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작위적인 당신의 이야기


  나는 투명한 유리잔에 손을 댄다.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 아래로 스며든다. 느릿하게 코에 닿는 케모마일의 향기. 손바닥의 냉기가 찻잔의 온기와 섞여 드는 짧은 감촉. 손이 살짝 저려온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손끝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케모마일의 부드러운 향과 온기 중 무엇이 나를 안정케 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 때 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 속으로 사라진다.
  진구는 택시를 잡아타고 눈을 감는다. 모멸감과 안정된 느낌, 될 대로 되라는 게으름과 서슬 퍼런 자기혐오가 온 몸을 들끓고 있다. 한겨울 새벽녘의 거리를 돌아다니다 택시 안에 몸을 누이니 취기가 오를 것이다. 뿌옇게 흐려진 정신 속에서 진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자판을 다시 두드린다.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떨림이 내 온몸을 부들부들 떨리게 한다. 진구는 방금 모텔 사바나에서 나왔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주점 매니저와 스물다섯은 족히 넘었을 주점 아가씨가 양 옆에서 그를 부축하여 겨우 401호실에 그를 던져놓았다. 아가씨의 성화에 못 이겨 새파란 매니저에게 팁을 안겨주고 401호실에 진구와 아가씨만이 남는다. 아가씨가 샤워를 하는 동안 진구는 침대 옆에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가씨의 잔소리가 잠깐, 아이 키만큼 쌓아놓은 목욕타월로 토사물을 덮어버린 것이 잠깐, 인사불성인 진구와 아가씨가 침대 위에서 몸을 섞은 것이 잠깐, 곯아떨어진 진구에게 뭐라 한마디를 남기고 진구의 지갑에 돈을 꺼내간 것이 잠깐. 즉석사진처럼 토막 난 단락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나오며 자판을 두드리던 나는 다시 진구의 택시로 돌아온다. 진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모텔을 나와 정처 없이 길을 헤맨 진구의 모습은 여백 안에 있다. 그러나 자판의 두드림과 함께 다시 나타나 택시 안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진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다시 케모마일을 한 모금 마신다. 차디찬 손으로 입가를 가리자 손바닥에 다시금 온기가 살아난다. 수족냉증은 대개 여성의 자의식이 만들어내는 환상 중의 하나지. 편집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예민함은 젊은 여성들이 불편해하는 자신의 특성으로 토로하는 것이지만 예민함과 섬세함은 여성의 자의식이 숭상하는 환상이다. 둔하고 무감한 여성을 원하는 이는 여자건 남자건 아무도 없다. 섬세함을 추종하는 젊은 여성 특유의 자의식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들어내는 환상 아닌 환상 – 수족냉증의 환상. 편집장은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팔 년 전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나누던 무리들의 시시껄렁한 잡담을 기억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개 같은 편집장. 나는 손발이 파랗게 얼어붙다가 빨갛게 부르터지는 편집장을 잠시 떠올리며 케모마일을 입에 가져간다. 케모마일을 꾸준히 마시는 게 좋을지도. 수족냉증은 여성의 쓸데없는 정서부터 가라앉혀야 되니까. 물론 따뜻하기도 하고. 의학적 타당성을 물어본다면 당연히! 없겠지? 물론 편집장은 수족냉증에 관한 헛소리도 모자라 그 처방전까지 뻔뻔하게 얘기했던 사실도 역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팔 년 동안 내가 중독자처럼 케모마일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수 없을 것이다. 개 같은 편집장. 나는 나도 모르게‘개 같은 편집장’이라고 자판을 두드리다가 황급히 백스페이스를 누른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솟아난다. 나는 두 손을 비비고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집중한다. 사라진 ‘개 같은 편집장’의 공백 위로 다시 진구의 이야기가 두드려진다.
  평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있었다면 미약한 혐오와 동정 정도였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떠밀리다시피 들어갔고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며 참고조차 되지 못한다. 내 피와 살과 뼈가 내 의지로 들어간 공간. 성이 매매되는 자본의 교집합. 빛깔이 있다면 새빨간 바탕에 검붉은 점이 흩어져 있을, 그 곳은 쾌락을 사고 사람을 사고 돈을 사는 곳이다. 그런 구매의 공간에서 진구는 첫사랑을 만났다. 벌거벗은 두 나체는 오롯이 서로를 알아보고 있었으나 둘은 사람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진구는 위에서 그녀를 억눌렀고 그녀는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 이후부터 진구는 그 곳을 스스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자신이 그 곳에 발을 딛었을 때처럼, 자신의 의지로서.    
