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소원

2009.10.04 12:3610.04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였다. 하루 열 시간이라는 살인적인 공부 스케줄과 매일같이 반복되는 아이들의 괴롭힘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단, 하루만이라도 세상이 멈춰버리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었다. 비록 터무니없는 바람이란 것을 알았지만, 잠깐이라도 공부를 쉬고 싶었고 나를 먹잇감인 마냥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보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소원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이루어졌다. 늦잠을 자버린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었다. 횡단보도에서 녹색불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 하필이면 파란색 싸구려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가는 김성일과 마주쳤다. 나는 녀석과 3년 째 같은 반이었다(불운하게도 2년인 지난 지금도 녀석과 같은 반이었다.). 녀석은 3년 내내 나를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하물며 수업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괴롭혀왔다. 녀석은 내 복부를 걷어차고, 내 얼굴을 급식 대에 쳐 박았으며 여자 아이들 앞에서 바지를 벗겼다. 하루는 녀석 때문에 코뼈가 왕방울 만하게 부었었는데, 보복이 두려워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말하지 못하고 붓기가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김성일은 나를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내 돈을 빼앗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녀석이었다.
김성일이 오토바이에서 내려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은 180이 넘는 거구였고, 두꺼운 팔뚝과 매서운 눈매를 가져 모든 아이들의 두려움이 되는 존재였다. 삭발한 그의 머리는 위압감을 더욱 가증시켰다. 요즘 유행하는 데로 교복 바지를 다리에 꼭 맞게 줄이고 컨버스 신발을 신은 그는 나를 향해 실실 쪼개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때리기 전에 짓는 미소였다.
“야, 이성재. 학교가기 전에 몸이나 좀 풀고 가자. 아, 나 스트레스 풀어야 돼.”
김성일이 말했다. 몸을 풀자는 것은 곧 몇 대 좀 맞자는 뜻이었다. 나는 김성일을 따라 학교 뒤 외진 골목으로 향했다. 두려움 보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매일같이 맞다보면 두려움과는 또 다른 기분이 들게 마련인 것 같다. 무기력감 같은.
김성일이 보도블록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소매를 걷어 젖힌 그는 내 멱살을 움켜쥐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주먹이 날라와 내 코를 부러뜨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주먹은 날라오지 않았다. 나는 실눈을 떴다. 그의 찢어진 눈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다시 움츠려졌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성일은 나를 때리려는 자세 그대로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나는 이 기회를 틈타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사람들이 모두 김성일처럼 멈춰서 있었다. 김성일에게서 멀어지고 싶었고 지각을 면하고 싶었던 나는 학교로 재빨리 뛰어갔다. 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나는 비로소 알아챘다. 비록 비현실적인 일이었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 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난 확신했다.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졌다.
다음 날, 김성일은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 뒤로도 소원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그 것도 제법 독특한 방식으로. 김성일 때와 마찬가지로 위기가 찾아올 때면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사람만 멈춘 게 아니었다. 시간이 정지했고 깨져버리던 창문의 유리 파편이 공중에서 멈췄으며 자동차의 매연이 공기 중으로 퍼져가다 말고 멈춰 있었다. 나를 제외한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이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소원은 내가 위기를 맞을 때만 찾아왔던 것과는 달리, 내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다. 온 세상이 멈춰라, 하고 생각하면 세상은 진짜로 멈췄다. 마치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시 세상이 원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내 권할 밖이었다.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할 일을 마치고 잠에 들고나면,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때문에 아무 때나 내 능력을 사용하진 않았다. 언제나 세상이 멈춰있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2년 전과 같이 늦잠을 자버렸다. 아침 7시에 일어나는 평소와 달리 30분 더 늦게 일어난 나는 엉거주춤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필요하다면, 세상을 멈추면 됐으므로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손에 식빵을 들고 현관을 나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남들이 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이용한 적이 없다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옷가게를 털어 원하는 옷을 빼입고 싶었고 식료품 가게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왕창 먹고 싶었다. 오늘 한 번 실천해 보리라.
