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09.08.31 20:1308.31

생명조합연구소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국제회의장, 사람들은 공중에 거대하게 반짝이는 금빛 도넛 모형에 감탄하며 좌석에 앉았다. 수십 개의 테이블마다 최고급 도넛이 은쟁반에 가득 쌓여있었다. 자리가 정돈되자 불이 꺼지고 무대 왼쪽 부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자 오케스트라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각종 전자음향과 자연음을 혼합한 웅장한 화음이 뿜어졌다. 정면의 화면은 어느새 우주의 풍경으로 바꿔있었다. 흑단같이 검은 배경 속에 은하수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며 자신의 은빛 치맛자락을 펄럭거렸다. 뭔가 작지만 굉장히 빠른 빛이 꼬리를 달고 소용돌이 속에서 튀어나왔다. 점점 확대된 빛의 정체는 쟁반 모양으로 생긴 우주선이었다. 우주선은 은하수 가장자리에 위치한 태양계로 뛰어들었다. 토성의 고리를 스치듯 지나가고 눈을 부라린 듯한 문양의 목성과 소행성대를 지났다. 바로 가까이에 파란색 구슬 같은 지구가 보였다. 우주선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장 지구 속으로 뛰어들었다. 흰 구름이 우주선을 삼키듯 먹어버리고 온통 하얀 수증기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전자오케스트라단이 악기를 두드려대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수증기가 사라지면서 우주선의 형체가 무대 위에 드러났다. 우주선은 천천히 무대 바닥에 착륙했다. 관객들의 눈이 우주선 문에 집중됐다. 문이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이 하얀 예복을 갖춰 입고 얼굴을 드러냈다. 원숭이처럼 생겼지만 원숭이도 아닌 특이한 느낌을 주는 생명체였다.
김박사가 단상에 서서 그 생명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퐁골원숭이와 인간유전자를 조합시켜 만든 인간원숭이, 일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일은 허리를 구십도로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허리가 굽어지자 그렇지 않아도 긴 팔이 거의 바닥에 닿았다. 사람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로 일의 탄생을 축하했다.
박연구원의 진행으로 일은 그동안 학습한 지식을 사람들 앞에 선보였다. 사회과학, 생명과학, 인문학을 비롯해 예술적인 능력까지 유감없이 뽐냈다. 사람들은 감탄과 함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곧 잔잔한 음악과 아름다운 영상이 흐르면서 일이 햄릿의 한 구절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오필리어에게 사랑의 감정을 호소하는 대목이었다. 일은 십여분에 걸쳐 어떨 때는 격렬하게 어떤 때는 침통하게 햄릿의 대사를 읊었다. 사람들은 사색에 잠겨 일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일의 표현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뇌하는 표정을 짓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불이 꺼진 채 무대 위에는 침묵이 흘렀다. 5분이 지나도 불이 켜지지 않자 이렇게 끝나는 건 좀 그렇잖아 하는 듯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부응하듯 요란한 음악이 터져 나왔다. 무지개색 찬란한 조명과 함께 형광색으로 번쩍이는 무대 의상으로 바꿔 입은 일이 공중제비를 두 번 돌며 나타났다. 일이 오른팔을 높이 올리자 천장에서 도넛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훌라후프가 떨어져 일의 허리에 감겼다. 지구 최고의 가수 라엘의 명곡 ‘도넛, 도넛’이 시작된 것이다.
‘도넛, 도넛’은 지구인들이 즐겨먹는 도넛을 찬미하는 노래로 발표되자마자 전 지구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그리고 지구 엄마들의 그 유명한 극성으로 그해 태어난 수백만 명의 아이들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도넛, 도넛, 너를 사랑해. 네가 없으면 이 세상은 블랙홀, 폭신한 너의 몸매, 설탕과 초콜릿이 흐르고, 어디를 봐도 모가 없네.……’ 일은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도넛, 도넛’의 안무 ‘중력춤’을 추기 시작했다. 발이 바닥에 붙어 잘 안 떨어지기 때문에 몸부림을 치거나 손으로 떼어내는 듯한 동작을 하며 상체는 유연하게 훌라후프를 돌리는 거였다. 중력춤은 운동신경이 발달했고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은 일의 체형에 유난히 잘 맞는 춤이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일의 스텝에 맞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는 도중 일이 훌라후프를 떨어뜨릴 것 같을 때마다 놀라운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일은 한번도 훌라후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일이 훌라후프를 공중으로 높이 던져 떨어지는 훌라후프 속으로 몸을 던져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쳤다. 일은 무대 뒤로 들어갔다 열띤 환호에 못 이겨 다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 준비해 둔 라엘의 또다른 곡, ‘블루 초코 도넛’을 불렀다.


