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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양이나라의 마녀

2003.11.18 01:2111.18

“그럼 잘 들어. 나는 이제부터 영원히 사랑을 저주하겠다.”

나라 안에 하나 뿐인 마녀, 엘마리Elmarie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국자를 휘저었다.  노래 같은 마녀의 목소리에 맞춰 그녀의 손이 움직이자 검은 냄비 안에 가득한 청회색 액체가 빙글빙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흐응, ‘잘 들어’보다는 ‘잘 봐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나라 안에 하나 뿐인 고양이이자 마녀의 패밀리어인 킷Kit이 검은 목을 쭈욱 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킷은 비단같은 검은 털을 지닌 멋진 수코양이였다.

“분위기 잡는데 끼어들지 마. 듣던 보던 무슨 상관이야? 저주만 잘하면 그만이지.”

“분위기 잡으려면 치맛자락에 난 구멍이나 꿰매고 얘기해요.”

“너어!”

마녀는 참지 못하고 냄비 속을 젓던 국자를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국자에서 튄 뜨거운 액체가 킷의 꼬리에 튀었다.

“캬아옹!”

킷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펄쩍 뛰어올라 벽을 향해 질주했다. 마녀는 국자를 팽개치고 빗자루를 집어들어 킷에게 휘둘렀다. 킷은 잽싸게 빗자루를 피해 책장 위로 올라갔다. 그 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저주는?”

마녀는 흠칫 동작을 멈추고 창문가에 앉아 있는 청년을 쳐다보았다. 길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과 단정한 얼굴, 푸른 예복으로 싸인 팔다리는 아무렇게나 의자 아래로 늘어져 있었지만 우아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나라의 하나 뿐인 왕자이자 저주의 의뢰인인 로센Losen이었다.

“이제 할 거야.”

마녀는 자신이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것보다 그 추태를 보고도 자기 페이스를 지키고 있는 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녀는 그를 저주하는 대신 다시 국자를 잡았다.

‘안 그래도 불쌍한 인간이지.’

왕자는 자기 페이스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녀는 한숨을 쉬고 국자를 냄비에 넣었다. 그녀는 안에 들어간 재료를 체크하고 책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재료는 딱 하나 뿐이었다.

“이제 하나, 저주의 결과를 결정할 하나가 남았는데 뭘 넣으면 좋을까.”

킷은 흘끗 마녀의 눈치를 보더니 우아한 동작으로 책장 위에서 바닥으로 착지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뭐가 좋을까요.”

마녀는 킷을 한번 돌아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봐, 왕자.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어?”

왕자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거 골치 아플 정도로 생각 없는 의뢰인일세.”

마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골치 아플 정도로 생각 없는 마녀님. 저주에 걸린 자들을 뭘로 바꿀지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냄비에 약재들을 퍼 넣으면 어떻게 해요?”

킷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떤 모양의 저주를 만들지, 어떤 결과의 저주가 될지가 저주의 가장 기초 아니었어요? 그것 마녀가 아니라 고양이여도 알 수 있는 사실….”

마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이마를 한번 문지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거기 가만히 있으렴.”

“마, 마녀님?”

킷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몸을 일으키자 마녀는 잽싸게 달려가 킷을 움켜쥐었다.

“켁켁, 왜 이러세요! 하나 밖에 없는 패밀리어를! 고양이 살려!”

킷은 버둥거리며 사지를 휘저었지만 차마 발톱은 내놓지 못했다. 행여라도 마녀에게 상처라도 나면 패밀리어고 뭐고 사정없이 빗자루 매질이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녀는 그 사이 한 손으로 킷의 목덜미를 잡았다. 킷은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마녀는 미소를 지으며 데룽데룽 매달린 킷의 등짝에 손을 뻗어 사정없이 털을 한 움큼 뽑아냈다.

“캬악!”

킷은 호된 아픔에 발버둥을 쳤다.

“시끄럿! 이제까지 고양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어서 참고 있었지만 이렇게 된 거 사람을 고양이로 바꿔서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패밀리어로 삼아야겠다.”

