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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은총의 날

2012.03.29 13:1103.29

●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루하루의 궤적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라지만 살다 보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깨우침을 얻는다. 어느 누구를 만나던 간에 모두 공통된 경험이 있다는 것은 이것이 곧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것을 뜻하는 걸지도 모른다.
“인생의 중요한 일은 예상치 않게 일어난다.”라는 깨우침 말이다.

사실, 소소한 일상사는 늘 우리가 대비하면서 살지만 결혼과 장례, 사고, 임신 같은 일들은 마른하늘에 천둥처럼 다가오는 법이다. 개인의 일상이 이렇게 뜬금없는 돌연변이 사건에 의해 인생항로가 뒤바뀌는 것처럼, 사회 역시 이런 사안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개인들의 총합이 사회이며 사회가 모여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여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랴. 예상치 못한 작은 사고가 역사를 뒤흔들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물며 그것이 신의 역사하심이라면 어찌하랴.

이 글은 그러한 사건과 사고의 총합을 주관하는 신의 놀라운 섭리를 상정하고 써 내려간, 다른 이들과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재조명해 본 글이라고 생각한다. 십 여 년 간의 조사와 연구가 포함되어 있는 이 기록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위치에서 문헌고증의 형식을 빌어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을 최선의 목표로 삼았음을 알리는 바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후일 밝히려니와, 독자 제위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음을 먼저 알린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 나는 굉장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기록을 남기는 것이 어떤 여파를 가져올 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신상에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 무섭기도 하다. 아니, 무엇보다 이 기록으로 인해 내가 행여 신성모독(神聖冒瀆)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 이성(理性)을 대하는 준엄한 태도와 사가(史家)의 의무를 놓을 수는 없다는 개인적인 확신이 없었다면 나는 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쪼록 후학들과 후세의 사가들은 내 기록을 오만한 철부지의 투덜거림으로 대하지 않기를 앙망할 따름이며 그간 베풀어준 종교국의 후의에 섣부른 오점을 남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기록은 누구나 존경하며 흠숭해 마지않는 우리 존귀하신 예언자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니 예언자의 사역과 성취에 대한 약간 색다른 시각의 분석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기록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의 시작,
‘징조’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 징조의 발생과 시작

현재 목격자와 미디어의 공식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날짜는 20X3년 4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징조’는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최초 관측은 강남구 삼성동 삼성역 근처의 지하철 환풍구 위에 약 10초간 나타났으며, 그 뒤 3분의 간격을 가지고 두 번 더 동일한 장소에 나타났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재 수많은 목격자와 복음서에 의해 알려진 ‘환한 서치라이트 같은 밝은 빛 아래 푸른색과 주황색이 섞인 입자들의 성스러운 유영(遊泳)’과 동일한 형태의 빛 줄기였다. 하지만 첫 번째 등장은 수많은 PPL과 옥외광고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의아하게 보이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 현상이었던 듯하다.

두 번째 징조는 4월 3일 용산 이촌 나들목의 인도였다. 역시나 십여 초간 빛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밝은 날씨에도 확연히 다른 밝기와 묘한 색깔로 사람들과 운전사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징조는 사라졌다. 그리고 4월 4일과 5일 시차를 두고 징조가 두 군데서 출현했다. 응암동과 북가좌동,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과 서울 영등포에 잠시 나타난 빛 줄기는 상대적으로 1,2차보다 많은 사람에게 목격되면서 본격적으로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도 이 때였다. 당시 4월 6일자 신문의 사설이 간략하게 당시 상황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을 가늠하게 한다.

-… (중략)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과 가톨릭대 성심교정에 십여 초간 나타난 원형 섬광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기상청 관계자는 “현재 대한민국 전역은 어떤 특이한 기상징후도 포착되지 않는다.”라고 밝혀 사진의 진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20X3. 4.6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내용을 보면, 4월 2일부터 시작된 ‘징조’, 즉 섬광기둥의 현상은 일종의 특수장비를 사용한 [티저광고] 이거나,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CG기술을 사용한 일종의 PR일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어떤 사업체나 광고사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공표하는 곳이 나오지 않자 사람들은 점차 호기심에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징조’들을 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서울의 도심광장에 ‘징조’가 보인 것으로 확인되며 이 부분에 대한 것은 동월 20일 자 경향신문에서 간략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불안을 조성하는 섬광기둥은 무엇인가?’ (20X3. 4.20 경향신문 사회면)라는 쪽 기사를 볼 수 있다.
특이한 사항은 아직 방송 쪽의 미디어는 이것을 취재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시에 오락채널용으로 소스를 취합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4월20일 이후, ‘징조’는 잠시 그 활동을 멈추기 시작한다.