“잘했어. 일, 최고야.”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연구원이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 올리고는 방을 나갔다.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왔다. 아직도 밖은 축제분위기였다. 일이 고조시킨 분위기가 다음 프로그램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머리뿐만 아니라 온 몸이 뜨거운 게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가 이제까지 본 사람은 김박사와 박연구원 그리고 몇 명의 다른 연구원들, 경비원 최씨가 전부였다. 그런 그가 무대에서 실수를 하지 않았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가상관객으로 예행연습을 몇 번 한 게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무대경험은 가상경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일은 무대를 떠올렸다. 자신의 몸짓 하나하나를 따라오는 시선들, 환호성,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박수소리,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구름 위로 붕붕 떠올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 쟁반에 도넛이 잔뜩 쌓여있었다. 일은 가까이 가 초코 시럽과 잘게 썬 아몬드로 장식한 도넛을 하나 집어 들었다. 향긋한 냄새를 즐기며 한 입 베어먹는데 문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일,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
문이 열리고 김박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박사 뒤에는 경비원 최씨와 또 한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몇걸음 앞으로 나왔다. 라엘이었다. 유명가수이자 모델, 탤런트, 지구 최고의 스타, 좀 전 발표회에서 부른 노래의 주인공이었다. 일은 깜짝 놀라 먹고 있던 도넛을 떨어뜨렸다. 영상으로만 보던 라엘을 만나다니.
“늦게 와서 네가 노래 부르는 걸 화면에서 봤어. 정말 대단하던데. 잘못하면 내 자리를 뺏기겠어.”
라엘이 웃으며 말했다. 라엘의 웃음에서 별이 마구 쏟아지는 것 같아 일은 눈을 뜨기 힘들었다.
“정말 라엘인가요?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긴.”
라엘은 구두 뒷굽을 두드려 한바퀴 돌고 손등을 턱 밑에 올리며 일에게 윙크했다. 그 장면은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는 cf의 한 장면이기도 했다. 일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라엘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라엘이 일의 행동에 깜짝 놀라 “어머머” 하고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도 달려들어 일이 더 이상 라엘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막았다. 일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김박사가 뒤늦게 나서서 어색한 분위기를 봉합하려고 했다.
“라엘, 놀라지 말아요. 일은 당신이 노래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봐왔기 때문에 친밀감을 느껴서 그런 거지, 다른 나쁜 의도는 없어요.”
“아…… 그렇군요.”
라엘이 대답을 했지만 불쾌감을 숨기지는 못했다.
경비원 최씨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지 라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진짜 라엘이지유? 진짜쥬?”
“그럼요. 속아만 보셨어요?”
“진짜 맞으면 여기 손등에다 싸인 좀 해줘유.”
라엘이 최씨의 손등, 팔목 등에 사인을 하자 최씨가 간지러워 죽겠다고 소동을 쳤다. 라엘은 최씨의 팔목을 꽉 붙잡고 사인을 끝마쳤다. 최씨는 라엘의 사인이 들어간 손등을 자랑스레 드러내놓고 라엘과 사진을 찍었다. 박사가 교대로 라엘의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라엘은 박사의 재치 있는 말솜씨와 최씨의 사투리의 부조화 속에서 그럭저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일은 그 무리에서 쫓겨나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잠시 후 매니저가 와서 라엘을 데리고 갔고 사람들도 뒤쫓아 나갔다.
왜 그렇게 짐승같이 행동했을까. 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까지 털이 북실북실 나있고 굵고 뭉툭한 손가락은 사람의 것보다 원숭이의 것에 더 가까웠다. 몇 주 전에 퐁골원숭이를 키우는 미니동물원에 갔다 왔었다. 박연구원이 원숭이 우리로 바나나를 던지자 마침 앞에 있던 놈이 집어 나무 위로 올라갔다. 다른 놈들이 쫓아가자 벌건 잇몸과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쫓아가던 놈들이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끽끽대며 눈치를 보았다. 박연구원은 그 모습을 보고 재밌다고 웃어댔다. 자신이 던진 바나나 하나가 원숭이 무리의 균형을 깨뜨린 게 우스운 모양이었다. 일은 박연구원처럼 가볍게 웃어젖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본능에 충실한 단순함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은 벌떡 일어나 벽에 붙어있는 세면대 거울로 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원숭이하고도 약간 다르다. 그렇다고 사람의 얼굴도 아니다. 유전인자가 반반씩 섞여있기 때문에 두 생명체의 특질을 적당히 혼합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물론 이런 착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육을 받고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런 의식조차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가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일은 코끝을 위로 잡아당겼다. 턱을 바짝 목 쪽으로 잡아당기고 눈 위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눈썹 뼈를 손등으로 가렸다. 사람과 비슷하게도 보였다. 가끔씩 좀 험악해 보이는 사람 있잖은가. 이런 걸 고치면 사람과 구별이 안 될 텐데.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이 눈썹과 튀어나온 입이었다. 그리고 볼 옆으로 구레나룻처럼 나있는 털, 그는 얼굴에 붙은 털을 잡아 뜯었다. 이 털만 없으면. 아야, 아파라. 이 털만 없으면 괜찮을 텐데. 그런데 귀는 또 왜 이렇게 위에 붙어 있는 거야? 그는 귓바퀴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얼굴은 왜 이렇게 시커멓지. 원숭이에 비해서는 하얀 편이지만 사람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자신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외모가 바뀐다고 그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라엘이 그래서 싫어하는 거야. 그래서. 라엘 생각을 하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라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빨리 떠나버리다니. 일의 눈가에 물기가 조금 배어나왔다.


