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여신의 죽음



그날 아침은 그 전날 밤샘 작업으로 조금 늦잠을 자려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날 흔들어 깨우셨을 때 짜증이 섞여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날은 그 후로 한참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일어나, 일어나 봐, 얘, …신이가!"

꽈악 막힌 것 같은,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떴다. 비현실성.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계셨다.

"엄마, 뭐?"
"신이가… 신이가 어젯밤에…."
"…뭐?"

그래, 심장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의 그 얼굴만으로도, 그 후에 나올 말을 짐작도 할 수 없었음에도 나는,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신이가, …아파트에서."

신이 어머니는 친구들을 오지 못하게 하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가 그날 아침에 연락을 받은 건 혜정이한테서였다고 한다. 혜정이는 여신이와 같은 아파트 바로 아래층, 27층에서 살고 있는 아이다. 내가 과외로 만난 아이였고, 나를 통해서 신이를 알고 나서는 나보다 신이와 더 친해졌다. 전화를 걸고 나선 곧장 펑펑 울어버려서, 어머니가 더 놀라셨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들었다. 그래서 장례식 이야기도 나는 혜정이를 통해서 들었다. 아파트에서는 혹시나 그 일이 TV에라도 나갈까봐 전전긍긍했다고들 했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경제논리에 밀리는 상황일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도 사실은 아직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상자가 아니라면 절대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나경이에게."

꼭 연애편지의 첫구절같은 이 글씨가, 라면박스만한 박스 제일 밑줄에 커다랗게 쓰여 도착한 게 오늘 정오였다.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바로 어제 화장한 친구에게서 도착한 소포에 쓰여진 `사랑하는`이라는 글씨가 얼마나 두려운지. 아니 그보다, 그 낯설음은 다른 데에서 오는 것이었다. 신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맙소사. 그 아이가?

나는 한참을 포장을 뜯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혜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는 시간이 이렇게 지겨운 것도 처음이다.

"여보세요?"
"아, 혜정아 나, 나경이."
"아…. 언니. 그러잖아도 전화를 하려고 했었어요."
"…그래?"

나는 다시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꼭 폭탄이 들었을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이 들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낮에, 학교로 신이 언니 편지가 왔더라구요…."

머뭇거리다가 혜정이가 힘들게 말했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다. 흔하게 사용되는 낡은 비유를 빌리자면.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목소리가 흔들리는가 하더니 결국 흐느끼기 시작한다. 불행히도 나는 이런 일에는 젬병인 사람이다. 사람을 위로하고 품는 건 신이지 내가 아니다. 그래서겠지만, 혜정이가 신이를 그렇게 좋아한 것은.

"혜정아, `꿈`으로 나와라. 거기서 보자."
"…네."

박스를 그대로 책상 밑으로 밀어놓고 나왔다. 바깥 바람이 선선하다.



‘꿈’은 혜정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까운 커피전문점이다. 커피점 앞에 도착하자 아찔한 생각이 된다. ‘꿈’은 신이, 여신이가 좋아한 곳이었다. 작은 지하의 어둑어둑함 때문에. 혜정이가 구석 자리에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하필이면 왜 저 자리에 앉은 걸까. 습관처럼. 셋이 만날 때면 언제나 파고들었던 구석자리, 작은 플라스틱 조명이 달린 자리를.

“…괜찮아?”
“…….”

어두운 조명이 붉은 눈을 감추지는 못한다. 혜정이가 스윽 흰 봉투를 내밀었다.

[ …1학년, 사랑하는 김혜정 앞.]
“보여줘도 되니?”

혜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봉투 안에 하얀 편지지에 꼭꼭 눌러쓴 글씨는 신이의 것이 맞았다. 여신이의 글씨는 한글96의 ‘가지’체를 닮았다. 그래도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는, 꼭꼭 눌러쓴 아기같은 글씨.

[ …혜정아, 나경이가 그랬거든. 내가 하는 말들, 알아들을 수가 없다구. 나경이가 하는 말들이 나는 너무 무서웠었어. 그런데. 너무 나경이가 보고 싶네. 미안한데, 너무 미안한데, 그 말을 하질 못했어. …]

편지 중앙에 박힌 내 이름자에 놀라 나는 편지를 덮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얘가 내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고.