  자판을 두드리던 손이 멈추고 나는 오늘 아침 편집장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서로 알게 된 지 햇수로 십 년이었지만 편집장이 내 집을 찾아왔던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가 새로 연재할 예정인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편집장은 솔직히 말했었다.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소설의 창작과 직접 관련된 어떠한 것에도 편집장의 권한은 닿지 않는다. 편집장은 그저 그녀와 십 년을 알아 온 친구로서, 솔직히 이야기했을 뿐이다. 아, 물론 작위성이 가지는 다양한 힘이 있을 수 있고 단지 단편적인 작위성만으로 전체를 호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가지는 작위성이 어떠한 맥락이나 의도로써 부합되지 않는다면, 작위 자체가 문제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작위적인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잖습니까? 가난한 대학생이 유흥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야기는 어쨌든 소재 자체만으로 신선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성매매업소에서 만난 아가씨가 십 년 만에 만난 첫 사랑이라는 것은, 흠. 너무 작위적인 설정 같습니다만?
  나는 찻잔에 남은 케모마일 차를 단번에 입 속으로 털어낸다. 등가죽을 쥐고 흔드는 것 같은 떨림이 잠깐 멈추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워드 프로그램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진구의 세계는 너무나도 작위적이다’라고 자판을 두드리다 나는 백스페이스로 그 문장을 지운다. 그러자 하얀 공백 위에 하얀 글씨체로 진구의 작위적인 세상이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하얀 공백 위에 떠오르는 흰 글씨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기에 지울 수도 없는 진구의 세상을 검은 글씨로 오려내려 몇 번을 시도하다, 자판의 두드림을 멈춘다. 역시, 너는 개 같은 편집장일 뿐이었어. 나는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본다. 쿨러가 돌아가는 소음이 발광하다 이내 사라진다. 노트북의 소음이 사라진 곳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를 떠올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것은 일 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대학원을 석사수료로 끝내버리고 그다지 유력할 것 없는 비주류문학웹진의 필진으로 자판을 두드릴 때 나를 소설가로 부르는 것은 나뿐이었다. 지방이긴 해도 꽤 유력한 문학계간지에 처음으로 글을 청탁 받았을 때는 얼음장 같은 내 손만큼이나 미래를 냉혹하게 보던 나도 미약한 흥분을 느꼈었다. 그것은 시작하는 자는 이미 절반에 도달했다는 해묵은 금언이 가지는 헛된 희망이었고 그에 따르는 헛된 흥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예상했듯이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내 글을 종이 위에 인쇄된 글로 볼 수 없었다. 인터넷이 마련해주는 웹 공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그것은 하늘 위에 써내려가는 바람의 소설이었고 바다 위에 새기는 물의 소설이었다. 나는 자고 일어나면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웹진작가로 자판을 두드렸다. 편집장은 원래 나와 같은 웹진의 필진 중 한 명이었고 대학원 선배였다. 환상소설을 쓰던 그는 꾸준히 출판의 기회를 얻어 자신의 글을 종이에 인쇄할 수 있었고 주류 문단의 주목도 받았다. 나는 다양한 소재와 시도와 실험으로 내 창작물에 드넓은 스펙트럼을 부여코자 했으나 내 글은 언제나 로맨스소설로 읽혔다. 그리고 작년 초 그가 편집장이 되어 웹진을 맡게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로맨스소설을 지키는 웹진작가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일 년 전 이맘때였고 나는 그것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부일 것이라 여겼었다. 변변한 직업 하나 없이 자판 두드리는 것으로 지금까지 생을 연명해 온 것이 이젠 신기한 일 취급도 못 받게 되었던 때였다. 그 무렵 나는 택배 하나를 받았다.
  집 안의 수분을 모조리 삼키는 난방열이 싫어 방 안은 냉골이었다. 나는 택배를 받고 부리나케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훈훈한 장판열로 냉기에 뻐근해지는 손마디를 녹이며 나는 박스를 뜯었다. 동네 제본소에서 했음직한 널널한 스프링제본의 인쇄물들이 박스 안에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게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쉽게 사라졌다.
‘당신이 하늘에 닿으면’ written by RAIN.
‘사랑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written by RAIN.
written by RAIN, written by RAIN, written by RAIN.
