

유 소위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슈트리펠 소위는 미심쩍은 심정으로 운전대 바로 옆에 앉았다.
물론 정신 잃은 불운한 정비병은 뒷자리에 치워주는 친절과 함께.

“글쎄, 지금 저 녀석은 미사일이나 음파 충격탄을 거의 쉴 새 없이 맞고 있는 데도 멀쩡한데?”

슈트리펠 소위는 분한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유 소위를 무시하고 자동차에 장착된 스캐닝 장비를 분리해 눈에 갖다 대보았다.
스캐닝 장비는 저 알 수 없는 괴수에 대해 대략적이나 정보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크기 50미터에...흠? 무게 260톤? 의외로 적군. 그리고..”

“이런, 공군 활주로 방어 FS들이군! 저 녀석들이 다 해결해버릴 것 같은데?”

유 소위는 크기 15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인간 형상의 기계들 두 기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무기를 각각 손아귀에 쥔 채 괴수를 목표로 접근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분통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슈트리펠 소위는 그 말에 아무런 관심도 가질 수 없었다. 스캐닝 장비가 추가로 알려준 정보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체내에 고에너지 반응? 이건 대체?”

그 의문은 곧 풀릴 수 있었다. 괴수는 인간을 포함해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을 찢어발기고 공포에 질리게 만들 입을 한껏 벌려 진공에서 불타는 화염 마냥 비실체감이 드는 열선을 토해낸 것이다.

“세상에! 지금 그거 봤어? FS가 아예 작살이 나버렸군!”

한스 슈트리펠 소위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묘한 흥분으로 들떠있는 유 소위를 한 번, 그리고 열선을 뿜어내며 망가진 FS를 마무리하는 괴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찢어진, 그리고 아무런 감정 없는 무자비함과 냉혹함을 선명하게 발하는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는 온몸으로 오한을 느꼈다.

“흠, 파일럿들은 무사히 탈출했군. 운 좋은 녀석들이...어?”

유 소위는 바로 앞에 두 손을 번쩍 든 채 정지를 계속해서 외쳐대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급히 브레이크를 밞았다.
매혹적인 어두운 청색 머리카락과 긴 앞머리에 가려진 눈, 그리고 모든 이들을 감탄케 하는 조각 같은 외모는 분명 한 사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라드 중령!”

시간 보호군 최고, 그리고 최강의 인물로 명성을 떨치는 제라드 중령을 이렇게 가까이서 실제로 보기는 둘 다 처음이었다.
한스 슈트리펠 소위와 유 소위는 급히 거수경례를 붙였다.
제라드 중령은 살짝 웃었고 실로 믿지 못할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재빠르게 자동차에 올라탔다.

“하하! 반갑군, 차 좀 얻어 타야겠어. 지금 저 녀석을 당장 소멸시켜야 되거든.”

유 소위가 다시 속도를 냈고 슈트리펠 소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몸을 돌려 물었다.

“그...그러면 저 녀석을 없앨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것보다 더 놈의 정체는 대체 뭡니까? 그리고 어떻게 감히 시간 보호군의 기지 한 가운데에 침입할 수 있었던 거죠?”

제라드 중령은 그 모든 질문을 듣고는 아주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듣기 쉽게 말하는 제라드 중령의 설명에 유 소위와 슈트리펠 소위는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타임 슬립 현상의 본질은 알지는 못해도 격렬한 기상 현상과 실종을 연결 지어 대강이나마 그 의미를 짐작한 어느 광기에 찬 과학자가 괴수를 만들어 폭풍우와 태풍의 한 가운데에 투입하는 실험을 계속 자행했던 것이다.
그 과학자는 시공을 건너간 괴수가 역사에 기록된 사실들을 파괴하는 테러를 자행하려 감히 시도했던 것이다.
시간 보호군 육군 장갑병단이 급히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급습했을 때 정말 우연히 한 녀석이 성공적으로 이 장소로 타임 슬립된 것이 모든 사태의 전말이었다.

“멍청한 장갑병단 녀석들! 잠깐, 그렇다고는 해도 저 괴수는 정말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저 망할 놈은 저희 기지의 모든 공격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흠,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얻어맞으면 즉사할 위태로운 상황일 수도 있지. 그리고 타임 슬립 입자가 괴수의 유전 인자에 모종의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충분이 있다는 것 역시 잊지 말게.”

슈트리펠 소위는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스페이스 비스트를 말하는 거군요. 맙소사...”

제라드 중령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유틸리티 벨트의 한쪽 부분에서 선명한 녹색과 적색이 뒤섞인 채 빛나는 원추형 물건을 꺼내들더니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심한 손동작으로 장전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장갑병단이 저 괴수의 골수 세포를 무사히 확보했고 과학자들이 분석해 세포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생물학 무기를 만들 수 있었지. 이걸 저 놈의 머리통에 박아 넣는다면...”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어떤 야수의 울부짖음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유 소위는 기지가 혼란스러움에 따라 분명 운전하기가 여의치 않았지만 최대한 능숙하게 이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어디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아, 그저 녀석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까지만 접근해주...그럴 것까지도 없군. 바로 저 앞에서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으니.”

그 말에 슈트리펠 소위는 허리춤의 GR-13 음파충격총을 재빨리 꺼내들었고 유 소위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차를 후진시켰다.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낮은 괴성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과 괴수 사이에는 오직 무미건조하고 그렇게 높지도 않은 창고 비슷한 건물 하나만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제라드 중령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기 누가 나오는군.”

금방이라도 괴수에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건물을 박차고 뛰어나온 그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유 소위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혀를 차며 차를 세웠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튀어 나올 것 같은 기색의 그 사람(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중성적 외모였다)은 살았다는 기색으로 차에 올라타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모두에게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아니,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됩니다! 어서요!”

유 소위와 슈트리펠 소위는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안 그래도 전속력으로 도망 갈 겁니다. 괜한 걱정 하지 마십시오.”

제라드 중령은 심각한 눈빛으로 학자와 같은 옷차림을 한 그 사람과 방금 그가 빠져나온 건물을 쳐다보았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붉게 상기된 그 사람은 거의 발작이라도 하듯이 외쳐댔다.

“젠장, 지금 당신네들은 상황을 이해 못하고 있어! 지금 저 건물 안에는 에너지 결정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단 말이야! 저 망할 놈이 저걸 박살이라도 낸다면 연쇄 반응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고!”

유 소위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폭발할 것처럼 울부짖는 자동차의 속도를 최대로 했다.

“제기랄, 언젠가 당신네들 학자 양반들이 나를 죽이는 날이 올 줄 알았어!”

슈트리펠 소위는 거의 폭주하고 있는 유 소위를 보며 차가 뒤집혀 죽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에너지 폭발에 휘말려 죽는 것이 먼저인가 하고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제라드 중령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괴수가 창고의 천장을 습격하는 모든 장면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두 손으로 먼저 천장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녀석은 꼬리로 구조물 전체를 한 번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에도 만족하지 않은 것 같은 괴수는 직접 두 발로 밞아 뭉개면서 파괴의 본능에 충실한 야수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목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괴수는 천천히 한껏 벌린 채 자세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녀석의 목구멍 너머로 적황색 화염이 선명하게 타오르며 빛나고 있었다.

