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5시

2004.01.19 21:5101.19



  나는 열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열한 번의 종소리가 울린 지 꽤 오래건만 아직도 열두 번째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CD가 달칵 소리를 내며 멈추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선다.  맨발에 닿는 장판의 차갑고 매끄러운 촉감이 어딘지 낯설다.

  괘종시계는 멈춰 있다.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는 아래, 비스듬히 기울어진 모습 그대로 움직일 줄 모르는 시계추가 눈을 붙든다. 아니, 멈춰 있는 것은 괘종시계만이 아니다. 냉장고 옆에 얌전히 놓인 알람시계도, 텔레비전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손목시계도 모두 멈춰 있다. 시계소리조차 없이 지독히도 두껍게 내려앉은 밤의 정적. 그 속에서 단 하나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틱 톡 틱 톡…. 수면을 흔드는 잔물결처럼, 갑작스럽지만 조용히 던져진 단조로운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린다. 검은 유리창 너머 나뭇가지 위에 작은 그림자가 하나 보인다. 부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짚고 선, 그것은 고양이이다.

  밀가루 포대에 담갔던 것만 같은 왼쪽 앞발을 제외하고, 귀 끝부터 머리 끝까지 온통 부드러워 보이는 짧고 까만 털로 감싸인 고양이는, 마치 밤의 검은 장막을 가르고 막 튀어나온 것만 같다. 고양이의 까만 목에는 빨간 가죽 목걸이가 걸려 있다. 도둑고양이인줄 알았더니, 아파트의 누군가가 기르는 걸까? 그러나 목걸이에는 으레 있어야할 이름표 대신 작은 시계가 달려 있을 따름이다. 고양이의 시계에는 단 하나의 시간밖에 없다. 25시. 원의 위쪽 정중앙에 위치한 아라비아 숫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숫자도, 눈금도 없이 깨끗하다. 그리고 단 하나의 시계바늘이 단 하나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틱 톡 틱 톡…. 밤의 적막을 깨고 단조롭게 들려오는 소리는 고양이의 등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놀랍게도 고양이의 등에는 오래된 장난감에나 달려 있을 법한 작은 태엽이 하나 달려 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고양이의 움직임과 대조적으로 태엽은 짧고 경쾌한 스타카토 리듬을 타고 돌아간다. 틱 톡 틱 톡 …

  내 관심이 그리 나쁘지 않은지 고양이는 호동그란 황금빛 눈을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런 고양이의 순한 태도가 맘에 든다. 똑똑, 살짝 유리창 너머로 노크를 해본다. 고양이는 달아나지 않는다. 냐옹-. 고양이가 입을 말아 올리고 작게 울자, 마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렇게 뚜렷이 보이는 걸까? 비로드처럼 윤기가 흐르는 까만 털을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듯하다. 지금은 밤인데. 거실엔 불도 켜있지 않다. 달이 밝아서? 고개를 들어 달을 찾아본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개기월식이 있다고 했던가? 오늘이 며칠이지?

  뎅-. 괘종시계의 열두 번째 종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는 문제집을 붙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CD가 달칵 소리를 내며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번 시작되는 낮고 부드러운, 허밍과도 같은 여자의 노랫소리.

  “…꿈…이었나?”

  시계를 보니 초침이 막 열두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달력 위 방금 전까지 오늘이었던 어제의 날짜에 가위표를 긋고 거실로 나왔다. 익숙한 거실장판의 차가운 촉감이 발끝에서부터 기분 좋게 올라왔다. 감기기운 때문에 열에 달뜬 몸이 조금이나마 식는 것 같았다. 안방에서 아빠의 코고는 소리가 일상의 고단함을 풍기며 들려왔다. 나는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괘종시계 앞으로 갔다.

  괘종시계의 추는 언제나처럼 규칙적으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군화소리처럼 흐트러짐 없는 시계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창 밖 나뭇가지 너머 남색 구름 사이에선 반쯤 이지러진 하얀 달이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태엽이 달린 이상한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바보같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아파트단지 어디선가 아기 울음 같은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집에서는 집중이 안 되고 자꾸 딴 생각만 드는 것 같았다. 엉뚱하게도 태엽 달린 고양이를 봤다고 생각했던 일도 결국은 책상에 앉은 채로 졸았던 것일 테고 말이다. 집에서는 공부가 안 된다는 내 말에 엄마는 재수학원비만 해도 꽤 된다고 허리 휘는 소리를 하면서도 선선히 독서실 자리를 끊어주었다. 친한 후배가 다니면서 괜찮다고 소개해준 곳이었다. 독서실 특유의 차분한 공기가 이곳에서만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주었다. 단지 불만이 하나 있다면 독서실의 에어컨이 지나치게 성능이 좋다는 것이었다. 결국 며칠 후, 얼마 전부터 코를 근질거리던 감기기운이 도져버렸다. 참아보려 애써보지만 기침은 자꾸 가슴을 때리며 터져 나왔다. 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독서실 여기저기에서 불만스러운 짜증들도 같이 터져 나왔다. 나는 죄지은 기분이 되어 주섬주섬 책을 챙겼다.

