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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

나는 신중하게 붓을 움직였다. 하현을 향해 막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이 하늘 높이 떠 폐허의 성벽을 비추고 있다. 처녀는 붓을 쥔 왼손을 높이 치켜들고, 고개를 한껏 젖힌 채 성벽에 그려넣은 장미를 붉게 칠한다. 굽이치는 금빛 머리카락은 등 언저리에 늘어졌고 긴 속눈썹은 담갈색 눈동자에 살풋 그늘을 드리웠다. 채색에 몰두하느라 약간 벌어진 고운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살짝 엿보인다. 담벼락에 붙은 계단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어 키톤 자락 밑으로 날씬한 종아리가 드러나 있다. 분홍빛 복사뼈 위로 늘어진 발찌의 금사슬이 반짝거린다….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는 XX세기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다. 페페는 위대한 시인 메로스의 이야기시에 나오는 화가이다. 젊은 나이에 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페페는 새로 지은 신전의 벽화 그리는 일을 놓고 다른 고명한 화가와 솜씨를 겨루게 된다. 결전의 날에 화가는 장미 덩굴로 뒤덮인 폐허의 성벽을 그려 왔는데, 그것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숱한 나비들이 날아와 앞다투어 꽃송이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본 페페는 깔깔 웃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과 화가를 데리고 폐허의 성벽으로 갔다. 그녀는 가서 아무나 저 꽃 한 송이를 꺾어보라 말했는데, 구경꾼 중 한 명이 가까이 가서 보니 장미는 모두 성벽에 그려진 그림이었다고 한다. 화가는 페페가 그린 장미 그림을 진짜 장미로 알고 화폭에 담았던 것이었다.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와 더불어 XX세기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메로스의 비통>은 양피지와 펜을 들고 무너진 성벽 앞에 망연자실 서 있는 젊은 시인을 그린 그림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페페는 실존했던 화가로서 메로스의 연인이자 후원자였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달빛 아래서 시를 짓는 연인의 초상을 그리고자 하였고 둘은 달이 뜰 무렵에 폐허의 성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달이 중천에 뜨도록 메로스는 오지 않았고, 무료해진 페페는 반쯤 허물어진 성벽에 장난삼아 장미 덩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메로스는 성벽이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채색에 열중해 있는 연인을 보았다. 순간 시인의 머릿속에 불꽃 같은 시상이 휘몰아쳤다. 떠오를 듯 떠오를 듯한 시의 첫마디를 붙잡느라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반 너머 기운 달이 무아지경에 빠진 두 예술가를 위태롭게 비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메로스가 펜을 든 순간(혹자는 첫 연을 마친 순간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시를 완성한 순간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이 확실한 진실이다), 와르르 무너진 장미가 시인의 눈앞에서 페페를 덮쳤다. XX세기의 화가들은 페페를 뮤즈처럼 생각했다. 그때까지 메로스는 무명 시인에 불과했지만, 연인의 죽음을 방관하면서까지 써낸 시를 통해 데뷔한 뒤로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몇 권의 일기장이 있다. XX세기에 살았다던 까마득한 선조가 썼다는 물건인데, 백부님이 소일거리 삼아 현대어로 옮기던 것을 이제는 내가 이어받아 해석하고 있다. <페페>연작을 그리기 전에 나는 이 일기장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 팔리는 극작가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던 나의 선조는 어느 해 여름에 메로스의 고향 근처로 여행을 갔다가 폐허가 된 옛 성을 구경하게 되었다. 완전히 허물어진 성벽 밑에는 핏자국처럼 검붉은 얼룩이 점점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영감이 떠오른 선조는 일기장에 나도 잘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휘갈겨 썼다.

옛말에 화가와 시인에게는 거짓말할 자격이 있다고 했던가. XX세기의 화가들에게 페페의 붐이 인 것은 내 선조가 그 이야기를 쓴 지 몇 년 후의 일이었으며, XX세기 이전 메로스에 대한 문헌에는 어디에도 페페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지 않다. 단 한 문장도. 내 선조가 어떻게 그 세 치 혀를 놀려 무명 극작가에 불과했던 자신의 창작물을 저 위대한 메로스의 시로 둔갑시켜 버렸는지는 모르겠으되, 나는 그 거짓말쟁이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품고 페페의 연작을 그렸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완성품을 다른 그림들과 나란히 놓아두었다. 다른 두 점의 그림에는 페로몬 주머니가 달린 암컷 나비를 잔뜩 잡아 라이벌의 그림에 문지르고, 성벽을 뒤덮은 장미 덩굴을 깡그리 뽑아 불태우는 사랑스러운 페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그 화가가 보고 그린 장미는 진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영악한 페페가 성벽에서 덩굴을 몽땅 걷어버리고 자신의 그림을 그려넣어 나중에 온 사람들을 속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라이벌의 그림에 나비가 꼬인 것도, 극적인 반전을 위한 그녀의 연출일는지 모른다. 나비 같은 미물을 속이는 것보다야 사람을 속이는 것이 훨씬 대단한 일이니까.

물론 이것은 모두 내 상상일 뿐이다. 허나 호사가들이란 원래 음모론을 좋아하게 마련이니 언젠가는 내 사소한 거짓말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 진실로 탈바꿈할 날이 오리라.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그림 대결에서 소재를 따왔습니다
너구리맛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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