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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책도둑

2009.09.06 20:1009.06

책도둑

나는 알고 싶은 게 굉장히 많다. 보통 사람이라면 관심 분야가 한정되어 있으련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 지식욕은 끝이 없었다. 때문에 난 끌리는 책이 있으면 일단 사고 봤다. 살 책은 많고 돈은 한정되어 있으니 결국에 가서는 책을 줄여야했다. 어디 가서 빌려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싫었다. 빌린 책은 더럽지 않은가. 또한 다시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없으며 누군가 빌려갔다면 반납할 때까지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야한다.

결국 난 책을 훔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빌릴 수도 살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 아닌가. 양심에 찔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읽히지 않는 책은 먹지 않으면 썩어갈 음식보다도 못하다. 그럴 바에야 내가 책을 가져가는 게 낫지 않은가. 궤변인건 나도 안다. 어쨌든 이리 생각하니 마음은 좀 편해졌다.

내가 책을 훔치는 방법은 단순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대게의 사람이 그렇듯이 일단 이름표가 붙어있으면 물건의 주인은 이름표에 적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두 벌의 옷이 있다고 치자. 두 벌은 모양과 색깔, 상표도 같지만 크기만 다르다. 큰 옷의 주인은 A, 작은 옷의 주인은 B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A와 B는 옷이 섞여있더라도 크기를 비교해본 뒤 자신의 옷을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름이 적혀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A의 옷에 B의 이름이 적혀있고, B의 옷에 A의 이름이 적혀있다면 A, B는 의심없이 자기 이름이 적힌 옷을 들고 간다. 나중에 그 옷을 입고 나서야 옷이 어쩐지 작은 것(큰 것)같고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그때는 늦은 뒤이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표시를 한다. ‘XX도서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종이를 붙이기도 하고 도장을 찍기도 한다. 도서관을 몇 번만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사실이다. 이 표식들은 대체로 단순하기에 위조하기 쉽다. 나는 이 점을 이용했다. 일단 서점에 들어가면 원하는 책을 고른다. 그리고 주인 몰래 도서관의 표식을 찍는다. 그 다음엔 책을 가방에 넣는다. 이때 주인에게 걸리지 않으면 좋고, 걸리더라도 상관없다. 주인은 도둑놈이 책을 훔치는구나 하고 찾아왔다가 오히려 면박만 듣는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어쩐지 께름칙하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증거가 없지 않은가. 새 책이긴 하지만 도서관에 있는 책이라고 낡았으리란 법은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란 증거는 있지만 원래 서점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주인은 엉뚱한 손님을 의심한 죄로 사과만 하고 물러설 뿐이다.

대형 서점들은 적당하지 않았다. 따로 등록을 해 놓아서 계산이 끝난 책만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하거나 감시인들을 두고 있었으니까. 대형 서점들은 종종 서점만의 표식을 하기도 했기에 여러모로 위험했다. 그렇기에 주로 목표로 한 곳은 중, 소형 서점들이었다. 책을 훔칠 때 중요한 점은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 책, 내가 빌린 책을 가방에 집어넣는 다는 듯이, 빌린 책을 잠시 볼 일이 있어서 꺼내봤다는 듯이 행동해야했다. 어깨를 너무 움치려도 안 되고 고개를 빳빳이 세워도 안 된다. 이미 제 것이라도 된 마냥 자연스럽게 여기는 게 중요했다.

주로 퇴근 시간인 6~7시에 서점에 갔다. 대낮보다는 저녁때 서점이 붐볐고 붐빌수록 주인의 시선은 분산되었다. 주인외의 사람들은 큰 문제가 안 되었다. 내 행동이 자연스러운데다 재빨랐기 때문이다. 설사 잠시 의심을 품었더라도 당당한 내 행동에 한줌 의혹마저 사라졌을 게다. 한번 간 서점은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책을 훔치지 않았으며 고작해야 한번에 2~3권 정도였다. 책을 훔치기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집안에는 책이 수북이 쌓였다. 어느새 난 책을 읽는 것보다 훔치는 데 더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을 훔칠 때의 떨림과 아슬아슬함, 서점 주인의 당황스러운 모습, 그 모든 것을 더 이상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읽지 않은 책이 절반 이상이었지만 난 도둑질을 멈추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힌 다는 걸 나또한 알고는 있었다. 허나 단지 그뿐이었다.