  “진영 언니, 지금 가게?”

  가방을 챙기는 소리에 옆자리의 수민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수민이의 얼굴 뒤로 요일별로 하루 스물네 시간이 세밀하게 쪼개진 시간표가 눈길을 끌었다. 시간표에는 보습학원 강사들의 사진과 학원 전화번호, 그리고 빨간 글씨로 식상한 문구가 박혀 있었다. 오늘 그대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소포클레스.

  “응. 아무래도 감기 때문에 안 되겠어. 너는?”

  “난 두 시까지 있을 거야. 요즘 독감이 유행이래. 언니 집에 가서 약 먹고 일찍 자.”

  그렇지만 너는 새벽 두 시까지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외울 거잖아? 나도 안다. 내가 어린애 같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다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다. 배가 아파왔다. 내 위장 한 구석을 나쁜 벌레가 뜯어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탁 탁. 누군가 칸막이를 두들겼다. 소리 죽여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금세 맞은편 책상에서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교통법규 문제집을 풀고 있던 아줌마도 이쪽을 흘겨보았다. 무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수민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가방을 들었다. 독서실 문을 나서기 전에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모습은 칸막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책장 넘기는 소리로 그들은 자리하고 있었다. 괜찮아. 단지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는 것뿐이잖아. 구두와 운동화로 가득 찬 신발장에서 꺼내든 내 신발이 오늘따라 유독 무거웠다.

  점점 심해지는 복통에 진통제를 먹고 싶었지만 이런 시간까지 문을 열고 있는 약국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배도 아프고 감기기운까지 있었지만 일부러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아빠는 술에 취해서 돌아오셨다. 아빠는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입으로 하염없이 미안하다고만 중얼거렸다. 여보, 미안해. 진영아, 아빠가 참 미안하다. 아빠도 돈 많이 벌어서 호강 시켜주고 싶은데, 미안하다. 그 날 저녁에 가신 동창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미안하다는 소리만 고장 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하는 아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슬그머니 방문을 닫아버렸다. 차라리 내가 못해준 게 뭐가 있냐고 큰소리 탕탕 치던 아빠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술을 과하게 좋아하신 할아버지께서 집안의 수많은 전답을 팔아먹으신 덕분에 초등학교밖에 못나왔지만, 혼자 힘으로 당당히 공무원 시험을 합격했다던 아빠의 신화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빠는 어제 일을 기억하시려나. 이렇게 일찍 가면 아직 안 주무시고 계실 텐데….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도둑고양이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쓰레기통이나 담 위에서 꼿꼿이 허리를 펴고, 간간이 밤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고양이들을 보면, 이 아파트단지가 실은 그들의 것인 양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왼쪽 앞발이 흰,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을 때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고양이가 나에게 인사라도 하듯이 고개를 까딱한다. 그 순간, 노랗게 빛나던 가로등이 하나 꺼진다. 뒤이어 가지런히 일렬로 줄지어 서있는 가로등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꺼진다. 순식간에 거리는 짐승의 뱃속과도 같은 먹먹한 어둠 속에 집어삼켜진다. 내 몸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목이 메인다.

  틱 톡 틱 톡…. 분명 기억에 있는 소리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계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당황하여 고양이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본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고양이의 빨간 가죽 목걸이에 달려있는 작은 시계가 똑똑히 보인다. 고양이의 시계는 이번에도 25시를 가리키고 있다. 고양이의 등에는 그때와 같이 작고 낡은 태엽이 돌아가고 있다. 꿈이 아니었나? 아니면 이것도 꿈인 걸까? 고양이가 ‘야옹’하고 작게 미소 짓는다. 그와 동시에, 어둠을 걷어 올리는 화려한 쇼윈도의 불빛.