하지만 언제든 두려움을 갖고 생활해야만 했다. 학교를 안 가고, 세상을 멈추고, 밖에서 놀다가 갑자기 시간이 원상태로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세상이 멈춰버리는 기이한 일도 일어나는데 무슨 일이라고 안 일어날 법은 없었다.
나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앵무새를 파는 펫샵을 지나(이놈의 앵무새는 아침이건 밤이건 잠을 잘 줄을 몰랐다.) 이른 시간에 오픈한 약국에 잠시 들렸다. 아무리 세상을 멈출 수 있다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는 해두는 편이 좋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 있는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내 감기약 하나를 샀다. 지각을 한 구실로 ‘몸이 아파서요.’는 최고의 방패였다. 약국을 떠나 적어도 10분은 걸리는 사거리의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갔다. 횡단보도 앞까지 30미터 쯤 남았을 때 녹색불이 켜졌고 나는 보도를 향해 뛰어갔지만, 앞에 다다르자마자 다시 빨간 불로 뒤바뀌어 버렸다. 신경질이 난 나는 애꿎은 신호등을 발로 찼고, 옆에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나를 ‘뭐 저런 놈이 다 있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루이뷔통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랄프로렌 반소매 셔츠를 입고, 진한 향수를 풍기고 있었다. 속칭, 된장녀와 다름없었다. 그녀의 진한 향수가 역겨웠던 나는 서둘러 신호등에 녹색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기나긴 시간이 흐르고 신호등에 녹색 불이 켜졌다. 나는 잰걸음으로 보도 위를 걸었다. 반 정도 보도를 건너가고 있었을 때 경적을 울리며 람보르기니 한 대가 다가왔다. 람보르기니가 빠른 속도로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고, 뒤따라오던 아줌마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는 머릿속으로 ‘세상아, 멈춰!’라고 외쳤고 람보르기니가 ‘끼익’하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내 왼쪽 허리 부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대편 보도위에 마치 마이클 잭슨의 ‘린’ 동작 구현하듯 어떤 아이가 몸을 기울인 상태로 정지해 있었다. 아마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던 중이었나 보았다.
신호등에 숫자판이 12를 가리킨 상태로 정지해 있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해 오던 람보르기니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하마터면 성격 급한 자동차 주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내 뒤편엔 두 팔을 들고 O자 모양의 입을 하고 있는 아줌마가 보였다. 그녀의 핸드백이 허공에 치켜든 상태로 멈춰 있었다. 나는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고, 아줌마가 있는 뒤편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진한 향수를 맡지 않기 위해 숨을 참고 그녀의 핸드백을 팔에서 빼내었다. 안에는 여럿 화장품과 지갑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안을 뒤져 향수를 꺼내 바닥에 깨뜨린 다음(역겨운 향수는 버리는 게 나았다.), 지갑 두 개 중 좀 더 큰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여러 종류의 카드와 현금이 수두룩했다. 나는 카드는 남기고 현금 8만원을 꺼내(수표 한 장이 더 들어 있었지만, 예의상 남겨두었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소우코’라는 일식 전문점의 할인쿠폰도 챙겼다. 핸드백을 다시 아줌마의 팔에 걸어 놓고 람보르기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괘씸한 람보르기니. 나는 주변에 돌 하나를 찾아보았다. 강남구 삼성동의 길바닥에선 돌 하나도 찾기 어려웠다. 얼떨결에 뾰족한 돌 하나를 찾은 나는 람보르기니의 옆구리에 흠집을 냈다. 워낙에 차체가 튼튼한 편이라 흠집이 눈에 띠게 생기진 않았지만, 어쨌든 복수는 한 셈이었다.
