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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푸른색 원피스

2005.03.03 18:4103.03

[푸른색 원피스]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신인 작가가 개인전을 연 갤러리 앞이었다. 나는 그 날 모처럼 생긴 혼자만의 주말을 즐기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옷장 깊이 넣어 두었던, 아끼는 원피스를 꺼내 입고 물방울 무늬 스카프도 맸다. 그걸로도 뭔가 부족하다 싶어 고민하다가 마침 새로 산 미니어쳐 향수가 있어서 그걸 뿌려 보았다. 인터넷 화장품 쇼핑몰에서 로션 같은 걸 사면서 배송료를 면제 받으려면 몇 천 원을 더 써야 하기에 괜히 골라 본 것이었다. 시향 조차 해본 적 없고 향수에 관해서는 영 문외한인 나로서는, 색깔이 곱고 향이 달달하더라는 것 밖에 알지 못했다. 맥이 뛰는 자리에 뿌린 향수는 무척 향이 짙었다. 나는 혹시 향수가 지나치게 진한게 아닐까 고민하면서 갤러리를 찾았다. 봄 초입인지라 가디건을 걸친 어깨가 제법 시려서, 나는 찾는 사람이 드문 갤러리 입구 쪽으로 발을 재촉했다. 그때, 그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았다.

“저어.”

놀랐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흔들어 그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남자는 곧장 당황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내 반응도 과했기 때문에 나도 곧장 사과했다. 남자는 얼굴을 조금 붉히더니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고, 남자는 곧 손뼉을 짝 치면서 내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 향수, 미라클이죠? 요즘 굉장히 흔한 향수라서…….”
“뭐예요?”

뭐 이런 매너 없는 사람이 다 있어!
나는 수치심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몸을 돌렸다. 흔한 향인지 아닌 지 알게 뭐람. 그것보다 향수가 역시 진했던 걸까. 나는 귀까지 확확 달아오르는 바람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돌아 보는 내내 마음이 진정 되지도 않고 그림 역시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어머니’라는 제목이 붙은, 도무지 뭘 그린 것인가 알 수 없는 그림 앞에서 옷가슴을 쥐고 속을 진정했다.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나가서 혼자 바람을 좀 쐬자. 그러면 향수 냄새도 가시겠지. 나는 곧장 바깥으로 나왔다. 출구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느긋하게 걸었다.

“저기.”

그 남자였다. 나는 손에 쥔 핸드백으로 그 사람을 후려칠 것처럼 오른 손을 긴장시키며 물었다.

“또 무슨 일이죠?”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돼, 됐어요.”
“괜찮으시면.”

옆으로 비껴 지나치려는 내게 그가 다시 말했다.

“괜찮으시면 차 한잔 사도 되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을 만큼 눈에 띄는 용모가 아니라는 것은, 서른 해가 가깝게 살아온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 만나는 남자를 경계하며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나 호감 가는 용모였다. 브라운관에서 보는 사람들처럼 훤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성실해 보였다. 그렇지만 처음 보는 남자와 차를 마시러 가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지는 일이어서, 나는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말해 놓고 나니 차 한 잔 정도야 어떠랴 싶은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쉽지만 처음으로 헌팅 비슷한 걸 받아 봤으니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리는 되리라 싶어 위안 삼기로 했다. 남자는 비켜 서는가 싶더니 급히 메모지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결국 명함을 한 장 꺼내 내게 주었다.

“꼭 전화 한 번 주십시오.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꼭. 저는 이 근처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사내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미라클이라는 향수 때문일까, 이런 일은. 어쩌면 일상의 기적 같은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나름 꿈꾸었다. 명함에는 남자의,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이름 세 자가 꼭꼭 박혀 있었다. 회사 이름은 낯 익지 않았지만 적어도 유령회사 같은 건 아닌 모양이었고 나는, 혼자 꽤 들떠서 며칠이나 잠을 설쳤다. 전화를 걸기까지는 닷새가 걸렸다. 남자는 전화를 받고 꽤 기뻐했고 우리는 그 며칠 후에 점심 시간을 빌어 함께 밥을 먹었다.

나는 미라클을 큰 병으로 다시 구입했다. 이번에는 향수를 사는 김에 다른 걸 사야 했다. 나는 생소한 영어 이름들 사이를 헤매다 평이 제법 좋은 링클프리 제품이나 영양팩, 새 마스카라 같은 걸 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바둑에 조예가 깊고 영화나 미술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뿌린 향수를 알아 맞힌 것치고는 향수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나보다는 많은 향수를 아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는 처음 만난 갤러리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주말 전시회를 관람했고 나는 항상 미라클을 뿌렸다. 나는 그 핑크색 액체를 일종의 부적처럼 여기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일 덕수궁 앞에서 볼까?”

