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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동전 전쟁

2013.03.15 22:0603.15

동전 전쟁


전에 스승님께서 인류의 역사는 곧 신병기의 역사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스승님 말씀치곤 흔치않게도 옳은 얘기라고 봐요. 활이 그랬고 청동검이 그랬고 등자와 화약이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지식과 기술을 쌓아 올리고, 그걸로 좀 더 쉽고 간편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게 화끈한 무기를 만들어내는 순환. 그 팽팽 돌아가는 악순환이야말로 바로 인류 역사의 요체라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의 새 장을 쓰셨네요, 스승님.”
“어라? 로즈 양이 이렇게까지 감탄해 줄 줄은 몰랐는데.”
“불행과 오욕으로 얼룩질 역사예요.”

스승님은 신나 죽겠다는 듯 싱글거렸습니다. 그래서 전 이 일이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확신했고요. 전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누르면서 그 악취미의 소산을 바라봤습니다. 스승님이 며칠 동안 마법연구실에 틀어박혀 뚝딱뚝딱 만들어 낸 희대의 신병기를요.

파괴력이 부족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네, 대단히 훌륭한 무기였어요. 향후 마법공학의 발전상을 수백 년쯤은 뛰어넘어 버린 것 아닌가 싶었죠. 높이 1.6미터로 사람과 비슷한 크기와 형태입니다. 눈에서 열 광선을 내뿜어서 산을 불태우고 양손은 뱅뱅 돌아가는 톱날로 바뀌어 사방의 모든 것을 작살내 버립니다.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고 산을 미는 괴력을 냅니다. ‘레이더, 열추적미사일, 개틀링 건도 빼놓지 말게, 로즈 양!’ 왕국군의 제식병기는 아직도 냉병기와 말과 대포 위주라는 걸 감안해 봅시다. 이 신병기 앞에선 돌도끼 들고 다니는 원시인 신세도 못 되겠네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병기의 동력원입니다. 마나? 마력핵? 땔감? 그런 상식적인 물건이 아니었어요. 스승님은 싱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멈춰선 병기에 다가갔어요. 인간형 병기의 뒤통수에는 가는 홈이 세로로 뚫려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흥얼거리면서 50페니드 은화 하나를 꺼내 그 홈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딸그랑, 찰캉 찰캉. 묘하게 청량한 소리를 내며 동전을 흡수한 병기의 눈알 램프가 빨간색으로 점멸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굉음을 내며 제트 엔진에서 굉음을 뿜으며 뒷산을 박살내러 훌훌 날아가 버렸어요.

50페니드에 1분. 한낱 마법사 도제 입장에선 지갑에 제법 부담이 되는 금액이지만 압도적인 파괴력이 필요한 사람에겐 비싼 값이 아니겠군요. 무엇보다 그 아래에 깔린 철학이 제법 성실합니다. 누구에게든 가릴 것 없이 정확히 돈 넣은 만큼, 그만큼 등가의 폭력과 파괴를 행사하고 뒤끝 없이 깔끔하게 돌아오겠다는 사무적 태도 말이에요. 저런 걸 연구실에서 뚝딱 만들어 내다니. 과연 희대의 미치광이 대마법사라는 악명이 괜히 드높은 게 아니죠. 오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마법능력을 타고나셨다 합니다.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는 건 행운이긴 합니다,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또라이기도 하다는 게 문제지.

“다 좋은데요, ‘저거’, 왜...”
“전투용 안드로이드라네.”
“저 안드로이드, 왜 제 얼굴을 하고 있죠?”
“그야 제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배려 때문이지. 로즈 양, 자랑스럽지 않나?”
“민망해요.”
“본인의 외모에 자부심을 갖게, 로즈 양. 이렇게 이쁜 얼굴을 왜 부끄러워하나.”
“제 외모엔 불만 없습니다. 동전 먹고 깽판 치는 결전 병기에 그걸 갖다 박아 놓은 게 문젠데요.”
“덕분에 로즈 양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거라고.”