● 예언자의 도래

20X3년 5월 2일. 오전 11시 57분 (사서에 의하면 정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침 근처를 지나던 중국인 관광객에 의해 촬영된 캠코더에는 11시 57분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을 걸어가던 한 사내에게 ‘징조’가 임하였다. 이미 익히 아는 예언자의 신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석이나 설명을 달지 않겠다. 하지만 간략하게 배경설명을 하자면 예언자는 당시 모 대학 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으로 30세의 나이였다. 재수, 다단계 판매, 신춘문예에 꾸준히 공모하는 문학도 등의 전력을 지닌 늦깎이 입학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청년기를 보냈던 것이 확실하다. 교단에서 발행한 전기에 의하면 청년시절 수많은 명상과 침묵 속에서 신의 현현을 갈구했다고 전해지지만 사회적으로 봤을 때 별다른 생산활동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에 왜 예언자가 세종문화회관 앞을 거닐고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예언자 본인의 입을 빌면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전날 꿈에 계시 받고 움직였다고 한다. 혹자에 의하면 아는 지인에게 돈을 빌리러 나왔었다는 모욕적인 음해도 있지만 그러한 사실여부를 떠나 예언자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5월 2일 정오. 홀로 거리를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경복궁을 쳐다보고 있던 예언자의 몸이 광휘에 휩싸인 것이 그 시각이었다.

“순간 온몸에 번개가 통하듯 강한 충격이 몰아쳐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전신을 덮는 공기 안에서 신의 따듯한 손길을 느낄 수 있더라. 눈을 뜨고 있으나 사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귀가 열리되 들리지 아니하며 손이 있으되 뻗지 못하고 혀를 놀릴 수 없었으니 그 때 오직 일심으로 소리 높여 외치는 천둥 같은 소리들이 위에 머물렀나니 ‘위대하다 위대하다 이것은 지고한 하늘의 말씀이라.’ 하더라. 수 많은 회중이 같이 있었으되 오직 그 것은 내게만 임하니라” (시공복음 1장 23절)

예언자의 말씀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당시의 일은 예외적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누구도 ‘징조’의 빛기둥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러했다. 당시의 광경은 전술한 중국인 관광객의 캠코더에 그대로 찍혀 있는데, 주변의 모든 이들이 뚫어져라고 예언자를 쳐다보며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고 가운데 서 있는 예언자는 강신(降神)이라도 받은 듯 허공을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주변으로 산란하는 빛무리 역시 붉은 빛과 녹색이 혼합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를 보고 있던 한 노인이 무릎을 꿇는 장면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이 장면은 많은 성화(聖畵)의 주제로 익히 알려진 광경이다.) 특이하게도 이번 ‘징조’는 약 2분30초가량 계속되었는데 지금까지 목격된 어떤 현상보다 긴 시간이었다.

[강림절]을 실제로 목격한 이들의 진술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많은 사료가 뒷받침하고 있고 이때부터 TV에서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예언자는 여하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가 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인터뷰는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5월16일 KBS와 가진 뉴스타임의 짤막한 전화통화였다. 그는 짧게 한 마디만을 던졌을 뿐이었다.

“때가 되었으니 모두들 준비하라.”

그 이후 약 한 달간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많은 방송사가 예언자와의 인터뷰를 시도하였으나 아무도 예언자의 거취를 찾아낼 수 없었다. 유일한 관련 인터뷰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무릎을 꿇은 노인과의 인터뷰였는데(YMBC) 노인은 거액을 요구하며 일체의 대답을 회피했다고 한다. 신학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주장하기를, 예언자는 그 동안 신이 주신 보금자리에 칩거하여 자신에게 내려진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에게 닥친 과업의 막중함에 대해 번민하고 통곡하는 시간을 지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슷한 용모를 한 사내가 강남 논현동의 월셋집과 편의점 부근 에서 종종 목격되었다는 소문 역시 떠돌았다. 필자의 조사 결과 동명이인으로 추정되는 사내의 이름으로 등록된 주소지가 논현동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정확한 사실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어쨌건 인터뷰가 시작된 뒤로부터 한 달 후인 6월 20일, 갑자기 예언자는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열 네 시종과 부흥사역

“나와 함께 마지막으로 예언을 받을 자 열넷의 이름이 생명책에 오르리니, 그들은 자의도 아니고 타의도 아니며 오직 빛 가운데서 있을 것이라.”

6월 20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다시 나타난 예언자는 말쑥한 흰 정장을 입은 채 모인 사람들에게 일성을 외쳤다. 그는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도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를 알고 있는 이도 있었고 관광객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경청했으나 외형에 대한 거부감이나 종교적 신실함이 있던 사람들은 점잖게 그의 말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예언자께서는 오연히 그들을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더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시다.

“예언자께서 불신자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가 믿지 못하니 너는 스스로 볼 것이요 목격한 뒤에는 다시 내게 올 것이라. 그 은총은 하늘과 땅과 빈자와 부자와 있는 자와 없는 자에게 모두 동등하리라” (시공복음 2장 5절)

