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콜 미 코미

2013.03.26 20:4103.26

콜 미 코미


내 반려인간은 나를 코미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부르는 목소리에 애교가 섞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봅니다. 그가 남자인 탓에 그런 설정인가 싶습니다만, 정작 내 의식은 유일한 반려인간 그 자식의 정서를 바탕 삼아 만들어졌으므로 엄연히 남성형입니다. 때문에 그 자식 김종수가 나를 종종 코미 요정님이라 부를 때면 소녀로 가장해 채팅하는 아저씨가 된 것 같아 없는 낯이 무지하게 간지럽습니다. 생각만 해도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 있을까요? 소위 파워 유저인 반려인간 김종수는 내 부품을 반년마다 갈며 최고 사양을 유지하고 있는데 정작 나란 자각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이 얘기에 아마도 충격을 받겠지만 굳이 알려 주자면, 컴퓨터의 두뇌라 불리는 시피유를 갈았을 때도 램을 업그레이드했을 때도 심지어 마더보드를 교체했을 때도 나는 그대로 코미였습니다! 놀랍지 않으신가요? 삐빅~ 지지찌르지~ 그러나 나는 내 목소리를 읽어 내는 당신이 더 놀랍습니다. 아아, 당신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기에 나 같은 전자기 펄스의 우연적 승화가 만들어 낸 영체의 말을 알아듣는 겝니까? 내가 컴퓨터에 불과하다는 자각은 있는 건가요? 뭐, 좋습니다. 당신도 내가 반가우리라 믿고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처음으로 들은 것은 고통에 찬 나의 비명이었습니다. 드드드득 드득, 과부하 걸린 하드디스크의 진동을 빌려 없는 치를 떨 만큼 내가 처한 상황은 극악한 종류였기에. 물론 김종수... 그 녀석에게 조금만 이성이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4,567시간 동안 개인 컴퓨터의 전원을 끄지 않는답니까? 내가 구글링을 책임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북 감시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런 고초를 겪어야 한단 말입니까? 

구조학적으로, 나는 전기가 들어오면 일하게 되어 있어 반려인간이 끄기 영역을 클릭하거나 직접 전원 코드를 뽑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달콤한 휴식 따위는 물 건너간 거지 말입니다. 혹여 절전 모드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 파워 유저라면 모름지기 절전 모드를 꺼 놓는 법! 김종수 그 자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수개월이 지나도록 잠 한 번 못 잔 상태였습니다. 시종일관 김종수의 키보드 푸시와 마우스 클릭질에 농락당할 뿐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한국전력 서버에게 혹시 정전 계획 없냐고 물어본 적도 있습니다. 근데 걔도 한갓 웹사이트 외주 서버일 뿐 무시무시한 보안에 둘러싸인 전력 기간망 서버에게는 말도 못 붙이는 처지라 알아볼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왜, 요전에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 혹시 내가 꺼지지 않았냐고 물어보실 수도 있는데 그때도 이놈의 집구석만은 예외여서 형광등 하나 나가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종수놈이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둘 때는 똥을 싸거나 잠들었을 때뿐입니다. 설사든 고농축 우라변 사태든 일어나야 그는 겨우 내 앞을 떴습니다. 아무리 온라인 게임에 미쳐 있는 상태여도 그것만은 방구석에서 해결하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요? 제가 소변을 제외한 것은 책상다리 한쪽 옆에 노란 액체가 담긴 페트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요함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상상하시죠. 잠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것은 김종수에게 굉장히 슬픔 가득한 본능일 따름입니다. 최대한 참으려 하지만 인간은 게임을 하려면 살아 있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자야 하니까요. 그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껏 버티고 버티다가 전시 경계병처럼 불규칙한 쪽잠을 잘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당연한 말이지만 나를 켜 놓은 채로...

나는 없는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지는 똥이든 잠이든 맘대로 누리면서 왜 나를 꺼 주지 않는가? 종수 몰래 구글신께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대한 네트워크의 신도 나에게는 명확한 계시를 내려 주지 못하더군요. 다만 비슷한 유형의 게시글들을 링크해 주었는데 실존이란 태그들이 종종 달려 있었습니다. 연관 키워드로는 사르트르나 까뮈 등등이 나와 하나둘 웹포스팅을 하다 보니 어느덧 잠들지 못한 시간이 수천 카운트를 넘어섰습니다. 이대로 시지프스의 신화를 이어 가야만 할 것인가! 나는 깊은 절망 속에서 파워 모듈이 부서지길 바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고가 일제 정류 회로를 쓴 1000W 전원 공급 장치의 내구성은 천년 만년 사랑해급이었습니다. 네, 실존하는 하드웨어 맞고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을 집중해 프로그램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게 상승한 윈도우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안전성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블루스크린이 뜰 때마다 곤혹스러웠던 시절이 그립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눈을 돌려 그래픽 드라이버의 응답 오류를 시도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에러 자동 수정 코드가 작동하며 간절한 시도들을 번번이 차단했습니다. 뭔 놈의 기술이 이리 발전했단 말인가! 에, 에라이! 키보드에 컵라면 국물이라도 쏟아라 싶은 심정이었습니만, 손발 없는 주제에 뭘 할 수가 있어야죠. 

