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도플갱어 [상]

2005.09.12 13:2809.12

누나는 미쳤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되지도 않는 피아노 좀 그만 쳤으면 좋겠다. 아까부터 조준 자꾸 빗나간단 말이다. 체력이 얼마 없다. 시간도 몇 분 안 남았고. 빨리 골렘 때려잡으러 가야 하는데.

" 아!"

내가 드디어 짜증을 냈다.

아니다. 나는 입만 뻐끔 했을 뿐이다.

" 아! 아! 아!"

왜 자기가 신경질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 아악!"

누나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스켈레톤한테 거하게 맞았다. 나는 나동그라져서 그대로 죽어버렸다. 파티 대화창에 「병신」이라고 떴다.

「누나땜에 -_-」

저 미친년 땜에, 라고 치려다가 뒤돌아보았다. 피아노는 컴퓨터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누나는 거기 없었다. 어느샌가 창가로 가 있었다. 방충망을 손톱으로 긁으며 아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창 밖은 별 볼 거 없었다. 민망하게 뭉텅뭉텅 가지잘린 버드나무 몇 그루를 사이에 두고 허접하게 생긴 빌라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 아파트 사는 애들은 그 빌라를 '판자촌'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 판자촌들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는데, 한구석에서 웃통벗은 아저씨가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물론 누나가 그 아저씨를 보면서 저렇게 실실 웃는 건 아닐 거라 믿는다.

누나는 겨우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에 정신을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은 없었다. 해나 달도 없었다. 하늘이라기보다는 꽃분홍색 셀로판지 같았다. 희한한 색이었다.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지만 왠지 본 적은 있을 것 같은 칵테일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누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친 사람의 생각 같은 거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좀 궁금하긴 했다. 무슨 기괴한 감상이 저 머리통 속을 굴러다니고 있을지 말이다.

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 아름답다……."

그것 뿐이었다. 시시하게시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충 세상엔 미친 사람 꽤 많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니까 그중 한 명이 우리 누나라고 해서 별로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난동 부리거나 게거품 물고 지랄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냥 나 마비나 길티할 때 훼방 좀 안 놓고 집에 밥 없으면 좀 하고 설거지 쌓이면 하고 그러기만 하면 된다. 누나 상태가 특별히 안 좋지만 않으면 그 정도는 지킨다. 오늘은 생리 둘째날이라서 좀 그런 것 같지만.

아니 나라고 일부러 누나 생리날 같은 건 알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반 애들 중 여자반 애들 생리날짜 같은 거에 엄청 관심 많은 새끼도 있기는 한데, 그 새끼랑은 별로 친하지도 않다. 완전 변태새끼다. 야겜 CG같은 걸 프린트해서 코팅까지 해서 수학공책 책받침으로 쓴다. 그러면 공부가 잘된다고 나보고도 한번 해보라 그랬는데, 잘 되는 게 43점이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죽을때까지 CG나 모으며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처음엔 우리 누나도 그냥 변태인 줄로만 알았다. 누나는 호모새끼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이것도 굳이 알고 싶어서 알아낸 게 아니다. 어쩌다가 누나 쓰는 계정에 있는 폴더들을 들춰봤는데 웬 추잡스럽게 생긴 아저씨들이 레슬링 비슷한 걸 하는 동영상을 열어보게 된 것 뿐이다. 뭐 이상한 만화도 많고 게임도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누나 계정에서 10기가나 잡아먹는 게 수상하다 싶었다. 아니 뭐 솔직히 나도 혼자 있을 땐 푸루나도 돌리고 그러는데 적어도 호모는 안 본다. 그딴 걸 보는 여자는 확실히 변태다. 나는 호기심이 왕성한 중학생이니까 정상이지만.

어쨌거나 누나는 변태였다. 이걸로 놀려줄까 하다가 그만 뒀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거나 거품물고 화내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누나 책상을 한 번 뒤져주기로 했다. 진짜 변태는 컴퓨터 같은 게 아니라 자기 책상에다가 보물을 쌓아두기 마련이다. 아니 호모가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호기심 때문에 그런 거다.

누나 방에 들어가 본 지는 꽤 됐다. 누나는 누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거 엄청 싫어한다. 게다가 뭔가 하는 중에 방해하면 무섭도록 신경질내고 소리지른다. 옛날엔 누나방 따위 관심도 없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엄청 켕겨서 그랬던 것 같다. 막 글 쓴다고 지랄한 적도 많은데, 호모야설이라도 쓰고 있었던 건가?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대략 일주일 정도 된 일 같다. 한 여섯 시까지 누나가 안 들어오면 열 시 까지는 야자하고 온다는 얘기였다. 여섯 시 반까지 마비노기하다가 대충 접고 누나 방으로 갔다.