일은 학습기는 보지도 않고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동공과 마주쳐야 진도가 나가는 학습기는 1시간 전과 똑같은 화면에서 멈춰있었다. 박연구원은 학습 진도가 거의 나가지 않은 걸 보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어제 일을 생각하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사람이라도 몸살이 나 누워있을지 모른다. “일, 왠일이야? 어제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일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박연구원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긴 너 덕분에 우리 연구소 위상이 많이 높아지긴 했다.” 박연구원은 일의 어깨를 대견하다는 듯 탁탁 두드리며 연구실을 나갔다. 사실 외부에 공개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일의 탄생과 성취력은 세계적인 뉴스 감이었다. 몇 가지 준비작업만 끝나면 일의 존재가 전지구의 방송망을 타고 알려질 것이다. 그러니까 일은 김박사, 박연구원 같은 연구원들의 성공과 명성을 보장할 비장의 무기 같은 거라 할 수 있었다.
일은 연구실을 나가 복도 끝에 있는 147실험실로 갔다. 147실험실에는 일의 친구 블랙75가 있었다. 블랙75는 7cm밖에 안되는 앙징맞은 몸집에 반짝이는 검정 눈, 커다랗게 펼쳐진 둥근 귓바퀴, 벌렁거리는 코, 털이 군데군데 벗겨진 긴 꼬리가 매력적인, 바로 쥐였다. 비록 종은 다르지만 둘 사이에는 찌릿찌릿한 교감이 흘렀다. 일이 가까이 가면 블랙75는 유리상자 안에서 서성대다가 그가 보이는 유리벽으로 달려와 바짝 몸을 대고 찍찍 울어댔다. 핑크빛 앞발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똑같은 핑크빛 뒷발로 서 있는 작고 포동포동한 짐승(블랙75는 당뇨, 비만 같은 질병을 연구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유전자 조합을 한 쥐라 뚱뚱한 편임)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그가 손가락을 유리벽 위에 대고 움직이면 블랙75가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블랙75가 보이지 않았다.
실험실 벽 쪽에 나란히 놓여있는 유리상자 중에 블랙75가 들어있던 40번 유리상자는 텅 비어있었다. 장난감같이 작은 먹이그릇에 먹이부스러기가 조금 남아있었다. 혹시 다른 번호의 상자에 들어있나 살펴보았지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블랙75가 일을 봤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유리벽을 박박 긁고 찍찍 울어댈게 뻔했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둘러보니 안쪽에 연구원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다 마침 택배 물건을 들고 온 경비원 최씨와 마주쳤다. 최씨는 블랙75를 잘알고 있었다. 저번에 우연히 블랙75의 몸값을 알고는 ‘어떻게 쥐 값이 내 월급보다 비싸데유’하고 놀라기도 했다. 물건을 내려놓는 걸 기다렸다 최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블랙75 못보셨어요?” “글씨유. 오늘 해부하러 갔나 부지유. 왜유?” 최씨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쓱 닦으면서 말했다. “해부요?” 일이 놀라 물었다. “야. 그동안 잘먹었으니 밥값을 해야지유. 안그래유?” 최씨가 당연하다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은 최씨를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달려 포유류 생체실험실로 쓰이는 A-11 실험실을 향했다. 입구에 막 들어가는데 방호레이저가 촘촘하게 나타났다. 데스크에 있는 연구원이 방호레이저 틈으로 내다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박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일은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좀 전에 해부실에 들어가셔서 1시간 후에나 만날 수 있다.” 연구원은 칼로 자르듯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은 할 수 없이 학습실로 되돌아갔다. 해부실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해부실 문턱에 갔다 온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해부되는 느낌이었다. 벌써 블랙75는 낱낱이 찢어져 고기 덩어리가 된게 아닐까. 조금만 피부가 찢겨져도 아픈데 몸 전체를 메스에 맡기다니. 영리한 눈망울과 오동통한 몸매를 다시 볼 수 없다니.
갑자기 그는 찌릿하는 통증에 전신을 떨었다. 자신도 블랙75와 똑같은 연구소의 실험용 동물인 것이다. 김박사나 박연구원이 자신을 동료처럼 대해주고 있어서 그렇지 자신도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해부실에 끌려갈 수도 있다. 이 나쁜 인간들. 목적이 있어서 나를 만든거야. 실컷 이용한 다음에 쓰레기 취급을 하는 거지. 그뿐이야? 그뿐이냐고? 인간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니게 만들어서, 라엘에게 비웃음이나 당하게 만들고. 일은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면서 울분이 제곱으로 폭발했다.
