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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 한 속어의 유래

2005.11.27 20:1311.27


용은 태고 이래 신성한 동물로 존경 받아 왔으나, 그 위상은 근래에 들어 급격히 떨어졌다. 용도 동물의 한 종류로 취급되면서 사람들이 그 활용 용도에 더 고민하기 시작한 탓이다. 용의 부산물들이 여러 가지로 의미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를테면, 용의 뼈가 있다. 거대한 몸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가 있으면서도 비행을 위해 가볍게 진화해온 그 뼈는 자연의 경이 중의 하나로,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유사품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각종 건축 재료 등으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과학자들이 거미줄의 유사품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랄까.
용의 날개를 비롯한 가죽, 용의 비늘, 용의 이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용의 안구의 수정체는 렌즈 연마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천체 관측 망원경에 사용되어 왔으며, 용의 고기는 비싼 가격에 미식가들이게 팔리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용이 사람들을 습격하거나 가축을 잡아먹는다는 헛소문까지 더해져- 용을 사냥하는 것은 한 때 전세계적인 유행이 되었다. 용들은 이에 한데 모여 저항하고, 싸움을 벌이고, 전쟁까지 벌였으나 개미떼처럼 덤벼드는 인간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자연의 왕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용들은 그 이후 깊은 산속이나 바닷속,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사막 한 구석으로 몸을 피해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워낙 거대한 덩치 때문에 몸을 숨기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해 거주지를 늘리려는 인간들의 시도와 맞물려 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다.
용의 개체 수 감소에는 488년 일어난 대공황도 한 몫을 했다. 대량의 실업자들은 목숨을 잃더라도 성공하면 인생 역전이라는 용 사냥에 너도 나도 뛰어들었으며,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한때) 차지하고 있었기에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따라 그 개체 수 증가가 몹시 느린 용들에게 이는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480년 당시 500여 개체가 있던 용의 숫자는 대공황이 끝났을 때는 12마리에 그칠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일부는 아예 절멸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통계를 냈던 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상황을 비탄하게 여겼다.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용이지만, 우리는 용의 생태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파충류로 분류할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럴 기회조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개체수가 적어졌기에 용 사냥꾼들도 실업자가 되어갔으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부 사냥꾼-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직업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장인정신을 주장하고 있었다-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 사냥을 그만두었다.

524년, 세계 조류학회에 한 용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남아있는 자료에 따르면 그 용은 어깨높이가 18미터, 추정연령 500년 - 용의 나이는 용의 뼈와 비늘이 성장하면서 남기는 나이테 모양의 자국을 통해 추정된다-의 은색 용이었다고 한다. 그 용은 놀라고 경악하고 공포에 질린 조류 학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이로다. 용 사냥꾼들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동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나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되었으니, 굴욕스러우나 태고 이래로 지속되어 온 우리의 혈족을 나의 대에서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에 너희들에게 나를 멸종위기동물로 지정하여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식이 조금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차피 한 마리 밖에 남아있지 않으면 용은 어차피 멸종할 운명이 아니었나라고 생각할 것이고, 상식이 조금 더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연재해나 인재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싸우는 일이 아니라면 용이 자연사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후에 조류학회에서 펴낸 한 서적에 따르면 화석과 건축자재로 쓰인 용의 뼈를 모두 분석한 결과 가장 오래 산 것으로 판정된 용의 수명은 5,000년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용이 입에서 불을 내뿜는 대신 그렇게 말을 하자 조류 학자들은 놀란 심장을 주워 삼키며 정신을 추스렸다. 그들은 의논해보겠다는 뜻을 용에게 전하고 회의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하루가 되지 못하여 수다스러운 기자들과 전신과 전보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에 퍼졌으며, 곧 세계각지에서 유수의 동물학자들이 이 자칭 세계 최후의 용을 만나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들은 모여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당시의 서기관이 기록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도록 하겠다.


파충류학자 : 용은 파충류로 분류되어야 하며, 용을 보호하고 그 생태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파충류학자 협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은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조류학자: 하늘을 날 수 있는 생물이 어째서 파충류로 분류됩니까? 용은 조류가 분명합니다.

파충류학자: 용은 비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빨이 달려 있는데 어째서 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류로 분류하는 것입니까?"

조류학자: 용에게도 날개 죽지 부근에 깃털이 있습니다. 일부 진화가 덜 된 원시 종의 새들에게서 부리에 이빨이 달려 있거나 갈고리 발톱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용은 항온동물이 아닙니까? 나는 체온을 유지하는 파충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파충류학자: 항온의 의미가 다릅니다! 멸종한 공룡들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거대한 몸에 따라 체온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컵에 담긴 뜨거운 물은 쉬이 식지만 욕조에 담긴 물은 쉽게 식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이 정도도 모르면서 학자라고 하는 겁니까, 당신은? 게다가 그 고대종의 경우 피막으로 된 날개로 하늘을 나는 종류도 있고, 비늘의 변형으로 털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 종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도 조류라고 할겁니까?

조류학자: 바보 같은 소리 관두시오! 그 파충류들은 비행을 하지 못하고 다만 활공을 할 뿐이라는 사실의 논문이 작년에 발표되었는데, 그것도 읽지 못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용은 비행에 필요한 가슴 근육이 충분히 발전되어 있고, 이는 조류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란 말이오! 따라서 우리는 용을 원시적인 조류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오!

파충류학자: 그럼 당신은 날수 있다고 박쥐를 조류로 분류하고 부리가 있다고 오리너구리도 조류로 분류할 셈입니까! 이 무지몽매한 사기꾼 같으니!

(하략)

3일 밤낮으로 계속되었던 이 마라톤 회의는 당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한 동물학자이자, 해부학자의 의견에 의해 결론이 지어졌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 학자가 한 정확한 말은 알 수 없다. 서기관이 2일 내내 욕설을 받아 적다 지친 탓에 사직서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용에 대한 연구 자료가 너무 부족한 탓에 겉으로 보이는 몇몇 특징들로는 용을 어느 동물로 분류할 것인지 결론을 낼 수 없겠습니다. 더 다각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바, 나는 용을 해부하여 그 특징을 관찰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말이 나오자 핏발 서고 갈라진 목으로 싸우고 있던 학자들은 잠시의 침묵 후에,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회의 시간 내내 졸았던 탓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한 동물 생태학자가 "마지막 남은 용을 해부하자니 당신들 미쳤소?"라는 말을 했지만, "과학의 발전을 위해 작은 희생은 불가피합니다"라는 반론에 묵살되고 말았다.
학자들은 곧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용 사냥꾼들에게 연락을 하여, 그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회의장 밖에 앉아 회의 결과를 기다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던 용을 죽이고 말았다. 이후 기중기와 암석 파쇄기가 동원된 일주일간의 해부작업을 통해 용의 내부 구조는 상세하게 해명되었으며, 심장의 발달 구조와 모이주머니의 존재 등 일련의 해부학적 특성에 따라 용은 조류로 분류되게 되었다. 파충류 학자들이 이에 거세게 반발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반론을 하기 위한 다른 자료를 구할 수 없었으니, 결국 이 논란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로서 마지막 용은 죽었고, 용 사냥꾼들은 모두 실업자가 되었으며, 우리는 자연사박물관에서 마지막 용의 박제(복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해부를 마친 이후 용이 조류로 분류되었을 때 한 동물학자 (이 사람은 해부를 반대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알려져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젠장, (용이) 새됐네."

이것이 사람들은 종종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 말하게 된 한 속어의 유래이다.

azure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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