마녀는 킷을 던지듯 내려놓고 뽑은 털을 끓는 냄비에 던져 넣었다. 퍼엉, 청회색의 액체는 고양이털이 닿자 연기를 뿜으며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마녀는 국자로 냄비를 휘저어 액체가 완전히 검게 변한 것을 확인하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들이키고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깨닫는 자는 고양이로 변할 거야.”

마녀는 뜨거운 냄비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하며 액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자신의 숨결을 타고 목소리가 액체에 스며들자 마녀는 다시 국자를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타고 마지막 변화가 약 전체로 퍼져나갔다.

“완성.”

마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왕자는 무심한 눈은 아무런 감탄도 나타내지 않았고 평소 같으면 요란스럽게 기뻐했을 킷은 등에 생긴 땜통 때문인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완성 했다니까!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나라 안은 고양이로 넘쳐나서 마음대로 패밀리어를 고를 수 있을 거라고!”

마녀가 소리를 지르자 왕자는 감흥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킷이 고개를 들어 황갈색 눈으로 마녀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수염이 움찔움찔 거리며 콧잔등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그러니까 이제 나 같은 건 필요 없단 거죠? 나도 더 이상 맞으면서 못살아요! 잘 있어요.”

킷은 폴짝 뛰어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틀로 올라갔다. 마녀는 감히 가출선언을 한 킷에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빈 약병중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래! 필요 없으니까 꺼져!”

킷은 휙 고개를 돌리고 약병을 피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병이 창틀에 맞아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희미한 ‘야옹’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마녀는 무시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왕자는 어깨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살살 털어냈다.

“바보, 라고 한 거 같은데.”

왕자가 말했다.

“됐어. 남은 단계나 진행하지.”

마녀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냄비를 불에서 내렸다.



마당으로 나간 마녀는 빗자루 끝에 냄비 손잡이를 꽁꽁 묶고 주머니에 끌을 넣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빗자루에 올라타 왕자를 쳐다보았다.

“뒤에 타.”

“그거, 날 수는 있는 건가.”

왕자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그것이 의심이라는 것을 알아채자 마녀는 얼굴을 구겼다. 분명 빗자루는 냄비와 냄비에 가득한 약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휘청 구부러져 있었다. 왕자가 마녀의 뒤에 타면 빗자루의 모양이 얼마나 더 불쌍하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다된 밥에 재 뿌리기 싫으면 타기나 해! 저주는 입회인이 없으면 효과가 없단 말이야.”

왕자는 꽤 오랫동안 빗자루와 마녀, 냄비를 번갈아 보더니 어정쩡한 모양새로 마녀의 뒤에 앉았다. 마녀는 빗자루가 휘어지는 감각에 한숨을 쉬고 빗자루를 띄웠다.

“이거 부러지진 않겠지?”

“마녀 생활 43년 동안 무사고 운행! 과적으로 인한 사고도 없음! 됐어?”

“…알았다.”

마녀는 왕자가 더 이상 불만을 늘어놓기 전에 높이 날아올랐다. 다행히 빗자루는 두 사람과 냄비의 무게를 잘 견뎌주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하고 똑같은 소리잖아요. 그거.’

마녀는 킷이 늘어놓았던 불평이 귀에 쟁쟁한 것을 애써 무시했다.

마녀가 향한 곳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였다. 그곳은 언제나 눈이 덮여있고 찬바람이 부는 곳으로 아무도 살지 않았다. 마녀는 옷깃을 여미며 눈보라 속에 빗자루를 내렸다. 그리고 냄비를 눈 속에 파묻어 식혔다. 냄비가 식는 동안 마녀와 왕자는 몸을 웅크리고 눈썹위로 달라붙는 차가운 눈을 비벼 없앴다.

“마녀, 이렇게 추운 곳에 올 거였으면 덮을 거라도 하나 가져오자고 했어야지.”