일은 바로 앞의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주먹이 책상과 부딪치면서 느껴지는 통증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뼈아프게 알려주었다. 거친 숨을 고르는데 책상 위에 놓인 박연구원의 카드가 보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홀로그램 무늬가 매혹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드가 있으면 이 건물의 보안지역에 들어갈 수 있다. 일의 머릿속에 기계실의 커다란 창문이 떠올랐다.
일은 주위를 살피며 카드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은 복도를 지나 기계실로 가는 비상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기계실에서 거대한 짐승의 숨소리 같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일은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자신이 거대한 육식동물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께름칙한 상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곳은 아니다. 얼마 전에 연구실의 제어장치가 고장 나는 바람에 다른 연구원과 같이 기계실에 온 적이 있었다. 기계실이란 말하자면 수학과 물리, 화학의 제반 법칙들이 정교하게 운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은 그곳에서 다시 정상이 된 자동제어장치를 들고 연구실에 되돌아갔었다. 그는 카드를 찍고 기계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를 보고 실험복을 입은 낯선 연구원이 아는 체를 했다. “일, 여긴 웬 일이지?” 일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박사님이 진공장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아마 저쪽에 있을 거야. 저쪽으로 가봐. 아, 그리고 저번 공연 잘 봤다.” 그러며 연구원은 친근감을 주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도 그에게 억지미소를 지으며 그가 가리킨 쪽으로 갔다. 커다란 원통관과 온도계가 수십 개의 눈처럼 달린 기계 뒤에 숨어서 보니 연구원이 보이지 않았다. 일은 전에 눈여겨봐둔 캐비닛에서 마스크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옷장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니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창문 건너편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규모의 또 다른 건물이 서 있었다. 이 층과 비슷한 위치 조금 밑에 창문이 열려있었고 창문 고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일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힘껏 뛰어 창문 밖으로 날아가 마주 보이는 건물의 창문 고리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고리를 붙잡지 못하면 수십미터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저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몇 십 보정도 뒤로 물러선 다음 숨을 고른 후 창문을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일은 팔다리를 버둥대며 옆 건물의 창문을 향해 자유 낙하했다. 간신히 창문 고리를 붙잡았지만 그 다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창문 고리를 단단히 움켜잡은 후 백팔십도로 몸을 회전시켜 창문에 달라붙은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일은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살짝 곁눈질해 보니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카트를 방진복을 입은 사람이 밀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흔히 보던 폐기물 처리 카트였다. 방진복을 입은 사람이방으로 들어갔다. 카트를 살펴보니 카트 밑바닥에 어느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일은 일단 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깊숙이 들어가 머리 위에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올려놓았다. 사람이 나와 그의 머리 위에 쓰레기를 퍼붓고 카트를 밀었다. 뭔가 끈적끈적한 액체가 끊임없이 위에서 흘러나왔다. 일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꾹 참았다. 사람이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일은 재빨리 나와 카트 밑에 달라붙었다. 팔뚝이 아팠지만 역겹지 않아 다행이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유유히 카트를 밀고 갔다.


일은 트럭이 멈추자 트럭 밑에서 머리를 내밀고 살피다 조심스럽게 기어나갔다. 일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다가 커다란 빌딩으로 따라 들어갔다. 둘러보니 왼쪽 구석에 화장실 표시가 있었다. 일은 화장실로 가 빈자리에 들어가 문을 걸었다. 온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잠바와 바지에도 갈색 액체가 지저분하게 묻어있었다. 일은 잠바를 벗어 바지에 묻은 액체를 닦고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계속 입고 있다가는 코가 썩을 것 같았다.
일은 화장실 거울로 가 마스크가 얼굴을 잘 가리고 있나 확인했다. 마스크는 일의 튀어나온 입과 털을 그런대로 가려주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일은 도로를 날아다니는 헬카와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서 내려다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큰 소음을 내며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헬카와 인도를 걷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에는 뭔가 활력이나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았다. 연구소의 차분하고 치밀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대형빌딩 몇 개를 지나 편의점같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학습기에서 이 분야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산다고 했다. 학습기에서 본대로 대형스크린이 벽을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이 둘러보며 쇼핑을 하고 있었다. 스크린 너머는 의자와 테이블이 갖춰져 있어 사람들이 차와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일은 호기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며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눈여겨봤다. 사람들이 스크린을 살피다가 물건을 고르고 점원이 있는 데스크로 갔다. 점원이 물건을 포장해서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스크린을 보다가 맘에 들거나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계산도 하는 것 같다) 점원이 있는 데스크에 가서 물건을 받아가는 것이다.