“크윽!”

제라드 중령은 두 눈을 감았다. 열선이 건물에 적중하는 순간 열대의 바다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색채의 향연이 하늘과 대지를 뒤덮으며 터져 나왔다.


결정 안에 내재되어 있던 불안정한 에너지의 파동들은 결정 그 자체를 달궈버리는 열선의 위력 앞에서 상상도 못할 방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하나라면 별 다른 영향력은 없었겠지만 창고 안에 존재하던 수백, 수천개의 에너지 결정체들이 거의 동시에 터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대기 자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 강력한 에너지 파동은 대기 중에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던 타임 슬립 입자의 움직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타임 슬립 입자 그 자체의 구성마저 변질시켜버렸다.
사고와 우연이 겹치면서 타임 슬립 현상이 발생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그 현상은 괴수를 중심으로 발생했으며 괴수는 단순히 한 차원의 시공간을 타임 슬립한 것이 아닌라 차원과 차원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타임 슬립하고 만 것이다.


“사라졌군요.”

유 소위는 뒤집힌 차에서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진 정비병을 붙잡은 채 기어 나왔다.
그의 말 대로 기지를 무자비하게 뒤흔들던 괴수라는 비현실적 생명체는 푸른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학자는 멍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폭발력이 저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에너지 일부가 빠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잠깐, 그렇다면 괴수가 정말로 폭발에 휘말려 소멸한 것인가? 아니면....”

한스 슈트리펠 소위는 뭘 그렇게 사서 고민하는지 이해 못할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녀석은 사라졌으니 축하할 일 아닙니까? 온 몸이 만신창이로군. 망할!”

묘하게 멀쩡한 제라드 중령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의 정비병을 간단하게 확인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사실 상관은 있는 것 같군. 에너지 결정체들은 분명 타임 슬립 현상에도 관여하는 물질이라고 알고 있는데 만약 저 폭발이 단순히 괴수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다른 시공간으로 타임 슬립 시켜버린 것이라면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니까. 아, 그리고 이 친구는 그냥 기절한 것뿐이니까 정신 차리는 약만 먹이면 될 거야.”

제2사하라 펠호프 공군 기지의 절반을 초토화시킨 그 사건은 그렇게 석연치 않게 끝이 나버렸다.
천운으로 사망자는 없었지만 인류 최강이자 영원의 군사조직이라 자부하던 시간 보호군이 유, 무형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었다.
제라드 중령의 의견에 따라 시간 보호군은 괴수가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을 염려해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최종적으로 괴수가 소멸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혀 다른 차원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 차원은 시간 보호군이 존재하는 차원과 분명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 근원이라던가 역사, 요소가 전혀 다른 면모가 더 강한 너무나 이질적 이세계였다.
이 세계의 지구는 오직 하나의 대륙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행성에 존재하는 문명군이라고는 동북아시아와 천축 일부만을 포함한 문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은 중원이었다.
언제 건국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득한 역사를 가진 채 몇천년 동안 군림해온 절대적 황제 지배 체제 아래 사람들이 지배당하고 살고 있는 거대한 중원 대륙.
그리고 관과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나름의 세력과 힘, 그리고 자유를 가지고 있는 전혀 다른 나라 안의 작은 세계가 분명 대륙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강호 무림이라 불리는 무인들의 세계.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마교로 대표 되는 정과 사로 나눠진 채 서로만의 신념과 힘으로 싸움의 역사를 일궈온 세계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직 이 차원에만 존재하는 기묘한 성질의 힘을 나름대로 연구하고 개척하며 활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차원에서 기묘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시공간선의 궤적을 밞아오고 있었다.


“대단하군. 이것이 중원 땅의 저력이란 말인가?”

남성다움이 느껴지면서도 준수함을 드러내는 외모를 지닌 한 청년이 탄성과 함께 객잔 안으로 들러왔다.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인 무복과 허리춤에 달린 칼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가 무인임을 짐작케 해주었다.
청년은 깊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막 중원으로 건너와 요녕성 본계를 본 것 뿐 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약간 위축이 드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휴, 스승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구나.”

이제 막 해동국에서 건너온 김훈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강호 무림에서 명셩을 떨치기 위해 중원 땅으로 건너온 것이다.
하지만 중원 입장에서 보면 변방에 해당하는 여기조차도 이러토록 사람들과 물자가 넘치는 모습에 그만 기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 스승과 같이 깊은 산 속의 작은 마을에서 무예만을 수련해온 것 때문에 도시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크기도 했다.
하지만 사정을 잘 모르는 김훈은 일순 심정이 답답해진 것이다.

“스승님으로부터 진정한 무인으로 인정받는 마지막 관문인데...하아, 정말 답답하구나.”

김훈의 스승은 이제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고 이야기하며 마지막 시험을 통과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다.
바로 중원 무림에서 그 명성을 떨치는 것.
그 곳의 실력자들과 대련하여 최소 3번 이상은 승리하고 그 이름을 모두에게 떨쳐야지만 된다는 것이다.
김훈은 허기가 느껴지자 피식 웃으며 음식을 주문했다. 점소이의 친절은 약간 호들갑스러운 면모는 있었지만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가장 자신 있는 음식 두 가지와 입가심을 할 약한 술 한 병 가져오게.”

“예,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주문을 받고 점소이가 사라지자 김훈은 언제나 음식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객잔 여기저기를 쳐다보았다.

“흠?”

객잔의 문을 통해 나름 잘생겼지만 왠지 모르게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와 무인 특유의 당당함을 풍기면서도 여인 특유의 연약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미녀가 같이 들어온 것이다.
김훈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 일행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나와 본 여자들 중에서도 그 미모가 으뜸이 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것이다.

“흠?”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객잔에 같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친밀한 사이가 아닌가 싶었지만 여성 쪽에서 거리를 두려하고 있었고 남자 쪽은 꽤나 무례하게 막무가내로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김훈은 그제야 저 남자가 여성과 아예 모르는 사이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깊은 사이는 결코 아니며 지금 무턱대고 들이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여성에 대한 예의범절을 모르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내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건방진 놈! 감히 이 나를 보고 그 무슨 행동이란 말이냐!”

김훈은 정말 어이없다는 눈으로 고함을 버럭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채 자신을 노려보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손동작과 느껴지는 기세를 보아하니 곧바로 칼을 뽑아들어 달려들 것임이 눈에 선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그 남자와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여인이 낭랑하면서도 딱딱한 목소리로 제지했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괜히 객잔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그렇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봅니다만....”

그 남자는 약간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가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호탕한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설희 소저. 역시나 그 미모만큼이나 마음씨 역시 아름다우시군요! 하지만 저런 주제도 모르는 녀석들은 가끔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분수를 가르쳐주는 것이 저희 강호 무림인들의 사명이라 할 수 있지요.”

김훈은 정말이지 듣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왔다.
저런 작자들이 이 중원 땅의 무예를 수련한 무림인들이란 말인가?
그나저나 저 남자가 여인을 분명 설희 소저라고 불렀다.
이름이 설희라. 그렇다면 성은 무엇일까?

“놈! 네 놈도 꼴을 보아하니 무인은 무인인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다면 칼을 뽑아라!”