두 개의 보도를 건너 학교로 가기 전, 나는 집에서 현관을 나설 때 했던 생각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나는 보도 하나를 건너고, 시계 가게에서 두 블록 떨어진 24시간 대형 마트로 들어갔다. 대형 마트답게 적지 않은 손님들이 들어서 있었다. 마트는 학교 교실의 두 세배 크기로, 식욕을 증진 시키는 밝은 불빛과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냄새가 뒤섞여 내 코를 자극했다. 나는 칸칸마다 빼곡히 쌓여 있는 식료품들을 둘러보았다. 이 모든 게 다 내 거라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비싼 연어회도 먹을 수 있었고, 고급 훈제오리로 먹을 수 있었다. 수레를 잡고 멈춰 있는, 좋지 못한 인상을 풍기는 아저씨의 얼굴에 오징어 젓갈을 묻힐 수도 있었다.
나는 그전에 곳곳에 위치한 시식코너로 다가갔다. 빵, 고기, 생선, 음료수 등 없는 게 없었다. 나는 장어를 시식해 보았다.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살살 녹아내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이수시게로 장어의 부드러운 몸뚱어리를 찍던 중, 장어를 굽고 있는 불판이 눈에 띠었다. 불판 위에 불마저도 활활 타오르고 있던 상태로 정지해 있었다. 나는 재미를 느끼고 불 가까이 손을 가져가 보았다. 그 순간, 불이 다시 되살아나 내 손을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얼른 손을 빼내어 바지 위에 문질렀다.
나는 음료수 몇 개와 초콜릿 한 가득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가방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다. 시식을 조금 더 하고나서야 마트에서 나온 나는 곧장 학교로 가지 않고 시계가게에 들렸다.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시계가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나는 주머니 속에서 클립 하나를 꺼내 문구멍에 조리 있게 집어넣어 문을 열었다.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였기 때문에 집에 없으실 때가 많았으므로 나는 비상시를 위해(사실 TV 드라마에서 도둑들이 클립 하나만으로 집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재미삼아 클립을 갖고 다니며 문 따는 것을 연구하곤 했었다.) 클립을 갖고 다니곤 했다. 나는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고가의 시계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시계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때문에 나도 덩달아 시계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남자의 상징이자 로망이야말로 시계라고 말씀하셨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고가의 시계를 골라보았다. 120만 원짜리의 로렉스 시계가(면세점이 아니기에 진품이라고는 보장 못하겠지만) 눈에 띠었다. 나는 왼쪽 판매대 안으로 들어가 진열장에서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찼다. 조금 헐거운 감이 있었지만 조만간 맞추면 그만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시계 가게를 나선 나는 건너편 천주교 뒤에 위치한 소선중학교로 향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아이는 아직도 몸을 기울인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예의상 아이의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성모 마리아의 으스스한 동상이 걸린 천주교를 지나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운동장은 우리 집 마당의 반 만했으며 학교 시설은 그 어느 학교보다 열약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교실의 갈라진 벽 틈으로 물이 새곤 했었다(김성일은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으면 바닥으로 떨어진 빗물을 핥으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 나는 맞기를 택했다.).
학교 정문 앞에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김종배 선생님이 정지해 있었다. 그는 지각하는 학생들이나 복장이 불량한 학생들을 잡아다 두들겨 패는 일을 맡고 있었다(학생부 선생이었다.). 예전에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그에게 호되게 맞은 적이 있었던 나는 그를 그렇게 지나치지 않았다. 학생들을 살펴보는 그의 그 특유의 눈빛을 바라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학교폭력 같은 진짜 중요한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쓸데없이 아이들 머리 잡는 데에만 온 신경을 두고 있었다. 나도 그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으므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가 과연 단 1초라도 내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난간에서 기대어 져 있는 대걸레 자루를 들고 김종배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대걸레 자루를 들고 그의 얼굴을 후려치자 고개가 꺾이면서 많은 양의 코피가 쏟아졌고, 그가 끼고 있던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바지를 벗겼다. 세상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나면 아이들이 바지를 벗고 노란색 팬티를 입고 있는 그를 보고 대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비록, 그러려면 하루를 넘기지 않고 세상이 원상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루를 넘기고 나면(내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 세상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어느 특정한 상태로 넘어가 있었다. 비록 소심한 복수였지만 나름대로 만족감이 들었다. 어떻게든 여학생들이 이 광경을 보기를 바랐다.