찬바람이 매서운 날이었다. 저녁이 되자 평소처럼 책을 훔치러갔다. 가까운 서점은 한번씩 거쳐 갔기에 한 시간정도 걸리는 서점을 택했다. 적당히 책을 읽는 척하면서 기회를 찾는 중이었는데 한 남자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검은 색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행동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이상했다. 주위를 자꾸만 살펴봤고 책을 들었다가 놨다가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날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히 책을 훔치고 있었다. 난 주의 깊게 남자를 보았고 마침내 남자가 책을 가방에 넣는 걸 목격했다.

위험했다. 한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책을 훔치게 된다면 그만큼 경계가 심해지고 내가 잡힐 위험도 커진다. 동종 업계의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게 보통이지만 적어도 책 도둑의 세계에선 아니었다. 난 잠시 고민을 하다 서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저 남자가 책을 훔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상해요. 한번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은 내 말을 듣고는 좀 놀랐는지 서둘러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남자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책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난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최후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는 줄 알았다. 헌데 오히려 주인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것 아닌가. 이상했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남자는 주인과 대화하는 도중에 날 슬며시 쳐다보며 웃었다. 비웃는 것일까. 내가 밀고한 사실을 눈치 챈 걸까. 잠시 후 주인이 내게 다가왔다.

“책을 훔치긴 뭘 훔칩니까? 빌린 책들만 가득하던데. 거 참 똑바로 보고 다니쇼. 생사람만 잡을 뻔했네. 당신 때문에 욕만 먹었잖수.”

아뿔싸. 남자도 나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방법이 나만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난 남자를 쫓기 위에 서점 밖으로 나갔지만 남자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남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수법을 쓰는 사람이 또 하나 있는 셈이 되고 내가 잡힐 확률은 배로 늘어나게 된다. 남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동류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그러한 냄새. 남자는 그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난 남자의 생김새를 떠올려 보았다. 키는 한 180cm정도 되었는데 얼굴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남자의 얼굴보다는 행동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남자가 안경을 끼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안경과 콧수염은 사람을 기억하기에 좋은 요소지만 얼마든지 없애버릴 수 있다. 지금 당장 남자와 마주친다면 그가 누군지 알겠지만 안경을 벗고 콧수염을 자른다면?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날부터 난 책을 훔칠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 언제 어디서 남자가 날 보고 있을지 몰랐다.

그때 이후로 내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일단 서점에 들어가면 서점을 한바퀴 빙 둘러본다. 동시에 서점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얼굴을 보며 남자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나 확인한다. 의심이 가는 인물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을 경우엔 주저하지 않고 서점을 빠져나왔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안심하고 책을 훔쳤다. 새 습관은 내게 평온을 되찾아 주었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 되어 갔다.

그 날도 난 평소처럼 서점을 한바퀴 돈 뒤 의심 가는 사람이 없자 책을 훔쳤다. 주인은 내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태평스럽게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적한 오후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요즘 내 손놀림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기에 채 5초도 되지 않아 도서관 표식이 찍혀졌다. 과거엔 적어도 30초는 걸렸던 일이었다. 표정 또한 태연하고 마음속에 불안이 없었기 때문인지 서점에 있던 다른 이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유 있게 작업을 마친 난 서점을 나갈 시점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문가로 눈길이 향했는데 한 사람이 서점에 들어오는 걸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온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남자였다. 내가 피하기 위해 그토록 오매불망했던,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을 본 지 오래됐고 콧수염은 사라졌지만 나는 그가 그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 불안과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착각이라면 좋으련만 내 몸은 그게 아니라고 저 자는 네가 그때 보았던 그 사람이 맞다고 소리쳤다. 내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남자는 내 존재를 눈치 챘다. 남자가 날 알아보기 전에 서점을 빠져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난 당황한 나머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실수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떳떳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도 내 행동을 보고서 모든 것을 짐작했으리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는 최악의 때에 남자를 만났다. 내가 책을 훔치기 전에, 내가 책에 표식을 하기 전에 남자가 서점 안에 들어왔다면 난 아무렇지도 않게 서점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때 나는 떳떳했으니까. 헌데 내 책이라고 말하기 위해 쓰였던 표식이 이제는 나를 목 죄는 손아귀가 돼버렸다. 도서관이라고 적힌 책을 어떻게 서점에 놓고 갈 수 있겠는가. 책들은 증거 그 자체였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모든 것이 남자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는 단지 내 가방을 열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로서는 손해볼 게 없었다.