그도 바라는 바였다. 김훈은 도 손잡이에 손을 얹고 천천히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가 묵직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외치던 모용세가의 차남, 모용군은 긴장한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건 아버지와 대련을 할 때나 느끼던 그 기세가 아니던가?

‘젠장, 내가 설마하니 절정고수를 건드린 거 아니야?’

아버지와 형, 그리고 세가의 무사들이 종종 이 무림에는 모래알처럼 강호를 주유하는 은거기인, 절정고수들이 넘쳐난다고 말은 듣기는 했지만 그게 정말일 줄은, 그리고 이렇게 직접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백씨세가의 하나 뿐인 딸이자 무공과 학문에도 능해 제갈세가의 제갈지와 더불어 무림의 떠오르는 재녀로 불리는 백설희 역시 놀랍다는 눈으로 김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스물이 조금 넘은 것 같은 젊은 나이임에도 절정고수 못지않은 기세가 칼을 아직 뽑지도 않고 발도 자세만을 취했음에도 흘러나온다는 것은 실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혀를 차며 저런 기인을 알아보지 못한 멍청한 모용군을 욕했다.
이러다가 자신까지 은원 관계에 휘말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음?”

김훈은 순간 자신의 감각 전체를 위협하는 알 수 없는 살기를 느꼈다.
아니 이건 살기 정도가 아니었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야수의 기세가 자신을 압박하는 느낌.
그는 주변을 천천히 한 번, 그리고 객잔의 천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함이 자신에게 위험하다고 맹렬히 경고하고 있었다.

“하하하, 네 놈! 겁을 먹은 것이냐! 내 용서해줄 것...으억!”

김훈이 갑자기 뭔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겁을 먹었다고 지레짐작한 모용군이 신나게 외치다가 땅 전체를 뒤흔드는 갑작스러운 진동에 객잔 바닥을 꼴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백설희는 놀라 외쳤다.

“지진?”

김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균형을 잡은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

“지진이 아니야. 제기랄, 이건 대체....”

그는 들을 수 있었다. 객잔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를.
그리고 모두를 노리는 그 끔찍한 살기를.
김훈은 몸 안의 힘을 끌어올려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들 도망치시오! 어서 밖으로 나가란 말이오!”

모용군과 백설희는 깜짝 놀랐다. 저런 중후한 내력이라니.
사람들은 무림인이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며 밖으로 나가라고 하니 약간 주저하면서도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미 늦었군!”

모두는 들을 수 있었다.
공기를 뒤흔드는 거친 울부짖음.
전신에 각인되는 그 거대한 소음이.
그제야 상황이 이상함을 깨달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밖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에서는 무언가 박살나는 거친 소음과 군중의 혼란이 그대로 그려지는 사람들의 고통과 공포에 찬 비명과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김훈은 힘을 끌어올려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여전히 사태 파악을 못한 채 불안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쳐다보는 그 두 남녀를 보았다.

“멍청한!”

바로 위 천장이 순식간에 부서지면서 감히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발바닥이 그들을 덮쳐들고 있었다.
전신이 아름다울 정도로 붉게 빛나기 시작한 김훈은 순식간에 그들 앞으로 쇄도하면서 그 둘을 낚아채려고 했다.
불행히도 자신을 죽이려 달려온다고 착각한 모용군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뒷걸음질하며 그를 피했고 그 미세한 동작에 방해받은 김훈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군. 후회는 저승에서 하길...“

결국 백설희를 붙잡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객잔 밖으로 뛰쳐나온 김훈은 뭔가 뭉개지면서 터져나가는 끔찍한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꺄아아악!”

갑자기 자신을 붙잡고 믿어지지 않는 경공술로 달려 나가는 무례한 남자의 뺨을 세차게 올려 붙어주려던 그녀는 도시 전체를 뒤엎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은 그림자의 주인을 똑똑히 목도하고는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댔다.

“조용히 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훈 역시 최대한의 자제력으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도망치면서 외쳐대고 있었다.
괴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웬만한 산보다 커 보이는 거대한 괴물이 도시를 짓밟으며 유린하고 있었다.
물론 힘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대적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들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호랑이 같은 짐승들이 조금 더 크거나 약간 흉포해진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녀석은 정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도마뱀과도 더 유사한 면모를 지닌 채 두 다리를 굳건한 채 붙인 채 당당하게 서있는 괴물.
아니, 괴물이라고 하기보다는 괴수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

“꽉 붙잡으십시오!”

그렇게 말한 김훈은 백설희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도약해 어느 건물 위로 안착했다.
거리는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경공술이 떨어지는 몇몇 무림인들은 거칠게 욕을 하며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마구 베며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당신이랑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꽤 있군요.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시지요?”

마음을 가다듬은 백설희는 그녀의 말처럼 건물 지붕 여기저기에 올라가 있는 무림인들을 보며 물었다.

“모르겠군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김훈은 무력한 심정으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 괴수는 너무 컸다.
그 크기가 거의 20장은 되어 보이는 것 같았는데 그 어떤 절정의 무공을 닦은 무인이라 할지라도 녀석과 쉽게 대적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날아서 재빨리 녀석의 머리에 칼을 박아 넣거나 힘을 쏘아내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백설희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진지하게 중얼거리고 있는 김훈의 준수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어떻게 하늘을 난다고 지금 그런 헛소리에요!”

그 말에 김훈은 오히려 몰랐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어? 여기 사람들은 하늘은 못 납니까? 전 날 수 있는데...뭐, 반 각의 반 밖에 안 되는 시간뿐이긴 해도 말입니다. 하하하! 뭐, 날 수는 있으니까요.”

백설희는 정말 혼란스러워했다. 저런 정도의 고수가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해대다니.
완벽하게 미쳤을 가능성이 컸다.

‘설마하니 저치가 신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도망쳐야겠군요.”

김훈은 괴수가 왜 입을 한 가득 벌리는 것인가 의아해하다가 노란 불꽃이 뿜어져 나온 것에 정말 기가 막힐 심정이었다.
그 어떤 일반적 불길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그 화염은 도시의 절반을 한순간에 불구덩이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이 타는 냄새와 뜨거운 열기, 그리고 흉물스럽게 무너져내려가는 건물의 모습.
불까지 내뿜을 줄은 정말 생각조차 못했었다.

“세상에....”

지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지옥의 불구덩이 한 가운데에서 괴수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 차갑고 냉혹한 야수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안 보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김훈은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마십시오.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멀리까지 날아야 되니까요.”

“아직도 그런 헛소....꺄아악!”

김훈은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공중으로 도약하자 그 충격에 지붕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백설희는 입만 딱 벌린 채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음을, 그리고 그를 붙잡은 이 허풍쟁이 남자가 정말로 하늘을 날고 있음을 알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불타는 도시와 거대한 괴수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보다 옅은 푸름을 간직한 창공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시원한 바람을 조금 맞는가 싶더니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김훈은 천천히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의 중심으로 발을 디디었다.
그는 아직도 멍한 상태의 백설희를 내려다주고 일그러진 얼굴로 기침을 몇 번 했다.

“크윽,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군.”

백설희는 갑자기 웃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김훈은 이 여자가 정신적 충격으로 약간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괘...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여전히 깔깔 웃어대며 손을 내저었다.