이름을 남겨 봤자 세상을 파괴한 희대의 마녀, 악귀의 현현 정도가 될 텐데. 그 부분을 지적하자 스승님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보였습니다. 언제나 제게 반면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참 헌신적인 분이세요.





무슨 수를 돌이킬 수 없겠다는 확신 얘길 했었죠. 그 예측은 불행히도 들어맞아 버렸어요. 돌아와 멈춰선 안드로이드에는 ‘로잘린 Mk.1’ 이라는 낯 뜨거운 이름이 붙었고, 스승님은 다음 날 해 뜨자마자 그걸 곧장 왕궁에 들고 가 버렸습니다.

물론 국왕 에트렝 4세는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국왕은 왕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능력 면에서 스승님과 호각지세를 이루는 만만찮은 인물이었거든요. 스승님께서 주체할 수 없는 마력과 대책없는 미치광이 기질과 뒷감당이란 걸 모르는 무책임함 때문에 그런 민폐를 끼친다면, 국왕은 순수한 악의와 검은 야욕으로 그렇게 한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등신 같은 폭군이었다는 말이에요.

국왕은 늘 전쟁을 통한 정복 사업이이야말로 진정한 자아 실현의 수단이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날로 쇠해 가는 국력이 현실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을 뿐이죠. 스승님께서 국왕에게 로잘린 Mk. 1과 2천 페이지짜리 제품 매뉴얼을 진상해 올린 순간 걸림돌은 사라진 거예요. 국왕은 우리가 어전에서 채 물러가기도 전에 옆 나라 케니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해 버렸습니다. 국왕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자신의 평생 숙원 사업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 어전에서도 당당히 스승님께 눈을 흘기며 귓속말할 수 있었죠.

“스승님, 돌았어요?”
“그러게. 우리 로잘린 양의 미모를 좀 더 완벽하게 표현했어야 하는데. 내가 조소에는 소질이 없다네.”

물론 전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마법사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에 케니시아산 고춧가루를 탈탈 털어넣는 것으로 그에 대한 응징을 완료했습니다. 밤새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화장실에 드나드는 스승님을 방치해 둔 채 저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에트리아-케니시아 100일 전쟁, 좀더 간단하게는 로잘린 전쟁이나 동전 전쟁이라고 향후에 이름 붙은 이 전쟁은, 짐작하셨겠지만, 유사 이래 비슷한 것조차 찾을 수 없는 참으로 희한한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장본인인 저는 정작 마법사탑에서 스승님을 재우고 입히고 먹여 살리느라 바빴고 이따금 왕궁에 불려가 귀찮은 질의응답이나 당한 게 다인지라 전장을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어요. 생생한 증언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한 번 풀어놓아 보자면.

사실 전장을 직접 눈으로 본 생생한 증인은 몇 되지도 않아요. 전장에 투입된 인력 자체가 소수니까요. 로잘린 Mk.1 의 선제공격에 유명을 달리하신 케니시아 국경 경비대 측에 조의를 표해야겠네요. 

전쟁 첫날, 로잘린 Mk.1 은 케니시아 국경 지대를 마음껏 유린했습니다. 성벽을 갈아내 버리고 산을 절개해 무너뜨렸죠. 다행히 안드로이드 병기의 광범위 공격은 겉보기에 비해 별로 실속은 없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어서, 의외로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하니 그건 다행스런 부분. 성채를 들고 흔들어 뒤집어 버릴 수 있지만 그 전에 도망가 버리면 그만이고, 레이저 열 광선은 치명적인 온도까지 상승하려면 한참을 조사하고 있어야 하니 인마 살상용은 아니었다고 해요. 개틀링 건이나 미사일은 확실히 무서운 무기지만, 그 아까운 탄약을 쓸 만한 적 병력은 다가오지 않았으니. 하여 로잘린 Mk.1 은 무사히 케니시아의 방어선을 무력화하고 귀환했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1분마다 귀환했다가 동전을 흡수하고 출격하길 반복한 거지만요. 12시간, 720분, 36,000 페니드짜리 활약이었어요. 제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짤그랑 짤그랑 찰캉 찰캉. 선불도 후불도 예약도 받지 않습니다. 오직 1분에 50페니드 현장 결제 뿐.