왕자가 얼어가는 뺨을 비비며 불만을 토하자 마녀는 덜덜 떨리는 무릎을 꼭 껴안고 볼멘  소리를 했다.

“평소에 그런 잔소리는 킷이 한다구.”

“…고양이만 못하군.”

왕자는 냄비 위에 떨어져 녹아가는 눈송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녀는 발끈했다.

“너! 의뢰인만 아니었어도!”

“아니었어도 뭐?”

왕자가 돌아보자 마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내가 참자. 안 그래도 불쌍한 녀석.’



사실대로 말하면 마녀는 왕자를 저주할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 이상의 저주가 걸릴 수 없는 것이 법칙이었고 왕자에게는 이미 강력한 저주가 걸려 있었다. 그것도 마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저주 말이다. 왕자에게 걸린 저주는 아직 마녀가 나라 안에서 유일한 마녀가 아니었던 20년 전, 마녀의 스승이었던 로즈마리Rosemarie가 건 것이었다. 로즈마리는 왕자의 아버지, 임금님인 하이번Highburn을 짝사랑했다. 마녀, 엘마리는 옆에 앉은 왕자의 잘생긴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스승님이 맛이 간 것도 무리는 아니지.’

당시 나라 안에 있는 두 마녀 중 가장 훌륭한 마녀였던 로즈마리는 궁정마녀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임금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사모하게 되었으나 임금님에게는 이미 아름다운 왕비님과 갓 태어난 왕자가 있었다. 로즈마리는 왕비를 질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왕비와 함께 있는 임금님을 보기 괴로운 정도였지만 질투는 날이 갈수록 커져서 임금님에 대한 사랑을 이겨버렸다. 로즈마리는 결국 다정한 눈길로 왕비를 쳐다보는 임금님을 계속 보느니 임금님에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걸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마시면 심장에 딱딱한 돌껍질이 생겨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저주약을 임금님이 마실 수프에 섞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임금님은 자신에게 벌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 수프는 임금님의 식사가 아니라 아기 왕자의 이유식이었다.

마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임금님은 불같이 노해서 궁정마녀라는 자리를 아예 없애버렸고 쫓겨난 스승님은 홧병으로 죽었다. 마녀는 생계가 궁해져서 치통약이나 무좀약을 만들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왕자가 자신의 두 가지 의뢰를 들어주면 임금이 되었을 때 궁정마녀 자리를 다시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다 식었다.”

왕자가 냄비위에 떨어지는 눈이 녹지 않고 쌓이는 것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마녀는 눈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미안. …식힌 다음에는 얼려야 한다는 걸 깜빡 했어.”

“…….”

“더 기다려야 해.”

“그냥 산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

“십중팔구 냄비 위치를 잃어버릴 거야.”

마녀는 어깨와 머리 위로 눈이 쌓여 더 이상 사람같이 보이지 않는 왕자를 외면했다. 돌껍질에 싸인 심장을 가진 왕자는 화를 내는 대신 가볍게 한마디 했다.

“…춥겠군.”

마녀는 20년 전 궁정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으로 스승님에게 감사했다.



한참 뒤, 마녀는 곱은 손으로 냄비 위에 쌓인 눈을 치웠다. 냄비 안의 검은 약은 꽁꽁 잘 얼어있었다. 마녀는 왕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냄비를 다시 빗자루에 묶었다. 파랗게 질린 두 사람은 빗자루를 타고 산을 빠져나왔다. 마녀는 빗자루를 몰아 나라 전체가 잘 보이는 하늘 한가운데로 가서 왕자에게 끌을 건네주었다.

“그걸로 약을 긁어서 살살 뿌려. 바람 타고 잘 퍼지도록 말이야. 난 빗자루가 계속 떠있도록 해야 해.”

왕자는 빙글 뒤로 돌더니 끌로 냄비안의 얼음을 긁기 시작했다.

‘참으로 편리하군.’

