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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붉은 눈, 검은 혀

2009.09.17 02:0609.17

노마는 열한 살 때 양 두 마리에 상인에게 팔렸다. 남자아이를 사러 마을에 상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노마는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날 저녁 엄마가 죽은 후로 처음 아버지가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마는 이미 자신이 팔렸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상인이 양 두 마리를 끌고 집으로 왔다. 노마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술이 급했던 아버지는 그 길로 시장으로 달려가 양 한 마리를 한 통의 포도주와 바꾸었다. 어차피 지긋지긋했던 집구석이라 노마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키우던 강아지와 헤어지는 것이 슬펐다. 강아지는 마을 밖까지 노마를 따라왔다가 길에 주저앉아 한참을 끙끙댔다.

노새를 타고 성까지 가는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성은 노마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상인은 성 앞에서 노마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볼 세상이니 실컷 봐둬.”
노마는 그 말이 다시는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뜻인 줄 알고 별로 그리울 것도 없는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막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세상은 무심하게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인은 성을 한참 돌아가 뒤쪽에 난 쪽문을 두드렸다. 문에 난 조그만 창이 열리고 문지기의 날카로운 두 눈이 나타났다. 상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이 닫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상인은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노마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땅을 바라보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마침내 쪽문이 열리고 검은 두건을 쓴 사제가 나타났다. 상인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사제는 상인을 무시하고 노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노마는 영문을 모른 채 눈길을 피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사제는 상인에게 주머니에서 은화 한 푼을 꺼내주었다. 상인은 한껏 고개를 숙이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사제는 노마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안으로 사라졌다. 노마는 사제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문지기들을 지나 마굿간을 돌아서 지하로 내려갔다. 잔뜩 긴장한 노마는 제대로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했다. 어두침침한 돌계단을 내려가니 좁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 양쪽으로 검은 나무문이 달린 방들이 있었다. 사제는 노마를 밖에 세워놓고 가운데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이상한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썩은 살과 오물 그리고 향내음이 뒤섞인 냄새였다. 노마는 속이 메스꺼워서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후 사제가 나와서 노마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노마는 머뭇거리며 방 안에 들어섰다.