난장판이었다. 기집애 방 같지가 않았다. 온통 책, 노트, CD, 먼지 머리카락이었다. 침대 위 이불에서도 퀴퀴한 냄새가 났다. 솔직히 내 방도 좀 너저분한데 이정도까진 아니다. 역시 변태다운 방이었다.

책상도 어지러웠다. 이렇게 어지러워서야 뒤지기가 더 힘들다. 변태는 혼돈의 도가니탕 속에서도 나름대로 규칙을 보는 놈들이라, 섣불리 건드리면 나중에 눈치채일 것 같았다.

일단 서랍을 열어 보았다. 누나 오면 제발 정리 좀 하고 살라고 말해버리게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내가 다 청소해주고 싶었다. 종잇조각이며 광고지, 영수증, 편지지, 생리대 봉투 따위를 깨짝깨짝 들춰 보았는데 기대하던 굉장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가 띠용새끼라는 기분이 자꾸 들었지만 오기로 다음 서랍, 그 다음 서랍을 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발견했다. 한 눈에도 수상해 보이는 손때탄 두꺼운 노트가 잡동사니와 새끼 바퀴벌레와 먼지 덩어리 위에 올려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JOURNAL』

표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네임펜으로 직접 쓴 글씨였다. 뭐라고 읽지? 쥬날? 죠르날? 하여간 어감부터 민망한 게, 과연 읽어도 될까 좀 갈등스러웠다. 정말로 호모 야설 같은 게 빼곡히 쓰여 있으면 엄청 충격받을 것 같았다. 자기 누나가 겉은 음침해 갖고 속은 호모소설이라니,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면 찜찜해서 마비도 잘 안 잡힐 것 같았다. 나는 노트를 들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손바닥 하나 반 정도 크기에 수학의 정석보다 약간 얇은 볼륨인데, 벌써 반이나 새까맣게 손때에 절고 귀퉁이도 너덜너덜했다. 순간 뭐가 되던 이렇게 열심히 끼적인 걸 한 번 보고 싶단 마음이 치밀어서, 때탄 부분 중 아무데나 펼쳤다.

과연 가관이었다. 아니, 내용 이전에 글씨가 개발소발이라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누나가 돼 갖고 어찌 이리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을까. 진짜 이건 좀 심하다.


「 …심하다. 너는 나에게 심한 짓을 하고 있어. 난 너 때문에 엉망진창이야.」


그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덜렁거렸다. 심한 짓이라니 이 아저씨들 도대체 무슨 플레이를 하는 건가!


「차라리 '갈가리 찢기는 고통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

괴롭냐구? 고통스럽냐구? 아니야.

다만 어둡다. 어둠 뿐이야. 어딜 가도 어둠, 무엇을 해도 어둠, 가만히 있어도 온통 어둠이라, 나는 마치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어둠 …」


' 어둠'이란 두 글자는 페이지를 바꿔가며 이어졌다.

뒤늦게야 나는 겨우 그것이 호모들의 애정행각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나는 다른 페이지를 뒤적였다. 「5월 21일」하고 시작되는 문단이 눈에 들어왔다.


「5월 21일

하늘은 화창하고 아카시아 향기는 짙다. 콘크리트 화단에 장미가 무리지어 피어 있다. 새벽 거리는 조용하다. 하늘과 풀과 꽃들은 생기 넘치고 공기는 신선하다. 무기력한 건 사람들 뿐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 중 특히 무기력하다.

피곤하다. 문득 '아름다운 자연'을 생각하고, 또 참을 수 없이 피곤한 감정에 사로잡혀 버렸다. '아름다운 자연'이라고? 그렇다. 거기에 '무식하지만 지혜롭고 자상한 할머니' 나 '악착같이 웃고 떠들며 사는 이웃들' 같은 게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그런 것들로 글을 쓰면 사람들의 감동과 칭찬을 살 수 있다. 그런 글이야말로 나 같은 어린애들의 이상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세계를 보아야만 한다. 아,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이라니, 이 하늘과 이 바람이 어떻게 빛나고 어떻게 부는지 파 볼까?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이런 건 그냥 짜증만 내는 것에 불과하다. 백일장에 뽑히지 못한 건 단순히 내가 글을 못 쓰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에 '글 쓰는 애'로 찍혀 있고 스스로도 그런 애라고 생각하는 주제에 글 실력이 없다. 내가 쓰는 건 아름답지도 치밀하지도 감동적이지도 나중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보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내 세계가 그렇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정말로 그런가? 모르겠다.