마녀는 생각했다. 마녀 자신이라도 높이 떠 있는 빗자루에서 뒤로 돌아 끌로 얼음을 긁는 위태위태한 행동을 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왕자는 별다른 용기가 없어도 이성적인 이유만 몇 개 달아주면 곧잘 해내는 것이다.

‘왕자가 사랑을 느끼기만 해도 패밀리어로 써먹는 건데.’

마녀는 피식 웃고는 왕자가 얼음약을 가루로 만들어 뿌리는 것을 구경했다. 검은 눈송이는 바람을 타고 나라 구석구석으로 날아갔다. 눈송이는 다정한 부부,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머리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마녀는 스승도 해보지 못했을 대규모 저주의 결과를 생각하며 황홀한 기분에 젖었다.

“팔이 아파.”

왕자가 분위기를 조금 깨기는 했지만.

“조금만 참아. 이제 곧 저주의 결과를 볼 수 있을테니.”

왕자는 다시 끌로 냄비 속을 긁는 일에 전념했다.

“빌어먹을 고양이. 두고 보라지.”

마녀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왕자가 하루 낮 하루 밤이 걸려 얼음 약을 전부 가루로 만들어 뿌리자 마녀는 고픈 배와 졸린 눈을 비비며 집 앞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때 왕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곤란한대.”

“뭐가?”

왕자는 얼음 가루가 묻어 검게 변한 자신의 푸른 예복과 마녀의 옷을 가리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녀와 왕자는 나라 안의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주의 눈을 맞은 것이다.

“그게 뭐?”

마녀가 다시 묻자 왕자가 말했다.

“우리도 저주의 영향을 받는단 말이다.”

마녀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녀는 가능한한 뻔뻔한 얼굴을 하고는 왕자에게 말했다.

“상관없어. 나야 고독한 마녀의 길을 걸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 너는 어차피 사랑 같은 감정은 못 느끼잖아. 네게 걸린 돌 심장의 저주가 깨지지 않는 한 내 저주는 먹히지 않는다구.”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의뢰로 내게 ‘감정을 되찾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는 목소리에 감정을 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효과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강조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마녀는 입을 따악 벌리고 왕자의 표정 없는 얼굴을 쳐다보다가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런 것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본 거야?”

“어쨌든 그게 내 두 번째 의뢰다. 하긴 고양이 저주 같은 것은 상관없지. 내가 감정을 되찾아도 꼭 사랑을 하게 될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연구라도 해보도록. 내 저주도 깨지 못하는 궁정마녀는 필요 없으니까.”

왕자는 차가운 미소를 짓고 마녀의 집을 떠났다. 마녀는 빗자루와 냄비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빌어먹으으으을!”

마녀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저주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정오가 되기 전에 나라 안의 사람들 중 절반이 고양이로 변했고 다시 자정이 되자 남아있던 사람들 중 절반이 고양이가 되었다. 그렇게 일곱 밤과 여덟 낮이 지나자 나라 안에서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셋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마녀와 왕자, 그리고 처음부터 고양이였던 킷이었다. 물론 왕자는 왕비님과 사이좋게 고양이로 변한 임금님 대신 임금이 되어야 했겠지만 대관식을 치룰 성직자와 충성을 맹세할 기사와 증인이 될 귀족 아가씨들 모두가 고양이가 되어버린 탓에 아직 왕자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방법을 찾지 못한 건가?”

마녀는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아 질문을 던진 왕자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녀는 사람들이 고양이로 변하는 동안 새로운 패밀리어를 찾아다니기는커녕, 왕자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느라 한숨도 못잔 터였다. 왕자는 시중들어줄 사람들이 고양이가 되자 궁중을 나와 아예 마녀의 집에 눌러 앉아 먹고 자며 마녀를 닥달했다.

“아직은.”