  눈을 찌르는 날카로운 빛에 팔을 들어 눈앞을 가린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불빛에 눈이 익자, 보이는 거리는 온통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하다. 나는 낯설고 화려한 거리 한복판에 서 있다. 사람들은 제각기 포즈를 잡고 우아하게 거리를 걷는다. 섬세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한껏 멋을 부렸다. 그러나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다. 모두들 자신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 따윈 없는 바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총총히 잰걸음을 옮기고 있다. 아무도 고개를 돌리거나,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오직 우아한 전진만이 있을 뿐.

  여긴 어디지?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조금 전만 해도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리고 또 그 태엽이 달린 고양이를 보고… 그건 역시 꿈이었을까?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나도 모르는 사이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하니 걸으면서 잠을 잔 것은 아닐 텐데?  

  무릎 나온 청바지에 거북이등처럼 불룩한 가방을 멘 내 후줄근한 차림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사한 옷차림들에 주눅 들어 우물쭈물 말을 건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그제야 이 거리를 감도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들은 얼굴이 없다. 하얀 석고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얼굴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나에게 대답을 줄 수도 없다. 그들은 입도 눈도 없으므로. 그들의 하얀 얼굴에서 오직 오똑한 코만이 도드라져 눈에 들어온다.

  떨리는 발을 들어 조심스레 뒷걸음질을 친다. 나를 뒤쫓아 오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용기를 쥐어짜서 그들의 하얀 얼굴에서 등을 돌린다. 이 거리에서 달아나야만 한다! 이곳이 어딘지, 가야할 방향이 어딘지 알지 못하지만 무작정 내달린다. 앞도 뒤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다리가 풀릴 정도로 달린 끝에야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밀려드는 안도감에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지만 힘겹게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겼다. 낮에 비가 와서인지 오늘따라 아파트단지 구석에 쌓인 쓰레기더미의 악취가 한층 더 지독했다. 화요일 아침에 수거해갈 쓰레기의 시큼한 냄새와 어디선가 풍겨오는 짭지름한 해초냄새가… 해초냄새? 난데없는 해초냄새에 의아해하며 늘어진 고개를 치켜든다.

  어느새 아파트는 상처 입은 거대한 고래의 모습으로 바뀌어있다. 고래의 상처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하얀 갈비뼈 사이사이마다 빼곡히 자리 잡은 작고 초라한 굴들이 보인다. 굴 입구마다 고개를 내민 지친 얼굴 위로 사나운 눈들이 나를 노려본다. 고래가 자신의 무게와 상처를 이겨내지 못하고 내쉬는, 한숨과도 같은 긴 호흡 속에서 반쯤 썩은 해초냄새가 난다. 나는 모두 똑같아 보이는 굴들 중 내 집을 찾지도 못하고, 찾더라도 차마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망연히 죽어가는 고래를 올려다본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하나. 틱 톡 틱 톡….

  “왜 무서워하지?”

  등에 태엽이 돌아가고 있는 고양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린다. 고양이는 말을 할 때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 모습은 마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고양이가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렇게 능숙하게 말도 할 수 있는 고양이라면. 어쨌거나 구관조나 앵무새도 아닌, 그 때 창문 너머로 보았던 바로 그 고양이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고 있다. 고양이의 목소리는 조금 새되고 여린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다.

  “네가 언제나 보는 것들이잖아? 왜 무서워하지?”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가로등 아래 서 있었으므로. 아파트는 더 이상 상처 입는 거대한 고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익숙하고 따스한 빛을 발하는 아파트의 창들과 가로등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태엽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 날 밤, 나는 지독한 감기에 앓아누웠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울어댔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로이 내려쬐이는 시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지칠 줄을 모르고 기세 좋게 울어대는 전화벨소리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땀에 절어 눅눅하고 불쾌한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수화기를 들었다.

  줄기차게 걸려오던 전화의 주인은 은정이였다. 졸업을 하고 재수를 결정한 뒤 친구들과 거의 연락을 끊기다시피 했었기 때문에, 나는 느닷없이 걸려온 반가운 목소리가 꽤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어색했다. 그렇지만 은정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능을 치러내고, 이제는 바쁜 대학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여유에서 나오는 태도인 걸까 하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단짝이었던 은정이와 나 사이에는 어느새 내가 놓쳐버린 1년만큼의 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 웬일이야?”

  “오늘 너 나올 수 있지?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몸살감기야. 근데 왜? 콜록콜록.”

  “왜긴. 오늘 백일이잖아. 근데 너 감기 심해? 못나와?”