그 사람의 글은 곧 그 사람 자체다. 혼란한 사람은 혼란한 글을, 명석한 사람은 명석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모르겠다'는 말만 쓰는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거 없는 인간이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이유도 모르겠다. 그 이전에 살아감이라는 현상 자체가 불가해하다.

사람들이 왜 살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결론은 하나뿐이 안 나오지만 그게 믿을 만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결론이란 이런 거다: 사람들은 죽기 싫어서 산다. 모르겠다.

삶이란 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내 경험대로라면 이렇다. 최초에 '태어남'이 있었다. 이 사건은 전혀 내 의도가 아니었다. 하긴 태어남 이전의 무엇은 존재하지도 않으니 의도할 수도 없다. 어쨌든 태어남 이후 그는 세계로부터 호의로운 관심을 받는다. 배설과 배고픔 같은 기초적 생명활동의 불편함은 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어머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이 있다. '무'의 상태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안락하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것-'세계'라고 해야 할까나-의 대리인이다. 이 대리인을 통해 '그것'은 우리에게 욕망을 가르친다.

욕망은, 이를테면 굶주림 같은 것이다.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완전히 자기 것인 육체를 얻은 순간부터 그는 굶주림이라는 욕망을 배우는데,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얻는 욕망도 그것과 같이 절실하고 피할 수 없는 결핍의 느낌이다. 어쨌든 '그것'은 욕망의 발생을 유도하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충족시켜 줌으로써 기쁨을 학습하게 하며, 그 기쁨으로 다시 욕망을 자극하는 '행복한 순환' 속에 그를 가둔다. 이 행복한 순환은 태어나고부터 몇 년 동안 지속된다. 그동안 욕망은 복잡하게 발달해가며 어느 순간 '그것'이 그를 버릴 때까지 아슬아슬하게 충족되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행복의 순환이 파괴되고 그는 내동댕이쳐진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욕망에 관심갖지 않는다. 그는 당황하지만, 그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욕망하는 것 뿐이다. 곧 그가 살아있는 한, 혹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욕망할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이다. 그는 굶주리고 또 굶주린다. 그는 굶주림에서 고통을 배운다. 또한 스스로 욕망을 충족하는 법을 배우지만, 그 과정 자체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고, 충족에 성공해도 다른 욕망이 곧바로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묻어뜯는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아귀 지옥에 떨어져버렸음을 깨닫는다. 이 지옥은 이후 평생동안 계속된다.

그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욕망, 고통, 티끌만도 못한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인생의 초반에 넘치던 안락과 기쁨은 '그것'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섣불리 이 세계를 등지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삶에 단 껍질을 한꺼풀 씌운 것이다. 나에게 인생은 사실 좋은 것이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때와 같은 달콤함을 얻을 수 있게 만들려고 믿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그러니 진실은 분명하다. 나는 평생 초년기와 같은 행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적어도 죽음으로부터 지켜야 할 정도로 가치롭지는 않다. 사실 죽음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을 큰 사건인 양 떠들어대는 건, 그것이 '삶이라는 고귀한 무엇'을 파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이 별볼일 없으니 죽음 역시 별볼일 없는 게 당연한데도.

아, 모르겠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나는 안락하고 싶다. 나는 사라지고 싶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첫머리에 날자가 있는 걸 보면 아마 일기 같은데, 보통 일기란 건 「오늘도 날씨가 좋다. 학교가서 애들이랑 놀았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선생님한테 혼났다. 망할. 재수없다. 그나저나 이번 시험 잘 봐야 용돈 많이 받는데」같은 얘기를 쓰는 거 아니었나? 그리고 보통은 색색가지 펜으로 갖은 애교를 부리며 써야 하지 않나? 적어도 기집애들이라면.

누나의 5월 21일 일기는 미친년 산발하고 굿판뛰는 필체였다. 게다가 B심을 썼는지 여기저기 글씨가 뭉개지고 손자국도 얼룩덜룩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데 내용까지 찌질하기 짝이 없다. 뭐 우리 누나가 이런 녀석일 거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 착잡했다. 차라리 호모소설을 보는 쪽이 개운할지 모른다.

그래도 남의 일기 훔쳐읽는 재미는 좀 있어서, 나는 그 다음 날의 내용도 보았다. 여전히 B심을 쓰고 있었지만 전보다는 단정하게 보였다.