나는 독서실 맞은편에 계단을 따라 층계를 서둘러 올라갔다. 4층에 다다른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복도를 따라 오른 쪽 끝 부분에 위치한 우리 반 교실로 향했다. 3학년 6반이라고 쓰여 있는 푯말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실로 들어간 나는 제일 먼저 김성일을 찾았다. 그가 제발 지각하지 않고 학교에 도착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도 김성일은 맨 뒷자리, 정중앙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왜 진작에 그를 때릴 생각을 안했던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토록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의 재수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이딴 녀석한테 맞고 지낸 과거가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쾌감이 느껴졌다. 김종배를 때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감이. 김성일이야말로 나의 소심한 복수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만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녀석에게 학대를 받는 아이는 나뿐이 아니었다. 녀석은 아이들을 더 심하게, 더 고통스럽게 때리지 못해 항상 안달이 나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괴롭힘을 받아온 모두를 대표해 복수를 하는 셈이었다.
나는 앉아있는 그를 교실 바닥에 드러눕혔다. 그러고는 나는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올라섰다. 키가 작은 나는 의자 위에 올라섰음에도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다. 나는 그 굴욕감을 밑에 누워 있는 김성일에게 풀기로 했다. 나는 컨버스 화의 끈을 강하게 동여 메고 그의 얼굴을 향해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향해 뛰어내렸다. ‘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코뼈가 안쪽으로 짓뭉개져 버렸다. 콧구멍에서 피가 분출했고, 내 새하얀 신발에 피가 튀었다. 나를 4,5년 동안 괴롭혀 왔던 녀석의 부러진 코와 피를 보자 흥분해 버린 나는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의 머리통이 날아가 뒤에 사물함을 들이받았고 더 많은 피가 흘러 나왔다. 아끼던 신발이 피로 흥건해 지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를 두세 차례 더 때리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복수를 끝내고 나자 더 이상 교실에 남아있기가 싫어졌다. 피로 뒤범벅된 김성일의 얼굴을 보자 구역질이 몰려왔다. 나는 허공에 발길질을 몇 번 해 컨버스에 묻은 피를 약간이나마 털어내고 앞문으로 걸어갔다. 뒷문으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김성일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앞문으로 다가가자 칠판 위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담임선생님이 보였다. 비록 정지해 있었지만. 나는 문득 소외된 느낌을 받았다. 학교에서 김성일을 마주치는 것만 아니라면 얼른 시간이 원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분필을 따라 칠판에 쓰여 진 문장을 읽어 보았다. ‘모든 일엔 대가가 따라온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장이었지만 담임이 왜 굳이 이 두 문장을 썼거니와 두 문장의 연관성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칠판에서 시선을 돌리고 교실을 나왔다. 피곤한 하루였다. 기분 전환으로 무역센터에서 건담을 가지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았다. 온 세상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가재 전문 요리점에 출근하지 않는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나를 위한 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노릇노릇한 토스트의 향기가 2층까지 올라왔다. 아버지는 출근 준비에 바빴다. 지겨운 일상으로 돌아가자 다시 어제가 그리워 졌다. 어제 무역센터에서 가지고 온 건담을 조립하느라 시간을 할애한 탓에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이 많았다. 은행에서 돈도 털어 보고 싶었고 어머니를 위한 진주 목걸이도 훔치고 싶었다. 물론 언제라도 세상을 멈추게 할 수는 있었지만 너무 자주 능력을 써먹었다간 어제처럼 또다시 이 세상에서 고립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전화기의 벨소리가 울린 것은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토스트를 덥석 물었을 때였다. 어머니는 싱크대 옆에서 무선 전화기로 전화를 받으면서도 톡 쏘아 보는 그 눈빛은 내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마치 죄지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네. 제가 오늘 돈을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머니는 전화를 끊고서 내가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식탁 옆 벽면으로 던져 버렸다. 벽면에 걸려있던 조그만 액자가 떨어지면서 사진을 보호하고 있던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사진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쯤 찍은 사진으로 해변에서 어머니와 포즈를 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머니가 상어 지느러미 인형을 들고 죠스 역할을 했고 내가 도망치는 역할을 했다. 옥의 티가 있다면 미소를 머금은 얼굴들이었다.