  백일주를 챙겨준다며 나오라는 은정이의 말에 나는 고맙다기보다 먹지도 않은 밥이 얹힌 기분이 들었다. 명치께를 쿡쿡 쑤셔오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누워있을 때가 아닌데. 이미 일주일이나 재수학원과 독서실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망가진 인형 같은 몸 위로 철 이른 이불을 덮고, 자다 깨고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것들을 몇 번 더 보았다. 그럴 때면 고양이가 등장했다. 밀가루를 묻힌 하얀 손에 분필을 삼킨 고운 목소리의 고양이가. 그리고 환상에서 깨어날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괘종시계의 열두 번째 종소리. 그 종소리가 또 하루가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흘려버린 시간만큼의 초조함에 몸이 달아올랐다.

  깔깔한 입 안으로 죽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감기약을 털어 넣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학원도 빠지고 있는 판에 놀러나갈 기운 따윈 없었다. 빨간 가위표로 가득한 달력이 머리맡에서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있잖아, 혜진이도 재수한다더라. 기집애, 대학도 괜찮은 데 갔으면서 뭐가 아쉬워서 그런대? 그냥 다니지. 그러게 말이야. 은정이와 나눈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약기운을 빌어 잠을 청해보았지만 점점 심해지는 복통 때문에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틱 톡 틱 톡…. 어느새 방은 비좁고 어둠침침한 굴로 변해있다. 벽 너머로 해초냄새를 품은 한숨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고래는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상처 입은 몸으로는 헤엄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체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지?”

  나는 고양이와 마주친 개처럼 으르렁거린다. 지난 일주일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타나는 환상 때문에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있다. 하루하루 헛되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는 초조함도 없지 않다.

  “이런 거라니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고양이가 시치미 떼는 얼굴로 딴청을 부린다.

  “저런 거 말이야!”

  지금 막 내 머리 위 천창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구두들을 가리키며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구두들은 전에도 몇 번 내 방에 난입한 적이 있다. 그것들은 거침없이 벽을 타고 들어와 내 방을 말 그대로 무자비한 구둣발로 짓밟는다. 그리고 다시 벽을 걸어 다른 이의 방으로 가는 것이다.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구두들이 지나간 뒤 벽에 남은 검은 자국들을 본다.

  “방이 엉망이 된 건 유감이지만, 이건 내 탓이 아냐.”

  “아아, 상관없어. 발자국은 곧 지워질 테니까.”

  고양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구두들의 행렬 속에서 내 구두도 발견하였기에 나는 위안을 받았다.

  “아무튼 나는 지금 할 일이 많단 말이야! 이런 환상 따위에 정신을 빼놓고 있을 참이 아니라고!”

  고양이가 앉아 있던 의자 위에서 뛰어내린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발을 떼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야옹-. 네가 말하는 할 일이란 건 이런 거야?”

  틱 톡 틱 톡…. 그 순간 고양이와 나는 거리 한복판에 서 있다.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기묘하고 마네킹들로 가득 찬 그 거리에. 맨들맨들한 얼굴을 하고 한 곳을 향해 쉬지 않고 걷는 그들의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더 이상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하지만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 이건 네가 바란 거잖아?”

  고양이가 비틀린 입을 하고 조롱하듯이 말한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마네킹들이 내 어깨를 마구 치고 지나간다.

  “뭐야! 걷는데 방해가 되잖아.”

  “그렇게 멍하니 서있지 말고 너도 어서 걸어! 아님 비켜나던지!”  

  “얼간이같이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거야?”

  그들은 걷지 않는 나를 비웃는다. 억지로 돌려세우고 등을 떠민다. 고양이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런 내 모습을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서있다. 나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은,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은 저 망할 고양이인데!

  고양이가 고개를 숙이나 했더니, 이번에는 이제까지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진지하고 정성스러운 태도로 털을 손질한다.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꼬리 끝까지 구석구석 털을 고르고, 목장갑을 낀 것 같은 도톰한 앞발로 세심하게 얼굴을 문지르고,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솜씨 좋게 수염을 잡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한참 몸단장에 여념이 없던 뻔뻔스러운 고양이가 문득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반짝 든다. 고양이 목에 걸린 시계의 하나뿐인 바늘이 바르르 떨고 있다.

  “이제 가봐야겠어.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냐. 환상은 더더욱 아니고. 너도 알고 있잖아?”

  울컥해서 뭐라고 쏘아붙일 새도 없이, 고양이의 시계가 25시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육중한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달력 위에 가위표가 하나 더 늘었다.  

