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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퀴

2013.07.15 20:3707.15

 

 

 

이병 박 휘진!”

이런 씹어먹을 새끼가, 누가 그렇게 관등성명 대래? , 내 말 무시하냐?”

아닙니다! 이병 불량감자!”

그래, 이 새끼야. 앞으로 그게 니 관등성명이다. 간부나 나보다 짬밥 높은 사람 없을 때는 항상 그렇게 하는 거야, 알아들었어?”

이병 불량감자! , 알겠습니다!”

신병의 목소리 끝에 울음기가 베어났다. 왠지 녀석의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나도 그다지 고개를 돌려볼 입장이 아니어서 팔과 어깨에 힘을 준 채 반대편 관물대의 상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박 성철!”

이병 박 성철!”

이 새끼 똑바로 가르쳐라. 딱 보니까 어리버리한게 나 짜증나게 할 거 같거든? 아니, 그냥 얼굴만 봐도 짜증나거든? 이 새끼가 사고치면 니 책임이다, 알아들었어?”

이병 박 성철! , 알겠습니다!”

 

내 옆에서 흔히 말하는 갈굼을 당하고 있는 신병은 좀 못생기고, 어눌한 녀석이었다. 까무잡잡하고 깨끗하지 못한 피부에 두툼하게 부어있는 눈두덩이, 복어가 연상되는 부풀어오른 두 뺨이 그를 더 어수룩하게 보이게 했다. 거기에 신병인 주제에 바깥세상 물이 덜 빠졌는지 행동도 느릿하니 선임병들 눈에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자대배치 첫 날, 심심해 죽으려고 하던 병장들의 짓궂은 장난에 걸려들어 지금 내 앞에 있는 일명 상또라이강 상병에게 반말로 욕지거리를 해댔으니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당연했고, 잠깐이면 지나갈 일도 아니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우리 부대는 내무반 군기가 심하게 센 편이었고, 구타와 같은 가혹행위도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신병이 선임병의 얼굴을 보는 일 조차도 군기가 빠진 행동으로 인식되는 이 비인간적인 공간에서 나는 이 어눌하고 굼뜬 녀석을 항상 옆에 데리고 다녀야만 했다. 나 역시 목소리와 말투로 밖에 구분할 수 없었던 선임병들의 이름과 계급을 외우게 하고, 아직 서툴렀던 군생활의 잡다한 일들-그래 봤자 청소하는 방법 따위였지만-을 가르치는 것은 내게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짓궂은 선임병들은 틈만 나면 녀석을 끌고가 외모에 대해 놀리거나 장난 삼아 가혹행위를 했었고 그럴수록 녀석은 바싹 긴장해 신병이 해서는 안 되는 실수들을 더 자주 할 수 밖에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건 지독한 악순환이었고, 가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누구나 상상할 수 있듯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녀석과 나의 자대 적응기간이 지나갔다.

 

박 일병, 이리와 봐

점호가 끝나고 일말(일병 중 최고선임자)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 감자새끼 때문에 돌겠다. 오늘도 껀수 친 거 알지? 꼭 껀수를 쳐도 강 병장한테 쳐요. 그나마 강 병장, 병장 달아서 기분 좋을 때 건드려서 다행이지. , 나도 어쩔 수 없이 몇 대 때리긴 했는데 저 새끼 사고 칠까 걱정되네. 오늘 진짜 정신 없이 쳐 맞았거든. 지금 화장실에서 머리 박고 있으니까 니가 가서 일어나라고 하고 좀 달래줘.”

··· 지금 화장실 가도 됩니까?”

아이씨, 누굴 바보로 아나. 상말(상병 중 최고선임자)에게 말해뒀어. 넘 오래 있진 말고. 담배 줄까?”

, 금방 데려 오겠습니다.”

녀석은 깔끔하게 닦아대서 물기 한 방울 없는 화장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린 채로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난 화장실 문을 닫고 얼른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땀투성이에, 피가 몰려 붉어진 얼굴, 몰아 쉬는 숨, 바닥을 바라보는 시선이 안쓰러웠다.