국왕은 희희낙락했고, 다음 날 황무지로 변한 케니시아 영토에 에트리아군을 진주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장에 또 한 명의 로잘린이 나타났거든요. 두 번째 로잘린은 에트리아군을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내 주고 – 죽을 만큼은 또 아니고 – 국경 너머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패닉에 빠진 에트리아 지휘부는 두 번째 로잘린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어요. 금세 알아낼 수 있었죠. 별로 비밀도 아니었으니. 그날 스승님과 저는 케니시아 수도에 가서 또 한 명의 등신 같은 폭군한테 로잘린 Mk.2를 진상하고 왔거든요. 고춧가루도 다 떨어진 김에 한 포대 새로 사왔고요.

스승님의 역작인 전투용 안드로이드에게 어디 창칼이 들기나 하겠어요? 곧 로잘린은 로잘린으로밖에 상대할 수 없다는 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이후 전세는 참 지루하게 흘러가게 되었어요. 짤그랑 짤그랑, 50페니드 은화 소리와 함께 양쪽 진영에서 로잘린들이 출격해요. 제트 엔진을 분사하며 날아간 두 미모의 안드로이드는, 꽤 격렬하게, 하지만 서로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는 못할 수준으로 싸우는 거죠. 갖가지 곡예비행과 회피기동이 펼쳐지고, 레이저 광선이 전장을 수놓고. 이따금씩 절벽 한두 개가 갈려 사라지고. 참고로 출격에 15초, 귀환에 15초입니다. 전쟁은 30초짜리 라운드가 매분 새롭게 일어나는 형식으로 변해 버렸어요. 찰캉 찰캉. 출격하는 로잘린에게 병사들은 플래카드라도 만들어서 응원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아, 이렇게 말하니까, 로잘린 Mk.0의 자격으로 전장에 한번 가 볼 걸 그랬다 싶어요.

당연히 두 국왕은 만족할 수 없었겠죠.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로 스승님의 목을 날리고 싶었겠지만, 그건 불가능해요(제가 자주 시도해 봐서 알죠). 스승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양측의 군대는 스승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요. 대마법사가 국가에 반역한다는 건 형용모순이에요. 차라리 국가가 대마법사에 반역한다는 쪽이라면 모를까. 하여 군대 대신 양국의 사신이 마법사탑으로 득달같이 달려왔습니다. 빨래를 널던 제 얼굴을 보고 낙마하더군요. 이제 시집은 다 갔다 싶어요. 사신이 쓰는 말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어렵긴 한데,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어요. “더 쌈박한 로잘린 내놔.” 저는 분별 있는 소녀이므로 이 말을 개인적인 희롱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스승님은 냉큼 그 요구를 받아들였어요. 그리고는 신이 나서 연구실에 틀어박혔죠. 저는 할 일이 줄어들어서 몸이 편해졌고, 대신 마음고생을 좀 했어요. 좀 공포스럽기까지 한 기간이었습니다.
“로즈 양! 여기 이 헤드 파츠 좀 봐주겠나? 내가 일생일대의 역작을 만들어낸 것 같아.”
“제 머리통 떼 와서 제 앞에서 자랑하지 마세요.”
“하지만 로즈 양 얼굴이잖아. 로즈 양의 검수를 안 받으면 진행이 안 되는데.”
“...들어가서 일이나 하세요. 연구실 문을 밖에서 잠가놓든가 해야지.”

그리고 일주일 쯤 후에 또다시 로잘린이 완성되었습니다. 신형 모델은 더욱 강력한 제트엔진과 대량살상병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0초마다 귀환하는 촌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무선동전투입장치 역시 부속품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이제 본영에 있는 동전투입구에 동전을 넣기만 하면 로잘린은 끊임없이 싸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경점 하나. 이용요금이 분당 500페니드로 상향 조정되었다는 점이죠.