  모든 인쇄물에 낙관처럼 찍혀 있는 글쓴이의 이름 RAIN은 웹진에서 사용하는 내 필명이었고 그와 함께 있는 제목들은 분명히 내 소설의 제목들이었다. 황당함을 느끼기에 앞서 여상스러운 차분함으로 나는 제본된 내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편의 장편과 세 편의 중편, 열여섯 편의 단편이었고 모두 내가 웹진에 올린 작품이었다. 나는 다시금 황당함을 느끼기에 앞서 노트북을 켜고 웹진 폴더에서 작품 목록을 유심히 확인하였다. 두 편의 장편과 세 편의 중편, 열여섯 편의 단편이 노트북 안에 담겨 있었다. 택배의 내용물은 모두 내 작품의 인쇄물이었고 웹진에 올린 내 작품의 전편이 인쇄물로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나는 파안대소했다. 그 때 내 손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면 ‘푸하하하’ 라고 열 번은 두드렸을 법한 큰 웃음소리로 나는 웃었다. 황당함은 채 나타나기도 전에 사라졌고 나는 웃음을 진정시키며 한 번도 인쇄된 적 없었던 작품들의 인쇄물을 신기하게 살피게 되었다. 짤막한 단편 하나를 읽으며 나는 싱긋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여상스럽지 않은 쾌활함으로 인쇄물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그때서야 택배를 보낸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용물에는 인쇄물 외엔 어떠한 메모나 편지가 없었다. 박스를 살펴보니 운송장에는 송하인의 주소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주소와 이름, 그리고 송하인의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송하인의 이름은 누가 봐도 송하인의 본명으로 볼 수 없는 이름이었다. 보낸 이 RAIN.
  받는 이가 RAIN이 아니라 보낸 이가 RAIN?
  아니다.
  받는 이도 RAIN이고 보낸 이도 RAIN이다.
  송하인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송하인을 확인한 것과 전화벨이 울린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었으나 나는 이상한 확신을 갖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안녕하세요. RAIN이라고 합니다. 방금 택배 보냈는데 받으셨나요? 나타나기도 전에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황당함이 나를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나는 별 불쾌함 없이 그의 전화를 받아주었다. 통화는 언제나 삼 분 안에 끝났고 전화 오는 횟수도 신경을 자극할 만큼 빈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호기심이 그의 전화를 끊지 못하게 했다. 웹 공간의 소설들을 인쇄하여 보낸 첫인상의 미묘함이 나를 이끈 것인지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알아내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하는 적극적인 첫 독자의 등장이 나를 이끈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RAIN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돋우어 얘기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목소리만으로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나와 비슷한 또래 정도 되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통화 때 나는 일부러 그에 관한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 역시 자신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내 작품만을 칭찬하였다. 그렇게 두 달 가량 펜팔이 되어 서신을 교환하듯 정기적으로 통화를 하게 되자 내 심경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RAIN은 어떠한 사람인가. 송하인의 이름으로 찍혀 있던 그의 가명 외엔 그에 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전화가 오면 그저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새로 올라온 글에 관해 그가 칭찬일색의 감상을 늘어놓으면 으레 형식적으로 답해주고는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하는 식의 형식. 이러한 대화형식은 두 달 내내 지겨울 만큼 똑같이 반복되었고 나는 차츰 대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색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용을 전달하는 그의 목소리와 목소리가 구성하는 대화형식의 의도. 그의 목소리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목소리를 돋우는 그의 습관은 아무리 좋은 목소리라도 반복되어 나타날 경우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상쇄하는 변주로 오히려 작용한다. 올곧게 내 작품을 칭찬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대화내용엔 RAIN 자신을 궁금하게 하는 여백을 오히려 강조한다. 나는 서서히 나의 호기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독자가 아니라 노련한 작가의 수법이 아닌가. RAIN을 알게 된 지 두 달이 흘렀을 때 나는 자판 앞에서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닌 RAIN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고민하는 나를 보며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놓은 덫에 기꺼이 걸려드는 독자를 비난할 순 없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다음 통화를 기다렸다.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듯 RAIN에게 가벼운 노크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RAIN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전화를 했지만 일주일 간격을 두어 정확하게 전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예정일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겨울의 끝이 보이지만 봄의 소식은 아직 요원하던 어느 날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수화기를 들었고 RAIN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약간의 지루함과 나른함마저 느끼며 나는 일상적으로 통화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차분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그런데 이렇게 통화한지도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 제대로 통성명도 못한 것 같아요. 뭘 하시는 분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요. 그런가요. 이번에 연재 완결하신 ‘나홀로 피운 꽃잎’ 잘 보았습니다. 베란다로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의미 없는 나의 되물음 – 베란다요? - 은 대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침묵 속에서 나는 RAIN이 머금은 승리자의 미소를 보는 듯 했다. 나는 천천히 창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람은 살랑살랑하지만 바람결에 스민 쌀쌀함이 아직 상쾌하진 못한 날씨였다. 나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베란다를 훑어보다 탁자 위에 놓인 박스에 시선을 붙잡혔다. 이게 무슨 박스일까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문득 차갑게 굳은 두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언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온기를 전하고 싶었지만 손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누가 놓아둔 건지 알 수 없는 박스가 입을 벌리고 누워 있다. 나는 하얗게 굳은 손으로 박스의 입을 더욱더 벌렸다. 박스 안엔 꼭 맞는 크기로 누워 있는 익숙한 스프링제본의 인쇄물이 담겨 있었다. 검은 잉크로 수를 놓은 것 같은 표지의 글자는‘나 홀로 피운 꽃잎’ written by RAIN의 형상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며칠 전 웹 공간에서 완성되었던 연재소설 ‘나 홀로 피운 꽃잎’의 인쇄본을 꺼내보았다. 누가 놓아둔 건지 알 수 없는 박스 안에는 누가 보더라도 나의 작품임이 확실한 인쇄물이 있었다. 나는 흘린 것처럼 인쇄물을 탁자에 떨어뜨렸다. 샛노랗게 얼어버린 두 손바닥으로 양 뺨을 문지르며 온기를 나누자 손끝에 저릿한 느낌이 퍼져 나간다.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두 달 동안 왜 이 생각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는지, 나는 정말 의아할 뿐이었다.