“깜짝이야. 엄마, 깜짝 놀랐잖아요.”
내가 먹고 있던 토스트를 떨어뜨렸다.
“성재, 이놈아. 깜짝 놀란 건 바로 나다. 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너가 어떻게….”
어머니가 눈을 감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무슨 말이에요? 제가 뭘 어쨌다고요.”
“다 알고 있어. 이 엄마를 속일 생각하지 말거라.”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기회를 주겠다. 너가 직접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하도록 하겠어.”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무슨 영문으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착각을 하고 계신 게 분명했다.
“전 정말로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흥분하시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 보세요. 어머니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게 분명해요.”
“좋아. 그럼 너가 시계방에서 시계를 훔친 게 아니라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어머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세요? 제가 시계를 훔쳤다니요.”
당황한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어머니는 누군가에게서 전화를 받고는 이 사실을 알아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시계방 주인일 터인데, 분명 가게 안엔 나 말곤 아무도 없었다. 설사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정지해 있었을 게 당연했다.
“웃기지마! 이 자식아. 증거도 있더구나. 너가 시계를 훔치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는데 그래도 발뺌 할 거니?”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너무 갖고 싶어서 그랬어요.”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CCTV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타오르던 불꽃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멈춰 있었는데 어떻게 CCTV가 돌아가고 있었던 걸까?
“어쩜 그렇게 거짓말을 잘 하니? 어미가 이렇게 가슴 아파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니?”
“아뇨. 전 그냥….”
“성재야. 그러고도 너가 내 아들이니?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어머니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나는 어머니의 우는 모습을 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그깟 시계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시계는 다시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찢겨진 상처는 다시 아무는데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도둑질이라니. 세상에나.”
“어머니. 진짜 잘못했어요. 시계는 다시 돌려주면 되잖아요. 앞으론 절대로 안 그럴게요. 진정하세요.”
나도 덩달아 울먹거렸다.
“이미 중고가 된 시계를 받아줄 리가 없지. 뭐, 그렇다고 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시계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고, 이놈아. 중요한 건 너가 도둑질을 했다는 게….”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다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틈을 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게 보였고 나는 서둘러 그리로 다가갔다.
“아버지. 출근하시는 길에 저 좀 태워주시면 안 돼요?”
“좋을 대로.”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짧고 간결했다. 아버지는 긴 말을 섞는 것을 싫어하셨고 나는 이 점을 이용해 새벽 2시에 외출을 하거나 엄마의 눈을 피해 20점짜리 시험지의 사인을 받아내곤 했었다.
아버지의 소나타 2의 뒷자리에 탄 나는 방금 전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CCTV에 찍혔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마트의 CCTV에도 내가 찍히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시계가게는 영업시간 전이었으므로 찍힌 건 나 혼자뿐이겠지만 마트는 상황이 달랐다. 마트엔 사람들이 북적거렸고(비록 모두들 정지해 있었지만.)시식대엔 각종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 정지해 있고 나 혼자만 움직였던 그때 그 상황이 모두 CCTV에 찍혔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마트뿐만이 아니었다. 건담을 훔치러 들렀던 무역센터도 있었고, 교실에도(비록 필요시에만 확인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CCTV가 있을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가겠지만, 어머니가 충격 받으실 일이 적어도 세 건은 남은 셈이었다. 게다가 시계 값만 해도 120만원이 넘는데, 만약 김성일이 부러진 코를 두고 진단서를 때온다면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녀석에게 합의금을 줘야 된다는 생각을 하자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또 다시 세상을 정지시킬 생각도 해봤지만 나중으로 미룬다고 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만 했다. 학교에 가면 아마 김성일이 부러진 코 밑으로 내게 얄미운 미소를 보낼 것이다. 한 방 쥐어박고 싶은 그 특유의 얄미운 미소.