종교국과 교계의 정사(正史)에 의하면 예언자의 눈에서 빛나는 전능한 광휘에 불신자들이 겁을 먹고 도망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민속학자 유태문이 쓴 [서대문야사](은총력12년, 명월당)에 의하면 예언자의 그 말이 끝나자 한 무리의 비둘기들이 분뇨를 내 뿜어 항의하던 이들이 황급히 도망갔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예언자의 말 앞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예언이 있은 뒤 이틀 뒤부터 다시 ‘징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빛줄기가 사람들을 그대로 덮었다. 맨 처음 ‘징조’를 받은 이는 여의도 전경련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빠져나가던 대봉물산의 이기수 회장이었다. 그는 ‘전기가 온 몸을 관통하는’충격을 받고 잠시 혼절해 있다가 일주일 만에 회사를 사회에 환원하고 예언자를 좇은 첫 번째 사도 [일위]가 되었다. 그다음 주부터는 하루에 1-2명씩 ‘징조’에 덧씌움을 당했다. 한강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박사용, 김포공항에서 화물을 담당하던 진학철, 무역회사 대리 서경아를 시작으로 시종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시종의 선택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었다. 서울역 앞의 노숙자부터 시작해서 서초동 대법원 공익요원까지 서울 시내의 모든 이들이 부름을 받았다. 마지막 열 세 번째 ‘징조’는 당안리 화력발전소 앞을 지나던 만삭의 주부 김수영이었다. 김수영이 임신하고 있던 [복중(服中)시종]오철영까지 합해 열 네 명이 채워지니 예언자는 더 이상 징조가 내리지 않을 것이요 이 열 네 명이 마지막까지 예언을 받들 것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더 이상 빛 줄기는 내려오지 않았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 열 네 시종은 20XX년 7월부터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예언자가 내려준 말씀에 의해 전국에 포교를 하러 다니기 시작한다. 맨 처음 포교를 시작한 청량리역 광장은 이제 성지가 되어 세계 각국의 신도들이 순례를 오는 장소가 되었다. 교계는 경전에 써 있는 [영적각성의 시기]를 이때부터 계수한다. 묘하게도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7월 이후에 논현동에서 비슷한 용모의 사내를 봤다는 이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세월이 너무 지나 그 시기의 일을 기억하는 이를 찾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누가 월셋집과 편의점을 오가는 청년을 기억하겠는가. 그리고 이는 음해로 윤색된 신성모독에 가까운 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반발과 경계

[일위] 이기수의 재력과 인맥에 힘입어, 예언자는 지금까지 어떤 종교의 창시자나 예언자가 으레 겪었던 간난산고를 그리 심하게 받지 않으며 순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예언의 말에 따르면 시간과 때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고 전하지만 그 파급력은 세계 종교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20X3년 7월에 서울에 포교를 나선 이들은 달랑 열 네 명이었던 반면 그 해 12월에 이르러서는 전국 36개 지부 35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교세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예언자의 포교는 기타 많은 종교의 창시자들과 격이 다른 존엄함을 지니고 있었다. 교리에 잔뜩 물든 신학자들이나 이성 지상주의자들이나 신비론자들이 몰려와 조롱과 경멸이 섞인 소리로 그를 대할 때에도 예언자는 어떠한 반론도 없이 슬픈 눈동자를 보이며 그들의 머리 위로 손을 들기만 하셨을 뿐이다. 불같은 웅변이나 학식과 권위, 칼에 의존한 것이 아닌 오직 신의 은혜와 사명에만 의지하여 나아가니, 애초에 고개를 흔들던 이들도 하나 둘 그의 곁에서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일위]이기수는 첫 번째 제자답게 예언자가 거둔 이들을 성심껏 돌보는 것에 전력을 다하였고 많은 이들이 또한 그의 겸허함 앞에 감동감화를 받았다고 전한다.  

[예언의회]라는 공식명칭과 조직이 정비되어 대외적인 선전물 발행과 대변인까지 둘 정도로 성장한 것은 다음 해 2월의 일이었고, 성도들의 십시일반에 의해 서울 중구의 빌딩 하나가 통째로 예언의회 총사무국이 된 것이 3월이었다. 무서운 교세였다. 이렇게 예언의회가 급작스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교단에서는 ‘예언자의 대언과 신에 감화된 영의 능력’이라고 촌평을 해 버리지만, 당시 주변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단 일위 이기수의 재력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검찰에 뻔질나게 불려 다니는 기존 종교들의 나태하고 부도덕한 타락이 그 표면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지구촌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재난의 연속이었던 점이 포교를 가속화 시킨 게 아닐까 싶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해일이 덮쳤고, 유카탄 반도와 남미는 원인 모를 지반침하로 거대한 싱크홀(sink hole)이 수십 군데 생겼다. 볼리비아는 도시 하나가 지하로 꺼져버리는 대참사도 일어났다. 유럽은 폭설과 함께 베수비오와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동시에 폭발했고 캘리포니아에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20X3년은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영적 각성의 해가 아닌 대재앙의 해였다. 이런 시기에 하늘의 빛을 받아 움직이는 신의 사도들이 땅을 누비기 시작했는데, 교세가 풍선처럼 부푸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국외 지부까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일본의 경우는 다음해 5월 한국 내 신도의 숫자와 맞먹는 규모로 성장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기존의 종교계는 당연히 반발했다. 기독교연맹은 20X3년 9월 발 빠르게 예언의회에 이단판정을 내걸고 강도 높게 비판을 내걸었다. 불교계도 기독교계보다는 점잖지만 새파랗게 날이 선 성명서를 내놓았다.

