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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림자 숲.

2009.09.10 10:0809.10








흐린 빛이 지면을 적시자 세상은 분주해졌다.
시끄러운 소음이 부드러운 아침 공기를 난잡하게 찢었다. 동향으로 나 있는 테라스로부터 뻗은 흰색 빛무리는 그의 몸을 침대위로 펑퍼짐하게 눌러 담는다. 그는 바르게 개켜진 이불의 한 쪽 공간에서 스르륵 손을 꺼내 탁자 위로 뻗었다. 가파르게 퍼지는 빛의 난반사에 손가락이 엉망으로 얽혔다. 그는 약간의 짜증을 참으며 최대한 시계의 늘어진 그늘을 향했다. 딸각, 울음 소리가 멎는다.

아침은 언제나 검은색, 회색보다 흰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는 얇고 단단하게 맺힌 명암들을 구분하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탁자위의 안경그늘을 더듬는 손이 분주하다. 침대에서 발을 내리자 검게 늘어지는 살이 바닥에 닿았다. 상쾌한 아침이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세수를 한다. 설령 오늘처럼 늦잠을 잔 날이라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느 가정집에서 쓰는 물 그림자가 그의 검푸른 얼굴에 짙게 일었다. 욕실과 테라스 등, 집의 모든 가제도구는 당연히 하얀색이다.

서둘렀던 것이 실수였을까. 술렁, 갑자기 그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너무 놀라 개켜둔 수건 틈을 집을 때 잠시 허둥거렸다. 물 그림자를 퍼 올린다는 것이 그만 형상까지 딸려와 튀어버린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 온 빛이, 맺힌 물 한방울로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일렁일렁 흔들리던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물의 표면을 긁어냈다. 떨어뜨린 수건 틈을 매울 세도 없이 급하게 가져간 맨 손가락은 작은 열상을 입었다. 손톱 끝이 하얗게 부스러지는 것을 보며 그는 작게 혀를 찼다.  

길게 그늘 진 거울의 반사면을 보며 그는 마지막으로 매무세를 점검했다. 빛의 입자가 산산히 틀어박힌 그의 몸이 잠시 연한 회갈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제 출근해야 할 시각이다.

이른 시간의 거리는 한적했다. 그러나 도로는 출근길에 오르는 여러 동체의 그림자로 빛 샐 틈 없이 빽빽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신도 그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무거운 동체의 그늘에 몸을 실었다.

운전을 하던 중 문득 시선을 느낀 그의 몸이 미세하게 술렁였다. 하얀 햇살을 몸에맞게 걸친 실체 아래의 동체는 미끈했다. 그 차의 주인인 까맣게 빠진 몸매의 OL이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잡티하나 없는 매끄러운 까만 피부에 그는 그만 정신을 빼았겼다. 그녀는 그런 그를 향해 한번 웃어주고는, 교차로 쪽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는 통속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꽤나 잘 생긴 축에 속했다. 강한 자외선에도 부스럼이 일지 않는 말쑥한 검은 몸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정말로 상쾌한 아침이었다.

그렇게 우쭐해져서 직장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속도를 늦추었다. 시끄러운 소음, 그리고 경적소리 따위들이 어우러진.
한 낮의 도로변에서 차량그늘의 연쇄 추돌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바람에 차량마다 큰 피해가 있었고 길은 통제되었다.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전봇대의 실체가 넘어지고, 누군가는 그 그늘 틈에 끼어 버둥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방을 뒤져 명암을 기록할 사진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늘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색.
색이다.
선연한 붉은 혀를 빼어 문 실체의 오염. 그 아래 힘없이 일렁이는 한 구의 환영.
비척거리는 형상이 낮설었다. 그가 서있는 쪽으로 부상을 입은 다른 형상이 걸어나왔다. 점점이 회색의 점상출혈이 있고 내 출혈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도와달라는 그들의 외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그런 것들보다, 언젠가 한번 보았던 '색깔'이 탐욕스럽게 그늘을 '앗아가는' 공포스러운 현장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의 몸이 스르륵 떨렸다. 그는 얼른 그 것(위험하고 불결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미친듯이 현장에서(그것에게서) 벗어났다. 온 몸이 타들어가도록 내리쬐는 하얀 햇살이 공포스러웠다. 갑자기 모든 것이 두렵고 두렵다. 그는 얼른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와 허둥거리며 그늘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사진기를 두고온 것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그런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그것은 망가져서 도로에 나 뒹굴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몸을 싣자마자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벗어나야 한다. 되도록이면 빨리, 그리고 멀리 말이다.

