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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의 표정 없는 얼굴에 시달리다 완전히, 지쳐 버린, 쇠약해진 욕망은 음울하게 돋아
올라 가슴 가득 번져났다. 그녀는 귀엽게 찡그리며 내 아랫배를 다 파먹었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신촌, 행복에 겨워 날뛰던 그녀의 무시무시한 방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지 아홉 시간
째다. 나는 소름끼치는 사랑을 피해 한낮을 틈타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 방, 침대
위에 하얗고 각진 종이, 위에 얼빠진 문장을 남겨 두고 마침내! 탈출했다 섬뜩한 노래
높고 높고 기괴하게 떨리는 선율, 보이지도 않는 불꽃에 몸 태우며 도망친다……작별
을 고하노라 사랑스런 사람이여. 난 더 이상 이 들척지근한 사랑을 견딜 수가 없어!
사랑의 열기와 일상의 기갈에 더 버틸 수가 없다, 내 영혼이 뿜어내는 모든 빛에 품은
그녀의 깊은 혐오, 그녀는 나를 끝없이 증오한다! 그녀는 나를 너무나, 너무나, 미치
도록 사랑하고 있어! 사랑이 그녀의 항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면 나는 서울의 비릿한
냄새에 휩쓸리며 점점 사그라드는 영혼을 내뱉는다. 달아나야 한다, 발밑에 눌어붙어
끈적거리는 그녀 방의 바닥재! 걸음 사무는 노면 발바닥에 들러붙고, 떨어질 때 내지
르는 선득한 비명! 내 어리고 순진했던 시절은 완전히 끝장났다. 내 사랑 내 영원한
여인, 나는 서울 가파른 구역에서 그녀의 이름을 즈려물곤 몸서리친다 눈 아래 물 듣
는다. 듣는다. 멀리서 웃는 소리 들었다. 등어리에 가시 돋는다. 청각이 코끝에 매달
린다. 온몸에서 냄새가, 풍긴다, 옆구리에서 손바닥에서, 이마에서 소름 돋는 냄새 외
친다! 달리며 내달리며 그녀 냄새 떨군다 가랑이에 들러붙은 사탕 냄새! 설탕인형처
럼 부슬부슬 울었다. 도주로 어디에나 우리들의 냄새를 흩뿌렸다. 서울은 그녀 코앞
에 완전히 드러난 알몸뚱이 지도다. 사탕 구른 흔적을 따라 그녀는 기어올 테다. 숨이
가슴을 뻐개고 날아오른다 나는 계속, 달린다, 삭막한 도시 스산한 골목 어디에든 그
녀의 친척들이 숨어 산다, 그녀와, 그녀의 거대하고 위대한 일가붙이들을 위해 지어
올린 이 도시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다 소름끼치는 비명! 빛방울 번뜩이는 가로등 아
래서 무지갯빛 사랑 흐르는 소리 들었다. 못 들은 척 고개 돌리고 무작정 뛰었어야 했
는데! 나는 지쳐 종내 쓰러질 테다. 끝장난 사랑, 모두 다 파먹힌 연인, 끈적거리는 도
로 위에 들러붙은 서울 시민이 지금! 달빛 흐르는 거리에서 죽는다, 등골 마디가 다
부스러질 때까지 옹그리곤 기다린다 내 사랑! 당신의 목소리 여섯 개나 되는 당신의
발, 두 개의 기다란 더듬이! 서울 밤거리의 구현자, 번들거리는 그 등어리 흔적만 남
은 나라개, 황갈색의 앳된 뱃때를 기다린다 우리 사랑의 역사는 길지도 못했다. 우리
는 겨우 일주일간 사랑했다. 황홀했던 일주일 동안 나는 갉아먹혔고 그녀는 산란을
준비했다. 뛰고 싶다! 좀 더 달리고 싶다 멀리, 서울 밖으로 도망쳐 나가고 싶다 강렬
한 지각력과 왕성한 상상력을 모두 동원해 하늘 밖의 하늘로, 현실 위에 도사린 꿈으
로, 마술의 담벼락이 뒤엉킨 곳까지 달려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녀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숨어만 있고 싶다. 그녀와 보낸 일주일, 완전히 갉아먹힐 때까지 그
리고! 다시 한 번 갉아먹히던 순간……누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세웠지? 온몸의 사랑
이 다 빠져나갈 때, 내 옆구리를 파먹던 그녀 숨소리에 소스라칠 때 누가, 그녀에게
면죄부를 팔았지? 고백을 할 시간이다. 종막을 고하기 전에 모든 진실을 털어놔야 한
다. 누가 그녀 일가에게 면죄부를 팔았더라? 마흔두 구의 운명천사가 지켜보는 앞에
서, 만 하고도 두 종류의 생물들이 갓 타오른 태양 아래 섰을 때, 온 우주가 주목하던
그 미인 콘테스트에서. 불길한 징조의 날, 창조주의 황홀한 글씨 새겨진 현수막 아래
서. 모두가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늠름한 짐승들이, 고고한 짐승들이,
네 발과 두 날개와 다채로운 비늘의 나립 한층 엄숙한 어류의 상쾌한 비린내, 가일층
훌륭한 개구리들 틈새에서. 완전무결한 어떤 남자, 지성적인 짐승들, 선량한 물고기