일은 돈이 없기에 구경이나 하자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스크린 주위를 걸었다. 라엘, 라엘의 모습이 저쪽 끝에 있는 스크린에 얼핏 보였다. 일은 자석에 끌려가듯 그쪽으로 향했다. 라엘의 모습이 전면광고로 나온 패션잡지였다. 일은 거의 반사적일 정도로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테스트 하시겠습니까?” 화면에 네모상자가 불쑥 생겨 질문을 던졌다. 일은 “예”를 눌렀다. “라엘의 모든 것을 밝히는 러브 러브 스무 고개”
1. 라엘이 살고 있는 집은? 일은 답변을 눌렀다. 파도 소리가 들리고 해조류의 짭짤한 바다 내음이 느껴지며 라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바닷가 절벽 위에 있는 집에 살고 싶어요. 사실 그런 집에 살고 있기도 하고요. 절벽 위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면 한 마리 갈매기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랄까요.” 일은 눈을 감고 천상의 소리인냥 라엘의 목소리를 음미했다. 그래요. 그것도 좋을 것 같네요. 그렇지만 숲 속도 좋지 않을까요? 일은 새집처럼 나뭇가지 위에 걸쳐놓은 집을 상상했다. 하트 모양으로 만든 창문으로 라엘과 자신이 얼굴을 내미는 행복한 모습도.
2. 라엘이 즐겨 입는 옷은? 일은 재빨리 답변을 눌렀다. 시뮬레이션으로 광택이 눈부시게 빛나는 옷감이 너울거리며 지나가고 라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즐겨입는 옷은 화성의 이온석으로 가공한 옷이에요. 이온석으로 가공한 옷은 튼튼하면서도 광택이 우아하고 실루엣이 예쁘게 나오거든요. 그리고 마카도르 섬에 사는 도요트새의 솜털로 짠 니트도 가볍고 부드러워 좋아해요.” 도요트새의 솜털인지 아주 부드러운 깃털이 일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일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지러움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엘이 고개를 돌리며 뭐하냐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손에는 반짝이는 이온석 롱코트가 들려있었다. 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라엘의 가느다란 상아빛 팔에 롱코트의 소매를 갖다대었다. 라엘이 코트를 입는 몇초간 일의 정신은 육체를 빠져나와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3. 라엘의 이상형은? 일은 답변을 눌렀다. “테스트가 끝났습니다. 지불란을 누르세요.” 네모 칸이 불쑥 튀어나왔다. 일은 화가 나 네모 칸을 주먹으로 쳤다. 네모 칸은 형태가 이지러지더니 두개, 세 개로 새끼를 치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상형이 얼마나 중요한데 지금 지불을 하라니, 말도 안돼. 일은 초조함을 못 참고 두더지를 잡듯 화면을 양손으로 마구 두드렸다.
“고객님. 뭐하시는 겁니까?”
뒤에서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종업원이었다. ‘지금 이 스크린 새끼가 나 약 올리는 것 안보이니?’ 일은 그보다 10센티미터 이상 큰 종업원의 팔을 거칠게 비틀었다.
“아악!”
키에 비해 허약한 종업원이 비명을 질렀다.
“그 팔 놓지 못해. 그리고 마스크도 벗어!”
어느새 다른 종업원이 나타나 전기봉 같은 걸 들고 위협했다. ‘내가 겁낼 줄 알고.’ 일은 종업원의 어깨를 잡고 공중으로 붕 떠올라 건너편에 서 있는 종업원의 전기봉을 발로 걷어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종업원들이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일은 날다람쥐처럼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차도를 묘기 부리듯 뛰어넘어 공원 표지판 붙은 쪽으로 내달렸다. 가끔씩 뒤돌아봤지만 종업원들이 쫓아오는 것 같진 않았다. 공원으로 들어간 다음부터는 걷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스크린을 마구 두드리는 마스크 쓴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났다. 그는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한가로이 산책을 했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역시 자유란 좋은 거였다. 자유를 공기처럼 누리는 사람들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언제나 자신은 그렇게 될까. 일단 연구소를 뛰쳐나왔으니까 자유에 한발자국은 내디딘 셈이었다.
일은 공원 매점 입구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매점 벽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해가 질 것이다. 밤이 오면 어디서 자야 하나, 일은 공원 뒤에 있는 산을 쳐다보았다. 짙은 초록색을 띤 산자락이 충분히 일을 숨기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박연구원은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학습실로 돌아갔다. 일이 보이지 않았다. 박연구원은 일이 장난치려고 숨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일을 찾기 시작했다. 캐비닛까지 뒤져도 없자 큰 소리로 일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 화장실과 가끔씩 들리는 근처 연구실에도 갔지만 일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원숭이 우리에 갔다 온 뒤로 일이 우울해했던 기억이 나 원숭이 우리에 가봤다. 퐁골원숭이가 먹을 걸 달라고 꽥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학습실에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 위에 놔둔 자신의 보안카드가 없어졌다. 박연구원은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당직실에 있는 술친구이자 경비원인 최씨를 찾아갔다.
“혹시, 일 못 봤어요?”
“아까 블랙이 해부실에 간 것 같다고 했더니 뛰쳐 나가든디유.”