“작금의 사태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살아있는 개인의 아집과 명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음이라. 누가 그 말에 책임을 질 것이며, 그 나오는 말의 결말을 예견할 능력이 있겠는가.” (20X4. 1.25 심각스님.“예언의회 사태에 비추어 선을 논하다”: 불교신문)

이번에는 예언의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직접 예언자께서 말씀하시니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은밀한 것을 보이시는 신의 말씀이 있으니 들으라. 예언의 은사가 함께한 이들이 같이 모여 한 번에 은혜를 보일 날이 올지라. 그 날은 믿는 이들에게는 승리의 날이 될 것이오 그 이후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해가 되리니 짧은 횟수로 천 년을 채우고 길게는 만년이오 오직 마도(魔道)의 종(終)이 보일 것이나 믿는 자만이 시험을 감당하리라.” (시공복음 12장 10절)

예언의회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심판과 멸망의 예언이 세상 밖으로 나온 20X4년 6월이 바로 유명한 [외적 각성의 월]이다. 자고로 한국에서 종말론을 외치는 단체치고 그 끝이 좋았던 역사가 없었으며,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성종교단체는 이구동성으로 예언의회를 비판해 들어갔으나 이미 예언의회의 세력은 기존 종교단체들의 세력에 맞설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교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나 당시 국회와 재계 쪽에도 예언의회의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교인들은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능한 예언자의 권능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이 함께 모인 [예언의회 철폐 결의 운동본부]가 20X4년 6월 발족하자 예언자께서는 “소산을 나누려는 이들의 뱃속이 검도다. 곧 그들의 탐심에 심판이 이르리라”하는 예언을 남기셨다. 예언은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고도 빨리 진행되었다. 세 종교단체의 연합은 정관의 첫 항에도 동의하지 못한 채 폭력사태로 붕괴되어 버렸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발족 모임이 가회동의 중식당이었는데 별다른 설명을 안 해준 목사가 돼지고기만두를 이맘에게 권하면서 칼부림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혹자는 주문 실수로 돼지고기가 우연히 연회장에 배달되어 일어난 사고라고 말하지만 어찌 되었건 신의 도구로 쓰임 받는 예언자의 권능이 만천하에 입증된 사건이었다. 3개 종교 유혈사태는 예언이 일어난 지 채 72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간에 벌어진 것이었고 중식당 사건 발생 5시간 만에 연합은 파행을 맞게 되었다. 오직 예언의회의 명성만 높아질 뿐이었다.

20X4년의 대한민국은 예언의회의 천하였다. 교세가 연말추산 100만을 넘어섰으며, 믿지 않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예언의회의 말투와 행동이 유행처럼 미디어를 타고 들불처럼 번졌다. 특히나 미디어에 종종 등장하는 예언자의 말투는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여서 대한제국시절 기독교 성경번역과 비슷한 근세 한국어가 현대 한국어를 대체하는 수준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반대급부로, 정치권과 국정운영을 맡은 고위층들은 예언의회의 이런 움직임을 고운 시선으로만 보지 않았는데 이런 세태는 당시 국무회의 녹취록에서도 슬쩍 살필 수 있다. 후손들의 명예를 생각하여 직책과 이름은 이니셜로 처리하였음을 이해 바란다.

-        20X4년 2월 5일 국무회의 속기록: 청와대 –
A: 현재 시중에 창궐하는 예언의회의 발호가 사회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라 보십니까?
B: 커다란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소요나 반사회적 행동은 보고된 바 없습니다.
C: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B: (다급하게 끼어들며) 대부분의 종교단체와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 후원을 하는 것뿐입니다. 별다른 특이사항이라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C: 제가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이번 가로림만 신도시지구 분양에 다섯 개 건설업체가 참여했는데 이 중에 세 개가 예언의회 계열이라고 알려져 있고, 항간에는 대규모 종교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말입니다
B: (굳은 목소리로) 항설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희 조사에 의하면……
D: (갑자기 말꼬리를 자르고 들어온다) B장관 예언의회 쪽하고 연관이 있지 않습니까?
B: 무슨 소리십니까? 갑자기
D: 한달 전에 강동 천호지구로 이사하셨다는 소문이 돌던데 불분명한 자금이 유입되었고 그게 [일위]시종의 개인계좌에서 넘어갔다는 제보가……
B: (버럭 고함을 지른다) 같은 내각끼리 내사하는거야? 엉?
A: 모두 조용히 합시다! (욕설과 고함, 아수라장이 된다)

당시 정권 말기의 내각은 비보도 사안이 많아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녹취록이 상당수 존재한다. 정권이 바뀌고 종교국 산하 행정개편이 이루어진 뒤 많은 혹세무민의 기록들이 소거되거나 파기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술한 것같이 아직 파편으로 존재하는 기록들도 몇 개 발견된다.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급격한 예언의회의 성장에는 이기수 회장의 뒷심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현 가로림성지의 개관이 교단이 이야기하는 바대로 ‘건설사들의 자발적인 헌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리라 필자는 믿는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짧은 시간 성장한 신흥 종교의 성장에 윗선의 비호나 외압, 정책변화는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우연히 내각에 예언의회의 성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이유 없는 핍박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 빛기둥 ‘징조’ 에 관한 이설