한 대 필래?”

···

담배를 쥔 녀석의 손가락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

, 씨발. 어쩌냐. 짬 없는 게 죄지.”

······

, 괜찮아? 쫌만 참아라. 금방 지나가겠지. 금방 지나갈 꺼야.”

나는 나조차도 실감하지 못할 말을 주워섬기며 녀석을 달래보았지만 녀석은 바닥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가 다 타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녀석은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박 일병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될 정도로 제가 잘못했습니까? 지들이 뭔데, 저보다 군대 일찍 들어온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제가 못생긴 게 제 탓입니까? 제 이름이 감잡니까? 고참 중에 제 이름 불러주는 사람 박 일병님 밖에 없어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구요으이이이익.”

끝내 이를 악물고 오열하는 그 녀석의 너무나도 서글픈 눈빛을 보며 난 해줄 말이 없었다. 애초에 난 녀석에게 그다지 호감도 없었고, 이름을 불렀던 것도 그저 내 성향 때문이었지 녀석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사실 이 녀석의 눈을 제대로 쳐다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난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 휘진아. 니 말대로 그 사람들 우리보다 군대 일찍 온 것 밖에 없다. 시간은 금방 지나갈 꺼야. 니가 지금 상황이 그렇게 싫으면 나중에 너는 안 그러면 된다. 우리는 안 그러면 된다. ? 우리는 그러지 말자. 적어도 우리 기분 때문에 밑에 애들 괴롭히진 말자.”

, 박 일병님. 정말 우린 그러지 말아요. 정말로··· 박 일병님, 진짜 약속 지키는 겁니다? 우린 안 그러는 겁니다? 나중에 내 밑에 새끼들이 애들 괴롭히는 거 보면 내가 다 죽여 버릴 꺼야.”

울먹이는 녀석을 진정시켜 들여보낸 후 일말에게 조용히 보고를 하고 내무반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녀석을 달래려 아무 말이나 했던 것인데 생각해 볼수록 정말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후임병에게 가혹행위를 안하고, 내 후임병들이 그들의 후임병들에게 그런 짓을 하는 걸 막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폭력의 고리는 분명 끊어질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항상 선임병들이 문제였다. 선임병들이 무언가에 화가 나고 그걸 상말에게 내리고, 그게 일말에게 내려오고, 끝내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에게까지 가해지는 지독한 폭력의 굴레. 그걸 끊어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이 길고도 괴로운, 아니 길어서 지옥 같은 군생활도 모두에게 조금쯤은 할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다잡듯 안 그래야지, 못하게 해야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도 일말이 되었다. 이 무렵의 휘진이 녀석은 전화대기(부대의 전화를 받는 업무 등을 맡음)였는데 부대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둘은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갈 부대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며 선임병들을 피해 눈빛을 교환하곤 했었다.

일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신병을 받고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고 나도 첫 신병을 받게 되었다. 새로 온 신병은 둘이었는데 딱 보기에도 둘 다 신병 특유의 어수룩함이 가득했다. 내가 겪은 괴로웠던 신병 시절과 완전히 다를 수는 없었겠지만 정말 기회는 충분히 주고 싶었다. 교육을 핑계로 가두어두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공간이었던 그 곳, 교육실에서 문을 닫아놓고 잔뜩 긴장해있는 신병 둘을 바라보았다.

신병!”

이병 이 준석! 이병 김 현일!”

시선 풀고 내 얼굴 봐라. 니들은 신병이니까 군기가 바짝 들어 있어야 된다. 목소리도 커야 되고 동작도 빠릿빠릿해야 된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최대한 도와줄 꺼다. 최소한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겠다. 너희들은 이게 나에게 있어 얼마나 큰 모험일지 모를 꺼다. 어찌 되었건 너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알았나?”