방에는 몸집이 작은 마녀가 한 명 있었다. 마녀가 다가오는 순간 노마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횃불에 비친 마녀의 얼굴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녀의 눈동자는 세로로 서있었고,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두 개의 구멍만 있었다. 게다가 마녀의 입에서는 뱀의 혀가 날름거렸다. 마녀는 노마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불쌍한 것.”
노마는 간신히 마녀의 얼굴을 들여다 볼 용기를 냈다. 마녀는 차갑게 웃고 있었다. 노마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마녀가 뼈만 남은 손으로 노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긴 손톱이 스치는 불쾌한 느낌에 노마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마녀는 노마의 손을 잡고 방 한쪽에 놓인 의자로 이끌었다. 의자 옆에는 천 년은 묵은 듯한 나무 밑둥이 있었다. 둘레를 가늠할 수 없이 커다란 나무는 그대로 천장을 뚫고 솟아있었다. 밑둥에는 조그만 서랍들이 달려있었다. 마녀는 한 서랍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붉은 돌과 손가락 길이의 검은 가죽뭉치가 들어있었다. 마녀는 노마에게 돌과 가죽뭉치를 보여주었다.
“아름답지? 이것들은 앞으로 비밀을 가리는 눈과 고통을 삼키는 혀가 될 것이다.”
노마는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눈만 불안하게 깜박거렸다. 마녀는 노마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켈켈’거리며 웃었다.  
“이 눈은 불타는 산의 심장에서 꺼낸 것이고 이 혀는 불도마뱀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야. 이 아름다운 것들을 너에게 주마.”
노마는 엉겁결에 마녀가 내민 돌과 가죽뭉치를 받아들었다. 마녀는 여전히 웃음띈 얼굴로 작은 향로에 검은 풀을 넣었다. 곧 묘한 냄새를 풍기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녀는 노마의 코앞에 향로를 갖다댔다. 무심코 냄새를 맡은 노마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노마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마치 눈과 혀가 불타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발이 묶여있어서 발버둥을 칠 수도 없었다. 노마는 가슴이 터지도록 신음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다시 이상한 냄새를 맡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노마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고통은 컸지만 이를 악물면 견딜 수 있는 정도였다. 고통을 참는 일에는 이력이 난 노마였다. 노마는 곧 눈과 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고, 힘겹게 내뱉은 말은 이상한 웅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두 눈이 있던 자리에는 딱딱한 돌이 박혀있었다. 입 속에는 혀가 아닌 기분 나쁜 맛이 나는 가죽덩어리가 달려있었다. 눈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노마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감당할 엄두도 나지 않는 절망 때문에 울었다. 노마의 얼굴은 금세 피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조용히 하거라. 아직 목숨은 붙어있지 않느냐.”
노마는 마녀의 말에 속으로 지르던 비명을 멈추었다.
“넌 앞으로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거야. 눈과 혀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바쳐야 하는 대가일 뿐이다.”
마녀는 멍하니 앉아있는 노마의 손에 죽이 든 그릇을 쥐어주었다. 노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혀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먹어두어라. 성밖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그 죽 한 그릇을 차지하려고 죽을 때까지 싸울 거다.”
노마는 마치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억지로 죽을 먹었다. 혀가 없으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 왕께서 여길 찾아올 거다.”
그 말에 노마는 다시 굳어버렸다.
‘왜?’
“네가 할 일은 왕의 죄를 듣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마녀는 노마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왕좌는 원래 손에 피를 묻히고 발로 온 세상사람을 밟고 서야 하는 자리야. 하지만 왕도 인간인지라 죄의 무게가 버거운 것이지. 넌 그 죄를 덜어주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어. 다만 너처럼 미천한 것이 왕을 볼 수 없으니 눈을 뺀 것이고, 들은 죄를 행여 내뱉을 수 있으니 혀를 뺀 것이다.”
‘그냥 듣기만 하면 되나요?’
마녀는 노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의 등에 그 죄를 새길 것이다. 죄는 결코 그냥 사해지는 법이 없어. 그만한 고통을 치러야 비로소 지워지지.”
노마의 마음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미어졌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마녀는 노마의 손에 수저를 쥐어주고 억지로 남은 죽을 먹게 했다. 노마의 입 옆으로 식은 죽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음 날 저녁 왕이 찾아왔다. 노마는 볼 수 없으면서도 왕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하지만 왕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노마는 청동으로 만든 틀 안에 앉아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과 등을 뺀 노마의 나머지 몸은 앉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틀에 갇혀있었다. 입에는 비릿한 냄새가 나는 풀이 가득 들어있었다. 마녀가 향을 피우면서 알 수 없는 주문을 읊고 난 후 왕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12살난 여자아이를 죽을 때까지 탐하였습니다.”