  그 날, 그러니까 정확히 일주일하고 하루만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몸이 으슬으슬 하긴 했지만, 훨씬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이미 늦어버린 재수학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오랜만에 독서실에 가서 책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녁식사 때 아빠는 매콤한 제육볶음을 안주 삼아 소주를 한 잔 걸쳤다. 과묵한 아빠도 일단 술이 들어가면 평소의 배나 되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때마다 항상 아빠의 인생강론의 충실한 청취자가 되어야만 하는 나로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아빠의 인생강론은 항상 재방송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기는 다 나았니?”

  “네.”

  “이제 얼마 안 남았지?”

  “네.”

  “진영아.”

  “네.”

  “너도 알겠지만 말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남들 놀 시간, 잘 시간에 참고 공부하면 좋은 결과가 오는 거다. 알고 있지?”

  “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라, 진영아.”

  “네.”

  “요샌 대학 나와도 취업이 안 되니 어쩌니 하지만, 대학마저 안 나오면 인간 취급도 안 해준다. 아빠는 말이야….”

  “이제 그만 좀 해요! 공부하러 가는 애 붙잡고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아빠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는지, 그런데도 대학을 나온 나이 어린 상사가 얼마나 싸가지 없게 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참에, 참다못한 엄마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이럴 때만큼 엄마의 뾰족한 목소리가 반가운 적은 없었다.

  “아, 알았어 알아. 다 지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내가 뭐 못되라고 그러는 건가? 진영아, 지금 독서실 가니?”

  아빠는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작년 같으면 족히 두 시간은 걸렸을 텐데. 엄마도 아빠도 작년 수능 때 일을 염두하고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추웠던 결전의 그 날, 나는 아빠의 차를 타고 시험장으로 가고 있었다. 밥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을 정도로 긴장이 되어서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왔었다. 먹은 것이 없으니 급체를 할 리도 없는데, 시험장이 보이자마자 갑자기 복통이 밀려들었다. 참지 못하고 뒷좌석에서 구르는 내 모습에 당황한 아빠는 황급히 차를 시험장에서 병원으로 돌렸다.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 없음. 허탈할 정도로 나는 건강했다. 스트레스성 복통입니다. 등교하기를 거부하는 초등학생들이나, 시험에 의한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지요. 특별히 건강상의 문제는 없고, 스트레스의 원인만 제거하면 증상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인만 제거하면 된다지만, 그렇다면 대학에 붙어야만 괜찮아질 테니 결국 그 전까지는 해결책이 없는 셈이다. 좋게 말하면 대학만 붙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고. 대학만 붙으면.

  “그래, 그럼 열심히 하고.”

  “네.”

  배가 아팠다. 독서실을 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진통제를 한 통 샀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복통이 약을 먹는다고 나아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이부자리에 늘어붙어 있을 때는 째깍째깍 시계소리가 들릴 적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초조함에 가슴이 묵직하더니, 막상 독서실에 앉아 있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은 누누이 이어지는 아빠의 설교가 아니라도 잘 알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서 다시 책을 펴들었다.

  틱 톡 틱 톡…. 독서실의 적막을 깨며 태엽이 돌아간다. 하지만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손목시계로 눈을 돌려보니 역시나 열두 시를 가리키며 멈춰 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웬일인지 구두들의 행진이나 동굴의 벽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갑자기 즐겁거나 만족스러워질 리가 만무하다. 전등불빛 아래로 어룽어룽 그림자를 만드는 고양이의 꼬리를 귀찮은 손으로 쳐내고, 다시 샤프를 재게 놀린다.

  “왜 화를 내지?”

  고양이의 어조는 언제나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그걸 몰라서 물어? 환상이든 현실이든 난 더 이상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어서 꺼져버려!”  

  입꼬리를 말아 올리지 않는 고양이의 표정은 도통 알아보기가 힘들다. 기분이 상한 걸까? 하지만 그건 네 탓이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고양이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그럼 너는 무엇을 할 건데?”

  “보면 몰라? 공부하잖아!”

  “왜?”

  “대학에 가야 하니까! 그만 입 안 닥칠래? 아니, 이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뭘 보여주든 상관하지 않을 거야! 어디 네 먹대로 해봐. 난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여전히 고양이는 화를 내지도, 동요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자꾸만 똑똑 부러져버리는 샤프심도 짜증스럽다. 뚝. 찰칵찰칵. 뚝. 찰칵찰칵찰칵. 뚝. 오른손이 노트 위를 세 번 왕복하기도 전에 샤프심이 다 부러져버린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쥐고 있던 샤프를 거칠게 필통에 쑤셔 넣고 아무 펜이나 집어 든다. 전등갓 위에 앉아 가만히 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고양이가 지루한 어투로 입을 연다.