이병 이 준석! 이병 김 현일! , 알겠습니다!”

선임병들이 보는 앞에서는 최대한 엄격하게 신병들을 대하는 척 했지만, 암기사항이나 체조 따위를 가르칠 때는 최대한 자세히, 천천히 알려주었다. 숙지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고 따로 시간을 내어 실전처럼 모의 테스트도 치를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어떤 가혹행위나 조금의 구타도 없었다. 내가 신병 때 딱 한번 보고 모든 걸 따라 해야 했던 수 십 가지 동작들, 외워야 했던 암기 사항들을 수 십 번 반복하여 가르쳐 주었으며, 우리 땐 배우는 시간보다 가혹행위에 시달리는 시간이 열 배는 길었던 그 시간을 고스란히 그들이 숙지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챙겼다. 이러한 사실을 어느 누구든 나보다 선임병이 알게 되었다면 나는 이 일로 혹독한 추궁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무리 없이 잘 따라오는 신병들을 보며 난 속으로 할 수 있어!’라며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병들이 첫 테스트를 받는 날 점호시간, 내게, 아니 모두에게 운이 없게도 일직병은 강 병장이었다. 모든 병사가 내무실마다 부동자세로 열을 맞추어 서 있었고 복도엔 강 병장의 군화소리와 강 병장이 들고 다니는 근무판이 내무실 침상을 쿵쿵 찍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병 이 준석!”

니네 분대장 이름.”

이병 이 준석! 일내무반 분대장 정 대일 병장! 이상입니다!”

신병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내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할 수 있어! 내 방식대로도 할 수 있어!’

강 병장은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단어를 신병 앞에서 읊조렸지만 그 때마다 준석이는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 잠시간의 침묵 후 다시 끼익끼익왁스칠해진 복도에 군화 밑창이 끌리는 소리와 하며 침상을 근무판으로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병 김 현일!”

오늘의 암구어

이병 김 현일! 오늘의 암구어··· 오늘의 암구어··· , 아아.”

상말, 일말 튀어 나와!”

상말인 김 상병과 나는 맨발로 강 병장이 있는 내무반으로 뛰어나가 앞에 부동자세로 나란히 섰다. 울상이 된 채로 반대편 관물대 상단을 바라보는 신병과 열을 받을 대로 받아 우릴 향해 눈을 부라리는 강 병장이 눈에 들어왔다.

야이, 상말이라는 새끼가! 일말이라는 새끼가! 신병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암구어도 모르게 해? 이런 개! ! ! ! ! ! !”

강 병장은 나무로 된 근무판의 모서리로 김 상병의 머리와 내 머리를 말하는 음절에 맞춰 번갈아 찍어대더니 나중엔 화난 자기모습에 더 흥분해서는 군화발로 우리 둘의 가슴팍을 차서 넘어뜨렸다. 그는 내무반 구석 벽에 처박히면서도 바로 일어서서 다시 자기 앞에 서는 김 상병과 나를 몇 번이나 발로 차서 넘어뜨린 후에야 겨우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점호가 끝난 후 상말에게 불려가 깨지면서 나는 정말 피가 거꾸로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비열하게도 내 분노는 성격 나쁜 강 병장에게도, 강 병장에게 깨졌다고 나에게 그대로 내리고 있는 김 상병에게도 아닌 신병 김 현일에게 모두 쏠려 있었다. 상말인 김 상병도 이미 허락한 내용이었기에 나는 거칠 것 없이 현일이를 교육실로 끌고가 내 분노를 폭력으로 바꾸었다.  

야 이, 개 같은 새끼야! 내가 너를 어떻게 가르쳤는데! 그걸 몰라! 씨발, 나는 한번 듣고! 10분을 맞았어! , 개새끼야! 한 번 보고! 한 시간을 맞았어! 내가 너한테 그러디? , 개새끼야! 그렇게 잘 해줬는데! 고마운 걸 모르고! 니가 나를! 엿 먹여? 이게 사람 대울 해주니깐! 고마운 줄 모르고! , 개 같은 새끼가!”