  자신을 스토킹하는 스토커, RAIN이라는 남자.

  그는 ‘편집장의 머리말’을 갈무리하고 운영진 S에게 메일을 보냈다. 새로 꾸민 웹 공간의 대문 어귀에 자신의 소품글은 환영인사처럼 걸릴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마감시한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럭저럭 마무리는 이루어졌다. 메일의 수신확인을 마치고 그는 웹진 ‘너머공간’ 74호에 방점을 찍었다.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마시자 억눌려 왔던 피로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다음 편집장을 맡아줄 사람을 떠올려 본다. 필진을 하고 있거나 필진의 경험이 있는 운영진들의 얼굴이 이력서 사진첩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작년 초에 편집장을 맡은 이후 그는 월례행사처럼 마감이 끝날 때마다 다음 편집장의 후보들을 헤아려보곤 했다. 그리고 이게 무슨 무의미한 생각인가 싶을 때까지 진지하게 후보들을 검토해보곤 했다. 또 망상이군. 가볍게 혼잣말을 지껄이며 그는 깨끗하게 차기 편집장 후보명단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는 자연스러운 생각의 연결고리를 끌어올리듯이 그녀를 떠올렸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원 시절이었겠지만 그는 대학원 시절에 그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인사를 하고 지내며 으레 만났던 여느 대학 후배들과 변별되지 않는 흐릿한 인상의 그녀. 딱히 그의 기억을 붙잡아 둘만한 추억은 없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가 기억 속에서 그녀를 붙잡기 시작한 것은 웹진 활동을 할 때부터이다. 창작에 뜻을 둔 이후 그가 관심 있게 찾아갔던 한 웹진사이트에 그녀는 이미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취향과 다른 글을 쓰고 있었지만 성실한 작가였고 오래된 작가였다. 그 이후 웹진에서 오 년 넘게 그녀를 봐왔지만 그는 한 번도 연재지연이나 연재를 중단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성실했기에 오래 활동할 수 있었던 웹진의 고정필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머리가 아파온다. 연재지연, 연재중단, 그로인한 고정게시판 회수, 고정필진에서의 제외와 같은 문제는 웹진의 편집장을 맡은 이후 언제나 그의 골머리를 썩이는 문제였으나 그러한 문제를 그녀가 주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편집장은 열 달이 넘도록 한 편의 글도 올리지 않은 그녀 - 웹진 필명 RAIN을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연재했던 ‘나 홀로 피운 꽃잎’ 이후 그녀는 팔 개월 동안 연재를 중단했었다. 지속적으로 웹상에서 연재재개에 대한 문의를 넣어보았으나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묵묵부답식의 답변뿐이었다. 고정필진 중에서 그다지 인기 있는 작가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연재중단이 웹진에 끼친 해악은 미비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로맨스작가 중에 그녀는 웹진의 터줏대감이자 대표 격이었기에 장기간의 연재 중단이 웹진에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환상소설만큼이나 아마추어 작가들의 고정 게시판 요구가 빈번한 로맨스 공간에서 육 개월 이상 연재가 중단된 게시판이 지속적으로 살아남고 있는 것에 대해 운영진 사이에서도 여러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연재재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고정게시판을 삭제할 수밖에 없겠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을 즈음에 묵묵부답이던 그녀에게 연락이 왔었다. 연재를 재개하겠다는 답변이었다. 편집장은 이제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연재를 재개하겠다는 그녀의 답변을 받은 것이 두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달 동안 한 편의 글도 웹진에 올리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게시판은 아직 살아있다. 적어도 이번에 마감이 끝난 74호까지 그녀의 게시판은 웹 공간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호까지 연재재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녀의 게시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게시판이 살아남아 있는 것도 편집장인 그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장은 웹진의 대장노릇을 하는 직위가 아니다. 한 편의 글도 없는 게시판은 다음 호 웹진 공간에서 사라질 것이고 편집장 역시 더 이상 그전의 성실함을 고려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연재만 재개한다면 일은 더 쉽고 편하고 평화롭게 끝날 수 있다. 얘기라도 한 번 해봐야겠군. 밍밍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삼키며 그의 생각은 부드럽게 내일로 기약할 행동으로 옮겨간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기한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았고 애석하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찾아가 오프라인 상에서 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별 일이야 있겠나 싶지만, 아무 일도 없이 이럴 까닭은 없다 생각하며.