그가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은 여섯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늘씬한 미모의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이웃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현관에서의 진한 키스도 잊지 않았다. 아침의 그 일로 인해 특별히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이한 취미네요.' 여자가 말했다. '무슨 결벽증 이라도 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가 웃으며 말한다. '일단 가서 씻고와요. 준비는 다 해놓을 테니까.' 직업여성 다운 태도와 말투다. 기분이 고조되었다. 그는 얼른가서 씻겠노라고 말하며 침실을 벗어났다. 그는 몸을 씻는동안 음탕하고 위험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제대로 몸을 씻을 수도 없었다.
샤워실에서 나오기전에, 그는 자신의 몸을 한번 더 확인했다. 탄탄하고 아름다운 검은 몸이다. 빛이나, 그 끔찍했던 '색감' 그 어느 것 하나도 찾아볼수 없는 아름다운 몸. 그는 자신의 잡티하나 없는 검은 피부를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밖으로 나왔다.

'무슨 짓이야?'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그는 경악했다. '왜 소리를 질러요?'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여자가 하는 일을 쳐다보기만 했다.
오전에 보았던 공포스러운 그것. 그것이 그의 방에 있었다. 작고 투명한 컵에 담긴 그것 말이다. 작은 혀를 날름거리며 온 방안을 불결하고 더러운 색으로 채우는 그것들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잡고 침대 옆 스텐드 아래에 두었다. 그는 또한 붉은 음영이 진 여자의 얼굴에도 경악했다. 여자의 얼굴은 검은색의 매끄러운 피부가 아닌 하얗고 울퉁불퉁하고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얼굴 뿐만이 아닌 벌어진 가운아래로 드러난 몸도 그랬다.

'이 괴물!' 그가 소리쳤다. '뭐라구요?' 여자가 말했다.'기가 막혀서 정말.'퍽 짜증스러운 목소리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순간 완전한 패닉 상태로 빠졌다. 그의 몸이 불안정하게 일렁거렸다. 투명한 작은 컵과, 못지 않게 작지만 공포스러운 그것이 지금 방안에 가득차서 그의 몸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의 공포로 질린 얼굴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여자, 아니 여자였던 괴물이 말했다. '웃겨, 정말.' 그리고 그녀는 흉측한 표정으로 그를 비웃었다. '미친놈.' 그리고 그녀, 아니 괴물은 자신이 들고왔던 가방을 들고 도로 나가려는듯 보였다. 여자, 아니 괴물이 지금 자신의 방에 저 끔직한 것들을 풀어놓고는 혼자서 도망치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실은 분노에 휩싸여)그 괴물에게 덤벼들었다. '꺄아아악!' 그러자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그와 엎치락, 뒤치락 했다.

쿵,

쿵, 쿵,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협탁에 괴물의 머리를 찧었다. 쿵, 괴물이 쓰러졌다. 불결하고 더러운것이 튀었다. 색은 없었으나, 이상한 냄새마저 나는 그것에 그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협탁 위를 살폈다. 스텐드와 함께 '그것'이 넘어져 스르륵 번졌다. 이윽고 침대가 활활 타올랐다. 그는 생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 힘 앞에 그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해져온다. 감히 그것에게 대항할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풀썩, 그의 몸이 하얀 바닥으로 널부러졌다. 가만히 손을 펼치자, 잔뜩 더러워진 손이 길게 늘어져 욕실 입구까지 닿았다. 그는 일그러진 고개를 들었다. 하얀 빛이 바닥으로 푸르스름하게 번져와 곧 저녁 시간임을 알렸다. 새삼스러운 식욕과 색욕이 동했지만 그는 일어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의 몸은 완전히 납작하게 짓눌렸다. 자신의 침실에서, 그리고 자신의 안에서. 그는 붉고 거대한 혀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과 어둠이 완벽히 동화되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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