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독히도, 하늘은 파랬다. 자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연적인 파란색의 하늘, 그 위에 붓으로 유화물감을 덧칠한 듯이 흰 구름이 덧발라져 있는 것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스우우..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묘한 소리로 울었다. 그에 따라서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올려다본 하늘에, 새들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세영은, 멍하니 정신을 놓고 그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서울의 하늘은 회색이었다. 이렇게 파란 하늘은, 간접적으로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맑은 공기에서 숨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부는 바람에서는 옅게 소금내가 났지만 비릿하지는 않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 이곳은, 그곳과 함께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입니다.  

시스터 포스, 아니 아트로포스는, 그 남자와 말을 타고 간지 반나절만에 혼자 돌아왔다. 그녀가 체인 메일 위에 걸친 타바드에는 희미하게 말라붙은 피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그 피의 흔적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세영에게 느끼도록 해 주었다.
아무리 맑은 공기여도, 아무리 파란 하늘이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서울의 뒷골목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혼란과 불안정. 그것이, 세영이 느낀 두 곳의 공통점이었다.
그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아마도 두 개의 차원이 등을 대고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아트로포스의 말 같은걸 믿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말도 안돼는,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 따위 실감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다른 차원 안에 와 있었고, 이곳 역시, 서울과 같은 곳이었다.
차가운 성당 앞 계단의 감촉을 엉덩이 아래로 느끼면서, 상반신을 한껏 젖힌 자세로, 그렇게 세영은 계속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믿기 어려운 사실을,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자신이, 더 믿기 어려웠다.
스아아아..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결에, 희미하게 현악기 소리가 실려 들려왔고, 세영의 귀는 그 현악기 소리를 민감하게 잡아내었다. 그것은 아주 약하고 희미한, 흔적에 지나지 않는 소리였지만, 피아노 현의 울림과 라이플 노리쇠의 움직임 소리마저 잡아내는 세영의 귀는, 나뭇잎의 소리 사이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분리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개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두 개 이상의 악기에서 나는 현악기 특위의 중음이 겹쳐져,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확실하게 아름다운 화음을 형성하고 있었다.
세영은 고개를 들고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당의 뒤를 지나, 마을을 가로질러서, 마을을 둘러싼 언덕의 위, 아마도 자신이 잠을 깨었던 장소에서 그렇게는 멀지 않을 언덕빼기에서부터, 바람은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그 현의 울림도.
고개를 돌리자, 그 현악기의 소리는 조금 더 선명해졌다. 현과 현이 맞닿아 울리는 종류가 아닌, 손으로 퉁겨 울리는, 좀 더 폭이 크고 대담한 현의 떨림. 어느 사이엔가 세영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그 소리가 좀 더 잘 들리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가까워질수록 가슴을 뛰게 했다. 높게 혹은 낮게 때로는 같은 음계로, 혹은 정 반대의 음계로 연주를 계속하는 두 개의 현악기. 그것은 완벽하게 일치하지도, 반발을 일으킬 정도로 대립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어떤 음계를 집던지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될 만한 화음을 만들어 내가고 있었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처음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며 받던 감동,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한 예술에 대한, 새로운 감동이 세영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가까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현의 울림, 그 아름다운 음색이 지금까지 복잡하게 세영의 마음을 채우고 있던 상념들을 사그리 몰아내고 그 안을 채우고 들어왔다.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점점 더 확실한 모습의 선율만이 귀로 들어와 머릿속을 채웠다.
허청허청, 홀린 듯이 언덕 아래까지 왔지만, 언덕 아래에서는 그 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또렷하게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음악소리만 들려올 뿐.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차왔다. 현을 뜯는 손의 움직임이 눈에 보일 것만 같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그 손이 현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잡아뜯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세영은 언덕을 올라갔다. 점점 더 또렷해지는 음률들, 점점 더 가슴을 에이는 듯한, 그 소리들. 잊고 있었던 감동을 다시 되살리는 불가사의한 현의 울림. 언덕을 한 발짝씩 올라갈 때마다 세영의 가슴은 더욱 두근거렸다. 누구일까, 도대체 누가 이런 음률을 연주하는 걸까. 점점 언덕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세영의 걸음은 좀더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졌다, 혹시나 자그마한 소리라도 나서 이 아름다운 음색을 망치지 않을까, 갑작스런 등장으로 연주하는 사람을 놀래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세영은 언덕을 올라갔다.
있었다.
나무 아래에 두 사람이 앉아, 각자 손에 악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세영을 감동시킨 음악은, 여전히 그 악기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기타와 비슷한 모양의 악기- 아마도 류트라고 불리는 중세의 악기-를 든 것은 아랍계열로 보이는 갈색피부를 한 20대 중초반의 청년이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옆모습으로 아름다운 금발이 웨이브를 지어 흘려내려 있었고, 그 사이로 조각처럼 단정한 옆얼굴이 반나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잇는 것이, 자신의 몸 만한 하프를 끼고 앉은 소녀였다. 아
니 소년일지도 몰랐다. 나이는 십 사오세, 성별을 구별해 내기 힘든 얼굴과 중성적인 체형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연주해 내는 하프의 음률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머리칼로 반쯤 가려진 청년의 옆얼굴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확실하게 세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이마를 드러내고 옆으로 넘긴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은 가늘고 하얀 목을 살짝 가리고 어깨를 약간 덮을까 말까한 위치에서 잘려져 있었다. 약간은 통통한, 호감 가는 인상의 달걀형 얼굴에는 또렷한 모양의 이목구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늘고 또렷한 눈썹과 그 아래의 속눈썹이 긴, 딥 그린의 커다랗고 둥근 눈동자, 매끈하게 흘러내린 콧잔등의 선과, 그 아래 자리한 붉은 입술, 지금이라도 당장, 입을 열면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붉고 자그마한 입술. 둥그렇게 흘러내린 어깨의 선이 그대로 하프를 감싸듯 들고 잇는 팔로 이어져,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현을 퉁기는 것은, 그 하얀 팔에서 뻗어 나온 크림색의 가느다란 손가락, 손목과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여, 현 사이를 타고 넘나들었다.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그 동선을 따라, 빛가루와도 같은 음악이 울러 펴지고 있었다.
하프의 현이 묵직하게 울리면, 그 뒤를 류트의 트릴이 뒤따랐다. 과감하게 류트가 가락을 이어나가면, 하프의 고음이 그 뒤를 받쳤다. 한 쪽이 격렬하게 코드를 진행해 나가면 다른 한쪽이 여유를 두고 베이스를 깔았다. 한 쪽이 부드럽게 멜로디를 엮어 나가면 다른 한 쪽은 자신을 죽이고 그 멜로디를 받았다. 마치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럽고 완벽한 조화. 그것이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서, 세영은 멍하니  그 둘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격한 감동이 가슴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에 불을 당기기라도 하듯이,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저히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투명하고 아름다운 음색의 목소리, 그러나 그 투명한 목소리에는 남자임이 분명한 강한 힘이 있었다.  