“아, 하하하! 말도 마요. 지금까지 이 세상 모두를 알았다고 자부하던 제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보다 못한 바보였는지 이제야 깨달았어요. 그게 너무 웃긴 것뿐이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호호호!”

김훈은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하는 의문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였다. 웃으니까 더 매력적이었고 더 예뻤다.
김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참, 제 이름은 백설희에요. 백씨세가의 무남독녀지요.”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제 이름은 김훈입니다. 사문은...밝힐 수 없는 점 사과드립니다.”

김훈이라.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았다가 저 멀리서 아직도 들려오는 아비규환의 비명성과 울부짖음을 듣고는 몸을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김훈 역시 씁쓸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검은 연기가 보이는군요. 이제 슬슬 보다 안전한 장소로 몸을 피해야겠습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저 괴수를 죽이기 전까지 이 땅에 안전한 장소가 과연 남아는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다.

“가까운 무림맹 지부로 가야 마땅해요. 위험을 경고해야 돼요! 우리 무림인들이 힘을 합친다면 저런 저주 받은 괴물 따위 손쉽게 죽여 버릴 수 있어요.”

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무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길을 잘 모르니 설희 소저가 길 안내를 좀 해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완벽해 보이는,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은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이가 길치라니!
김훈은 그런 백설희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새삼 느꼈다.


모용세가와 그들이 지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도시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소식은 곧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고 그 원흉이 크기 20장의 괴수라는 사실 역시.
무림인들은 영물이라고 보기에 너무나 사악하고 거대한 괴물의 출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그런 강력한 녀석이라면 내단의 크기와 효능 역시 기대가 된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다.
관에서 급히 병사들을 동원해 괴수의 앞을 가로막고 토벌 작전을 펼쳤지만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관군의 정예병들이 필사적으로 괴수를 공격하고 죽어나가는 시간 동안 괴수의 특이한,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너무나 절망적인 습성이 밝혀졌다.
녀석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도시, 아니 웬만한 규모의 중소 도시까지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습격하고 있었다.
결국 황제의 특별한 허락을 받은 중앙의 최정예 황실수호군 일부가 출동했다가 전멸하고 나서야 조정은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대적 지배자 특유의 유희에 대한 욕구이기도 했다.
사실 황실 휘하에도 무림에서 이름을 날릴 수준의 고수급 무인들은 꽤 있었다.
또한 황제는 충분한 양의 벽력탄을 모아 터뜨리면 충분히 그 야수를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전에 지금까지 하나의 독자적 세력으로 지내게 해준 무림인들이 과연 얼마나 잘났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만약 무림인들이 큰 피해를 입을지언정 괴수를 쓰러뜨린다면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동시에 평화시의 현 무림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이익마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꿍꿍이를 품은 황실에서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무림인들 역시 괴수 토벌 작전에 이미 나서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의 방파들이나 세가들은 하나 같이 도시에 자리 잡은 채 이권을 붙잡고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괴수는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문물을 발전시키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습격해 도시를 파괴하고 있었다.
이대로 괴수가 도시를 습격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결국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무림 전체가 멸망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 유명을 달리하고 사라진 군소 방파가 부지기수였다.


“허허허....”

남궁세가의 가주는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과장된 이야기라고만 치부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소문이 오히려 부족했다.
남궁해산은 가주의 위엄이 묻어나오는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생물이 그의 바로 눈앞에서 실존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 역시 두려운 모습으로 웅성대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일개 나 따위가 처리할 일이 아니다...’

무림 전부가 나서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몸만 가지고 날뛴다면 몰라도 저 괴물은 입에서 불까지,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내단에 대해 농을 삼고 유쾌하게 웃어댔다.
일검에 녀석의 목을 베겠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 망할 놈이 근처까지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에 손수 손을 쓰리라 자신 있게 나선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녀석의 발을 묶어둘 함정이라도 파둘 것을 정말이지 크나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이미 이렇게 된 것! 네 놈을 쳐 죽이겠노라!”

내력을 끌어올려 허공으로 도약한 남궁해산은 단번에 그 괴수의 머리 위까지 솟아오르자마자 선명한 빛을 발하는 검기로 들끓는 검을 휘둘렀다.
손잡이를 통해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과 귀를 통해 선명하게 들려오는 선명한 금속성 소음.
남궁해산은 절망적인 표정과 함께 부러진 검에 시선을 향했다.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육체를 지니고 있었단 말이냐!
그는 내력을 제대로 운용하는 것마저 잊은 채 피를 토하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괴수의 흐릿하고 축축한 눈동자 너머로 꼴사나운 자기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상아와 같이 빛을 발하는 이빨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남궁해산은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주황빛 불꽃에 적중 당했다.


남궁세가 가주의 죽음!
오대세가의 한 축을 자랑하던 가주가 괴수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버린 사건은 무림 전체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가주가 죽어 눈이 돌아간 남궁세가의 장로들과 일급 무인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가 역시나 그대로 전멸해버린 사실 역시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이제 괴수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싶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구파일방과 같은 이름 있는 문파를 제외한 군소 정파들은 각자 자기 문파의 핵심만을 챙겨 무림 정파의 중심이자 집결체인 하남 무림맹으로 서둘러 이동하고 있었다.
사파들은 이 혼란기에 최대한으로 도시를 재산과 이권을 약탈하며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맹.
무림맹은 애초에 그깟 짐승 따위라는 시각으로 우습게보고 있다가 남궁세가의 가주와 장로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계기로 비상 체제에 돌입하고 있었다.


사천 당문의 문주인 당혁기는 아무리 괴수라고 해도 독 앞에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안 그래도 괴수가 사천으로 접근하는 기미가 보이자 사천을 통해 하남 무림맹으로 습격해올까 몸이 단 무림맹 측에서는 시급히 당문에 지원 요청을 했다.
괴수의 불길 아래, 그리고 그 거대한 발 아래 짓밟힌 정파가 이미 부지기수였다.
요행히 재산과 핵심만을 챙긴 그들은 무림맹에 의지하고 있었다.
사파들 역시 어느 순간부터 사파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마교 근처로 피난을 해 대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하하하,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우리 당문이 자랑하는 혈지독과 세해독의 조합 앞에는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바로 옆에서 푸근한 인상의 장로 하나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당문의 비전 중의 비전인 칠선독만 완성이 되었더라면 그 녀석을 실전 투입해볼 좋은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아쉽군요.”

“뭐, 그렇긴 하지만 우리 당문이 수백년의 시간과 제대로 계산도 못할 자금을 퍼부어 만든 팔선독을 겨우 이딴 놈에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팔선독의 완성은 우리 당문이 단순히 오대세가를 뛰어넘는 것으로 모자라 구파일방마저 뛰어넘는 새로운 영광의 디딤돌이 될 것이야! 하하하!”

저 멀리서 탄성과 함께 고함이 들려왔다.
당혁기는 미소와 함께 두 손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나보군! 모든 당문의 이들은 독을 터트릴 준비를 하라!”