  “결국은 너도 똑같아.”

  그 말에 움찔 손을 멈춘다. 그 어떤 환상과 맞닥뜨렸을 때보다도 가슴이 덜컹거린다. 복통이 가슴으로 옮겨 온 것만 같다. 가슴이 아파서, 너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가늘게 숨을 고른다.

  “넌 다른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말과는 달리 고양이의 어디에서도 낙심한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의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유리구슬과 같아서, 그 안엔 거짓말을 들켜버린 아이 같은 내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잔인하게도 고양이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시끄러워!”

  고양이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에 집히는 대로 마구 집어던진다. 그러나 고양이는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오히려 입술을 말아 올려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사실인걸.”

  “그딴 소리 듣기 싫어! 꺼져버려!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란 말이야!”

  제대로 겨냥도 하지 않고 마구 책을 집어던지는 내 팔을 누군가 붙들었다.

  “언니…? 왜 그래?”

  수민이가 휘둥그레 눈을 뜨고 내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독서실 안 여기저기서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얼굴들이 보였다. 내 주위에는 책과 필기구를 비롯한 온갖 나부랭이들이 어수선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뭐지 이건? 선뜻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언니? 언니 왜 그래? 진영 언니?”

  수민이가 내 어깨를 조심조심 흔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대체 어디부터 보았을까. 분명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모두 다 그 빌어먹을 고양이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꿈이나 환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난 정말 미쳐버린 걸까?

  “…바, 바퀴벌레가 나와서….”

  목을 움츠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민이는 어이가 없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그런 거래? 쟤야, 쟤. 독서실 여기저기서 조그맣게 수군대는 소리들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얼굴을 마구 찌르는 것만 같았다.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얼굴과 썰렁한 독서실의 분위기에 더 견디질 못하고, 황급히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이 나와 버렸다. 독서실을 나와서도 나는 내내 얼이 빠진 채로 있었다. 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두고 말들이 많을 것만 같았다. 아니 제대로 들리기나 했을는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다음날 찾아간 독서실은 소독공지와 함께 문이 닫혀 있었다.

  재수학원에서 수학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던 내 옆자리의 아이는 강사가 나가자마자 언제 졸았냐는 듯이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만화책을 펴들었다. 그 아이의 가방에는 두껍고 딱딱한 수학정석대신 만화책만 열댓 권 들어 있었다. 한심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너도 볼래?”

  30권이 넘도록 여전히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주인공들은 학교도 가지 않고 날마다 일어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들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가방에서 만화책의 앞 권을 꺼내 내밀었다.  

  “아니, 난 그 만화 싫어해.”

  “왜?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전에는 봤었는데 이젠 안 봐. 보면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밖에 없잖아. 어떻게 주인공이 화장실만 가도 시체가 나오니? 보고 있으면 살인자보다 주인공이 더 위험인물 같다니까.”

  “그러니까 만화지.”

  “그래서 더 싫어. 어차피 만화일 뿐이잖아.”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때맞춰 다음시간의 강사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 아이는 뭔가 기분이 상한 듯 했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후로도 그 아이의 얼굴을 가끔 마주치긴 했지만 다시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더 이상 태엽 달린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학원. 독서실. 집. 학원. 독서실. 집. 가끔 삼각형의 꼭지를 바꾸기도 하지만, 삼각형ABC나 삼각형ACB나 그게 그거다. 별다를 것 없이 이어지는 오늘들을 보내며 나는 기묘한 고양이를 만났던 밤들을 잊어버렸다.  

  어느새 달력이 빨간 가위표로 거의 가득 채워졌다. 아이들은 미친 듯이 마지막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거나, 자포자기해서 책을 거들떠도 안 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좀 더 실질적인 방향으로 태도를 정한 소수의 아이들도 결코 늦춰지는 법이 없는 시계소리에 쫓겨 그리 잘 되어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민이가 독서실에 오자마자 나를 휴게실로 불렀다. 휴게실의 TV는 항상 틀어져있던 EBS대신 웃고 떠드는 연예 프로그램에 채널이 맞춰져있었다. 수능이 코앞에 닥쳐온 지금까지 교육방송 녹화비디오를 붙들고 앉아있는 한심한 짓 따위를 하는 애는 아무도 없었다.

  “언니, 전에 아파서 백일주도 못 마셨잖아. 이거라도 먹고 시험 잘 봐.”