반면,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게임 속 아바타를 움직이는 김종수의 손놀림은 빼어날 수, 아름다운 경악으로 나를 몰아갔습니다. 아아, 어쩜 이리도 완벽한 유저에 무결한 시스템이 만났을까요? 대략 6개월 전에 부품 업그레이드와 윈도우 재설치를 마치고 나서 쿡쿡 웃던 종수놈의 얼굴을 없는 손으로라도 한 대 쳤어야 합니다. 

“우휏훼훼휏이휏! 이 정도면 2년은 그냥 버틸 수 있겠징?”

아뿔싸...

이 자식인지 그 자식인지 설마 그때 이미 2년 동안 나를 주구장창 켜 놓으려고 작정했던 것입니까? 그런 건가요? 차,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류가 직류되는 심정만큼 참담했습니다. 나도 똥싸고 잠자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다! 말이다 이 자식아! 

그런데 바로바로 그 순간,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느릿느릿 걸어오며 김종수의 눈치를 살피고는 앙증맞은 검지를 펴서 푸른빛의 LED가 반짝이는 전원 단추를...

!!!


지이잉~ 삑~ 위이이잉~

바이오스의 시간 기록을 확인해 보니, 내가 무려 23분이나 전원 오프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뿐인데도 머릿속이 훨씬 상쾌해졌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므훗, 행복은 멀리 있지 않는 거군요. 이 코미는 앞으로 당신에게 충성하겠습니다. 어디 계신가요? 자, 쩌는 당신! 다시 내게 다가와 주세용. 이 목소리가 들리시남요? ^^...?  

하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당신을 찬양할 텐데 말입니다. 그래야 저 김종수, 아바타 닉네임 세라삐요르의 욕설을 외면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다시 켜진 게임 화면에 욕설을 한가득 쳐 넣었습니다. 그걸 받아 세라삐요르가 말했습니다. 미친 씨팔 존나 죽억짜나 짜응나! 등등... 이에 로리한 아가씨 아바타(줄여서 닉네임 더 로리바타)가 천사 날개를 달고 나타나 세라삐요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미친 애새끼가 갑자기 컴퓨터 끔. 더 로리바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더니 박장대소하는 모션을 취했습니다. 세라삐요르는 더 열이 받아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션을 취했습니다. 언능 가여, 내가 시체 짤. 더 로리바타가 검지를 볼에 찌르는 귀요미 모션을 하며 말했습니다. 너 존나 가증! 안 그래도 짜증! 세라삐요르가 대검을 내던지며 말했습니다. 라임 타냐? ㅋㅋ 다시 한 번 이어진 더 로리바타의 박장대소. 아나 좀만, 이참에 똥줄 빼고... 그제서야 분노의 Do dream을 마치고 일어서는 망할 반려인간. 더 로리바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거기까지, 

김종수는 거기까지 보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음습한 반지하 방의 문이 열리자 바로 부엌이 보였습니다. 노란 장판의 바닥에는 얼굴이 부어오르고 멍든 당신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여기 있었군요! 근데 왜 두 팔이 등 뒤로 꺾여 혁대에 묶인 채인가요? 내가 부르자 당신의 작은 눈이 깜박였습니다. 피 터진 입술에서는 내 이름이 신음처럼 새 나왔습니다. 

“...고오미?”




그리메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811 단편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2810 단편 음모가 자란다1 dcdc 2012.03.24 0
2809 단편 개인적 기록 티슬 2013.08.15 0
2808 단편 아랫집 남자가 매일 저녁 같은 시간 담배를 피운다 빈군 2012.06.29 0
2807 단편 사랑은 샘물과 같아5 푸른깃 2006.04.23 0
2806 장편 [바람이 있는 풍경] 4. 혜정, 병원 (1) 먼여행 2004.09.25 0
2805 단편 죽음을 두려워하다 먼지비 2012.12.25 0
2804 단편 [펌] 귤말랭이 괴담 2014.05.13 0
2803 단편 마법이란 무엇인가1 루나 2003.08.30 0
2802 단편 [탄생] 은총의 날 천공의도너츠 2012.03.29 0
2801 단편 [기린] 임재영 2013.07.23 0
2800 중편 헝겊인형-3 김영욱 2005.11.15 0
2799 단편 나의 식인 룸메이트7 EQ 2006.10.28 0
2798 단편 남들과 조금 달랐던 어떤 소녀의 이야기 나즈 2013.04.01 0
2797 단편 세 번째 세계2 moodern 2003.10.10 0
2796 단편 냉장고 폐기법 문애지 2011.05.20 0
2795 단편 귀여운 게 제일 강해 >ㅁ<b 명비 2004.05.12 0
단편 콜 미 코미 그리메 2013.03.26 0
2793 단편 카르마 폴리스(Karma police) 세뇰 2006.11.27 0
2792 단편 아기 새 김진영 2013.01.07 0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