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이어지고 들러붙다

2012.09.10 16:2109.10




눈보라 그친 고요한 설원에 조그만 집 하나가 홀로 섰다. 나무판자만 이어 붙여 만든 허름한 집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지 굴뚝으로 연기가 피었다. 판잣집 안벽은 바람을 막으려는 듯 가죽이며 목판, 종이들이 못 박혀 있었다. 허나 모두 그 안에 그림을 품었다.

박 본은 나무판 하나를 벽에서 떼어냈다. 유일하게 채색이 된 그림으로, 절반은 새파란 하늘에 그 아래는 설원이었다. 본은 나무판을 짐에 넣었다.

그는 짐을 어깨에 걸쳤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술에 곯아떨어졌다. 본은 몰래 작은 술병 두세 개를 짐 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곤 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문 앞에 섰다.

“구신잡이 과거 보러 가느냐?”

아버지의 너른한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기요.”

아버지는 기침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잘 보고 오너라.”
“과거 합격하면 그대로마 구신 잡으러 가니 다시 올 일은 없찌비.”
“기지. 내 잊고 있었구만.”

본은 털모자를 썼다. 아버지는 두리번거리는 꼴이 술을 찾는 모양이었다.

“내 이제 가면 아바지 혼자 죽어야 하겠소꼬마.”

본이 말했다.

“꺽정 말고 가 보라구.”

아버지는 휘이 손짓을 했다. 본은 절을 하고서 집을 나갔다.

절 두 번 하였으니 아버지 돌아가실 때의 예는 미리 하였다. 본은 눈밭을 걸으며 눈물을 냈다. 저 냥반 내 떠난 지 사흘도 되지 않아 죽을 끼라. 그는 애꿎은 짐끈을 쥐어 멨다. 그리고 정 든 고향을 떠나갔다. 아버지 남겨둔 작은 집은 추운 설원에 영원히 남았다.





박 본은 귀신잡이군 해치아달의 첫 시험에서 아버지 이름을 말했다가 당장에 시험에서 떨어졌다. 결국 근처에서 잡일이나 하며 일 년을 버티고 다시 과거에 응시했다. 다행히 시험 담당자가 바뀌었고, 그는 본의 신상을 듣고도 불편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본은 훌륭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해치아달에 들어갔다. 그리고 6년이나 지나서야 기총의 자리에 올랐다. 십 년 전 아버지가 지은 죄는 여전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덕분에 그 아들도 눈총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울호국國의 해치아달 영노사 하늘누리초 소속 설서기 기총이었다. 기총은 평균 81명의 군을 부릴 수 있는 직위였다. 본은 진급하여 뛸 듯이 기뻤으나, 정작 자리에 앉으니 상관들은 그에게 일을 맞기지 않았다.

해치아달은 악귀 사건의 위치와 규모, 사안의 중요성에 맞게 각 부대 단위별로 얼마든지 개별 활동이 가능하게 되어있었다. 그에게 일이 떨어지질 않으니, 그는 기총이 되고서 힘 한 번 써보지 못했다. 결국 아랫사람들, 즉 대를 이끄는 대총들이 출사하는 걸 허가만 해주는 꼴이 되었다.

박 본은 갈수록 답답했다. 그는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해치아달에 지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랫사람들의 놀림감이고 윗사람의 멸시와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병영 안에서라도 뭔가 해보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먹통이었던 설서기의 무구 보급을 해결하고, 악귀 정보 서적들을 구입하여 병영 내에 안치했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기총이 아닌 일개 병사였을 때는 열심히 구르기라도 했다. 허나 지금은 앉은뱅이 군인에 가시방석이었다.

까마귀가 날아온 날, 결국 그는 최후의 결단에 이르렀다.

까마귀가 물고 온 것은 수꾸바윗골이라는 광산 마을에서 온 구조 요청이었다. 광산에서 바위로 된 괴물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머지는 숨어있다고 했다. 동굴이라, 본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쪽지를 들고 방을 나갔다. 이 신청이 거부되면 모든 걸 그만두고 하야할 생각이었다. 지루한 일상으로 풀어진 몸에 각이 잡히고 힘이 들어갔다.

출사신청을 받은 건 김자 선우로, 하늘누리초 초관을 맡고 있는 이였다. 그는 옛날 박 본의 아버지와 함께 싸운 전적이 있었다.