사실, 필자가 전하려 하는 말은 지금부터이다. 원래 필자는 종교국 산하 [역사담당국]의 사서들을 총괄하는 사관이었다. 수많은 사료와 자료를 정리해 예언자와 일위시종 이기수를 비롯한 열네 시종의 일대기를 편찬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다. 수많은 자투리 사료들과 정사와 정부기록들을 취합하던 중, 생각보다 많은 이설(異說)들이 존재하며, 그 중에 몇몇은 존귀한 예언자의 권능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특하고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운 참언들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옥석을 분간하는 것이 필자의 일인지라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 많은 시험과 신앙의 도전을 받았다 말할 수 있다. 공직에 봉직하던 10여 년간 신앙에 관련되지 않거나 배척하는 사료들을 선별하여 없애던 중에 나는 우연하게도 묘한 사료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필자가 사료를 입수하게 된 경위부터 설명해야겠다. 이 자료는 한 사내가 역사담당국으로 직접 찾아와 내 손에 전해준 이메일의 프린트 복사본이었다. 원문은 지운 지 오래이며 남아있는 것은 사본이 전부라고 말했다. 간략히 사내의 입에서 나온 사료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전국에 예언자의 복음이 천하를 석권하던 초기, 정확히 말하면 20X3년 12월에 한 통의 외신이 국내 통신사에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인테르팍스 민스크지부에서 국내의 모 통신사로 날라온 것으로 보인다. (인테르팍스 사의 원본 역시 묘하게도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통신문은 당시 보도국장이었던 김 모 씨의 앞으로 전달되었는데 이 소식은 김 모 씨의 개인 메일함으로 들어간 채 보도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 모 씨는 몇 년 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이후 유족의 장남이 나를 통해 통신문을 전달했다. (김 모 씨는 이 통신문에 대해서 장남에게만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약4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모두 이 지면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1990년 플레세츠크 우주기지에서 비공식적으로 발사된 플리우스2호 바비예다(승리)는 성층권 궤도에 무사히 안착하고 임무를 수행하려 하였으나 발사체의 회로 이상으로 목표궤도보다 200km 높은 지점에 올라가며 성층권이 아닌 열권에서 기계고장을 일으킨 채 궤도비행을 하고 있었다. 200메가와트급 회전 레이저포를 장착한 ICBM요격용 군사위성 바비예다는 태양광 충전장치로 자가동력을 유지하며 외대기권 요격뿐 아니라 고해상도 전파 카메라를 사용, 1/30m 오차범위가 가능한 국지적 지상요격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로 설계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플레세츠크 기지의 바비예다 문건은 모두 파괴되었으나 91년 1월 마지막 교신에 의하면 지상촬영용 카메라와 해상도는 아직 성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레이저포 역시 경미한 타격만을 받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연이어 나오는 통신문을 요약하자면 20X3년 서울 도심을 수십 차례 조사(照射)한 빛줄기의 형태는 바비예다의 레이저 사격을 위한 예비 타겟팅, 즉 조준으로 보이며 빛줄기의 현란한 색깔은 근처 대기 중에 포함된 분자의 산란광이라는 견해였다. 하지만 발사체계의 문제점으로 타겟팅 이후의 발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조준]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문건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그 동안 불규칙적으로 일어난 ‘징조’를 설명함에서 가장 체계적인 설명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 발사한 인공위성의 수명이 20X3년까지 이어질 확률은 희박하다. 더군다나 성층권도 아닌 열권에서 공기층을 뚫고 굴절되지 않은 채로 내려오는 레이저 조준이라는 것이 당시 과학기술로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사항이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을 김 모 씨도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이 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추론에 불과하다. 화성의 탐사로봇도 자신을 스스로 고쳐가며 예상수명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임무 수행한 전력도 있으니 그저 흔한 가설로 치부해 버리기엔 문제가 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예언자가 받은 소명과 환상과 계시는 그저 개인적인 망상증의 발현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이론을 채택한다면 그 이후 일어난 시종의 선택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그저 고장 난 인공위성의 무작위 조준이 사람들을 열 세 번 찍었다는 것인가? 예전에는 한 번도 사람들을 찍지 않았던 ‘징조’가 예언자 이후 사람들에게 [타겟팅]되게 설정된 것일까?

이 말도 안 되는 발신미상의 정보를 아직도 소각하지 않고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내 신앙의 부족함 때문도 아니고, 내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마도의 길로 넘어가고 있음도 아니다. 예언자여 도우소서. 이 기록을 그나마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 내용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일어난, 기록문명이 발달한 현대문명사상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기적의 순간과 어쩌면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은총의 날]에 대한 기록이다.


●은총의 날

이미 복음서와 예언자의 육성청취로 모든 이들이 은총의 날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니 구차한 진술은 피하도록 한다. 단지, 복음서가 아닌 세속의 기준으로 봤을 때 20X4년의 정세는 결코 예언의회에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조직의 부흥과 폭발적인 신도의 증가에 비례하여 기존 종교와 정치권의 흉조(凶爪)는 갈수록 날카롭게 날을 벼리는 중이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언자의 때가 이르매 악인들의 마음이 서리를 맞은 들짐승처럼 흉포해졌다고 하나, 현실적인 이유는 가로림만 성지사업에 대한 이권 분배의 문제가 아니었는가 싶다. (오 예언자여, 저의 강퍅함을 사하소서.) 사역의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일위시종 이기수는 비록 정계에서 은퇴했다 치더라도 개인재산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고 보는 것이 진보신학의 최근 학설이니 나의 견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실, 예언자께서는 적신으로 움직이시며 손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셨건만, 열 네 시종은 자신의 스승과는 반대의 삶을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천상의 시종들이여, 저의 무지함을 사하소서.) 사람이 갖는 물욕에서 그 때까지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예언자께서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고 믿는다. 복음서의 은총절 전반부를 보면 이런 예언자의 고뇌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께서 가라사대 신을 보고 믿는 자들이라도 탐심과 악함을 모두 떨어버릴 수 없나니 이것은 사람의 능으로 할 수 없음이라. 눈물로 회개하는 나의 기도를 신께서 들으사 모두가 함께 다시 살아나고 들릴지라”(시공복음 20장 21절)