마녀는 노마의 등에 용의 피로 문양을 새기기 시작했다. 용의 피는 살가죽을 태우며 깊숙히 파고들었다.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하들과 밭일하던 가족을 활로 쏘아맞추는 내기를 했습니다. 도망치던 남자아이는 사냥개를 풀어서 물어죽이게 했습니다.”
노마는 등을 찢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입안에 든 풀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백성들이 저를 욕한다고 하여 굶어죽을 지경이 되도록 세금을 올렸습니다.”
고백이 길어질수록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노마는 왕의 고백을 다 듣지 못했다. 중간에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 왕의 고백은 한 달 간격으로 계속되었다. 노마의 등은 거의 전체가 끔찍한 흉터로 덮혔다. 노마는 더 새길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고통은 아무리 시달려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맞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왕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왕이 말하는 죄의 내용은 상상도 할 수 없던 것이었다. 마을어른들이 말하던 왕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노마는 밤마다 사람들이 온갖 잔인한 고문에 시달리는 악몽에 시달렸다. 혀가 있다면 깨물어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는 마음의 눈물마저 말라버려서 속으로 울 기운도 없었다. 노마의 영혼이 말라가는 동안 바깥세상은 불길한 기운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노마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엄청난 함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마녀가 급히 노마의 방으로 들어왔다.
“따라오너라. 왕이 우릴 죽이려 들게다. 어서 몸을 피해야 한다.”
마녀는 노마의 손을 이끌고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한참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노마는 마침내 도착한 방의 차가운 흙바닥에 앉았다. 마녀가 급히 쇠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바뀔 때가 되었어. 인간이 질 수 있는 죄의 무게는 정해져 있으니까. 반란군보다 왕에게 먼저 잡히면 우린 둘 다 죽는다.”
노마는 영문을 모른 채 마녀가 시킨 대로 잠자코 벽에 기대어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어차피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마당에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노마의 눈에 박힌 두 개의 붉은 돌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마녀는 다음 날 만세소리를 듣고 노마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몇 시간 후 두 명의 사내가 노마를 데려갔다. 옆에서 걷던 마녀가 웃음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왕은 죽었다. 너는 왕이 저지른 죄의 기록이니 쉽게 없애지는 않을 것이다.”
노마는 왕이 죽었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더는 지옥 같은 고백의 시간을 견딜 필요가 없었다. 노마는 잊어버린 줄 알았던 미소까지 희미하게 머금었다. 메마르고 갈라진 노마의 마음에 단비처럼 기쁨이 젖어들었다.
두 사람은 왕좌에 앉은 한 사내 앞에 도착했다. 마녀가 한껏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왕이시여.”
굵은 목소리의 사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왕이라고? 왕은 내 철퇴에 머리통이 깨져서 죽었어.”
“그러면 이 미천한 늙은이가 고귀하신 분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다들 나를 대장장이 할레스라고 부르지.”
“할레스님, 여기 지난 왕이 저지른 죄를 낱낱이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마녀는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할레스에게 노마의 등을 보여주었다. 할레스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이토록 많은 죄를 지었으니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어.”
“그렇습니다. 그 자는 참으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앞으로는 헐벗던 사람들이 따뜻하게 입고, 굶주리던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세상이 올 것이오.”
“성군이시여.”
“나는 왕이 아니라니까!”
“할레스님, 왕국을 이끄실 분이니 왕좌에 오르셔야 마땅합니다.”  
할레스는 그 말이 싫지만은 않은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백성들이 원한다면 왕이 될 수도 있겠지. 그건 그렇고 이 아이는 어떻게 하지?”
“죽은 왕의 죄를 온 백성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녀의 말을 듣는 순간 노마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노마는 성 앞의 광장에 전시되었다. 사람들은 눈을 맞으며 떠는 노마의 등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노마는 온종일 죽은 왕에 대한 저주와 욕설을 듣다가 저녁 무렵 쓰러졌다. 쓰러진 노마의 등 위로 하얀 이불처럼 눈이 쌓였다. 밤이 깊어서야 병사 하나가 나와서 발로 노마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죽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노마가 약한 신음소리를 내자 병사는 낡은 천을 덮어주고 죽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더니 서둘러 돌아갔다.