그와 만나고 처음 맞는 봄이었다. 오월은 따로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화창하고도 아름다웠으며 연일 마음이 들떴다.

“응. 그럼 내일 봐.”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귀여운 내 남자친구는 전화기에 대고 스스럼없이 사랑해, 하고 속삭이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떠올렸다. 전화를 받고 끌 적마다 나는 화장대 위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미라클 향수 병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면 웃음이 피었다.

토요일 오후의 덕수궁 앞에는 햇볕이 눈 부시게 떨어져 그 빛 만으로도 사방에 꽃이 핀 것 같았다. 나는 지하철 역에서 나와 먼 발치에서 그를 발견하고 옷 매무새를 다잡았다. 처음 만난 날과 같이 푸른색의, 오래 아껴 입은 원피스를 입고 그가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해 준 목걸이를 했다. 귀걸이는 생일 선물, 시계는 내가 그의 생일에 커플용으로 장만한 것. 나는 행복에 못 이겨 몸을 떨었다.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평소와 다름 없이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웃음이 얼어 붙었다.

“왜 그래?”

내가 물을 때까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그가 걱정 되어 어깨를 잡았다. 그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냐니까? 응? 어디 아파?”

그는, 마침내, 내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작고 여리고 비통하게. 나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그가 울음을 삼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우리들은 나란히 걸었다, 오랫동안. 햇볕은 그의 단정한 머리카락 위로 환하게도 쏟아지고 나는 원피스 밑단이 튿어진 것을 발견했다.

처음 만났을 때 눈에 확 들어와서,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붙잡고 있었어.
사귀게 되었을 때 그는 자주 그렇게 속삭였다. 왜 그럴까, 왜 그랬던 걸까 열심히 생각했는데 미라클 향기가 풍겨서 이 향기에 반했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미안해.”

돌담길 앞에서 그는 몇 번이나 말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와 걸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러나 손을 잡지 않고 한참 걷고 그에게서 내가 모르는 여자 이야기를 들었다. 어렸고 치열했기에 애틋했던, 라디오 방송 사연으로 나올 것 같은 풋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지기 전에 나는 물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가 입던 옷이라는 걸, 왜 이제서야 알았어?”

답 없이 그는 걸음을 멈췄다. 지하철 역 앞에서 그와 나는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만났던 때처럼 그는, 무슨 말을 할까 고르는 양 머뭇거리더니 불쑥 말했다.

“이제 봄이네.”

지금은 오월이야. 봄은 이제 곧 끝이 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웃으며, 그러네, 하고 말했다. 사흘이 지난 다음에 반이나 남은 미라클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향수를 싱크대에 쏟아 붓고 빈 병을 헹궈 따로 내 놓으면서 나는, 우습지만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또, 봄이네.
이듬해 봄에 나는 그 원피스를 다시 꺼내 밑단을 고쳤다. 빛이 바랬어도 한두 해는 더 입을 수 있겠다.

이제, 봄이네.



:: end ::
--------------------
미라클 향수죠? 하고 묻는 남자, 미술관 앞에서 붙잡는 남자, 이제 봄이네요, 하는 대사.
……가 생각나서 문득 써 봤습니다.

미로냥
댓글 4
  • No Profile
    딥씨 05.04.06 16:27 댓글 수정 삭제
    이런 질문하면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제가 이해력이 조금 모자라서 물어 봅니다. ^^;; 그러니까 남자는 향수 때문이 아니라 원피스 때문에 반했던 거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먹는 사람도 좋던데...
  • No Profile
    딥씨 05.04.12 02:57 댓글 수정 삭제
    '먹는 사람'에도 꼬리말 달아놨습니다. 음, 두 편 다 좋지만 저는 '먹는 사람'이 더 좋군요. 제 취향이라서 그런가. ㅎㅎㅎ 아, 푸른 원피스도 좋습니다. 상큼한 느낌. 미라클 향수 냄새는 모르지만 아무튼 향수 냄새처럼 산뜻한 소설입니다.
  • No Profile
    녹용 05.04.16 19:03 댓글 수정 삭제
    예전에도 봤지만 한번 또 보니 새롭네요^_^
    미라클 향수는 저도 참 좋아하는 향수랍니다. 잘 보고 가요-.
  • No Profile
    미로냥 05.04.20 09:40 댓글 수정 삭제
    딥씨/ 네. 원피스 때문에 반했다는 걸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꼬리말 감사합니다:-)

    녹용/ 전 미라클에 이상하게 호감이 가는데, 정작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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