예언자의 권능으로도 사특한 무리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20X4년 7월 예언자의 선포가 있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검찰이 예언의회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뇌물수수혐의를 받은 일위시종 이기수가 전격적으로 구속되었다. 도주우려, 증거인멸의 우려 때문이라 했지만 이것은 예언의회의 권위를 꺾기 위한 마도의 획책이었다고 종교국의 공식적인 기록은 남기고 있다. 사료와 녹취록을 통해 살펴본 일위시종 이기수는 안티테제를 형성하는 반영웅(反英雄)의 행동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신심과 열정이 남들보다 뛰어났을 뿐이다. 이기수가 구속되자마자 순식간에 언론과 미디어의 호의적인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고 예언의회는 순식간에 국적(國賊)의 위치까지 내몰리니 이것이야말로 간교한 악마의 논의라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속세의 눈으로 보면 종교권력과 정부권력의 투쟁이었지만 그것은 불신자들의 시각일 것이다. 예언자께서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셨기 때문이다. 동시에 당신께서는 마지막 사역의 마무리를 할 때가 되었음을 자각하신다.

20X4년 9월 11일, 예언자께서는 갑자기 자신이 마지막 말씀을 전할 때가 되었다고 전국의공중파 채널 07:00에 방송되는 [은혜의 시간]을 통해 말씀하셨다. 서울광장에 앞으로 사흘 뒤에 당신이 말씀을 전할 것이니 마지막으로 말씀을 받고 권능을 받으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순식간에 불법집회라며 막는 경찰들과 정부 앞에 시작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 사흘간의 투쟁기는 복음서 [광장기]에 쓰여 있는데 걸인시종 성기조에 의해 작성된 아름다운 운문은 속에 수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거대한 철의 장막’ 과 ‘ 철갑을 두른 마병의 권세’로 대표되는 경찰권력과 ‘말씀의 깃발’로 상징되는 신도들의 밀고 밀리는 접전 속에 셀 수 없는 순교자들이 나온 ‘서울광장의 성전’은 언제 읽어도 처연하며, 신도들의 의분을 끓어오르게 하는 명문이다. 결국, 이틀간의 치열한 혈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진 신의 기둥]에 의지하며 마병을 무찌른 신도들은 광장으로 들어갔다고 [광장기]는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권력자들은 언론을 동원, 이러한 이적마저 부정하려는 강퍅함을 내보인다.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예언의회와 경찰의 힘겨루기는 예기치 않은 사건에 의해 일단락 되었다. 오후 6시경 시청사 배관공사를 하던 외부 크레인의 직경4m 철근 파이프 고정쇄가 끊어지며 경비 중이던 경찰 호송차와 신도들을 덮쳐 최소 20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신도들은 아수라장을 틈타 광장에 침투하였으며 경찰들은 격렬한 충돌 속에 무장을 해제당하고……(중략)” (20X4. 9. 13. 한성일보)
    
내가 우연히 사교의 잔해에서 발견한 위조신문의 사설은 이런 식으로 순교자의 숫자를 줄이고 우연히 일어난 사고인 것처럼 신의 권위를 깎아 내리려 하였다. 어쨌건 광장에 진입한 신도들은 재빨리 물심양면 협조하여 주변의 물품으로 단상을 쌓고 마이크를 연결하여 자정이 되기 전 예언자의 말씀이 울려 퍼진 강대상을 마련하였다. 당시 집회 참석자들이 성인 남성보다는 여성과 청소년들이 주를 이루었음을 생각해보면 대여섯 시간의 노동으로 거대한 일렬의 단상과 하나의 강단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소소한 기적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일단 성도들이 단상을 만들기 시작하자 마병들은 물처럼 밀려나 빠져나갔다고 [광장기]는 기록한바, 신의 이적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하다. 일설에 의하면 경찰청장이 광장의 사건을 전해 듣고 상급자 보고를 하러 가던 중 계단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을 입은 덕에 지휘체계가 붕괴하였다고도 전하지만 현재 그것을 입증할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하여간 당월 14일 아침 9시. 예언자의 목소리가 광장에 청아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수십만의 청중들이 광장에 모여 신의 대언을 듣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는 정리된 있는 학설이 없다. 9시 이후 예언자의 최후 성언(聖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설이 분분하다. 집회에 동원된 카메라는 단상을 향해 있어 정확한 인원파악은 불가능하다.  공식 기록들에 따르면 경찰추산 삼 천명 대 성도추산 삼십 오만 명의 인파가 군집했다 전한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 견해와 광장의 넓이로 추산하건대 14-15만 정도의 인파가 동시에 운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규모가 아닌 예언자의 말씀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수척해 보이는 얼굴로 성도들을 씁쓸히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현재 이 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카메라는 옛 호텔 자리에 자리 잡은 구형 16mm 보도카메라인데 피사체가 너무 멀어서 얼굴 외에 정확한 음성이 지원되지 않는다. 음성 녹취록은 소실되었고 근거리에서 잡은 예언의회의 카메라는 음성파일이 날아갔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학자들이 무성으로 말하는 예언자의 표정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였는지를 연구한다. 그나마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저는 지금까지……”라고 말하면서 눈을 살짝 내리까는 예언자의 모습이다.