" 그녀를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걸었네.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녀를 위하여 기사들은 명예를 걸었네.
  그녀를 위하여 시인들은 재능을 걸었네.
  그녀의 미소 한 번에 우리들은 생명을 걸리.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우리들은 인생을 걸리.
  그녀의 아름다움에 여신이 한숨을 내쉬리,
  그녀의 아름다움에 세상 만물이 빛을 잃으리.
  오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

화답하듯이, 아이도 입을 열었다. 믿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미성(美聲). 청년의 목소리도 아름다웠지만, 이것과는 수준이 틀렸다. 어떤 전자악기로도 만들어 내지 못할 만큼 청아하고 울림이 좋은, 남성의 그것처럼 깊이가 있고 웅장하고, 여성의 그것처럼 경쾌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그 목소리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 하지만 누가 알까, 아름다운 이의 슬픔을.
  운명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앗아갔네.
  그녀는 아름다움에 가족을 잃었네.
  그녀는 아름다움에 살아가는 곳을 잃었네
  그저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네. "

다시 청년이 노래를 받았다.  

" 무엇을 탓할까,
  자신의 운명, 그것은 그녀의 운명,
  여신마저 한숨 쉴 정도의 아름다움을 타고난
  그녀의 운명
  운명을 탓할까 자신을 탓할까. "

세영은 넋이 나간 듯이 서 있었다. 손 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합주가, 두 사람의 노래가 너무나도 마음에 저리도록 아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주고받던 노래는 어느 사이 합창이 되어 있었다. 하나와 하나를 더하면 숫자상으로는 둘이 나오겠지만, 저 두 사람의 합계는, 절대 단순한 둘이 아니었다. 셋, 혹은 넷, 혹은 그 이상으로 서로를 증폭해주고 있는 듯했다.