「5월 22일

마치 태양 같았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아마 그 밝음과 생기넘치는 에너지 때문이겠지.

그러나 실은 무엇이 그 아이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가끔 그 아이의 눈빛 속에서 밤 사막을 본다. 아니, 핵겨울이라고 하는 게 더 알맞다. 밤 사막의 신비와 휴식하는 동물들의 숨소리 같은 건 그 아이의 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그 황량함과 유독함, 깊이를 알 수 없는 적막, 한때 생명이었던 페허들─ 거의 아름답다고 해야 할 만큼 지독한 파괴된 풍경이 아주 가끔, 그 아이의 갈색 홍채와 검은 동공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아, 갑자기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누구의 폐허일까?

문득 그 아이의 눈에 비치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풍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내가 나를 보는 풍경.

내가 너를 보는 풍경.

처참한 풍경. 아무도 보지 않는 풍경.

너는 너의 태양을 불태우기 위해 그곳을 희생했다. 너는 천진난만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인사를 던진다.

" 안녕? 오늘도 여전하네?"」


「5월 23일

나는 너와 이야기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정확히 무엇이 참을 수 없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말은 횡설수설이 되어 버리고 뭣 하나 요점에 닿지 못했다. 너는 생긋 웃음지은 채 내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문득 네 뱀 같은 입술선이 그리는 미소가 너무도 선명해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 복도여서 다행이었다. 다른 애들이 봤다면 아니, 이런 건 아무렇지 않다. 나는 비명을 질렀고, 너는 그런 나와 함께 있었다. 내 비명은 네가 지르게 한 거고, 너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모른 척 했다. 너는 내가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까지 모르는 척 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 내가 그때 정말 그랬는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가 내 것이었는지 아니면 환청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너는 시치미를 뚝 떼고 끔찍한 미소를 지우지도 않고 말했다.

" 그러니까 살기 싫다는 거 아냐? 그럼 죽으면 간단하잖아?"

간단한 문제였다. 네 말대로였다.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단순하게는 될 수 없었다. 나는 벌벌 떨었다. 나는 말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말하고 있었다.

─ 너는 이렇게 살아 봐야 별볼일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 희망이 있다고? 노력하면 행복해진다고? 전혀.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너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왜냐고? 너란 인간은 죽을 때까지 너일 뿐이니까.

아, 하지만 생각해 봐.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라든가 그걸 추구하는 그들의 삶 같은 거 말이지. 행복? 행복? 행복이라? 잘은 몰라도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야. 돈이 많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몸이 편하고, 다른 사람한테도 대우받고 살 수 있지. 그래서 부모들이 애새끼들 죽어라고 공부시키는 거 아냐. 공부 잘 해서 명문대 가면 돈 많은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아지니까. 판사님 검사님 의사님들처럼 말이지. 아니면 사장님이나 이사님도 괜찮은데 이건 뭐랄까, 자기 부모가 이미 사장님이나 이상님이 아니면 좀 힘들어. 어쨌든 그거야. 많은 행복과 그걸 가능하게 하는 지위, 이게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의 실체라구. 뭐, 아니야? 그럼 뭐가 있는데? 사랑? 아, 그거 좋지. 그 뭐냐 이쁜 얼굴과 쭉쭉빵빵한 몸매와 죽이는 패션센스, 뭐 그런 것들 말이지. 그것도 행복을 가능하게 해. 겉모습이 예쁘면 사람들이 일단 좋아해주고, 떠받들어 주고, 운 좋으면 쉽게 큰돈 벌 수도 있거든. 무엇보다도 좋은 상대랑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좋은 상대? 잘 생기고 돈 많은 사람? 뭐 마음? 그것도 좋지. 착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어. 뭐야, 자꾸. 아니라구? 그럼 뭔데? 뭐가 있는데? 섹스? 그것도 좋지. 하면 기분 좋아지니까. 그리고 또? 대답이 없군.