남자를 무시한 채 서점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난 뛰는 덴 젬병이었다. 거기다 무거운 가방까지 짊어진 상황이라니. 그래, 남자와 협상을 하자. 저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보자. 내가 모든 걸 말해버리면 남자도 책을 훔칠 수단을 잃게 된다.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의 목구멍까지 막아버리는 셈이다. 남자가 그렇게까지는 어리석지 않기를 빌었다. 난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설사, 책을 그만 훔치라 해도 상관없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남자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위치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여유있고 밝은 표정이었다. 난 그 짧은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어떤 결말이든 간에 결판이 나버린다면 속이 시원하련만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신세였다. 남자는 책을 살펴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더니 내게서 사오 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멈춰섰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책만 바라봤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걸까. 설마 나를 못 알아본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남자는 읽던 책을 놓고 다시금 나를 향해왔다. 남자는 어쩌면 나를 조금 더 쉽게 요리하기 위해서 천천히 뜸을 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남자의 생각이었다면 이보다 잘 먹혀들 수는 없었다. 긴장과 초조함은 극에 달해 난 손끝만 건드려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와 나는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려웠지만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접근해왔고 난 남자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남자는 나를 못 본 척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아니, 정말로 나를 못 알아본 걸까? 그게 아니면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남자는 내 뒤로 가더니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난 한동안 남자를 바라봤지만 남자는 나란 존재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책만 읽었다. 책의 매력에 푹 빠져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지금 서점에 있는 남자는 내가 일전에 보았던 사람이 아니다. 단지 책을 고르러 서점에 들른 사람이었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자 불안해하며 머리를 싸맸던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슴 한 구석 찝찝함이 남아있었지만 그 감정도 남자가 서점을 나가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자는 아까까지 보고 있던 책을 계산한 뒤 나가버렸던 것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문제 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저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점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주인이 날 불렀다. 설마!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역시 그런 것이었다. 그냥 모른 척 갈 리가 없었다. 직접 일을 해결하기 싫어서 서점 주인에게 모든 걸 불어버린 거겠지. 자신은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이니 얼마나 편한가. 돌이켜보니 남자가 계산을 하는 것 치고는 서점 주인과 오래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그때부터 의심을 했어야하는데, 그때 서점에서 도망갔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아니다. 나와는 달리 남자는 내가 책을 훔치는 광경을 보지는 못했다. 단지 짐작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일단 잡아떼자. 서점 주인이 뭐라고 하든 아니라고 하자. 그 남자가 착각한 거라고 엉뚱한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려하냐고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명예훼손죄로 고발해버리겠다고 말하자. 그러면 서점 주인은 지레 겁을 먹고 사과할 것이다. 100%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왜요? 왜 부르셨죠?”

난 나도 모르게 거칠게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좀 전에 나가신 손님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든 믿지 마시오. 그는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요.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도둑놈이지.”

“손님 그게 아니라 이거, 좀 전에 나가신 손님이 전해주라고 해서요.”

서점 주인은 내게 여러 번 접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뭐지 이게? 상황은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점 주인에게 추궁당할 것을 대비해 핑계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난 서둘러 쪽지를 펴보았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당신 한번, 나 한번, 이제 공평하군. -

쪽지를 본 순간 깨달았다. 시팔, 놈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날 가지고 놀았다. 자기가 한번의 위기의 넘긴 것처럼 나도 한번은 봐주겠다는 소리 아닌가. 철저히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놈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던 셈이었다. 차라리 날 신고했다면, 경찰서로 끌고 갔다면, 이토록 비참한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놈은 그러지 않았고 지금 내가 느끼는 건 절망감과 분노뿐이었다. 난 결심했다. 먼저 놈을 찾아내서 놈을 감옥에 쳐 넣기로. 그렇지 않고서야 이 분과 한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목적은 바뀌었다. 책을 훔치는 건 뒷전이었다. 놈을 잡는 것이 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난 서점들을 매일 같이 돌아다녔다. 놈과 나의 접점은 서점이 유일했다. 난 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단지 놈의 얼굴과 책을 훔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어떻게 해야 놈을 잡을 수 있을까. 놈의 심리를 알아야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놈은 나와 비슷하다. 책을 나와 같은 방식으로 훔친 것도 그렇고 책을 훔친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일단 책은 아무나 훔치지 않는다. 책은 팔아봐야 돈도 얼마 안 된다. 책은 지식욕이 있는 사람만이 훔친다. 내가 학구적이고 지적인 것처럼 놈도 그러할 것이다.