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들! 그중 가장 아름다웠던 건 바로 우리들, 요정들이었
는데! 시민답게 너무나 시민답게, 날개 뜯긴 우리들이었는데……이 별이 도시들을,
수많은 서울들을 가득 머금고 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던 날 이래로 우리들의 경연은
치열했고, 치열했고, 마침내 운명천사들이 나타났던 그날 모든 도시의 운명이 결정됐
다! 가장 강한 자 나서라! 모든 운명의 정점에 설 자 누구냐? 모든 생물이 한맘으로
사랑할 그 누군가가 마지막 미인 콘테스트에서야 결정났다, 그건 삼억오천만 년 전의
사건이다. 이 별의, 모든 서울의 대사건이었다! 그녀들에게 면죄부가 부여된 건 삼억
오천만 년 전의 일이다. 그래, 맞아, 우리들이었어 나무들 또 바람과 구름, 움직이는
모든 자들 또 멈춘 채 살아가는 모두가 한맘으로 동의했다, 그녀들이 가장 귀여워! 모
든 생물이 그녀 일가에게 패배했다……그녀들이 제일 강해, 그녀들이야말로 모든 서
울에서 가장, 귀여운 생물이야. 그녀의 일족은 위대하고, 위대하고, 세 번 더 위대하
다! 도시의 역사는 그 견고한 등골 아래 물컹한 길바닥 위에서 그녀의 일가를 양육한
다, 그녀들은 운명의 옹호를 받으며 삼억오천만 년 동안 변하지도 않고 서울을 지배
해 왔다. 다정하면서도 성가신 태양을 올려다보며, 비슷한 불덩이로 골목을 채운 서
울의 어두운 하수구를 점령하고 우울하게, 유쾌하게, 어느 쪽이건 마음대로 내키는대
로 방황하며 사랑을 파먹는다. 그녀들은, 그녀들은,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
신들과 경합했던 두 종류의 생물을 증오한다! 경쟁자의 배제를 요구하는 본능, 생물
의식의 어두운 구석에서 태어난 비밀스런 감수성, 콘테스트 금상 수여자는 이위와 삼
위의 멸종을 요구한다! 인간의 배설물로 쌓아 올린 서울의 왕좌를 차지한 채 겹겹이
쌓아 올린 육체, 흩뿌려진 해골과 축축 나려뜨려진 껍질을 모두, 모두 다 차지하려 든
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그렇게도, 욕심사나울까! 또 다른 서울을 숨쉬려
는 사람들은 사막으로 내쫓겼다. 양서생물들은 가까스로 숨을 쉰다, 아름다울 뿐더러
현명한 개구리들은 일찌감치 타협했다. 개구리들이 연출하는 서울에서 절대적인, 박
애적 독백과 긴 독백과 길고 긴 독백 속에서 그녀들은 종말 이후까지 안락할 테다. 그
녀들은 어떤 업무에도 시달리지 않고, 업무 시간에 매이지도 않고, 오로지 경제 사슬
의 끝에 도사린 채 파먹기만 한다. 아! 우리들 날개 빠진 요정들은 서울에서 천천히,
시들어 왔다. 그녀들의 의심스런 결의를 우리는 전혀 몰랐다. 서울이 치밀한 그물망
으로 둘러싸일 때까지, 그녀들의 악의를 건드리며 사랑을 빨아먹었다, 아름답고도 아
름다운 우리들! 끝없이 배란하던 그녀들! 운명이 결정지은 사랑에 휘말려 평범하게
관계해 왔다. 서울의 심술궂은 사랑, 합법적인 설복, 너무나 사랑스럽던 그녀에게 나
는 사타귀 깃털 한 가닥까지 완전히, 먹힐 테다. 먹성 좋은, 살아있는 화석, 지하실과
하수관의 여왕, 가장 강하고 두렵도록 귀여운 내 연인. 우리에게 떨어진 최상의 진실,
가장 귀여운 그녀야말로 가장 강한 존재라는 도시의 선포, 내 운명의 사랑으로 나는
서울에서 죽는다. 미친 듯 도망쳐 나와, 파먹히던 나를 위해 누군가 세운 십자가 아래
까지 달려와, 종내 지쳐 죽는다. 진실의 고백으로 내가 어떤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요정의 연약한 갈비뼈에 가해지는 형벌, 말하자면 조여드는 사랑, 냉혹한
그녀를 저주하며 동시에 옹호하는 비열한 운명 아래서……호흡 바스러질 때까지 기
다린다. 바스락거리는 그녀, 소르르 기어드는 소리를 기다린다. 기름 바른 듯 광택 흐
르는 몸을 꿈꾼다. 검고 검은 몸뚱이를 꿈꾼다. 몸통보다 긴 더듬이를 꿈꾼다. 무늬
없이 매끈한 앞가슴판을 꿈꾼다. 그녀는 이미 한 자루의 알집을 벽에 붙였다. 알이 꿈
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흘 후 한 자루의 알집을 또 낳을 테다. 나는 발딱 드러눕
는다 그녀가 나를 찾아올 때까지, 계속 기다린다 그녀는 서울이 완전히! 끝장날 때까
지 잔인한 식사를 계속할 것이다. 요정은 그 전에 끝장나리라. 마침내 다 파먹힌 요정
의 텅 빈 가죽 속에 서식하는 바퀴벌레만 남으리라……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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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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