  찹쌀떡을 내미는 수민이의 손에 끼인 은반지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거렸다. 작년 수능시험 백일 전에 나는 엄마에게 18K 금반지를 받았었다. 은보다 금이 훨씬 더 효력이 좋지 않겠니? 하는 반우스겟소리와 함께. 나는 석달 하고도 열흘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반지를 끼고 다녔다. 손을 씻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반지를 빼는 법이 없었다. 학교 선생들도 다른 건 다 규제를 해도, 고3들의 손마다 하나씩 빛나는 반지만은 뺐지 않았다. 마치 그 반지가 합격의 보증서라도 된다는 듯이. 그러나 지금 나는 재수를 준비 중이고, 반지는 서랍 한 구석에 처박혀있다.

  팥을 좋아하지 않지만 수민이를 봐서라도 받아들었다. 시끄러운 연예방송의 마지막 멘트로 ‘고3 여러분들 힘내세요.’라는 여자MC의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 일주일간 TV에서도 라디오에서도 수능 얘기는 꼭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마치 어린이날의 초등학생들처럼 우리들은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그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멍하니 TV화면을 응시하던 수민이가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말했다.

  “언니, 내일 뭐 할 거야?”

  “이번에는 일찍 잠이나 잘 거야.”

  “나도 그래야겠다. 공부한답시고 잠 설치고 가면 오히려 더 못 푼다더라. 우황청심원 먹고 가도 안 된다며? 너무 긴장이 풀어져서 문제가 오히려 더 안 풀린다나 뭐라나. 그 대신에 컨디션 같은 거 먹으래.”

  “그래?”

  나는 수민이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휴게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배가 아파서 대화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언니, 옷은 뭐 입고 갈 거야? 애들이 그러는데 항상 입던 교복을 입는 게 안정되고 좋다던데. 차라리 체육복이 더 편할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리고 보니까 뒷자리 앉으면 난로 때문에 엄청 덥다던데 어떡하지?”

  “글쎄. 그냥 아무거나 편한 걸로 입고 가지, 뭐.”

  재수생한테 교복이니 체육복이니 하는 말을 꺼내는 수민이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얘는 눈치가 없는 거야, 일부러 속을 긁는 거야?

  “공부나 하자. 이제 진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제일 마지막에 보는 게 시험에 나온다잖아.”

  시험에 관한 수많은 노하우들을 듣고 알고 있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통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진통제를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다행히 진통제는 잘 들었다.

  “난 수능만 끝나면 제일 먼저 잠부터 실컷 자고, 날마다 영화 보러 다닐 거야.”

  줄지은 책상들이 있는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수민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수능만 끝나면….



  쏴아-, 세차게 들려오는 물소리에, 아니 그보다는 잘 만큼 잤기 때문에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불도 개지 않고 일어나 고픈 배를 쥐고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가 지난 20년 간 해왔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식탁 한 구석에 아마도 아빠가 펼쳐보았을 신문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접혀있었다. 신문에는 등급별 평균점수와 본격적인 대학입시요령이 깨알 같은 글씨로 나와 있었다.  

  “아빠는?”

  “그야 너 잘 때 벌써 출근하셨지.”

  늦은 아침을 대강 때우고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TV에선 이름 높은 교육계 인사들과 혀가 매끄러운 리포터들이 이번 수능은 재수생에게 유리했다느니, 너무 쉬워서 점수가 대폭 올랐다느니 매년 되풀이하는 말들로 시끄러웠다.

  엄마는 나 때문에 설거지를 한 번 더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지난 2년 동안 한번도 설거지를 하거나, 걸레를 빨아본 일이 없었다. 슬그머니 거실 한 쪽에 쌓인 마른 빨래들을 개기 시작했다. 빨래를 다 개고 나니 엄마가 세탁기에서 새로운 빨래더미를 꺼내 쏟아놓았다. 그것들을 다 베란다에 널고 나니 이번에는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엄마는 점심을 차리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또 다시 저녁준비를 하다가 반찬거리가 없다며 장을 보러 나갔다. 집안일은 얼핏 조급할 게 없고 손쉬워 보여도, 똑같은 일거리가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오랜만에 효녀노릇을 해보려던 나는 금세 질려버렸다. 맥없이 앉아서 바쁘게 돌아가는 TV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수민이는 지금쯤 영화를 보고 있을까?

  저녁 무렵 은정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하고 있니? 나와. 시험도 끝났겠다, 이 언니가 밥 사줄게.”

  비록 수능은 끝났다지만 아직 대학에 확실히 붙은 것도 아닌데, 별로 축하를 받거나 놀러나갈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얘,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설마 아직도 감기가 안 나은 거야?”