제갈세가가 제공한 정교한 진의 핵심 부분에 독탄이 여기저기 배치되기 시작했다.
또한 폭발하면 파공강침이 발산되는 천뢰구도 십여개를 진 외곽에 이미 준비해둔 상태였다.
제 아무리 크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괴수라 할지라도 한낱 생물이었다.
당문이 자랑하는 독과 암기 앞에서는 맥없이 죽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강호 무림을 뒤흔드는 괴수를 보았을 때 당혁기는 감탄을 토해냈다.

“정말 크고...위험한 야수로군. 놀라워!”

소문에 20장이 넘는 녀석이라고 들었는데 좀 더 정확히 그 크기를 눈으로 대강 계산해보니 약간 과장된 감이 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17장 정도의 녀석이었다.
뭐 20장이나 17장이나 그게 그거였지만.

“좋아! 터뜨려라!”

괴수가 진 근처까지 접근하자 당혁기가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외쳤고 그것을 신호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짙은 색깔의 연기가 치솟아 오르면서 괴수를 뒤덮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이 발동하면서 천뢰구도 연속적으로 폭발했다.
그 광경에 당혁기는 탄성을 발했다.

“장관이로군. 만약 독기가 좀 가신다싶으면 녀석의 내단을 내 손수 취하리라.”

착각도 자유였다.
독무가 조금씩 옅어지는 기색과 이제 슬슬 진이 자동으로 소멸할 시점이 되자 해독약을 충분히 복용한 당문의 문도들은 괴수가 쓰러져 죽어있는 모습을 기대하며 아직도 독 안개로 휩싸여있는 진 근처로 향했다.
감이 무척 좋고 또 뜨거운 열기에도 민감한 문도 한 명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순간 노란 불길이 길게 뿜어져나오며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그 어떤 바보가 봐도 화가 났음이 명백한 괴수가 한 번 몸을 털며 상처 하나 없는 몸을 드러내더니 길게 울부짖으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마...맙소사! 우리 당문의 독을...우리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독을 이겨냈단 말이냐!”

당혁기는 절규했다.
괴수가 천천히 턱을 벌리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고 너무나 고요해 이상한 기분마저 드는 침묵은 곧 깨져나갔고 당문의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사람 살려!”

“불사의 존재다! 저주받은 존재다!”

“으아악!”

“사...살려줘!”

대지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공기가 분노로 진동하고 있었다.
괴수는 무자비한 존재였다.
괴수는 평등하게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공평한 결과물을 선사하고 있었다.
괴수가 무참히 짓밟으며 걸어오는 그 발걸음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녀석은 입을 벌렸고 소문으로만 듣던 노란 불길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열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을 화염 아래 녹여버리고 있었다.
당문의 문도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독을,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암기술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천녀산화, 구천현녀, 추혼비접, 그리고 당문의 암기술을 대표하는 만천화우까지.
나올 수 있는 모든 절정의 암기술과 무공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문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독 두 개의 배합과 십여개의 천뢰구를 이겨낸 괴수였다.
아무리 소나기처럼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암기라고는 해도 그 크기가 너무나 다른 괴수는 그렇게 당문의 모든 것을 유형적으로, 또 무형적으로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크...크으윽! 한낱 미물 놈에게 우리 대 당문의 아이들이! 커헉!”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당혁기는 기혈이 역류하면서 피를 토했다.
입가에 흐르는 검붉은 피를 닦을 생각도 제대로 못하면서 당혁기는 이를 갈며 외쳤다.

“네 놈! 감히 우리 당문을 우습게 본 사악한 존재여! 하늘이 너를 보냈다면 우리 당문이 기꺼이 너를 깨부수겠다! 칠선독....그래, 칠선독이다! 크흐흐...”

용케 살아남은 몇몇 장로들이 암기와 독을 뿌리면서 필사적으로 도주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일부 발이 느린 당문의 문도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있었지만 곧 산 채로 불타면서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크흐흑, 모두 후퇴한다! 모두 경공을 전력으로 펼쳐라! 본문에서 최대한으로 중요한 것들을 챙겨서 무림맹으로 후퇴한다! 빌어먹을, 미완성된 칠선독과 비급, 재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챙겨라!”

당문이 독의 절대 경지를 목표로 만들던 독이 바로 칠선독이었다. 이 독을 뿌리면 제 아무리 뛰어난 경지의 신선 일곱 명이 일거에 죽을 것이라 확신한 당문의 선대 문주가 붙인 이름으로 현재 해독약이 없다는 점과 위력 조절 및 독의 제대로 된 제어 방법을 밝히지 못했다는 점이 미완성의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쓸 수는 있었다. 해독약이 없고 또 불완전해 실수로 쓴 당사자가 중독당할 위험이 크기는 했지는 쓸 수는 있었다.
그 사실이 당혁기의 광기에 찬 부르짖음을 가까이 선 듣던 장로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무림맹주 태허춘장은 침통하게 신음성을 토해냈다.
당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가장 빠른 전서구로 당문 자신에 의해 전해졌다.
지금 당문은 서둘러 본문을 버리고 다른 문파들처럼 비참하게 무림맹으로 도망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점은 미완성된 당문의 칠선독을 무림맹에서 완성하여 괴수에게 사용한다면 녀석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는 당문 문주의 말 정도였다.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문파에서 무언가 선전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없소?”

장로는 헛기침과 함께 대답해주었다. 맹주가 질문을 했으니 아무리 나쁜 소식이라도 대답은 해주어야 예의였고 그 자신의 의무였다.

“흠, 그나마 다행히도 무당파와 곤륜파, 화산파와 같은 도가 계열의 문파들은 산 깊숙이 위치한 탓에 무사하다고는 합니다. 다만...그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마을과 도시는 예외 없이 전멸해버렸다고....”

“젠장!”

누군가가 급히 전해준 서신을 받아 읽어본 무림맹 군사 제갈천은 분통을 터뜨렸다.

“방금...하북팽가가 멸문했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무림맹에 남아있는 팽가의 이들을 제외하면 가주를 포함해 생존자가 전무하다는 보고군요.”

침묵만이 모두를 지배하며 그들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제갈천은 입술을 깨물며 맹주에게 제안했다.

“맹주님,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 남은 방도는 두 가지 뿐인 것 같습니다. 당문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온 칠선독과 북해빙궁의 빙정. 이 둘만이 괴수를 처치하는 데 남은 방도일 것 같습니다.”

“그...그렇다면?”

맹주가 당황해서 묻자 제갈천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괴수의 활동 경로와는 꽤 떨어져있어 안심하고 있는 세외세력들. 그 중에서 북해빙궁의 빙정을 무슨 수를 써서든 괴수의 체내로 투입한다면 아마 순식간에 얼어붙어 죽어버릴 겁니다. 검강도 통하지 않는 괴물 같은 괴물을 상대로는 이제는 그 수밖에는 없습니다.”

맹주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저 콧대높은 북해빙궁이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빙정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무림맹을 휘청거릴 정도의 대가를 지불해야 될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무림맹의 지위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칠선독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건가? 아직 미완성이라고는 해도....”

“절대 불가입니다. 아직 미완성인 물건을 함부로 썼다가 괴수는 물론이고 저희들마저 독에 중독당해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또 여유롭게 완성되기만을 기다릴 시간은 없습니다!”

맹주는 천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크게 한숨을 토해내며 힘겹게 결정을 내렸다.