  다음날 그는 아침 일찍 전화를 걸었다. 워낙 오래 전 번호라 이미 다른 번호로 바뀌었다면 웹상에서 연락을 취해야했고 그 역시 전화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대학원 주소록에 실려 있던 그녀의 전화번호는 숫자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그녀의 전화번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편집장이란 말에 그의 존재를 떠올린 것 같은 인상이었다. 만나기는커녕 전화로 얘기한지도 오랜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는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그녀는 어렸던 학생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오늘 시간이 괜찮다, 마침 새로 연재할 소설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는 말을 늘어놓았고 괜찮다면 저희 집에서 봤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였다. 목소리는 별 감정이 없었지만 그는 그녀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싶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워낙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는 대수롭잖게 생각을 흘려보내며 약속 시간을 정했다. 그녀는 그가 대학원 주소록에 실려 있는 주소지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는 주소지가 가리키는 곳을 찾아갔다. 이층 높이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돌담 오른편에 돌계단이 있었다. 흘러내리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좁은 계단을 오르자 청록색 철제대문이 힘겹게 올라붙어 있다. 초인종과 연결되어 있어야 할 손잡이 끝부분은 끊어진 전선이 꼬리를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단추모양의 손잡이를 옆으로 당기자 쇳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좁고 긴 콘크리트 마당을 걸었다. 좁다란 마당 끝엔 빨간 대야와 잡동사니더미가 보일러실 앞을 점거하고 있고 마당 오른편엔 두꺼운 반투명 유리가 덧씌워진 현관문이 붙어 있었다. 현관문 오른쪽에 매달려 있는 초인종 역시 끊어진 전선을 늘어뜨린 채 그를 맞이했다. 그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철제대문이 열리는 요란한 쇳소리가 초인종 구실을 했는지 그녀는 이미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모양이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그녀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당신이었군요.”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 발걸음을 잡아매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께름칙한 푸른빛이 그녀의 도드라진 광대뼈를 휘감고 볼을 따라 턱까지 흘러내려가 있다. 누런 피부에 덮여 있는 그녀의 턱은 쉴 새 없이 떨리며 입 안에서 덜그럭대는 충격음을 만들고 있다. 힘없이 당기는 양 입 꼬리를 보며 그는 그녀가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말라붙은 얼굴가죽이 뜯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미소를 보며 그는 그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살아있는지 의심을 품게 하는 몰골로 그녀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집 안에 들어섰다. 거실 방바닥에 앉아 그와 그녀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예의의 선상에서 모자람 없이 그녀의 안부를 묻고 난 뒤 연재중단에 관한 얘기를 꺼내었고 그녀는 자신이 요즘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둘의 대화는 비교적 차분하고 매끄럽게 이어졌지만 그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그녀의 안색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의 뒤편 허공에 시선을 놓아버리다가도 흠칫 놀라며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그가 하는 얘기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걱정하는 눈치를 알아서였는지 그녀가 잠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마실 것도 안 드리고 있었네요. 차 좀 내올게요.”
  그녀가 부엌에 가 있는 동안 그는 그녀가 이번에 새로 연재할 예정이라며 건네 준 소설의 초고를 보았다. A4용지에 인쇄된 초고를 읽다 그의 시선이 잠시 한 곳에 머물렀다. 그는 잠시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진구라는 사실에 시선과 생각을 붙잡힌다. 내용이 요약된 시놉시스를 읽고 초고의 내용을 읽는 와중에도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 진구에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알지 못한다. 부엌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의 손에 케모마일 찻잔 대신 쥐어져 있는 철제 방망이를 그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발가락이 아프다. 수화기를 괜히 발로 찬 것 같다.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석사수료로 대학원을 마치던 해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전화기를 발로 걷어차고 나는 울었었다. 편집장의 결혼식장에서 나는 학교 선후배들 틈에서 유령처럼 신랑신부의 축복과 행복을 빌었다. 유령에게 진심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가 기원하는 축복과 행복은 진심이었다. 한 줌의 웃음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 방울의 눈물도 없었던 평온한 하루였다. 그 자리에서 눈물이라도 흘렸다면 황당함과 비웃음을 양 매듭으로 삼아 나는 목이 졸리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을 토해내어 축복과 행복을 빌더라도 무의미 이상은 되지 못하는 유령이었고, 그는 내 온몸을 관통하여 지나간다 해도 머리카락 한 올 흩날리지 않을 마네킹이었다. 나를 아예 기억에서 삭제시킨 몇몇과 내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몇몇 사이에서 나는 말쑥한 예복을 입고 있던 편집장에게 축하인사를 건넸고 편집장은 예의바르게 내게 화답해주었다. 나를 못 알아보는 몇몇 이들처럼, 깍듯한 인사였다. 나는 언제나 편집장의 그 예의범절이 싫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새신랑에게 내 전화번호를 건네는 당시의 나를 설명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황당해하던 편집장의 얼굴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매끈한 예의를 자랑하는 그의 평소 표정이 아니었다. 깨져버린 마네킹의 실금 사이로 흐르는 인간의 피를 보며 쾌재를 불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내 전화번호를 받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별 일은 없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전화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전화가 오지 않은 건 당연했고, 다행이었지만, 나는 수화기를 발로 차버린 까닭에 오열을 하며 울었었다. 새끼발가락이 너무 아팠다. 당연한 울음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다행일 정도로 긴 울음이었다.