박연구원과 최씨는 해부실을 찾아갔다. 해부실의 연구원은 일한테 1시간 후에 오라고 했으나 오지 않았다고 방호 레이저 틈으로 무신경하게 말했다. 둘은 흩어져 일이 갈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얼마 후 일을 찾지는 못했지만 기계실에 근무하는 직원한테서 일을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의 행방을 캐묻는 그를 직원이 수상하게 여기는 듯 싶자 박연구원은 그만 말하고 최씨한테 갔다. “기계실에서 봤다구유? 가만, CCTV가 있잖유.”
당직실에서 최씨가 기계실 CCTV를 검색하는 동안 박연구원은 생각했다. 일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쥐 블랙이 해부되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학습실에 놔둔 내 보안카드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 왜 기계실에 갔을까? 박사님 심부름으로 진공장치를 가지러 가다니 말도 안된다. 박사는 일을 보지도 못했다. 그러면 일은 어떻게 하려는 걸까? 얼마 안 있어 최씨가 기계실 CCTV에서 일을 찾았다. 중앙에 있는 CCTV에 일이 캐비닛의 마스크를 꺼내는 장면이 찍힌 것이다. “왜 저러지유?” 최씨가 물었다. ‘왜 저러기는, 몰라서 물어? 멍청하긴. 연구소장 친척만 아니었으면 넌 벌써 잘렸다.’ 박연구원은 쏘아붙이려다가 자신이 최씨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꾹 참았다. 왜 저러긴. 일은 이 건물을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카드를 훔치고 마스크를 챙긴 것이다. 물론 기계실로 간 이유도 탈출하기 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박연구원과 최씨는 일의 행동경로를 쫓기 위해 본격적으로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일을 마지막으로 본 학습실부터 시작했다. 학습실의 CCTV에서 15:11분에 일이 책상을 두드리다 보안카드를 주머니에 넣는 장면이 보였다. 일이 학습실을 나가 복도와 계단을 쥐새끼처럼 살피며 달음질치는 모습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기계실 CCTV에서 15:38분에 창 밖으로 뛰어내리는 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박연구원은 곧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낯빛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그래도 설마 일이 바깥으로 나가기야 했겠냐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던 게 사실이었다.
“이 일을 어떡하지. 일이 옆 건물로 들어가다니……”
“진정해유. 일단 김박사님하고 상의를 해봐유. 박연구원이 나가라고 해서 나간 건 아니잖아유.”
박연구원은 일의 탈출 자료를 갖고 김박사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일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화면이 끝나기도 전에 김박사는 책상을 두드리며 총맞은 용가리처럼 날뛰었다. 박연구원은 동료들한테 들은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박사가 던진 재떨이에 맞아 코피가 났다는 소문도 박사의 이단옆차기에 가슴을 맞고 심장병에 걸렸다는 소문도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닌 듯 싶었다. 박사는 콧김을 내뿜으며 사무실의 빈 공간을 왔다 갔다 하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번쩍 집어 들었다. 박연구원은 핸드폰을 자신에게 던지려는지 알고 몸을 재빨리 움츠렸다. 그러나 박사는 핸드폰을 귀로 가져가 누군가와 통화를 연결했다. 박사는 일의 탈출을 얘기하며 수색을 부탁했다. 갑자기 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박연구원은 김박사가 양손잡이라는 걸 떠올리며 이젠 꼼짝없이 걸렸구나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아무 일도 없고 박사의 목소리가 계속되자 박연구원은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박사는 더럽게도 왼손으로 머리칼이 빠져서 보기 흉한 정수리를 박박 긁고 있었다. 박연구원은 안도의 한숨을 조그맣게 쉬었다. 보기 괴롭기는 하지만 신상에 아무 탈은 없는 것이다. 박사가 계속 통화를 하면서 정수리를 긁던 손을 내려 책상을 더듬었다. 박사의 손가락이 전자 명패를 건드렸다. 태양전지로 움직이는 친환경명패는 김박사를 칭송하는 문구가 번쩍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생명조합연구소 김**, 세계최초로 화성과 지구 식물 조합, ……’. 갖가지 자기 피알을 무한대로 집어넣을 수 있을뿐더러 자리 임자가 바뀌면 사용자 정보만 바꾸면 되는 유용한 물건. 그러나 전자명패의 기능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로 30센티미터, 높이 7센티미터의 합금인 삼각 뿔대는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무기로 사용가능한 것이다. 박연구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일은 산에 올라갔다 어두워질 무렵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커다란 바위 틈바구니였는데 낙엽을 모아 깔고 나뭇가지를 꺽어 바람을 막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짐승 울음소리에 잠을 못이루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온통 하얀 바닥을 걸어가고 있는데 라엘이 커다란 도넛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는 라엘과 숨바꼭질을 했다. 라엘이 도넛 가운데 구멍으로 빠져나가면 그도 그녀를 쫓아 도넛 구멍으로 들어갔다. 라엘이 도넛 가장자리를 뱅뱅 돌면 그도 그녀를 쫓아 도넛 가장자리를 돌았다. 그녀가 반대쪽에서 도넛을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도 그녀를 쫓아 도넛 테두리를 떼어먹었다. 그가 콧등에 설탕을 묻히고 먹는 것을 보고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괜히 기분이 좋아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라엘이 도넛 구멍을 가리키며 태워달라고 했다. 그는 라엘을 도넛 구멍에 앉히고 앞으로 힘차게 밀었다. 도넛이 라엘을 태우고 그네처럼 움직였다. 라엘의 머리카락이, 치맛자락이 꽃송이처럼 휘날렸다. 어디선가 하얀 꽃잎이 눈송이처럼 떨어졌다. 라엘이 옆에 서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라엘의 손을 잡고 그녀 옆에 앉았다. 도넛이 균형을 잃고 좌우로 흔들렸다. 라엘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는 미끄러지는 라엘을 꽉 붙잡았다. 우연히 둘의 입술이 마주쳤다. 둘은 키스를 했다. 하얀 꽃잎이 소복하게 도넛과 라엘과 일 위로 떨어졌다.