놈과 나의 행동반경엔 일치하는 지점이 있었다. 처음 마주친 서점과 두 번째로 마주친 서점. 그 사이의 간격은 거리로 따지면 지하철로 1시간가량, 시간으로 따지면 두 달이다. 난 지도 위에 두 서점을 표시한 뒤 두 서점을 잇는 선을 그었다. 두 서점을 끝점으로 삼지 않고 조금 더 여유 있게 그었다. 그리고는 그어진 선을 반지름 삼아 원을 그렸다. 원은 도시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추측이 맞다면 원안에 있는 서점 중 하나에 놈이 나타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원은 너무 넓었다. 조금 더 범위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난 두 달 동안 간 서점을 지도에 모조리 표시했다. 서점은 두 서점을 잇는 선 주변에 고루 분포되어있었다. 중간에 지나온 경로는 다르지만 시작과 끝은 같았다. 놈도 내가 지나온 서점을 순서는 다르지만 지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난 과감히 이 서점들을 포기했다. 내가 한번 간 서점들을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놈도 찾아가지 않을 테니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하지만 난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놈과 나는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나는 놈을 잡으려 했고 놈은 나를 놓아줬다. 그 점만 봐도 놈과 나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심하며 언제 잡힐지 몰라 불안해하는 나와 당당하게 나를 놓아주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놈. 놈은 항상 자신만만한 사람일 것이다. 또한 놈은 나보다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한수 위라고 여겼기에 절호의 기회를 붙잡지 않고 나를 놓아준 것이다. 나는 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실수는 한번으로도 족하다. 난 놈을 반드시 잡고 내가 저지른 죄와 놈이 저지른 죄, 모두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어떤 방법을 써야 효과적으로 놈을 처리할 수 있을지 매일 밤 고민했다. 언제, 어디서 놈을 만날지 몰랐다. 그렇기에 즉각적이면서도 놈의 행동과 심리를 고려한 계획을 세워야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개였다.

하나는 놈이 책을 훔치는 걸 덮치는 것이다. 확실히 놈을 잡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놈은 저번 일이 있은 후로 책을 훔칠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다른 하나는 덫을 놓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을.

내가 처할 수 있는 상황은 두 개였다. 내가 서점에 있을 때 남자가 들어오거나, 남자가 서점에 있는데 내가 들어가거나. 앞의 상황에선 남자의 행동을 처음부터 관찰할 수 있기에 유리하다. 책 훔치는 걸 포착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에 비해 뒤의 상황에선 남자가 그전에  무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앞의 상황을 만나리란 법은 없다. 내겐 좀 더 확실한 계획이 필요했다. 낮은 확률에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틈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책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 팔아봐야 돈도 안 될 책을 훔치는 이유만 생각해봐도 뻔하다.  그는 읽을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닐 게다. 책을 탐하는 모든 이들처럼 그 또한 책 한권으론 부족하다 느낄 거고 여러 권의 책을 들고 다닐 게다. 그러기 위해선 가방이 필수적이다. 사실 나 또한 가방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가방을 이용하면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운 계획은 이렇다. 일단 남자의 가방을 떨어뜨린다. 다음엔 남자 몰래 훔친 책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남자의 범행을 밝힌다. 벗어날 수 없는 증거에 의해 그는 결국 철창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큰 그림을 짜자 세부사항들도 머릿속에 떠올랐고 계획은 점차 구체화 되었다. 오래지 않아 난 놈을 만나기만 하면 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내게 필요한 건 재빠른 손놀림과 냉철한 판단력이었다. 긴장하여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었다.

난 저녁때마다 서점으로 갔다. 언제 놈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훔치진 않았다. 단지 놈을 찾고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록 놈을 만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서점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서점에서 놈과 마주칠 확률은 무척이나 낮았다. 비록 범위를 줄였다고는 하나 그 범위도 보통 넓은 게 아니다. 이전에 두 번이나 만난 것도 따지고 보면 놀라운 일이다. 난 놈에게 받은 치욕을 되돌려주지 못한 채 포기해야 되나 싶었다. 그럴 때면 난 놈의 비웃는 듯한 그 더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이 잘못했다고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질질 짜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다잡기엔 충분했다.