희희낙락한 양국의 사신들은 저마다 자기네가 유일한 Mk.3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겠죠. 유감스럽지만 이번에 만들어진 로잘린 역시 두 대였습니다. 로잘린 Mk.3-001과 Mk.3-002는 양국으로 전달되었고, 맹렬한 속도로 은화를 소모하기 시작했습니다. 1분마다 동전 10개를 넣어야 하니 분명 찰캉거리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을 거예요. 이제 두 대의 Mk.3은 24시간 작동했고, 각각 매일 72만 페니드를 삼켜대기 시작했습니다. 제 2년치 봉급이에요.
양측이 훨씬 강력한 병기를 동원하게 됐지만, 결판이 날 리가 없었습니다. 로잘린 간 싸움의 영향권이 증가했기애, 양국의 군대는 국경 지대에서 더욱 멀리 후퇴해야 했고요.
벌개진 눈을 한 사신들이 다시 마법사탑으로 쇄도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로잘린을 요구하려는 거였죠. 사신들이 마법사탑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역시 더 많은 로잘린을 만들기 위해 벌개진 눈을 한 스승님이었습니다. 이제 익숙해져서 꽤 속도가 붙은 것인지, 스승님은 똑같이 생긴 로잘린을 쑥쑥 잘도 뽑아냈어요. 스승님의 평에 따르면 조금씩 다른 헤어스타일과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면서요.

“스승님, 이제부터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마세요.”
“뭐...뭐? 아니 로즈 양, 대체 왜 그러는가?”
“진지하게, 스승님이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Mk.3은 대량 양산되기 시작했고, 양국에 똑같은 숫자가 균등하게 분배되어 나갔어요. 전쟁 70일차에 모델넘버는 기어코 300을 찍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시기에 전장에서는 300명이나 되는 로잘린들이 미친 듯이 뛰고 비행하고 모든 것을 부수고 있었다는 이야기죠. 전장은 국경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도 그 전장은 마치 좁아터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로잘린들은 초고성능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었기에 우회 기동 및 후방 타격도 불가능했어요. 그저 국경 지대에 몰려서 패싸움을 벌이는 게 한계였지요.
양국은 차차 이 전쟁이 지구전이 되어간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유일한 전투력의 척도는 바로 은화의 수였어요. 이제 양국 통틀어 300명의 로잘린은 매일 2억 페니드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습니다. 다년간의 폭압정치로 잔뜩 부풀어오른 양국 왕가의 내탕금에 손대야 할 만큼 엄청난 부담이 되는 양이었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로잘린의 가동을 멈추면 금세 전선에 전력공백이 생길 건 자명했습니다. 그러니 동전 투입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아마 그곳 군영의 최요충지는 바로 무선동전투입장치들을 가동하는 방이었겠지요. 큼직한 방의 벽면을 가득 메운 걸로도 모자라서 서가처럼 늘어놓은 선반들에까지 들어찬 투입장치들. 텁텁한 실내 공기. 기계의 가동에 수반되는 열기로 후덥지근한 분위기. 그리고 수레 단위로 줄지어 들어오는 페니드 은화. 계속되는 투입 작업. 끝없이 이어지는 짤그랑짤그랑 동전소리. 실시간으로 초개처럼 산화하는 왕가의 부. 여러분, 이것이 바로 최신 현대전의 양상이랍니다.