“빙궁주에게....서신을 보내야겠군. 원시천존이시여, 우리 모두를 보살펴주시길....”


김훈이 허공을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붉은 잔상이 여러 개 생겨났다.
분명 빠른 것 같으면서도 그 붉은 잔상이 여럿 남는 것이 왠지 모르게 느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눈으로만 쫓을 수 있을 뿐 아무도 그 움직임을 건드릴 수 없었다.
김훈과 그녀는 그렇게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하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백설희가 그 아름다운 미모가 더 빛을 발하는 미소와 함께 감탄했다.
 
"언제나 하늘을 나는 것은 정말 즐겁군요."
 
"하하하!"
 
김훈은 그런 그녀가 좀 더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무림맹 안에서 그와 그녀는 서로를 알아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무림맹 녀석들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

마교의 교주인 마혁후는 빙긋 웃으며 비밀리에 접수한 서신의 복사본을 내던졌다.

“과연 녀석들이 북해빙궁에 얼마나 넘겨줄지 예측도 안 되는군.”

마혁후의 농에 모든 장로들이 웃었다.
오직 총군사 사마갈희만이 웃지 않은 채 웃음이 잦아들자 곧바로 말했다.

“하지만 교주님, 이 괴수는 정말 만만치 않은 존재입니다. 이미 정파 세력의 반 이상을 멸문시켜버린 녀석입니다. 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도 무림맹을 도와야 됩니다.”

마혁후는 얼굴을 찡그리며 부복하고 있는 총군사를 노려보았다.

“이봐, 지금 자네 제정신인가? 혹시 미친 거 아냐?”

“교주님, 만약 빙궁의 빙정이 괴수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들 마교는 무림맹과 연합해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이 괴수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은 존재이며 오직 사람에 대해 알 수 없는 증오를 가지고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괴수는 정과 사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마혁후는 약간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해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 총군사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상황이 꽤 심각한 모양이군. 그럼 좀 더 설명해보도록. 빙궁 녀석들이 실패하면 우리도 나서야 될 수 있으니까.”


북해빙궁주인 북천악은 마치 얼음처럼 반투명한 검신을 자랑하는 검을 멋들어지게 휘두르면서 저 멀리서 접근해오는 괴수를 겨누었다.

“으하하하, 내 저 놈의 머리로 궁을 장식하겠노라! 바보 같은 중원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그 위풍당당한 면모에 궁주와 함께 파견 나온 북해빙궁의 정예 무사들이 환호했다.
북천악의 발이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북해빙궁 최고 수준의 경공이 발휘되었다.
마치 얼음 위를 질주하는 것 같은 속도로 발을 떼지 않은 채 달려 나가던 궁주는 괴수가 턱을 벌리면서 자신을 노리자 한 손에 든 빙정을 내던졌다.

‘빙정이야 뭐 또 찾아내면 되겠지. 여유분도 3개는 남아있고.’

북천악은 빙정이 괴수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만족스러운 미소로 괴수로부터 5장 밖의 거리까지 재빨리 벗어났다.

“자, 이제 멋들어진 얼음 조각이 되어....어?”

그것이 궁주의 마지막 유언이 되리라고는 감히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까지 쇄도해오는 새하얀 불길, 아니 설풍을 현세의 마지막 광경으로 본 북천악은 그 새하얀 설풍에 적중당하면서 아주 완벽한 얼음 덩어리로 얼어버렸다.

“구...궁주님이...크아아악!”

북해빙궁의 사람들은 궁주가 말 그대로 몸을 바쳐 만든 그 멋진 얼음 조각을 제대로 감상할 틈도 없이 궁주의 배경을 장식하는 얼음 조각이 되어야 했다.
괴수는 이제 입에서 새하얀 불길을 뿜어대며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있었다.
녀석은 새로 얻은 능력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


“크어억, 이 멍청한 빙궁 새끼들! 죽이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새로 힘을 줘! 크악, 뒷골이!”

맹주는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경련했다.
제갈천은 재빨리 맹주의 마음을 진정시킬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도 마교 녀석들이 우리와 힘을 합쳐 괴수를 없애자고 제안해왔습니다.”

맹주는 잠시 숨을 진정시키고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군사를 쳐다보았다.

“그 놈들이? 무슨 꿍꿍이지? 혹시 속임수 아닌가!”

“아닙니다. 교주가 직접 보내온 겁니다. 녀석들도 무림맹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자신들 차례라는 것을 안 것이지요. 또 천축 무림의 일부에서도 호기심 탓인지는 몰라도 무림맹과 협력해 싸워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맹주는 여전히 신뢰할 수 없었지만 일단 납득하기로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니 이제 모든 것이 괜찮게 흘러갈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군. 교주 녀석과 나, 그리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모두 합공을 한다면....제 아무리 괴수 녀석이라고 해도 죽여 버릴 수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중원 무림의 모든 힘을 동원해야겠지요. 절정의 고수는 물론 일류에 속하는 모든 고수를 끌어 모아야 될 겁니다.”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군사, 지금 그 망할 놈이 어디까지 와 있지?”

“가장 최근에 황보세가와 점창파가 연합해 괴수를 공격했다가 반 수가 전멸 당했다는 보고로 볼 때 지금 현재 괴수의 이동 속도를 종합해 추산하자면 대략 5, 6일이 못 되어 무림맹 근처까지 당도할 것 같습니다.”

“쯧, 그나마 다행이군. 마교와의 연합이 결정 나지 않았더라면 자칫 우리들도 다 죽을 그 칠선독에 의지했었을 테니.”

제갈천 역시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저희 제갈세가 사람들이 기관 지식과 진법 지식을 총동원해 괴수가 무림맹으로 진입할 경로 여기저기에 시간을 끌 함정과 진, 기관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제대로만 된다면 최소한 2일 정도는 좀 더 여유가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맹주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혹시...제갈세가 측에서 만든 그 진이나 기관에 걸려 괴수가 죽을 가능성도 있겠지?”

제갈천은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그 희망을 부정했다.

“없다고 단언은 못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사천까지 오기도 전에 저희 제갈세가보다는 못 하지만 무시 못 할 능력을 지닌 기관술사와 함정의 대가들이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니까 말입니다.”

맹주는 입을 다시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아네. 그냥 한 번 물어본 것뿐이야.”


김훈은 최초의 습격에서 백설희를 구출한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은 분명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김훈은 그저 그녀의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이렇게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장소는 불길했다.
여기에는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림인들이, 정과 사를 아우르는 무림의 정예들이 집결한 채 공통의 적이자 마물인 괴수를 처단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김훈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는 너무 위험하다고.
사실 이 계획 자체를 그녀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허사였다.
생각해보니 괴수를 처단하지 않으면 어디로 도망가든 결국 괴수가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위험하긴 해도 괴수를 처단하는 것이 그녀의 말처럼 합리적 판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훈은 여전히 뭔가 불안했다. 비수가 자신의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두려움.
그런 심각한 모습에 백설희가 피식 웃었다.

“아직도 걱정이에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강호 십대 고수에다가 마교의 교주와 맹주님까지! 아무리 괴수라도 멍청한 짐승일 뿐이에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김훈은 혀를 차며 다른 이들처럼 괴수를 기다렸다.
이렇게 된 것 그녀를 최대한으로 지킬 것이라 굳게 다짐하며.