" 그것이 그녀의 운명
   차원의 틈에 비틀려 버린, 그녀의 슬픈 운명.
   가족을 잃어버린 그녀의 슬픈 밤하늘빛 머리칼.
   살 곳을 잃어버린 그녀의 슬픈 장미빛 입술,
   운명의 상대를 잃어버린 그녀의 슬픈 연둣빛 눈동자.
   모든 것을, 그녀는 잃었네.
   모든 것을..... "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그 여운으로 류트와 하프의 현의 울림만이 남았다. 잔잔하고 슬픈, 그리고 애절함이 배어나는 후주, 가슴이 벅차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뺨이 젖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손들 들어 그것을 훔칠 수도 없었다.
-튜르르르르릉.. 하프연주자의 크림색 손가락이 길게 저음부를 훑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이, 류트는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청년이 먼저 고개를 들어 세영 쪽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단정한 얼굴과 흘러내린 웨이브의 금발, 그리고 머리칼과 같은 색의 속눈썹 안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토파즈 색의 금빛 눈동자. 그 금빛이, 세영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 듣고 있었습니까. "

노래를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빙긋이 미소를 띈 입가, 세영은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젖은 뺨을 문질러 닦았다.

" 아, 저 죄송합니다 엿들을 생각 같은 건.... "
" 괜찮습니다 "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의 미소. 그 미소에 끌려서 세영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해서 하프만을 응시하고 있던 아이가, 그때야 고개를 들어 세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파악할 수 없는 성별, 눈에 익숙한 동양적인 검은머리와 감고 가느다란 눈썹, 기품이 느껴지는 진한 녹색의 눈동자. 그 눈이 자신을 응시할 때 세영은 가슴이 덜컹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습관적인 듯이, 붉은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 당신, 네파에트인가? "

아이의 노래하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세영은, 그 물음에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분명히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나 어릴 아이의 반말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아트로포스의 손님이겠군, "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는 일어났다.

" 그럼, 먼저 갈게 라진. "
" 조심해서 가십시오 하렐님. "

끄덕. 청년과 세영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아이는 그대로 세영이 올라온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숲이 빨아들이는 것처럼 아이의 뒷모습을 가리더니, 아이의 모습은 곧 세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세영은 잠시 청년의 존재를 잊고, 아이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존재했던 것 마저 환상이었던 것처럼, 아이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 서울에서 오신 분이지요? "

흠칫, 세영은 청년의 말에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미소 띈 얼굴,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어딘지, 악기를 연주할 때와는 다른, 이상한 느낌.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던, 그들이 연주했던 음악에 대한 뭉클함은, 그 한마디로 사라지고, 세영의 이성이 되살아났다.

" 슬슬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신은. 애초부터 이곳에 어울릴 사람은 아니었어요. "
" 무슨 의미입니까? "
" 말 그대로입니다. "

빙긋, 청년은 그렇게 웃었다. 금빛의 눈동자, 금빛의 속눈썹, 갈색의 피부,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미소.

" 당신의 운명은, 이곳에 닿아있지 않다는 것이죠, 이 돌발적인 사태가, 앞으로 어떤 일이 될 지는, 솔직히 예상하기 힘들군요, 아트로포스도 아마 그럴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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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너머로 빗소리가 요란했다. 세영은 멍하니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그리고 익숙해진 무겁고 습한 공기. 낮은 전자음과 함께 점멸하는 빨간 디지털 시계의 문자판. 모든 것이 자신이 속한 곳의 것들. 아직도 눈꺼풀 안에 남아있는 파란 하늘과 녹색의 나뭇잎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곳의 것.
빗소리와 침묵, 그리고 조그맣게 들려오는 시계의 전자음.
삐리리리리리리리-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대로 천장을 응시한 채로, 세영은 손을 뻗어 익숙한 자리에 있을 수화기를 잡았다.

" 유 세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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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맑았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특별히 무어라고 딱 꼬집어 낼 수는 없었지만 이상스런 불쾌감이 세영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고 맴돌고 있었다. 그 불쾌감의 대상은 방을 채우고 있는 음습한 공기이기도 했고, 여전히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이기도 했으며, 의식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토파즈색 눈을 한 청년의 미소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그곳에 닿아있지 않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스럽게도 무슨 앙금인 듯 세영의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운명이 닿아있지 않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한 마디가 왜 이렇게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깊게 심호흡을 해도, 가슴속은 여전히 답답했다. 맛보지 못했던 맑은 공기가 폐에 달라붙어 숨을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자신과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왜 그곳을 맛보았던 걸까. 어째서 그곳에 갔던 걸까.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세영은 현관에서 우산을 집어들고 한 손에는 간단한 손가방을 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을 잠그고 시선을 들자, 좁다란 골목의 맞은편에 반쯤 젖은 콘크리트 벽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다시 골목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레인코트를 입은, 긴 흑발과 가늘지만 단단해  보이는 라인을 가진 남자.
젖어버린 머리카락 밑에서 방울방울 빗방울이 맺힌 안경이 어른한 빛을 반사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짝 엿보이는 것은, 짙은 블루 아이즈.