  어쨌든 그 이후 팔 년의 세월이 흘렀고 강산이 변했지만 나는 하나 변한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전화번호를 바꿔도 태연자약하게 걸려오는 RAIN의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다시 한 번 수화기를 발로 걷어찼고, 울었으니 말이다. 세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이루어진 RAIN의 성실한 스토킹은 그 내용에 있어 지독한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전화를 걸었고 택배로 선물을 보내왔으며, 가끔씩은 나도 모르게 집에 들어와 자신의 선물을 놓고 갔다. 어떠한 위해를 가하거나 전화상이든 선물로든 나를 모욕하는 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의 스토킹은 내용으로 보았을 때 광팬 수준으로 봐줄만 했다.
  그러나 분명 RAIN의 스토킹이 내게 전달되는 형식은 내용이 뭐가 어찌되었든 나를 찢어발기는 지독함으로 충분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전화번호를 모르는 상태로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RAIN은 여상스럽게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날에도 RAIN의 선물박스는 천연덕스럽게 베란다에 놓여 있기 일쑤였다. 선물박스를 뜯어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 올랐다. 피부를 벗겨내고 싶은 소름끼침이었다. ‘나홀로 피운 꽃잎’을 인쇄본으로 선물 받은 이후 나는 더 이상 자판을 두드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먹고 자는 것만큼이나 살아가는 습관 중 하나였던 글쓰기였다. 노트북을 켜고 자판을 두드리려 할 때마다 나 몰래 집 안으로 기어 들어왔을 RAIN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필의 오롯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내 글을 가장 사랑하는 독자를 가장 처참하게 배신할 수 있는 방법이 절필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웹진에 한 편의 글도 올리지 않았다.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좁은 땅덩이에 기어올라서라도 살아보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 같은 이 동네의 다세대주택들과 엉겨 붙은 집들이 빚어내는 미로 같은 골목길은 내게 안온함을 주는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장보러 나갔던 어느 날 확고한 발걸음으로 나를 쫓던 삼십대 괴한을 인식한 이후부터 나는 더 이상 이 동네를 안온한 보금자리로 느낄 수 없었다. 골목길로 내려오는 이층 계단 맞은편에 RAIN은 전봇대처럼 서 있다. 건너편 의류수거함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 집 마당을 올려다보는 RAIN의 눈빛이 보이는 것도 같다. 아니다. 이미 고장나버린 대문을 열고 들어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RAIN의 희끄무레한 실루엣이 내 눈에 똑똑히 보인다. 그것도 아니다. 이미 내 집 안에 들어와 베란다에 선물박스를 놓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RAIN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를 사로잡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집 밖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경찰의 대응은 어떤 면에선 나에게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었다. 범법행위로 입증될만한 사실이 아무것도 없었고 설령 잡히더라도 훈계 이상의 제재가 가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살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분노였다. 물론 솟아오른 만큼 사그라지는 것도 빠른 감정이었다. 잊고 있던 시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던 어느 날, 석 달 치 달력을 한꺼번에 뜯어야만 했을 때 나는 비로소 다시 겨울이 왔음을 느꼈다. 뽑아버린 전화선을 무의식중에 연결하고는, 다시 RAIN의 전화를 받고, 기계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RAIN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손이 저릿하게 떨려온다. 나는 차디찬 손을 부여잡으며 물을 끓였다. 거름망에 담긴 케모마일 두 스푼. 말라비틀어진 잎사귀가 끓는 물에 젖으면, 향과 온기가 손을 어루만진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케모마일을 마시는 부질없는 짓거리만큼이나 부질없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연재재개를 알리고 글을 구상했다. 그리고 RAIN은 내게 다시 글쓰기를 재개한 것에 대해 축하해주었다. 이번 소설을 기대한다고, 연재가 완결이 되면 꼭 인쇄하여 선물로 보내드리겠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저번에 보낸 케모마일 차는 잘 마시고 있냐는 이야기도 한다. 나는 내 피부를 모조리 벗겨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나는 단 한 편의 분량도 웹진에 올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RAIN에게, 이 세상에서 내 글을 가장 사랑하는 RAIN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복수는 절필이었다. 단 한 글자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RAIN은 계속해서 전화를 했고, 내 새로운 글을 독려했다.