“어?”

저 멀리서 누군가가 급히 경공을 펼치며, 그렇게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몰랐지만 맹주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사내가 당문에 소속된 이임을.
맹주는 입술을 깨물며 현재 이 자리에 없는 당문의 문주가 무언가 일을 저질렀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내는 피를 토하며, 그리고 경련하며 씹어 내뱉듯이 말을 간신히 토해냈다.

“무...문주님이..커허어억...칠..칠선독을 사...크어억!”

그걸로 끝이었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진 그 불운한 사내는 한 줌의 혈수로 녹아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희망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다...당문이 칠선독이라는 금단의 독을 썼다면...그렇다면 괴수는 죽었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언급된 괴수 당사자가 듣는 이를 모두 절망에 빠뜨리는 깊은 울부짖음으로 대신해주었다.
모두의 시선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천천히 다가오는 그 존재로 향했다.

“모든 무림인들이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괴수를 제압하는데에 총력을 기울여라!”

그렇게 외친 맹주였지만 한 가지 불안한 가능성이 계속 그의 마음 한 구석에 걸렸다.
만약 당문의 칠선독이 괴수를 상대로 사용되었다면 그 독기는 괴수 주변에 남아 있다는 것인가 하는 너무나 신경 쓰이고 두려운 가능성이.


괴수는 마치 비명과 비슷한 소리를 질러대며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갈고리 손톱을 번뜩이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불쾌한 질감이 물씬 풍겨나는 갈색 빛 비늘과 잘 다듬어진 창처럼 예기를 발하는 이빨이 모든 이들에게 각인되고 있었다.
괴수의 턱이 크게 벌어지면서 낯선 느낌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기 시작했고 갈라진 혀가 붉게 번뜩이며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알 수 없는 적의와 증오로 가득 찬 노란 눈이 세로로 찢어진 채 모두를 노리고 있었다.
날카롭게 번쩍거리는 이빨이 한 줄로 늘어선 채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면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건물형 방어 구조물과 함정을 겨냥한 녀석의 목구멍 너머로 노란 불길이 터져 나오며 모든 것을 불태우고, 또 녹여버리고 있었다.
괴수는 그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도 성치 않는 듯 그 잔해마저 발로 짓밟으며 인간이 남긴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고 있었다.
괴수는 다시 시선을 돌렸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괴수는 그 움직임을 정지하고 깊은 숨을 여러 차례 내쉬며 사람들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 괴수를 노려볼 뿐이었고 몇몇 용기있는 이들이 화살과 암기를 날려보았지만 허사였다.

“대체 뭘 기다리는 걸까요?”

설희가 물어왔지만 그 역시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무언가가 강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김훈은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혹시나 하고 안력을 끌어올렸다.

“이런...”

그는 알 수 있었다. 괴수의 노란 눈동자 너머로, 붉게 충혈 된 실핏줄 아래 꿈틀대는 증오와 광기를.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뜨겁게 달아올라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김훈은 괴수가 이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젠장, 모두 피해요!”

그렇게 외친 그는 바로 옆의 백설희를 끌어안고 단번에 50장 이상의 거리를 뛰어넘었다.
거대한 불길이 이 대지의 절반 이상을 단번에 불태워버리고 있었다.

“오, 맙소사!”

두 번째 불길이, 좀 전의 것과 비교해도 그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 노란 불꽃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대며 공기를 가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대지를 박차고 전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스승은 하늘을 날 때에는 1부터 180까지의 숫자를 마음속으로 항상 세며 주의하라고 당부하셨다.
그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그는 날 수 없었다.
김훈의 몸은 그 자체가 왠지 모르게 유리처럼 반짝이는 느낌의 주는 붉은 빛으로 빛나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설희 소저, 괜찮습니까? 설희 소저!”

“저..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사람들이....”

아래는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용감히 괴수에게 달려들었지만 냉혹한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김훈은 마교의 교주가 마황파천장이라는 실로 무시무시한 무공을 펼쳐 연속으로 괴수의 배에 공격을 하는 것을, 결국 검은 피를 토하며 경련을 일으키다가 괴수의 불길에 녹아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무림맹에 머물면서 만나고 사귄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수는 겨우 100 남짓.
그는 어떻게든 몇몇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하강하면서 속도를 냈다.
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내던져지는 칼과 화살, 그리고 암기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훈의 허리에서 날씬한 도신을 자랑하는 도가 뽑혀져 나왔다.
신비로운 푸른빛이 아름답게 빛을 발하면서 심상치 않은 차가운 예기를 드러내는 것이 평범한 칼은 분명 아니었다.
도에서 느껴지는 예기는 점차 강렬해지기 시작했고 희마하게 보이던 기운의 실체는 점차 선명한 붉은 빛을 띠며 그 형태를 드러냈다.

“젠장!”

눈앞을 가로막고 그와 설희를 위협하는 위험한 병장기를 칼로 쳐내고 있었지만 부족한 감이 역력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힘의 일부를 두 눈에 집중시켰다.
김훈의 두 눈동자가 붉게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붉은 빛을 길게 쏘아 냈다.
붉은 안광에서 뻗어나간 그 빛의 집합체는 온갖 병장기에 정확히 맞아들면서 녹여버리거나 가벼운 폭발을 일으켰다.
제대로 된 상황이었다면 사람들이 보고 감탄했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수는 겨우 50 정도였다.

“크윽!”

백설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입에서 피를 흘리는 김훈을 쳐다보았다.
결국 두 눈에서 힘을 발출한 것이 비행에 있어 심각한 저하를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몸이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김훈은 후회했다. 바로 곁의 그녀를 제외하고 그는 아무도 구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녀를 잡은 시점에서, 괴수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력의 불길을 이렇게 거칠게 쏟아내며 모두를 패배로 몰고 간 시점에서 전력으로 여기서 벗어났어야만 했다.
김훈은 최대한 괴수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팔과 다리가, 그리고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젠장!”

죽지는 않겠지만 잘못하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는 애매한 높이에서의 급격한 추락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을 믿고 몸을 맡기고 있었다.
김훈은 땅과 시야가 가까워진 순간 다급히 몸을 날려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충격을 최대한으로 완화하면서 거칠게 굴러가던 그는 안정이 되자마자 굳은 얼굴로 백설희의 안위를 제일 먼저 살펴보았다.
그녀는 걱정 말라는 얼굴로 처음 만날 때 김훈을 한눈에 반하게 만든 그 웃음과 함께 그를 반겨주었다.


4만 명이 2만 명으로, 그리고 2만 명은 3천명으로 줄어들었다.
3천 명이 600여명 남짓한 인원으로 변해버린 것도 금방이었다.
괴수는 무림인들의 중심에서 무차별적으로 휘저어대고 있었다.
당문이 뿌렸지만 단지 괴수의 움직임을 조금 더 둔하게 만들어준 것뿐인 무림 역사상 최고이자 최악, 최강의 절대 독인 칠선독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괴수의 몸 곳곳에 남아있는 칠선독은 어느새 무림인들 전체를 중독시켰다.

“컥!”