목이 타고 숨이 막혀왔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세상이 붉게 보였다. 구석에서 온몸을 웅크리고 나에게 맞고 있던 현일이는 울먹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박 일병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 일병님, 죄송합니다···

그 모습은 불과 반 년 전 내 모습이었다.

 

내가 신병을 구타한 사건은 우리 부대에선 다음 날이면 잊혀질 사건이었다. 오히려 선임병들은 이제서야 제대로 군인이 된 것 같다며 나를 존중해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 큰 상처를 주었다. 현일이가 받은 상처는 이미 내가 어쩔 수도 없는, 스스로 이겨 내야 할 상처가 되어있었고 다행히 잘 헤쳐나가는 것 같았지만 현일이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내 죄책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공공연히 일어나는 부대 내의 폭력에 신경질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일로 가까운 선임병들과도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심지어 행정 보급관에게서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는 말로 에둘러 지적을 받기도 했다. 휘진이 녀석은 부대 생활이 좀 편해졌는지 자신이 싫어하던 고참들이 하던 행동을 조금씩 따라 하곤 했다. 후임병들은 그런 휘진이를 뒤에서 바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박 휘진의 앞 두 글자를 세게 발음하다 보니 생긴 별명인 듯 했다.

 

병장 2개월차에 난 행정 보급관을 찾아가 내무실장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행정 보급관은 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충실하게 군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내무실장직을 맡겨주었다. 사실 내무실장직은 짬밥이 되는병사들 입장에서 귀찮기만 한 자리였고 내 경우엔 후임병보다 선임병이 더 많은 일명 꼬인 군번이었기 때문에 내무실장이 된다 한들 그다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무실장에 자원한 건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 곳의 지긋지긋한 폭력의 고리를 끊어 내는 것. 최소한 내무실장으로부터 내려가는 폭력의 폭포를 멈추는 것이었다. 나보다 선임병이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원하기 전에 휘진이 녀석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녀석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무실장을 맡은 후 한 달여가 지나자 집합 시간에 모인 나보다 선임 병장들이 내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 내무실장. 요새 애들 너무 빠졌어. 너 애들 교육 안 시키냐?”

그래, 박 병장. 얼마 전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일말한테 밥 좀 타오라고 시켰더니 사람이 없어서 못한다고 그러더라? 씨발, 서러워서 아프지도 못하네.”

교육 시키겠습니다.”

, 박 성철이. 내무실장 달았다고 뵈는 게 없냐? 삐리한 물병장 새끼가. 니가 뭐 한다고 그러는지 아는데, 그 따위 짓 계속하면 너 병장 대우 안 해준다?”

죄송합니다. 교육 시키겠습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 졌고 병장들은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길 원했다. 내가 보기에 군기가 빠진 병사는 없었다. 논리는 단순했다. 폭력이 없어지면 그들이 쉽게 누릴 수 있었던 부당한 자유를 누리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내 후임 병장들과 회의하여 확실히 결정을 하라는 결론을 내고는 선임 병장들은 각자 내무실로 흩어졌다. 그나마 그 정도도 내무실장이었던 나를 어느 정도 배려해 준 것이었다. 후임 병장들이라고 해 봤자 나와 휘진이 녀석 동기들, 갓 병장이 된 다음달 군번뿐이었다. 옥상에 모두 모이자 휘진이 녀석의 동기가 말을 꺼냈다.

박 병장님, 손 좀 대긴 대야 되요. 요새 위에 병장들 너무 압박해. 내가 보기에도 애들 좀 빠진 것 같고.”

어디가 어떻게 빠졌는데.”

솔직히 밥도 안 타다 주는 건 좀 그렇지. 나 때 그렇게 했으면 다 죽었지.”