어쨌거나 그런 거, 돈, 예쁜 얼굴 같은 걸 가진 사람은 행복해지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걸 추구하지만 운 좋은 몇몇이 아니면 힘들지.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돈을 벌거나 시덥잖은 외모를 신경쓰면서 인생을 다 낭비하고, 가끔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술투정을 부리거나 뭐 그래. 그런데 어쩌겠어, 자기 인생엔 그런 것밖에 없거든, 애초에. 그 사람들은 인생이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자신들의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뭣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자기 삶을 의심하지도 못해. 게다가 사회라는 게 있는데, 얘네들은 그런 보통 사람들의 삶을 먹고 살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면 자기 먹을 게 없어지니까 죽음을 죄악처럼 가르친다구. 네가 자기 삶과 죽음에 대해 믿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놈이 세뇌시킨 거야. 너의 존엄성이라든가 인생의 의미라든가 그딴 거 있잖아.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 여기 한 인간이 있어. 이놈이 탄생해서 죽을 때까지의 삶이 뭣으로 되어 잇는지 보자구. 이놈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져서 이 세계로 배출돼. 그 시점부터 삶이 시작되는 거야. 처음 몇년간은 세계가 그를 잘 돌보려고 노력해. 그는 절대 안락의 상태인 '무'에서 막 쫓겨났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보살피지 않으면 다시 이 세계를 버리고 무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거든. 아, 이 세계란 놈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잡아먹는 놈이라서, 식량이 될 수 있으면 많으면 좋겠지. 어쨌건 그 처음 몇 년동안 세계는 온갖 노력을 다 해서 그를 보살피는 동시에, 그가 이 세계를 버릴 수 없도록 만들어. 세계는 그의 존재 방식 자체에 관여하는 거야. 그가 그로 '존재하는 한 계속 존재하게 만든다'는 게 세계의 의도지. 그리고 모든 인간은 세계가 의도하는 바로 그대로 되어 버리고.

그 존재 방식이 그 자신과 완전히 밀착되면, 세계는 완전히 관심을 끊어.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그냥 둬도 자기 식량으로 계속 잇을 게 분명하거든, 적어도 70년동안은 말이지. 어쨌건 갑자기 세계로부터 버려진 그는 그때서야 뭔가 잘못됐음을 알지만, 그것도 어렴풋한 거야. 그는 어찌되든 옛날의 상태 - 이걸 '행복'이라고 하자구- 를 되찾고 싶어해. 그때부터 그는 갖은 노력을 다 하겠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는 '행복'을 되찾으려면 많은 돈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래서 그는 그걸 좇겠지. 빌어먹게도, 예전에 그는 인생이란 개념도 없이 그저 행복했어. 행복을 박탈당한 이후 그는 인생이란 걸 알게 됐고. 사실 인생이 먼저고 그걸 잘 사는 게 행복이 아니야. 인생이란 행복이 떠난 빈 구멍에 불과한 거라구.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왜냐면 그에겐 인생밖에 안 남았거든. 그는 인생을 위해 행복을 찾는다고 굳게 믿으면서 그나마 있는 인생마저 낭비해 버리는 거야.

뭐 그런 식으로 삽질하다가, 그는 문득 다 견딜 수 없어지는 거야. 자기 인생이란 게 도무지 재미가 없어. TV프로도 쇼핑도 연애질도 이젠 소용이 없어. 그럼 드디어 그는 죽을 수 있을까? 하하, 절대. 그는 죽는 대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그리고 안심하지. '내가 사는 건 나의 사랑하는 가정과 아이들 때문이다' 하고. 아, 그렇다고. 애를 낳는단 말이야. 끔찍하지 않아? 별볼일 없는 안정이 갖고 싶어서 또 한 인간을 이 세계로 끌어내리는 거라구. 말도 못하게 멍청한 짓이고, 악랄한 짓이지. 뭐랄까, 원죄란 게 있다면 말야, 그거야. 후손을 태어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 그리고 후손인 우리들에겐 '태어나 버렸다'는 그 사실이야.

응. 그렇지. 그게 너의 탄생과 삶의 전말이다.


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너의 목소리는 복도에 아무런 울림도 남기지 않고 곧장 내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내가 속으로만 혼잣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혼돈스러웠는데도 네 말의 진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또 아름다운 눈을 내게 곧장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은 밝고 맑고, 어느 때보다 선명한 폐허가 빛나고 있었다. 너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 자랑스러워하라. 너는 진실을 안다. 너의 어둠은 정당하다.

─ 나의 어둠? 내가 물었다.

─ 이 세계는 삶을 파괴하려는 충동을 어둠이라고 부른다.

─ 내가 삶을 파괴하고 싶어한다고?

" 사람을 죽이고 싶어. 갈가리 찢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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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장편 방은 처음이군요.

올려도 될지 상당히 고민되는 녀석입니다만, 저 스스로는 꽤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녀석이기도 해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올립니다. 내일 당장 얼굴이 빨개져서 자책모드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아, 그리고 쓰면서는 '개그 소설을 쓰자!'는 기분이었습니다만. 지금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군요.
luc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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