  “아니, 감기는 예전에 다 나았어.”

  “그럼 왜 그래?”

  “아니,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뭔가 허전한 게, 겨우 어제 하루 때문에 내가 그 고생을 했나 싶기도 하고….”

  “그럼 그게 뭐 별건 줄 알았니?”

  전화선을 타고 깔깔거리는 은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웃고 있는 은정이에게도 그게 별게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고3 때 은정이는 거의 조울증 환자처럼 툭하면 눈물을 보이곤 했었다. 은정이는 아침에 같이 히히덕 거리며 수다를 떨다가도, 점심때가 되면 책상에 엎드려서 훌쩍거렸다. 진영아, 나 대학 못 가면 어떡해.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아.

  “대학생활은 어때?”

  “뭐, 다 그렇지 뭐. 지겨워 죽겠어. 나 학점 모자라서 전공 선택도 못하게 생겼다니까. 게다가 우리 엄마는 벌써부터 졸업하면 뭐 하고 살 거냐고 난리야. 툭하면 학교 선생이나 하라고 닦달이라니까. 선생은 뭐 아무나 하냐?”

  학교는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교수들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며 끝없이 이어지는 은정이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나는 웃음기마저 어린 투덜대는 목소리에서 일 년 전 가슴이 답답하다며 울먹이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 백일주를 마시자고 전화를 걸어오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때 내가 들은 목소리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질투가 났었다.

  열두 번째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새 나는 그토록 거부하던 그 거리 위에 서있다. 거리에 가득한 마네킹들이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간다. 행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녹색 체크무늬 제복을 입고 지나가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붙잡고 말을 건다.

  “왜 앞으로 가야만 하지?”

  “그런 건 몰라. 하여튼 분명한 건, 뒤쳐지면 끝장이란 거야. 너도 그런 생각할 시간에 부지런히 걷기나 하라고.”

  누군가 등을 떠민다. 뒤를 돌아보니 넥타이 대신 굵은 밧줄을 목에 멘 지치고 초라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부지런히 힘겨운 발걸음을 떼고 있지만, 그것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

  “왜 이러고 서있어? 어서 앞으로 가.”

  남자는 자꾸만 재촉한다. 나는 걷는 대신 언제나 궁금해 하던 것을 물어본다.

  “언제까지 걸어야만 하죠?”

  “조금만 더 걸으면 돼. 조금만 더.”

  그러나 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키지 않지만 남자의 재차 이어지는 재촉에 무거운 발을 들어 옮긴다. 생각보다 길을 걷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 있는 것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길 수 있다.

  익숙한 태엽소리가 들려온다. 틱 톡 틱 톡….



-----------------------------------------------------------------------------

오래전에 썼던 글인데 최근에 수정을 하고나니 문득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아보고 싶어져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아무리 봐도 이 제목은 문제가 있어요 ㅜㅗㅡ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91 단편 장미 덩굴을 그리는 페페 너구리맛우동 2012.10.23 0
2790 단편 검은 구름2 강민수 2013.08.07 0
2789 단편 무드셀라 증후군4 제퍼리 킴 2012.02.21 0
2788 중편 높은 성에서(4) - 요약 moodern 2005.09.02 0
2787 단편 야구공, 사진, 음악CD, 거울 그리고 열쇠 진영 2013.02.09 0
2786 단편 청개구리의 꿈을 꾼 이야기1 너구리맛우동 2014.02.24 0
2785 단편 동전 전쟁 빛옥 2013.03.15 0
2784 단편 푸른 고양이와 늑대소녀3 hybris 2007.07.15 0
2783 단편 습작 (습작이 제목이 아닌건 아시죠?)3 루나 2003.07.16 0
2782 단편 바퀴3 티슬 2013.07.15 0
2781 단편 그녀를 찾아서 mariate 2005.01.23 0
2780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1. 여신의 죽음1 먼여행 2004.09.22 0
2779 단편 [탄생] 달과 이름 단식광대 2012.03.30 0
2778 단편 너구리맛우동 2012.12.15 0
2777 단편 사조백수전射鳥白手傳 dcdc 2012.01.08 0
2776 단편 비, 내리다.2 초이 2013.08.20 0
2775 단편 어느 한 속어의 유래2 azuretears 2005.11.27 0
2774 단편 하나의 공간 아이 2003.07.14 0
2773 단편 별자리와 꿈의 기원 너구리맛우동 2013.01.15 0
단편 25시 azrael 2004.01.19 0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