놈을 찾기 시작한 지 8개월이 흘렀다. 그 날 내가 들어간 서점은 한 바퀴 도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엔 주인과 검은 코트에 검은 가방을 입은 남자, 그 둘만이 있었다.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난 슬며시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가능한 내가 자신을 관찰하는 걸 모르도록 조심스럽게. 헌데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서점에 있던 남자는 내가 찾던 사람이었다. 8개월이나 지났건만 나는 그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허나 그는 날 못 알아보았다. 8개월 간 사람을 몰래 관찰하는 버릇을 들인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상 그를 만나자 고민이 되었다. 계획했던 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두고 볼 것인가.
내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 그는 매고 있던 가방이 무거웠는지 옆에 있는 책꽂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가방과 떨어진 셈이다. 이보다 좋은 기회를 맞을 순 없었다. 아직 남자와 가방의 거리가 가깝지만 이정도면 몰래 책을 넣기엔 충분하다. 책 두 권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책에는 이미 낙인이 찍혀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지며 입안에 침이 말랐다. 가방 앞에 선 난 살며시, 느리면서도 재빠르게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는 준비한 책을 넣고 가방을 닫았다. 모든 계획이 성공했다는 생각에 안심하려는 찰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여어,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

설마, 책을 넣은 걸 눈치 챈 걸까.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그는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책 넣기를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아? 저번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서로 합의를 했으면 좋겠어. 구역을 정해놓고 활동하자는 얘기야.”

예상치 못한 말이었지만 나로선 반가웠다. 그의 가방에 훔친 책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른다는 게 이 대화로 확실해졌다.

“음, 괜찮은 생각 같군.”

“아무래도 여기는 서점 주인이 있으니 밖에 나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

“좋아, 그렇게 하자.”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가 가방을 챙기려했다. 혹시라도 안을 들여다보면 큰일이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가방은 놓고 가는 게 좋겠어. 무겁지 않아?”

말을 마치기 무겁게 내 가방을 내려놓았다. 내가 먼저 행동해야 그도 따를 것이다. 가방을 매고 있다간 그가 가방을 떠올리고 뒤져볼지도 모른다. 그건 원치 않는 바였다. 난 그의 가방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방을 놓은 뒤 나왔다.

“내가 간단히 지도를 만들어봤어. 여길 봐봐. 이 지점이 당신이 활동할 구역이고 내가 활동할 구역은 여기야.”

그가 내 지점이라고 가르친 구역은 손톱 크기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마했고 그의 구역은 도시 전체를 차지했다. 그는 나를 놀리고 있었다. 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는 조용히 서점 주인에게 책이 도난당한 사실과 범행 방식을 조용히 말한 뒤 숨어서 지켜보려 했다. 그가 모든 사실을 까발리면 나 또한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까. 헌데 그에게서 놀림을 당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인내심을 갖고 상황을 봤어야했는데 긴 기다림에 지친 난 그러지 못했다. 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의 죄를 말하려했다. 헌데 그러기도 전에 그가 내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이 사람이 서점에서 책을 훔쳤습니다. 가방을 뒤져보십시오.”

주인은 그 말을 듣고는 내 가방을 뒤졌다. 가방에는 책이 들어있었다. 내가 분명히 남자의 가방에 넣었던 그 책이. 두 눈으로 봤지만 난 믿을 수 없었다. 남자의 가방에 있어야 할 책이 왜 내 가방에 있단 말인가. 주인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며 설명을 요구했다. 내가 미처 변명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내가 썼던 수법을 말했고 곧 이어 경찰이 나타났다. 상황 설명을 들은 경찰은 즉시 나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그 사이 남자는 유유히 빠져나갈 뿐이었다.

대체 왜? 어떻게 책이 내 가방 안에 들어가 있었던 걸까? 분명히 놈의 짓이 확실한데 그는 내 가방에 손 댈 틈도 없었다. 난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갖고 경찰차로 끌려가는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려 서점을 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그때 나는 서점 주인과 놈이 웃으며 얘기하는 걸 보았다. 그 순간 난 모든 걸 깨달았다. 서점 주인도 그와 공범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를 찾고 있는 동안 그는 서점에서 날 기다렸을 거다. 그를 도와줄 조력자와 함께. 언제 어떤 장소에서 만날지 몰랐기에 내가 계획을 세울 수 없었던 반면, 그는 모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서점에 들어온 순간부터,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셈이다. 난 내가 어떻게 행동했든 간에 책 도둑으로 몰렸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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