일은 아침햇살에 잠이 깼다. 찬 기운에 온몸의 관절이 녹 쓴 것처럼 뻣뻣해진 느낌이었다. 일은 나뭇가지를 치우고 돌 틈바구니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쑤신 부위를 주무르고 가볍게 체조를 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자느라고 잊었던 배고픔이 다시 상기되었다.
음식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시내로 나가면 뭔가 먹을 걸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식당에서 버린 음식물을 줍거나 시장에서 파는 과일 따위를 훔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민첩성으론 그 정도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일은 마스크를 쓸까 하다가 좀 더 밑에 내려가 쓰기로 했다.
일은 산을 내려가다가 계곡에서 멈췄다. 바닥을 훤히 비추며 흘러가는 물이 정말 깨끗하게 보였다. 일은 계곡물로 목을 축이고 세수도 했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라엘을 만나러 가는 거야. 편의점에서 본 라엘이 사는 집의 풍경을 떠올렸다. 시내로 가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곡 건너 나무에 빨간 열매가 달려있는 게 보였다. 배에서 다시 꼬르륵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일은 물을 건너 나무 위로 살금살금 올라갔다. 손을 뻗어 사과같이 생긴 것을 따서 껍질을 조금 깨물어보았다. 쓴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열매를 떨어뜨렸다. ‘기껏 올라왔더니 쓴 사과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바나나를 들고 나무로 올라간 퐁골 원숭이 모습이 떠올랐다. 일은 나무 밑을 보았다. 10미터가 훨씬 넘는 높은 위치였다. 아래 있는 잡목과 수풀더미가 조그맣게 보였다. 인간이라면 엄두도 못 낼 높이였다. ‘그래서 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서둘러 나무를 내려갔다.
산비탈을 올라가는데 뭔가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일은 코를 실룩거리며 냄새를 쫓아갔다. 50미터쯤 갔을까. 커다란 나무가 쭉쭉 뻗어 올라 햇빛을 가리고 있는 숲속. 사방으로 가지를 뻗친 아름드리 고목나무 밑에 피크닉 가방이 열려있고 그 안에 도넛이 가득 들어있는 게 보였다. ‘누가 저기다 도넛을 놔두고 갔을까?’ 일의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한 두 개쯤 가져가도 모를 것 같았다. 일은 주변을 재빨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일은 가까이 가 도넛을 집어 들었다. 딛고 있던 땅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일은 펄쩍 뛰어 수 미터 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은 후 탄력을 이용해 나무 뒤에 있는 땅으로 몸을 옮겼다. 함정이었다.
바위 뒤에서 수풀 속에서 제복 입은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하늘에선 헬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는 네발로 뛰다시피 달렸다. 아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네 발로 뛰고 있었다. 다행인건 두발로 뛸 때보다 더 빨리 뛸 수 있다는 거였다. 사람들이 숨통을 조이듯 바짝 쫓아왔다. 그는 안 되겠다 싶어 가까이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나무를 향해 총을 쏘았다. 뾰족한 바늘이 나무줄기에 박히자 노란 액체가 아래로 흘러내리며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틀림없이 마취제일 것이다. 박사의 손아귀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더 높이 올라가 아래를 내려보자 사람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게 보였다. 사다리 같은 걸 타고 위로 쑥쑥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다. 일은 덩굴을 잡고 잡아당겼다. 안 끊어지는 게 제법 튼튼해 보였다. 그는 몸을 굴려 다른 나무로 옮겨갔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그가 옮긴 나무로 쫓아왔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보니 뱃속이 간질간질한 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재주껏 잡아보렴. 이 느림보 거북이들아!’ 그는 다시 덩굴을 잡고 조금 떨어진 나무를 향해 몸을 굴렸다. 바람이 시원하게 일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덩굴이니 뭐니 다 놓아버리고 새처럼 날고 싶단 생각 또한 들었다. 그는 덩굴을 놓고 눈에 들어온 나무를 향해 몸을 던졌다. 둥글넓적한 잎사귀를 헤치고 나무기둥을 잡았다. 그런데 이 나무는 무슨 종류인지 몰라도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미끄러웠다. 손톱을 오그려 나무에 박듯이 매달렸지만 몇 미터를 그대로 미끄러졌다. 중간에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엉덩이를 부딪치지 않았으면 그야말로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꼴이 될 뻔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했다. 섣불리 다른 나뭇가지를 만졌다가 땅바닥에 거꾸로 박힐까봐 겁이 났다. 나뭇잎 사이로 사람들이 기세등등하게 쫓아오는 게 보였다. 할 수 없이 조금 낮은 나무로 몸을 던졌다. 간신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기둥으로 올라가는데 팔뚝이 따끔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팔뚝에 바늘이 꽂혀있었다. 일은 재빨리 바늘을 뽑아 밑으로 던졌다. 후르륵 소리가 나면서 검은색 그물이 박쥐날개처럼 펼쳐지는 게 보였다. 그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뒤에서 군화 발소리가 땅을 울리며 쫓아왔다. 좀 전에 목을 축였던 계곡이 눈앞에 보였다. 햇살이 반짝이며 흘러가는 계곡물에 눈이 부셨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계곡 바위 위에 라엘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활짝 웃는 미소가 꿈에서 보았던 그 미소 그대로였다. 일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물이 자기 몸 위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쫓아와 막무가내로 그의 몸뚱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는 쓰러지면서도 계곡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라엘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속임수였다.