  받는 이 RAIN, 보낸 이 RAIN의 택배는 점점 자주 내 집에 배달되었다.
  그 날도 RAIN의 택배는 어김없이 도착하고,
  나는 온 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애써 외면하며 박스를 뜯는다.
  박스 안엔 인스턴트 밥이 24개입 세트로 가득하다. 다른 박스엔 햄 세트가 들어있는가 하면 참치 캔이 여섯 묶음이나 들어 있는 박스도 있다. 생수가 가득 실린 박스가 배달되어 올 때는 옮기기가 무겁다. 케모마일이 담긴 박스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하니까. 받는 이 RAIN, 보낸 이 RAIN의 택배 박스가 점점 쌓이고 있다.  
  달력을 보아도 날짜를 알 수 없다. 시체마냥 굳어가는 손발과 끓는 것처럼 올라오는 온몸의 떨림으로 보아 아직은 겨울인 모양이다. 나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새로운 글을 독려하는 RAIN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전화선을 뽑는 대신에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쉬고 싶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보세요, 한열음씨 댁 맞습니까?
  RAIN이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를 전화상에서 들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나는 기억하기 힘들었다. 나는 분간할 수 없는 다른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편집장입니다. 열음씨?”
  RAIN이 아닌 한열음으로 불려본 것이 얼마만인지 나는 기억하기 힘들었다.

  로맨스의 환상으로 들어가는 일은 즐겁다. 아름다운 연인들을 갈라놓는 온갖 외부적 요인과 그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려는 둘 사이의 내부적 요인들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아름다운 환상을 직조한다. 그러나 가슴 시린 사랑의 변주곡은 끝내 세상에 울려 퍼진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듣는다. 로맨스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방해하는 더러움이 차고 넘칠수록 그것이 결국에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그 작위적인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로맨스소설을 쓰며 내 삶의 한 호흡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번 내쉬고 나면 사라져버릴 허망한 한 숨을 위해 나는 자판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집에 찾아오겠다는 RAIN의 전화를 받고 또 다시 걸려온 전화는 편집장의 전화였다. 편집장은 집에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분명 RAIN의 전화가 먼저 왔었는데 집에 찾아오겠다는 말은 어쩐지 편집장이 먼저 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RAIN이 가져다 놓은 이번 소설의 시놉시스와 초고 인쇄본을 바라보았다. 편집장이 찾아온다는 사실에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 찾아온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은 편집장이 아니라 RAIN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나는 마당으로 나와 보일러실에 처박혀 있는 잡동사니 중에서 철제방망이를 꺼내 부엌 한구석에 놔두었다. 나를 소설가라고 부르는 사람만큼이나 나를 지켜줄 사람 역시 나뿐이었다. 그러나 철제대문의 돌쩌귀가 내는 쇳소리에 나는 철제방망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현관 앞에 섰다. 알 수 없는 남성의 실루엣이 서성이다 이내 현관문을 두드렸고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일 년 전부터 나에게 있어‘개 같은 편집장’이 되어버린 이진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서 구역질나는 매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또한 서 있었다. 당신이었군요. RAIN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진구와 함께 천연덕스럽게 들어오는 RAIN을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진구와 나는 거실에 앉았고 RAIN은 진구의 뒤에 서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나는 처음으로 진구를 마주 대했다. RAIN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가 말을 꺼낼 때마다 다양한 표정과 손사래를 처가며 내 말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한 얘기를 꺼낼 때에는 양 손을 펴 올리며 나를 독려하기까지 했다. 나는 오로지 진구의 두 눈만을 바라보며 말하고자 애썼지만 그 사람의 뒤에 오도카니 서 있는 RAIN의 모습을 완전히 무시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 때 진구의 어떤 말에 RAIN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두 남자에게 모두 신경을 곤두서고 있어서였는지 나는 진구의 말을 듣지 못했고 RAIN이 입을 벌려 뭐라 말을 하려하자 더욱더 앞의 얘기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진구 역시 나의 이상한 모습에 뭔가 낌새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근데 뭐라고 하셨죠, 편집장님?