100일 동안 계속되던 전쟁은 시작됐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종언을 고했습니다. 어느 날 두 국왕들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이냐고요? 그들의 숙원인 정복사업도 일단 나라 굴릴 돈은 남겨둔 다음에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그런 걸 아는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전쟁이 끝난 건 공식적으로 스승님의 부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로잘린의 동전투입 기능이 먹통이 되었다던가요. 당연히 동전 투입이 중단되면 Mk.0을 제외한 모든 로잘린은 1분 내에 고철덩이로 전락하고 말죠. 당연히 수리 요구가 빗발쳤습니다만, 전쟁 100일차에 들어서던 이 시기 스승님의 관심은 이미 전투기계의 유지보수 분야에서는 떠나가 있었습니다. 대신 스승님은 미술책들을 한 아름 들고 와선 조소로 인체를 표현하는 기법에 대해 새로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스승님은 로잘린들을 보수하는 걸 거절했습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애초에 돈 받고 판 것도 아니니 사후처리를 해줄 의무도 없어요. 오히려 스승님은 302대의 로잘린을 죄다 반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누구 말이라고 거절하겠어요. 그리고 전 이건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뒤처리가 고달팠거든요.

그래서 전쟁은 끝나버렸어요. 두 국왕 폐하께서는, 권력의 원천이었던 내탕금 규모가 바닥을 보일 만큼 뚝 떨어진 마당이라 영 살아가기가 옛날 같지 않으신가 보더군요. 두 분은 이제 만사 조심조심하면서 목이 달아나지 않기만을 빌며 지내야 할 거예요.

하루가 멀다 하고 스스로가 식모인지 하녀인지 고민하는 게 일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도 마법사의 도제이기는 했나 봅니다. 이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면서 마법사나 할 만한 괴상한 고민을 하게 되었거든요. 제일 이상한 건 무엇보다도 동전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였죠. 은과 소량의 여타 불순물로 구성된 50페니드 은화만을 에너지원을 삼는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요. 로잘린 안드로이드들은 그 동전들을 땔감처럼 다 태워 없애 버린 걸까요?
궁금즐을 해결하기 위해 한창 전쟁이 발발하던 도중에 한 일이 있습니다. 저금통을 깼어요. (아까운 내 만 삼천 페니드!) 각각에 간단한 추적 주문을 걸었죠. 그리고 수도로 가는 우편마차에 실어보냈습니다.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그 동전들이 공출되어 로잘린의 뱃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동전들은 순조롭게 에트리아 수도에 도착했고, 순식간에 공출되어 빠른 속도로 전선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마침내 동전이 도착하여 투입장치실 안까지 진입한 것이 확인되었을 때, 저는 거기에 집중하느라 그만 점심 식사 준비하던 걸 태워먹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데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어요.
동전은 이윽고 전선에 배치된 로잘린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더니,

다음 순간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에 추적 주문이 그만 풀려버린 게 아닌가 착각했어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추적 결과. 동전은 두 왕국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저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집중했고, 냄비를 하나 더 태워먹었고, 동전들 하나하나의 행방을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단어 하나를 더 붙일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것들은 모든 ‘필요한’ 곳에 소리 없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의 놋그릇 속에, 노동을 마치고 해진 뒤 돌아오는 어린아이의 주머니 속에. 한숨을 내쉬는 가장의 텅 빈 금고 속에. 저는 왜 실시간으로 돈을 녹여버리는 전쟁이 100일동안 지속되면서도 어떠한 디플레이션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왜 동전 자체가 부족해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죠.
저는 제 마음 속에서 스승님에 대한 평가를 미묘하게 상향 평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상향’이라는 것은 쓰레기장 밑바닥에 파묻을지 하수 처리장에 빠뜨릴지 정도의 차이를 말한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뒤처리가 남았습니다.
남겨진 로잘린들을 고이고이 간직하고자 하는 스승님의 의지는 꽤 강력했습니다만, 그래도 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고철덩이가 된 로잘린들은 죄다 절벽 너머 호수로 던져넣어 버렸습니다. 로잘린 모습을 한 로잘린 수백 명이 하나하나 풍덩풍덩 빠져드는 광경은 꽤 섬뜩한 것이었습니다.
“아아, 로즈 양. 나는 슬프다네. 절벽에서 꽃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어...”
스승님의 소름 돋는 한탄은 꽤 길어질 것 같았어요. 저는 황급히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말하고 마법사탑으로 돌아가는 길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식탁에는 어떤 식으로 케니시아 고춧가루를 투하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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