   열네 시종이 마무리한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 이루어지리라. 믿음있는 자들이여 너희는 복 있는 자로다. 오늘 본 것을 전하고 천하의 생령들에게 알려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라. 믿는 자에게는 은총이요 불신자에게는 마도의 해로다.”(시공복음 25장 25절)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관계자들과 검찰은 독순술과 음향파일을 조합하여 다음과 같은 낭설을 퍼뜨리려 노력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을 속여왔습니다. 저는 예언자가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종말이나 신의 도래 같은 건 모릅니다. 온다 해도 저는 모릅니다.” (20X4년 10월 21일자. 검찰청 조사 발표 회견문 中)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것은 지금까지도 예언자학(學)을 다루는 신학도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신학자 만프레드 빅터 윤의 주장대로 “신의 현현에 대한 준엄한 경고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신언론(神言論)]을 따를 것인가 역사학자 정문숙씨의 [자기반성에 입각한 대중구원의 각성]으로 볼 것인가는 각 개인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사실 이 말은 바로 몇 초 뒤 일어난 예언자의 권능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찍은 16mm 카메라에 의하면 갑자기 단상으로 제자들이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이고, 보석으로 풀려난 일위시종이 예언자를 보호하려는 듯 뒤에서 덮치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예언자는 그들의 몸동작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뻗어 올린다. 이 장면 이후 진동 때문에 카메라는 땅에 곤두박질쳐 정확한 상황을 알아낼 수 없다.

사가(史家)들에 의하면 하늘에서 거대한 ‘징조’의 기둥이 단상을 휩싸고 엄청난 열기가 그들을 감싸 올렸다고 적혀있다. 동시에 땅에서 불꽃이 치솟아 시청을 넘어 서대문에서도 보일 거대한 불꽃기둥을 만들어내니(높이가 100미터 이상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불과 함께 예언자와 시종들은 형체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전한다. 시청광장은 아수라장이되어 버렸고 측면에서 찍던 카메라 두 대는 화염의 열기로 센서가 망가진다. 정확하게 단상에 있던 예언자와 시종들만이 화염승천을 해 버렸고, 십 여분 후 불기둥이 사그라들 때까지 모인 모인 신자들은 자신들이 목도한 기적을 보며 하늘을 향해 울면서 찬송을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서울시청사의 첨단을 보면 불에 그슬려 검게 탄 자국이 남아있거니와 그 광경을 목격한 신도들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살아서 당시의 벅찬 감격을 전한다. 믿지 않는 경찰들과 불신자들도 그 광경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정부와 언론의 발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6개월 뒤, 남아있는 마지막 시종, [복중시종]오철영이 예언지회 회장과 다수당 총재를 동시에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은 예언회의를 국교로 삼게 된다. 그 이후의 일들은 편만한 사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불필요한 진술은 줄이도록 하겠다.

다시 필자가 조사했던 기록과 가정을 토대 삼아 마지막 부분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기로 하자.

내가 남기려는 말은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먼저 전제하려 한다. 이는 소련위성 바비예다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 서술하는 내용은 인테르팍스 통신사의 전송문이 사실이고, 김모씨의 번역본이 사실에 근거해 있으며, 그가 절대 문건을 위조하지 않았고, 군사위성이 존재하며 동(同) 기체의 기능이 살아 있을 때를 가정해서 적는 것이다. 절대로 이 글을 읽는 후학들은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내린 가설은 이런 것이다.

-        만약 타겟팅 프로그램이 작동되기 시작한 바비예다가 그 동안 자가수리를 하면서 맨 처음 잡아 놓은 ‘우선목표’ 인 예언자를 저격한 것이라면?

100메가와트급 대구경 레이저가 예언자와 시종들을 직격한 것이 승천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것만으로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불꽃의 화염기둥은 설명이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서울시 도시계획과의 20X4년 11월 감사보고 문건을 서울시청 사고를 조사 중 발견하게 되었다. [서울광장 배관 공사중 발견된 크랙으로 6차 지하공동구의 가스관에 결함이 의심됨]이라는 내용이었다. 은총의 날 직후 단상주변은 싱크홀이 일어났다.
이쯤 되면 정확하게 사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 고출력 레이저장비를 다시 복구한 바비예다는 맨 처음 잡은 ‘우선목표’의 궤적을 추적 중, 다른 목표들과 같이 군집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최대출력의 일점사로 목표들을 향해 레이저를 발사한다. 그 레이저는 과녁들을 적중시킴과 동시에 크랙이 발생한(배관공사를 했다는 경찰의 말이 사실이라면) 6차 지하공동구를 타격, 들어 찬 도시가스가 발화하며 엄청난 고압의 불기둥을 만들어낸다. 설상가상으로 [광장기]에 언급된 ‘성도들이 급조시킨 단상’은 전승에 의하면 근처의 드럼통들과 골재들을 만들어 섞은 것이었다고 하는데 배관공사가 당시 실제로 행해졌다면 옥타-마그네슘의 발화재가 들어있는 드럼통이 몇 개 섞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불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줄기. 형체도 없이 사라진 예언자와 시종들……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남는다.
왜 예언자에게 ‘징조’가 내려온 것인가?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왜 예언자에게 레이저가 떨어진 것일까?