본은 선우가 아직 기총의 자리에 있을 때 들어왔었다. 선우는 뛰어난 전사인 본이 아비의 죄 때문에 구르는 걸 불쌍히 여겼다. 아버지와의 옛 인연도 있고 해서 남몰래 챙겨왔다. 그는 본의 아버지가 누군지 소문이 나지 않게 조치했으며, 본이 기총으로 진급한 것도 모두 선우가 힘 쓴 덕이었다. 하지만 기총부터는 다른 이들 눈길에 더 이상 도와주지 못했고, 그저 탁상군인으로 앉혀 놓고  있었다.

선우는 본의 신청서를 받고 한숨을 토했다. 그는 본에게 힘써보겠다고 하고 밖으로 내보냈다. 사실 그에게도 내심 본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본이 좋은 군인이긴 했다. 하지만 아들은 아비를 닮는다던데, 과연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대역죄인이지만 박 본은? 그저 죄 없는 아들일 뿐이었다. 게다가 상관으로서 훌륭한 군인이 썩어가는 걸 지켜볼 수도 없었다.

선우는 밤이 되서야 박 본을 불러들였다.

본은 병영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군을 나가면 무얼 할까 생각했다. 다시 붓을 잡아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가 달을 감상하는 중에 병사 하나가 초관님이 부르신다며 말을 전했다. 그날 밤 본의 심장을 조이는 끈 하나가 풀어졌다.

이튿날 설서기의 모든 병사가 병영에 소집됐다. 병영 마당은 청색 갑옷으로 가득 찼다. 박 본은 그들을 이끌고 출사했다. 병사들의 수군거림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번 사건만 잘하면 없어질 불평들이었다. 본은 병사들에게 엄격한 얼굴을 보이면서도 마음은 들떠 겨우 감추었다.

설서기는 총 88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58명이 싸움에 임하는 전사로, 본의 뒤에서 대열을 맞춰 따랐다. 그 중 절반은 환수몰이 넷이 부리는 용충 두 마리 위에 타고 다녔다. 용충은 머리는 용, 몸은 애벌레인 덩치 큰 환수였다. 전사들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반씩 번갈아 탔다. 생활병은 모두 25명으로 용충이 끄는 수레 주위를 걸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반은 용충에 타거나 수레에 올랐다. 설서기의 유일한 무당인 선우려는 말을 타고 앞줄에 섰다.

삼 일째에 설서기는 혹불이 떼와 마주쳤다. 혹불이는 온 몸이 딱딱한 혹 천지인 키 작은 요괴였다. 정찰대가 발견한 무리는 어림잡아 서른 마리는 되었다. 박 본은 정찰대의 보고를 받고서 용충과 생활병을 바위산 뒤에 숨겼다. 나머지는 곳곳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단단한 혹을 뚫을 수 있게 도끼와 곡괭이로 무장하게 했다. 하지만 혹불이는 바위산으로 오다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향했다.

“기총, 저 늠드 가는 길에 마을 하나가 있꼬마. 새끼들 분매이 사람 냄새 맡꼬 짝 튼 것 가웁찌비.”

서노대 대총 문자 야릴띠우가 말했다.

“근디 우리 달음박으론 저 늠들 못 따라잡꼬마. 기총, 어찌 함둥?”
“나는 말이 있으니 내가 미끼로 가갔꼬 데려오겠꼬마. 대총드은 병사드한테 손도끼 쥐어주고 기다리라.”
“예? 혹불이들 수도 만으고 발도 빨라갔꼬서리 말로도 안디얄텐데….”

박 본은 말을 달려 혹불이 떼에게 갔다.

혹불이들은 본을 보자마자 두 발로 걷던 폼을 버렸다. 짐승처럼 네 발로 땅에 서서 으르렁댔다. 본이 무리 가까이서 말을 멈추고 등을 내보였다.

괴물들이 땅을 차며 튀어나왔다. 본은 말의 배를 찼다.

혹불이 하나가 달려들어 말꼬리를 뜯고 떨어졌다. 혹불이들은 벌써 말 엉덩짝까지 붙었고, 본은 칼을 뽑아 베어냈다. 하지만 칼은 키 작은 혹불이까지 닿지도 않거나 두꺼운 혹을 뚫지 못했다. 한 놈이 도약해 본의 옆구리를 물고 매달렸다. 피가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싸우다보니 어느새 바위산 안이었다. 박 본은 말을 돌려 두 발로 세우며 칼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투척!”