아버지는 나를 천주교 건너편 시계 가게 앞에서 내려주셨다. 가게를 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주위에 김성일이 있는지 살펴보고는,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로 걸어갔다. 정문엔 웬일인지 김종배가 서있지 않았다. 하지만 김종배에 대해 수근 거리는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바지’ 그리고 ‘팬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제 내가 저지른 행각을 본 게 분명했다. 팬티만 입고 정문에 서 있는 교직원이라.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았다. 멈춰버린 세계가 하루가 지난 뒤에야 돌아올 시에는 항상 모든 게 뒤바뀌어 있었다. 이를테면 낮에 밖에서 운전을 하다가 멈춘 사람이 있다면,(불과 몇 시간 뒤에 세상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내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그 사람은 차를 타고 있는 바깥 도로변이 아닌 자기 집 침대에서 잠을 깰게 분명했다.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지금 현재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 상황이란, 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김성일을 마주치는 것이었다.
교실로 들어간 나는 내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김성일이 나를 보고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다랗던 그의 코가 아주 보기 좋게 움푹 패여 있음을 덕지덕지 붙인 반창고 위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나는 그 코를 아주 빼도 밖도 못 시키게 더 때려주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세상이 멈추지 않는 한 그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헐크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와 다섯 번째 떨어진, 맨 앞자리인 내 자리에 잠자코 앉았다. 나는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내고 뒤를 흘끗 쳐다보았다. 김성일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제발 내게 오지 말기를. 때마침,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김성일이 다시 자리에 앉았고(미소는 잃지 않고 있었다.)곧, 경례를 하는 회장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인사에 답하고 출석부를 확인하는 듯싶더니 내게서 시선이 멈췄다.
“이성재, 어떻게 된 거야. 어제는 무단 조퇴 처리 했다.”
“무슨 뜻인지….”
“너가 쉬는 시간 도중에 교실에서 나갔다며? 애들한테 다 들었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반에서 나가던 것을 본 애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하룻밤이 지나고 세상이 원상태로 돌아왔으므로 수업은 없었을 테다. 역시 CCTV때문인가. 내가 뭐라고 항변하기 전에 선생님이 내 말허리를 잘랐다.
“그나저나 김성일, 넌 얼굴이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김성일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묵직했다. 아무래도 조회 시간이 끝나고 녀석이 나를 가만히 둘 것 같지 않았다.
“넌 있다가 쉬는 시간에 나 좀 보자. 그럼 조회는 여기서 마친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들 최선을 다하길 바라고 자, 이상. 회장 경례.”
김성일이 내게 다가온 것은 담임이 교실을 막 떠나기 직전이었다.
“야, 이성재. 각오는 돼있겠지?”
김성일이 내 뒷목덜미를 움켜쥐며 말했다. 김성일이 CCTV를 확인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담임은 CCTV에 대한 말이 없었다. 담임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김성일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던 걸까?
“뭐…?”
“뭐라니? 설마 지금 당장 죽고 싶은 거야? 이 것 봐. 어제는 내가 방심했어. 내가 어떤 놈인 줄은 너가 더 잘 알잖아. 안 그래? 어제 애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망신주고 나니까 어디 기분 좋냐?”
조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십 분은 있어야 했고 얻어터질 시간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어제 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릴 줄로만 알았다. 지금 같은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무슨 영문인지 김성일이 내게 맞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상황이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제 보았던 칠판의 문장이 떠올랐다.
“좀 아플 거다.”
김성일이 내 얼굴 위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날아오는 주먹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세상이 멈추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잠시 몇 초를 기다린 뒤 나는 다시 눈을 떠 보았다. 김성일의 주먹이 내 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그 주먹을 옆으로 강하게 밀쳤다. 이제부턴 내 시간이었다. 오늘은 아주 김성일의 전신을 망가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좀 아플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김성일과 똑같이 말했다. 김성일의 재수 없는 얼굴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정지해 있는 꼴이라니. 너무나 무기력한 김성일의 모습이었다. 강한 희열이 솟구쳤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내리치려는 순간, 설상가상으로 김성일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 움직이는 사람은 나와 김성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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