할레스는 곧 왕좌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대장장이 왕이라고 불렀다. 대관식을 마치고 성 밖으로 행차하던 할레스는 광장 한쪽에 묶여있던 노마를 보았다. 노마는 미동도 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있었다.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든 할레스는 노마를 성 안으로 거두도록 지시했다.    
노마는 따뜻한 물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손길이 그를 간호했다. 며칠이 지나도 마녀는 찾아오지 않았다. 노마는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난 듯 했다. 가끔씩 들리는 바람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음미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를 돌보는 하녀는 새 왕의 인자함을 칭찬했다. 그녀는 나쁜 왕은 가고 좋은 왕이 왔으니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마는 덩달아 희망에 들떴다.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그동안 노마는 지난 고통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맛보았다. 그의 음식수발을 들어주는 하녀는 올린이라는 이름의 열다섯 살난 소녀였다. 노마가 밥을 먹는 동안 올린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마는 고마운 마음에 올린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노마의 예민해진 귀는 올린이 맨발로 오가는 소리를 들었다. 노마는 몰래 나무와 칼을 구해서 나막신을 깍기 시작했다. 원래 손재주가 있던 노마인지라 손대중으로 예쁜 신발을 만들 수 있었다. 나막신이 완성된 날 저녁 노마는 기뻐할 올린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두 명의 병사가 잠든 노마를 거칠게 깨웠다. 노마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끌려가다시피 문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이 노마를 데려간 곳은 예전에 노마가 머물던 지하방이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오래 쉬었으니 이제 일을 해야지.”
마녀의 목소리를 듣고 노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병사들은 발버둥치는 노마를 청동틀에 강제로 앉히고 걸쇠를 채웠다. 노마는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동안에도 의식은 무심하게 진행되었다. 향불이 피어오르고 마녀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할레스가 한껏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녀는 노마 앞에 놓인 의자로 할레스를 안내했다. 할레스는 의자에 앉아 옷매무새를 만졌다.
“왕이시여. 마음에 쌓인 짐을 내려놓으소서. 신께서 이 제물을 통해 사하실 것입니다.”
할레스는 물끄러미 마녀를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내 말에 반대한 신하의 일족을 멸하고 시체를 돼지들에게 먹였습니다.”
마녀는 정성들여 날을 세운 칼로 노마의 등에 새 왕의 죄를 새겼다.
“감히 왕을 대장장이라고 부른 백성들을 잡아 입을 꿰매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노마의 등은 죄의 기록으로 가득 채워졌다. 마녀는 칼을 내려놓고 할레스에게 다가가 절을 올렸다.
“오늘로 백두 번째 기록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곧 백지를 마련하겠습니다.”
할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침소로 돌아갔다. 마녀는 밖으로 나가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병사들은 노마를 밖으로 끌어냈다. 성의 한쪽 구석에 있는 빈터에는 장작더미와 형틀이 준비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노마를 형틀에 묶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노마는 식은 땀을 흘렸다.  
“잘 가거라. 고통은 금방 끝난단다. 그 뒤엔 영원히 쉴 수 있지.”
마녀는 노마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장작더미에서 내려섰다. 곧이어 병사들이 장작에 불을 붙였다. 기름을 끼얹은 장작은 삽시간에 맹렬한 화염을 일으켰다. 꿈틀거리던 노마의 몸은 이내 성난 괴물처럼 으르릉거리는 화염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졌다. 마녀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연신 주문을 외웠다. 불길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사그라졌다. 연기마저 바람결에 사라진 후 남은 것은 수북히 쌓인 잿더미뿐이었다. 마녀는 잿더미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돌과 검은 가죽뭉치를 꺼냈다. 돌과 가죽뭉치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마녀는 혀로 가죽뭉치를 핥았다. 오랜 세월 절여진 진한 고통의 맛이 느껴졌다. 마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마녀는 새로 올 아이의 붉은 눈과 검은 혀를 생각하며 여전히 어둠 속에 잠긴 지하로 사라졌다.
    



댓글 4
  • No Profile
    그냥 09.09.18 23:36 댓글 수정 삭제
    잘 봤습니다. 대뜸 이런 말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작가님이 이 글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조금 듣고 싶어졌습니다. 여유가 되신다면 무엇을 위해 이글을 쓰신건지 조금 이라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 No Profile
    그냥 09.09.19 00:18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러니까 작가님의 글에 관심이 생겼고 대화가 하고 싶어져서요. 저도 글을 쓴다고 나불대고 있는 입장으로써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달까요. 혹은 배워 갈만한게 있을꺼 같아서 껄떡대고 있는 거지요. 여자분이시라면 데이트 신청을, 남자분이시라면 친구가 되자고 무례하게 청하고 있는 셈입니다.

    ... 농담이구요.

    참 인상적인 이야기인것 같네요. 다시 말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아스바타 09.09.21 15:51 댓글 수정 삭제
    검색해보니 다른 글은 없군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우상희 09.09.24 18:42 댓글 수정 삭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이네요. 저도 이런글 참 좋아하는데요. 느낌상 뭔가 좀더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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