마녀는 눈을 비볐다. 몇 가지 방법을 찾기는 했지만 쓸만한 것은 없었다. 심장을 둘러싼 돌 껍질을 녹이는 약은 약이 독해서 먹는 순간 왕자가 죽을 것이 뻔했고 돌도 깨부술만한 충격적인 미모를 지닌 여성을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고양이가 된 상황에서 찾아낼 수도 없었다. 그나마 효과 있어 보이는 것은 왕자 스스로 저주를 깨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여러 가지 감정을 느껴보려고 애쓰는 것인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녀는 스승이 남긴 두꺼운 책의 책장을 넘기다 말고 문득 왕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도대체 이유가 뭐야? 네가 저주를 풀고 ‘싶을’ 이유가 없을 텐데.”

왕자는 마녀의 눈을 그대로 바라볼 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글쎄.”

“생각해보면 이상해. 네가 궁정마녀를 맞고 ‘싶을’ 이유도 없고 사람들을 저주하고 ‘싶을’ 이유도 없을 텐데 말이야.”

“이유가 필요한가.”

“대답해!”

왕자가 계속 대답을 피하자 마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화를 냈다. 왕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감정이 없는 것이 임금이 될 자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별로 임금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될 수밖에 없다면 훌륭한 임금이 되어야한다고 배웠으니 노력은 해봐야지. 그리고 첫 번째 의뢰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내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왕자의 담담한 목소리에 마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게 다야?”

“더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그러면 나중에 네 저주가 풀리고 나면 네 나라의 백성들에게 걸린 저주는 어쩔 셈이었어?”

“그거야 나라와 백성에 해가 되는 저주라면 당연히 궁정마녀가 풀어야겠지.”

결국 왕자의 어려운 의뢰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거니와 그가 자신을 알뜰히 이용해먹을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녀는 급기야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앗! 거는 건 쉬워도 푸는 건 어려운 게 저주라고!”

왕자는 마녀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서 풀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러면 어쩔 건대!”

왕자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갔다. 왕자가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여는 것을 보고 마녀가 외쳤다.

“어디 가는 거야!”

왕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가야지.”

“네가 의뢰해서 벌여놓은 저주는?”

“몰라.”

마녀는 자신의 심정에 솔직하게 반응하기로 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가는 왕자에게 달려가 멱살을 움켜잡고 소리 질렀다.

“네 저주가 안 풀리는 건 네가 저주를 풀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야! 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뭔가 느끼는 게 안 되면 너에 대해서라도 뭔가 느끼려고 애써봐! 저주를 풀고 싶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어딜 공짜로 먹으려고 해!”

왕자는 멱살을 쥔 마녀를 멀뚱하니 쳐다보더니 손을 올려 마녀의 손을 옷에서 떼어냈다.

“별로 저주를 풀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마녀는 머리를 굴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마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책상 맡으로 돌아갔다.

“다시 앉아봐.”

왕자는 문을 닫고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네놈의 돌껍질 안에 든 심장은 아직도 말랑말랑한 게 갓난아기와 마찬가지일거야. 갓난애도 자기가 무시당하거나 상처 입는 건 싫어해. 갓난애도 자기 자신은 사랑한다구. 다른 사람이 불가능하면 널 사랑하도록 해봐.”

왕자는 흐음, 하고 손을 턱에 가져갔다. 그는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마녀에게 물었다.

“날 사랑하라고?”

“그래.”

왕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누구라도 자기 자신은 사랑한다고?”

“그래.”

“그럼 너도 너 자신을 사랑하는가?”

마녀가 말했다.

"그래, 나도 나 자신을 사랑….“

그 순간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마녀의 작은 집을 가득 채웠다. 왕자는 재빨리 문과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연기가 집 밖으로 빠져나가고 방안의 물건들이 또렷이 보일 즈음 왕자는 마녀가 있던 자리에 꼬리를 뻣뻣하게 부풀린 고양이가 대신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연, 자기애도 사랑이라는 건가. 재미있다는 것은 이런 때 쓰는 말이겠군.”

‘말도 안돼!’

마녀는 분함을 가득 담아 외치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캬릉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저주를 풀 마녀도 없으니 내 나라는 고양이 나라가 되겠군. 별 수 없지. 다른 나라로 망명이라도 가는 수밖에.”