손도끼가 사방에서 날아왔다. 혹불이들은 날아드는 충격에 휘청댔다.

본이 재차 소리쳤다.

“공격하라!”

매복해있던 병사들이 몰려나와 혹불이들을 공격했다. 도끼가 머리를 쪼개고 곡괭이가 가슴을 꿰뚫었다. 박 본은 칼로 상처를 내어 그 속에 칼을 수차례 박아 넣었다. 눈을 찔러 파 들어가거나 다리를 베어 쓰러뜨렸다. 그 후엔 목을 마구 쳐 잘라냈다.

전투가 끝나니 해가 산허리에 걸렸다. 주변은 혹불이 시체와 검푸른 피로 가득했다. 설서기에 사망자는 없었다. 병사들의 푸른 갑주만 피에 젖어 짙게 물들었다.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어, 박 본은 야영 준비를 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야영지를 다 치고 나면 술을 마셔도 좋다고 전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곧 잿빛 땅에 해가 녹아들었고, 병사들은 검게 변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어두워지자 횃불이 피었다. 무당 선우려가 혹불이 시체 산에 정화 굿을 행했다. 신들린 목소리가 밤공기를 흩뜨렸고, 굿이 끝나자 술판을 벌였다.

본은 무당의 허락을 받고 혹불이 시체를 하나 끌어다가 천막 안에 놓았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 혹불이를 그렸다.

“기총!”

병사가 불쑥 들어왔다. 그가 보니 거골대 대총 김자 서걸이었다.

“서걸 대총. 무슨 일임두?”
“기총, 혼자 천막 안에 틀어박혀서 뭐하는 검매! 나와서 술 마시지 않고!”
“아, 나는 할 일이 있어서리….”
“모두가 기총을 찾는다우! 어서 나오시라고!”

서걸은 본을 끌고 밖으로 데려갔다. 본이 모닥불에 앉자 병사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본과 함께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시간이 흐르자 남은 건 박 본과 대총들, 그리고 몇몇 병사뿐이었다. 본은 낮게 기운 달을 보고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꼬마. 이제 모두 들어가서 자라우.”
“내가 모셔 드리겠고마.”

한 병사가 일어나 비틀거리는 본을 부축했다.

“자네가 누구지?”
“백각대 대총 김자 석전이고마.”
“그렇구만.”

천막에 본을 누이고 석전이 물었다.

“혹불이 시체는 뭐 하러 여기 누여놨슴두?”
“그리려고 눕혔꼬마.”
“혹불이 그려서 어따 쓰라구?”
“내 병영에서 구신사전 보니 허술한 데가 마으갔고서리, 내 직접 사전 만드려 하꼬마.”
“그림 좀 볼 수 있겠슴둥?”

본은 그림을 석전에게 건넸다.

“잘도 그리시는구만. 어디서 그림 배웠었슴매?”
“어릴 때 잠깐 배웠었꼬마. 어릴 적 아바지가 잘 나가실 때. 그땐 꿈도 그림쟁이였지비.”
“아바지가 무슨 일을 하셨슴매?”
“똑같이 구신잡이군 하셨꼬마. 박 정구라고 말하면 알겠지.”

석전은 흠칫 놀랐다.

“기총이 박 정구네 아새끼라는 말임두? 그 대역죄인 박 정구 말임두?”
“그렇고마.”

석전은 뭐라 말하려다 누군가 안에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무당 선우려였다.

“오늘 혹불이한테 상처를 입으셨지요? 치료를 해드리러 왔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나가보겠소고마.”

석전은 밖으로 나갔고 그녀는 본에게 가 앉았다. 윗도리를 들춰보니 복부를 감은 붕대 위로 피가 번져 있었다.

“겨우 붕대나 감아놓으셨군요. 이런 꼴로 무슨 술을 그리 잡쉈습니까.”
“별 거 아니오.”
“아니긴요. 상처가 곪으면 건장한 사내도 죽는 법입니다.”
“건장한 쓰나이는 아예 상처를 입지 않는 법이기.”
“그럼 기총님은 건장한 사내가 아니란 말이십니까?”
“그런 셈이겠꼬마.”

선우려는 무당방울을 꺼내 상처를 쳤다. 본은 목구녕에서 신음이 끓었지만 참아냈다. 우려가 중얼중얼 주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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