" 당신이군요, 유 세영이란 사람이. "

그의 차가운 빛의 눈 아래에서 입술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 언젠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왔던 플레인스 트레블러.

" 이 일에 도움을 준다는 플레인스 트레블러가, 당신이었습니까 리할트씨. "
" 네. "

그는 짧게 대답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잔잔하게 그려진 미소, 세영은 그의 미소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것은 세영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슬픈 것이었다.
토파를 잃은 라에느를 보고 세이티가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를 떠올렸다. 플레인스 트레블러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면서, 아름다움을 얻은 그를. 그리고 자신은, 그가 어떤 곳에서 왔는지를 확실하게 보았다. 새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로 가득 찬, 그가 버리고 온 세상.
그 대신 그에게 주어진 것은, 회색으로 흐려진 대기와, 어두운 콘크리트의 골목. 그리고, 너무나 슬퍼서 바라보기조차 힘들만한 아름다움.
지독한 슬픔이, 그에게서 배어 나왔다, 그의 젖은 머리칼과, 안경 뒤에 감추어진 푸른빛의 무표정한 눈동자와, 그리고 그 젖은 실루엣에, 세영은 가슴이 아려와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 갈까요? 은 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단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선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버린 것이 세영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쩐지 우산을 써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젖은 뒷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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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여러분들이 맡아 줄 부분은 이쪽입니다. "

은의 가게에서는 언제나처럼 카운터 안쪽에 선 은과, 그 앞의 다섯 사람- 리할트와 세영, 라에느와 콜과 알프렛-이 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 상황으로, 콜은 이야기보다는 자기 앞에 놓인 팝콘과 콜라에 좀 더 관심이 있어 보였지만.
가게 한쪽에는 아까부터 프로젝터로 틀어놓은 콘서트장의 평면도가 비추어지고 있었고, 세영은 진지한 눈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 세영 군이 요소에서 스나이핑으로 보조하고, 리할트 씨와 라에느가 전면으로 들어가고, 콜이 뒤에서 네트워크를 받아 백업을 해주는 방식이지만, 사실은 시선을 끄는 것이 주임무이니까, 너무 조용하게 끝내지는 않도록 하고, 뭐 그렇다고 해서, 몸을 사리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

은의 뒷말에는 약간 웃음기가 실려있었고, 그 말을 들은 라에느가 픽 하고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가을비까지 내린 후라 밖은 제법 쌀쌀한 날씨일텐데, 여전히 그녀는 칠부 소매의 배꼽티에 찢어진 블랙진 차림이었다.
하얀 벽에 비쳐지던 프로젝터의 영상을 보고 잇던 리는 안경을 벗고 잠시 눈을 비볐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눈의 피로에 보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니터라던지 프로젝터라던지를 오래 보고 있으면 쉽게 눈이 아파 왔다. 다시 안경을 쓰고 프로젝터의 영상에서 눈을 돌리자, 바에 팔꿈치를 대고 턱에 손을 댄 알프렛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를 보자, 리는 문득 왜 그녀가 이곳에서 같이 브리핑을 받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설마 당신도 이 작전에 참가하는 건 아니겠지? "
" 응? "

멍하니 누군가를 바로 보던 알프렛의 시선이 리에게 고정되었다. 갈색의 부드러운 눈이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그녀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 설마 "

그녀는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리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방긋 웃었다. 장난기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빙긋이 미소를 지은 오렌지색의 입술.

" 내가 그렇게 대단해 보여요? "
" 그럼 재미로 듣는 거야? "
" 글쎄요~ "

알프렛은 말꼬리를 장난스럽게 늘이면서 웃었다. 그 모습에, 리는 자신도 피식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 브리핑은 이 정도이고, 콘서트날짜는 앞으로 일주일 뒤인 11월 3일, 그때까지는 몸을 풀어 두던지 쉬어두던지 해요. 지하에 있는 연습실은 사용해도 좋고. "

그르륵, 스트로로 콜라를 빨아들이던 콜이 은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은 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 너도 이곳의 네트워크를 사용해도 좋아 콜. "

콜은 스트로를 입에 문 채로 빙긋이 웃었다. 세영이 노트북을 덮으며 일어났고, 뒤따라 라에느가 일어났다.

" 그럼, 일주일 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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