밥을 왜 타다 줘야 하냐. 밥 타다 주는 게 군기랑 무슨 상관이냐. 군인이 자기 밥 먹으러 안 가는 게 군기 빠진 거 아니냐.”

얼마 전엔 이병 새끼가 내 얼굴 똑바로 쳐다보면서 경례하고 지나가더라고. 눈깔을 확 뽑아 버릴라다가 박 병장님 보고 참았어.”

······

한 명, 한 명의 말을 받아주다 보니 슬슬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자신의 동생 같은, 아니 거울 같은 후임들을 보며 어떻게 저런 말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미 저들은 신병 때 그리도 무섭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고참이라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잠자코 있던 휘진이 녀석이 입을 떼었다.

박 병장님. 박 병장님 물렁한 거 알고 있었는데, 오늘 같은 일 났는데도 계속 그러는 건 아니지. 이러다 진짜 병장 달고 단체로 대가리 박는 수가 있어요. 내무실장이면 그 정도는 책임져 줘야 되는 거 아녜요. 병장의 권리!”

나는 황당함에 한동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 병장의 권리? 병장의 권리가 뭔데? 자기 귀찮은 일 후임에게 다 미룰 수 있는 거? 자기 기분 나쁠 때 후임에게 맘껏 풀 수 있는 거? 아무 이유 없이 애들 괴롭혀서 발소리만 들어도 불안에 떨게 만들고는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거? 니가 말하는 병장의 권리가 뭐야?”

에이, 그렇게까지 말할 껀 없잔수. 솔직히 박 병장님 정책 땜에 우리 병장들 다 손해보고 있는 건 맞잖아요. 죽도록 맞아가면서 겨우 병장 됐는데 애들이 우릴 호구로 봐요. 얼마 전엔 내가 지나가는데도 일병 나부랭이 새끼가 티비 보면서 쳐 웃고 있더라고. 이건 아니지. 그지 같은 부대 들어와서 지금껏 같이 고생 했는데 박 병장님은 본전 생각 안나요?”

본전 생각? 뭐에 대한 본전 생각! 니가 삐리할 때 나한테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얘기했던 건 똑똑히 기억난다, 이 자식아!”

에이 썅! 다 지난 얘기 가지고 그게 뭐 어쨌다고! 박 병장님은 뭐 사람 안 팼어? 현일이 생각 안나? 박 병장님이 산 증인이잖아요! 그래, 박 병장님에게 뒈지게 맞았던 현일이랑 한 대도 안 맞았던 준석이. 지금 누가 군생활 더 잘해요? 현일이는 놔둬도 알아서 잘하잖아, 빠릿빠릿하게. 준석이 뺀질대는 거 알죠? 그 자식 내가 한 번 손봐줬어야 했는데. 그냥 풀어준다고 다 잘하는 게 아냐. 적당히 쳐 맞아야 사람 되는 거지! 박 병장님은 혼자서 고고한 척 하지만 원래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앞뒤 딱딱 맞는 동물이 아니란 거 몰라요? 그냥 더러운 꼴 봤으니 더러운 짓 좀 하다가 나가면 그뿐이에요! 씨발, 이 더러운 곳!”

어느 순간 귓가에 찌잉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휘진이 녀석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목소리가 멀어질수록 검은 감자 같이 생긴 녀석의 얼굴과 곤충 같은 눈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그래, 현일이가 더 빠릿빠릿하긴 하지. 그래서?’

속에서 무언가 역겨운 게 올라왔다.

어차피 잘 해줘 봤자 고마운 거 모르고 기어오르는 거 꼭 당해봐야 알아요? 그리고 내가 처절하게 당한 게 있으면 누군가에게 풀어야 하는 것도 이 세상의 이치야. 억울하면 그 자식도 누군가에게 풀어버리라지! 박 병장님이 꼭···

굴레다. 진흙탕을 구르는 바퀴다.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인간의 마음이 이리저리 비틀린 수레바퀴처럼 빙글빙글 헛도는 것만 같다. 그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sebyul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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