누군가가 피를 토하는 것을 시작으로 칠선독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멀쩡하던 사람이 피를 토하며 혈수로 변해버렸고 무공이 어중간하거나 그 의지 하나만은 대단한 사람은 더욱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기괴하게 녹아내리며 쓰러졌다.
그렇다고 칠선독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미완성인 독이었다.
독의 발동은 지극히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
무공이 무림맹주와 동급이거나 조금 떨어져도 초절정급인 무림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었다.
일반의 무림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칠선독의 불완전함, 혹은 그 변덕으로 운 좋게 살아남기도 했다.
그러나 칠선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전혀 온전한 상태는 분명 아니었다.
당혁기가 손수 칠선독을 터뜨려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었던 칠선독의 부가적 효능이 있었다.
칠선독은 독에 중독된 이의 정신 구조를 변질시켰던 것이다.


“으아아아아!”

김훈은 피를 토해내며 하늘을 보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살아있었지만 백설희는 죽었다.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힘을 그녀에게 주입시켜주었다.
차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미소와 함께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피를 계속 토해내면서 무언가를 말했다.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김훈은 그녀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자신의 힘을 그녀의 단전으로 쏟아 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의 노력 때문인지 마지막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녀는 한 줌의 혈수로 변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의 육체를 남긴 채로 세상을 하직했다.
한동안 백설희의 죽음이란 끔찍한 사실을 도저히 믿지 않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녀를 살려내보려 했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없다.
그녀는 죽었다.

“으아아아아아!”

지금까지 그 자신의 힘을 억제하던 피가 입으로 솟구치면서 전신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붉은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설희의 죽음으로 김훈은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그 이성이 무너지면서 김훈 안에 존재하던 힘 역시 폭주하고 있었다.
아니 폭주가 아니었다. 힘은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색채를 계속 환하게, 그리고 더욱더 선명하명서도 아름답게 밝히고 있었다.

“크악!”

“우아악!”

음속을 돌파하는 거친 소음과 함께 충격파가 김훈이 존재하던 주변인들을 뒤흔들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하늘로 치솟은 그 충격파에 아무리 독에 휘말렸다고는 해도 이름 있는 무림인들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고 있었다.

“크흐흐....”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 점차 검게 변하고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냉각되면서 공기가 사라져감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대기권을 돌파한 김훈은 광활한 우주 공간을 활공하기 시작했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그 칠흑의 공간에서 붉은 빛이 그 어떤 별의 흔적보다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김훈 안의 힘은 기뻐하고 있었다.
우주에서 느껴지는 이 모든 감각은 그 힘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경험해온 그 모든 시공 궤적과 이제 다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저 은하계 저편의 고향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김훈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나마 전자기적 의식 패턴으로 그를 지배하려던 힘은 곧 자신보다 상위의 자리에 있는 김훈의 의식에 굴복당하면서 급격히 그 의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김훈은 푸른 행성의 어느 지점을 노려보며 몸을 돌렸다.
공포에 질린 멍청이들이 보였다.
원수가 보였다.
괴수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인의 시신이 보였다.
김훈의 두 눈에서 그 이전의 것들과 비교를 하는 것이 오히려 모욕일 것만 같은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그대로 괴수의 머리를 꿰뚫었고 머리 전체를 뒤흔드는 핏빛 폭발과 함께 괴수가 비틀대고 있었다.
머리 윗부분이 날아간 녀석이었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김훈은 붉은 빛에 완전히 휩싸인 도를 꺼내들었다.
두 눈으로는 여전히 빛을 미친 듯이 쏴대고 있었다.
괴수는 여전히 죽지 않은 채 피로 뒤범벅이 된 턱을 벌리고 불길을 뿜어대고 있었다.
붉은 잔상을 남기며 피해낸 김훈은 괴수의 머리 바로 위에 정지한 채 칼을 아래로 겨누었다.
괴수가 움직였지만 그가 더 빨랐다.

“으아아아아아!”

두 눈이 붉게 빛나면서 다시 한 번 붉은 색채로 이루어진 치명적 빛의 무기를 발산해대고 있었다.
그는 넘실대는 도강의 끝부분을 머리에 쑤셔 박는 것을 시작으로 괴수의 몸 안으로 돌진해나가고 있었다.


노인은 수련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노인은 어두운 하늘을 절반으로 가르는 것처럼 떨어지고 있는 붉은 유성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일반 유성과 그 차이를 분간해낼 수 없었겠지만 노인은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풍겨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자연에 퍼져 있는 기와 닮았으면서도 너무나 이질적인 그 힘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 단정 지으며 급히 그 유성이 떨어진 장소로 향하던 노인은 그 장소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강렬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소년이 붉은 빛에 휩싸인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 소년을 일단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호기심에 구덩이 안의 붉은 결정을 만졌던 때가 기억의 잔향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괴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도에 실린 힘과 두 눈에 집중해 쏘아댄 붉은 빛으로 돌파해나간 김훈은 방금 전 떠올린 유년 시절 너머의 기억을 아주 잠시 떠올릴 수 있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김훈은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천천히 허공에서 땅으로 안착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붉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오직 한 곳에 붙잡혀 있었다.

“설희 소저....”

그는 비틀거리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김훈의 등 뒤로 무림인들의 탄성과 함께 무언가 터져나가는 불쾌한 핏덩어리의 소음이 들려왔다.
거의 반 토막이 난 괴수는 갈라지는가 싶더니 체내에 침투한 힘의 성질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김훈은 그러나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그녀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설희 소저...왜 대답이 없소?”

그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또 하나의 혼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욕망에 휩싸인 채 내단을 갈구하며 그 끔찍한 육신의 파편과 흔적 사이로 기꺼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내단이다!”

“내단을 찾아라!”

“크하하!”

어떤 이는 괴수의 살덩어리를 생으로 씹어 삼키고 있었고 어떤 이는 뭔가 내단 비슷한 덩어리만 눈에 보인다 싶으면 주변의 사람들을 미친 듯이 도륙하며 훔치고 있었다.
아직도 하늘에 내리는 핏방울로 뒤범벅인 무림의 이들은 정파와 사파, 세외세력, 마교 할 것 없이 모두 다가 붉은 피로 흠뻑 젖은 채 오직 자신의 추악한 욕망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점차 사라져가는 붉은 빛과 함께 이 현세의 지옥에서 살아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깨끗한 김훈은 모두의 실책으로 죽어 있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해동으로 가자. 내 고향 해동국에 가서 같이 살자. 그래, 이 땅은 비록 피로 물들었지만 거기는 아직 안전해. 해동으로 가자. 해동으로...”

김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피를 토하며 죽어나가는 이들의 비명과 절규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괴수의 피와 살에 독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번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하고는 상관도 없었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김훈과 백설희의 주변으로 반구형의 붉은 빛 보호막이 나타났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여기는 더러워졌지만 내 고향은 깨끗해. 해동으로 가자. 보여줄게 너무 많아. 내 고향 해동국에서 같이 사는 거야. 이 지저분한 중원을 떠나 해동으로 가는 거야...”

김훈의 붉은 눈동자는 백설희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분명 그녀가 웃었다고, 여전히 살아있다고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그는 기쁨으로 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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