‘무책임해애애애!’

왕자는 마녀였던 고양이에게 손을 한번 흔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마녀였던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책상 위로 올라가려고 애썼다. 몸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의자 위에 올라가는 것도 몇 번이나 바닥에 나뒹굴어야 했다. 간신히 의자에서 책상 위로 올라간 그녀는 펼쳐져 있던 책장을 넘겨 고양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발톱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 책만 상하고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야! 그때 박쥐 날개랑 박하잎이랑 지렁이 뼈랑…그리고 뭘 썼지? 어쨌든 그런 걸 썼으니까 그 반대 속성을 지닌 재료를 어떻게 조합하면!’

고양이는 재료가 담긴 찬장이 저 높은 벽에 꼭 닫힌 채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캬아아앙’ 분에 찬 울음을 터뜨렸다.

부스럭.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집밖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가 창문을 타고 귓전을 때렸다. 고양이는 흠칫 몸을 낮추고 노란 눈을 창문에 향했다. 황갈색 눈동자가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녀님?”

킷이었다. 마녀였던 고양이는 등을 곧추세우고 발톱을 내밀었다. 패밀리어에게 이런 흉한 꼴을 보이다니 견딜 수 없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킷은 유연한 몸놀림으로 창문을 타고 들어와 고양이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헤에, 고양이가 되셨네요. 그러길래 제가 저주를 걸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늘 말씀드렸잖아요.”

“캬아악!”

“시끄럽다고요? 그렇게 화를 내봤자 자업자득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어쨌든 고양이가 된 모습이….”

킷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었다.

‘내 손에 빗자루가 잡히기만 했어도!’

킷의 건방진 자세에 고양이는 분노했지만 뭉툭한 손발로는 빗자루는커녕 국자도 집을 수 없었다. 킷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주 예쁘네요.”

‘그래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고양이도 나쁘지는 않아요. 제가 쥐 잡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쥐 같은 거 먹기 싫어!’

“나무 타는 법도요.”

‘됐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법도, 화장실로 쓰면 좋은 모래가 많은 곳도.”

‘제에기라아아알!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일단 잡아보기나 해요. 엘마리.”

킷은 까슬까슬한 분홍 혓바닥을 낼름 내밀고 창문으로 펄쩍 뛰어올라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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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가볍게~_~/
adama
댓글 4
  • No Profile
    서진 03.11.18 15:15 댓글 수정 삭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분함을 가득담아" 라는 부분이 눈에 들어오네요. 아마 분노나, 아니면 "분한 감정" 같은 것을 가득 목소리에 실어 외친다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그런 감정이나 심리상태를"분함" 이라는 말로 명사화 한 부분이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요.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에요.) 아무튼 재미 있네요. "킷" 도 귀엽구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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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언 03.11.19 16:25 댓글 수정 삭제
    아하 ^^ 재밌군요.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글은 발랄하군요. 사랑때문에 고양이가 된 사람들이니, 사랑으로 극복해 보는 것도 좋겠죠. 모두 다 함께이니, 재난 극복도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지내다 보면 고양이적인 취미와 감각이 생겨날 지도 모르죠. 옆 나라에서 고양이를 죄다 죽여버리겠다고 덤비지만 않으면 좋을 것같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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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ama 03.11.19 22:24 댓글 수정 삭제
    말씀들 감사합니다0-0/ 음. ..분함을 가득담아..가 어색하게 보일수도 있군요;; 음음; 어쨌든...최대한 쉬운말로 쉽게 쉽게 가볍게 쓰는데 중점(..)을 두었으니(..가 아니라 그런것밖에 못쓰..;ㅁ;) 가볍고 즐겁게 읽어주셨다면 저는 기쁨의 눈물을!(...데굴데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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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 03.11.20 17:41 댓글 수정 삭제
    (웃음) 재미있고, 뭐랄까 발랄하고 귀여워요. 다시 한번 봐도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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