●오직 은혜를 구할지니

필자는 지난 10년간 이 문제를 연구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그 중 대부분은 필자가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인 예언자를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이 천년 마도의 해에 다른 불신자와 함께 영영히 남겨지는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을 계속 연구한 것은 어떤 알 수 없는 소명과 ‘인간에게 이성을 허락하신’ 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지난 5월, 필자는 나로우주센터를 방문했다. 그 동안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필자는 의외의 결론을 마주하게 되었다.
폴리우스2호, 바비예다의 잔해는 확인해 볼 수 없었다. 나로우주센터와 국립천문대에서 관측한 바로는 인테르팍스의 옛 문헌에 부합하는 크기와 형태를 지닌 인공위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야 필자는 인테르팍스가 보냈다는 김 모 씨의 전보가 철저하게 조작된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10여년 간의 연구가 허망한 일을 추적함에 다름이 없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돌아가면 지금까지 써 놓은 원고를 불사르며 내 모자란 신심을 통회하리라. 이렇게 마음 먹고 상심한 채로 우주센터의 플랫폼에 서 있었다.
그 때, 관측센터의 전문연구원이 고개 숙인 나의 모습을 낙담한 것으로 여기고 툭 하니 한 마디를 던졌다. 그날은 우연히도 5월 2일이었다.

“여기 특이한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긴 합니다.”

그것은 선대의 관측연구원이 기록한 작은 관측보고서로, 종교국 이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과학문헌 중에서 온전히 형태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서신 중 하나였다. 나는 연구원이 준 데이터를 돌리며 떨리는 손으로 20X4년 9월 14일 날짜를 클릭하였다. 짧은 관측소견이 하나 적혀 있을 뿐이었다.
[대한민국 상공 300km 지점으로 진입하던 이스라엘 제(制) 무인실험 우주선 헤세드가 정체미상의 운동체와 부딪혀 파괴됨. 추정시각 09: 48]

필자는 그 문건을 가만히 들고 석상처럼 멍하니 서서 연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수 많은 종이 울리듯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착각이 들었다. 연구원은 자신이 준 문헌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는 채 필자를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마 나는 종내 모니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어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신의 오묘한 섭리는 그렇게 예언자를 이 땅에 이끌어 내신 것일지도 몰랐다. 그 때를 위해 바비예다를 예비하시고 헤세드를 예비하셔서 당신의 말씀으로 경계를 삼아 마도천년의 불구덩이를 살아야 할 모든 인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오직 이 때를 위해 준비된 바비예다는 영광스런 쓰임이 끝나자 신의 권능으로 다시 영원한 우주로 날아가 버린 것이리라. 아니, 필자는 예언자의 신성함과 그 권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설사 그가 능력이 없는 일개 사람이었을 지라도 그 모든 것은 신의 섭리 아니었겠는가? 바비예다가 존재하지 않는 들 어떻단 말인가? 이 모든 일은 신께서 예비하신 일들인데 소련산 고철위성이 없었다고 일어나지 않았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가 용기를 내어 연구를 끝내고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것이다. 신의 섭리는 자연 어디에나 편만 하시니 그것을 찬양치 않을 도리가 없었다.

종교국의 권위는 날로 강성해지고, 이 땅의 신민들 95%는 예언자의 서를 읽고 있다. 세계 열방의 사람들도 조금씩 말씀을 받아들이며 40%에 육박하는 이들이 마지막 보인 예언자의 권능 아래 모이는 중이다. 필자 역시 그들 중 하나인 일개 사관에 불과하다. 수많은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인 우리를 위하여 넓은 우주를 떠돌고 있을 부서진 바비예다를 보내신 신의 한없는 사랑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으랴. 오직 은혜를 구할 뿐이다. 나의 신심은 이 세속적인 조사를 통해 오히려 강해졌나니, 시련을 통해 믿음은 굳건해지는 법이다.

오비디우스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우연은 항상 강력하다. 낚싯바늘을 던져두라. 예기치 않을 때에 걸려들 것이니. -

신의 이름과 예언자의 권능을 찬양할지니라. 때가 왔으니 믿는 자들이여 힘을 내라. 은총이 빛줄기처럼 내리는 그날이 멀지 않으리라.


은총력 42년 9월 29일 경기도 퇴촌의 서재에서 한 촌로가 쓰다.
Et veritas Domini manet in aeternum. (주의 진리와 은혜는 끝이 없도다)

canicul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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