박사는 화면으로 일이 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다. 일은 멍하니 앉아있다 가끔씩 희죽 희죽 웃으면서 앞에 놓인 블록을 끼웠다 뺐다 할뿐 특별히 의미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박사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붙잡아 온지 일주일째 일은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 부쩍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고 사람보다 원숭이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검사해 보니 육체적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정신병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라엘과 만났을 때의 충격이 일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난번 회의에서 일의 변화, 물론 부정적 변화에 대한 대처방안이 논의됐었다. 연구원들은 뇌수술로 변이가 예상되는 부분에 대한 외과적 처치, 약물투입으로 일부분의 기억 삭제 등을 제안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일을 예전으로 돌릴 수 있을지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어떤 대책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었다.
앞으로 무궁무진한 인간원숭이의 활용방안이 여기서 멈추게 되는 것일까?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쏟아 부은 막대한 예산과 노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박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인간원숭이 생산에 투자한 업체, 국가기관에는 뭐라고 말을 할 것인가. 이것은 박사의 명예, 아니 생명과도 결부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원숭이 프로젝트는 되살아날 것이다.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성장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외계행성의 개척,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외계인과의 조우, 임상실험, 장기 공급, 사람들이 기피하는 단순 반복적이거나 위험한 일에 신체적 능력은 최고이면서 지능조작이 가능한 인간원숭이는 필요악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원숭이를 공급하면서 얻게 되는 막대한 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조합연구소를 지구 최고의 연구소로 만들어줄 것이며 제2, 제3의 창조적인 생명조합 연구 붐을 일으켜 지구를 듣도 보도 못한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영원히 기록될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갖게 될 것이며 어렸을 때부터 도넛박물관을 구경하며 경탄해마지 않던 희귀 기록을 가진 도넛을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욕심을 부려볼 수도 있다. 김박사는 자신의 사저에서 희귀 도넛의 진열장을 보는 걸 상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일이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면 이 모든 꿈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 사랑스럽고도 귀한 도넛 같은 꿈이…….
박사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자신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자 텔레비전이 자동으로 켜졌다. 라엘이 활짝 웃으며 신곡 ‘도넛 폰드’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구인들을 연못에 사는 작은 생물들로 비유해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도넛 모양의 옷을 입은 무희들이 뒤에 서서 요새 유행하는 개구리춤을 추었다. 개구리춤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팔을 앞으로 휘저으며 팔짝팔짝 제자리 뜀뛰기를 하는 춤이었다. 남녀노소 건강에 좋다고 해서 전 지구적으로 유행하는 춤 중의 하나였다. 라엘과 무희들이 한번은 오른쪽으로, 한번은 왼쪽으로 몸을 틀어 개구리춤을 추었다. 그는 라엘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려다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앞에 있는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텔레비전이 지레 겁을 먹은 듯 퍽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는 일어나 냉장고에서 콜라병을, 캐비닛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먹음직한 각가지 디자인의 도넛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는 두 손을 파리처럼 비비고 입을 아구아구 벌리며 턱 운동을 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어깨를 약간 구부리고 팔꿈치는 적당한 위치에 고정하고 연속으로 도넛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예전에는 후배 연구원들을 괴롭혀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얼마 전 안 좋은 일이 생긴 후로는 취향을 바꿔버렸다. 이렇게 도넛을 배터지게 먹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문틈으로 박사의 모습을 훔쳐보던 최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에 있는 박연구원에게 물었다.
“아니, 뚱땡이 되려나? 왜 저런 데유?”
“그래도 도넛을 먹는 게 우리를 잡는 것보다 낫잖아요.”
왼쪽 눈에 안대를 한 박연구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200*99매)
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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