  새로 쓰신다는 소설 말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인 것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나는 진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침착한 진구의 얼굴 위로 RAIN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를 삼켜버릴 것처럼 벌리고 있는 그의 입이 벙긋대는 모습을 나는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죽여 버려. 안 그러면 네가 죽어.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차를 내오겠다는 말을 던지듯 뱉어내고는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RAIN이 나를 따라 부엌으로 걸어왔다. 목구멍이 막힌 사람처럼 RAIN은 내게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내가 살아있는 만큼이나 확실했다. 죽여 버려. 안 그러면 네가 죽어. 나는 물을 끓이고 찬장에서 케모마일을 찾았다. 케모마일은 정서를 안정시킨다고 누군가 말했었지. 거름망에 케모마일 두 스푼을 담는다. 말라붙은 잎사귀를 흐물흐물 녹여내면 부드러운 향이 피어오를 것이다. 죽여 버려. 안 그러면 네가 죽어. 김이 피어오르는 주전자 손잡이를 무심코 잡았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차디찬 쇳조각을 만진 것처럼 싸늘한 냉기가 두 손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거실을 바라보았다.
  RAIN이 얼음장 같은 철제방망이를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잠깐, 그 앞에 앉아 내 소설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진구의 뒷모습이 잠깐, 머리를 후려치는 철제방망이가 잠깐, 찰나의 경련과 함께 진구가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것이 잠깐, 마네킹의 뒤통수에 그어진 실금 같은 상처 사이로 끈적끈적한 선혈이 흐르는 것이 잠깐. 즉석사진처럼 토막 난 단락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나오며 부엌에 있던 나는 다시 진구의 앞으로 돌아온다. 철제방망이를 쥐고 있는 손이 너무나도 시렸다. 진구의 손이 움직였다.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발작적인 움직임이 있은 후 이번엔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이윽고 진구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진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혀버린 목구멍이 갑작스레 뚫린 것처럼 나는 거친 한 숨을 토해냈다. 말을 하는 것은 정신적인 일이 아니다. 피와 살이 빚어내는 소음은 지극히 물질적인 일이었다. 나는 진구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분명한 말이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두드려. 네 손으로, 네 온몸으로. 그 차가운 손이 뜨거워질 때까지, 두드려.
  “지쳤어. 아무도 작위적인 이야기 따위는 좋아하지 않아.”
  네가 사랑하잖아.  
  “내가 사랑해도 나를 사랑하진 않아. 그저 스토킹일 뿐이야.”
  네가 살고 싶잖아.
  “역시, 너는 개 같은 편집장일 뿐이었어.”
  나는 철제방망이를 들어 올린다. 숨이 붙어있음을 보여줄 뿐인 미약한 움직임 외에 진구는 가만히 쓰러져 있을 뿐이다. 귓가에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돌려 부엌을 바라보았다. 숨을 할딱거리는 주전자 주둥이의 뚜껑이 끊임없이 김을 뱉어내고 있었다. 거름망에 담겨진 케모마일 두 스푼은 말라 비틀어져 있다. 나는 철제방망이를 집어던졌다.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진구를 품에 안고 나는 오열했다.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긴 울음이었다.  
      
  “한열음? 이름 되게 독특한데요?”
  카페의 원형 테이블에 세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 옆에 앉은 여자와 남자는 손을 잡고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수다를 주도하는 가운데의 여자는 아름다운 연인이 결혼으로 들어서는 과정이 낳을 수 있는 사정들을, 주로 폐해 쪽에 초점을 맞추어 입을 조잘거렸다. 결혼얘기의 당사자인 남자는 유쾌하면서도 깔끔함을 잃지 않는 웃음을 간간히 섞으며 무리를 즐겁게 했다. 왼쪽에 앉아 있고 그래서 남자와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있는 여자는 말없이 잡담을 들으며 수줍은 미소를 간간히 섞고 있다. 그녀가 지금까지 입을 연 것은 남자가‘한열음’이라는 그녀의 이름에 대해 물어 본 것에 대답한 한 마디 뿐이었다.
  “특이한 이름이긴 한데,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닌가 봐요.”
  남자는 자신의 결혼 상대자인 오른편 여자의 차가운 손을 주무르며 수족냉증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듣는 이들은 대부분 그 신뢰성엔 의문을 표시했지만 충분히 재미있게 지껄인 덕분에 잡담으로서 합격점을 받았다. 웃음꽃은 이 테이블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네 명의 공통된 화제인 대학원 이야기가 잠시 곁들어진 후에 남자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서 유독 말을 아끼고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한열음씨라고 했죠? 이번에 대학원 마치고나면 뭐 특별히 계획 있어요?”
  옆에 앉은 수다스러운 여자가 열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의 눈에서 처음으로 호기심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열음은 테이블 아래에서 맞잡고 있던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손에서 열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글을 쓰고 있어요. 대단찮은 거긴 하지만 계속 써보려고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열음은 말했다. 그러나 이미 호기심을 잃은 그의 눈은 매끄러운 흑갈색이었다. 남자는 그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정갈한 미소로 답했다.
  “열심히 당신의 이야기를 쓰기를 바랄게요.”
  진구는 열음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열음의 손이 따뜻해져 온다.
  네, 당신의 이야기.
  네, 작위적인 당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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