“어제까지 마음이 너무 편안해서, 죄스러웠어요. 신이언니를 잊고 있다는 게. 그런데 그 편지가 오늘 도착해 있는 거예요, 학교에서.”

혜정이는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김혜정.”
“…네.”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최근에 한동안 얘를 못 만났다.”
“선생님.”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나는 조금 움찔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때문에 신이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할 말이 없잖아. 이 쪽에서 말야.

“신이 언니는, 사람을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 사람이 누군가로 죽는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죠.”

“글쎄, 어쨌든 신이가 널 각별히 생각한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난 언니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어라?

“언니는 나한테 자기 이야기를 해 준적이 없으니까. 늘 나만 이야기했으니까. 언니는 늘 여기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어요. 조용히 웃으면서.”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셋이 아니라 둘이 있을 때, 나와 있을 때의 여신이는 언제나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어조를 높이는 법도 없이 한결같이 이어지는 그 이야기들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가끔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죠. 완이 이야기, 나경언니 이야기. 그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져서 화가 날만큼.”

“혜정아.”

“그리고 이 편지가 나한테 왔어요. 그 안 가득 나경언니 이야기, 완이 이야기, 나는…, 나는….”

한숨이 나온다. 이거야 원, 죽은 사람을 놓고 우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소포가 왔어.”
“신이 언니한테서요?”
“응.”

혜정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편번호 안 적혀있었죠?”
“아…, 글쎄?”
“안 적혀있었을 거예요. 그래야 오래 걸리니까.”

혜정이가 단정지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여신이는 언제나 그랬다. 작은 일에도 너무 세심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 애의 그런 면이 섬뜩하다고 멀리할 정도였다. 마치 여신(Goddess)처럼.

“혜정아. 이 편지 내가 좀 빌려도 되니?”
“…꼭 돌려주세요.”
“물론이지.”

가방에 편지를 챙겨 넣는 것을 혜정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에 적의敵意가 나타나는 것을 모를 만큼 내가 무심한 사람은 아니다. 저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원망을 돌리지 않고는 힘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왜 그게 나인지는 조금, 불만이지만.

“왜… 그런걸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혜정이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완곡한 표현을 하더라도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지. 나는 이렇게 담담하기만 한 것이다. 마치 먼 곳의,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혜정이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거리로 나왔다. 여신이가 그랬듯이 혜정이도 아르바이트로 개인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했다.

“그 사람이 어제 세이를 걸어서… 뭐랬냐면 말야,”
“세이를 걸어?”
“응, 아… 세이가 뭐냐면….”

나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을까, 상기된 얼굴로 내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했던 신이에게. [ 네가 하는 말들 말야, 그, 통신 이야기는 나는 통 못알아들어, 아니? ] 라고 말했을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말을 들은 그 애의 표정이 어땠었는지, 그 애는 서운해 했었나?
집으로 돌아와 박스를 풀었다. 라면박스 한가득 빼곡히 들어찬 책들은 대충 세어도 서른 권은 넘어 보였다. 테러리스트,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아기찾기, 깊은 슬픔, 엘리베이터, 한권씩 꺼내면서 제목을 읽다가 무심코 책장을 열었다. 갈색 펜으로 밑줄이 군데군데 그어져 있었다. 책 표지 앞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나경이에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서, 그래서 너도 읽어보라구.
생일 축하해.             - 신이가. ‘

생일이라니, 생일이 지난지 몇 달이 지났는데?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마찬가지로 밑줄이 군데군데 그어져 있다.

‘나경아, 내일 너 시험 치러 간대서
시험 끝나면 이 책 읽어보라구. 내가 참 좋아하는 책이거든.
이제 한 번만 더 치면 끝이지? 힘내.      - 신이가. ‘

‘사랑하는 나경이에게.
스무번째 생일 축하해. - 신이가.‘

모두 그랬다. 내가 신이를 알게 된 그 날, 고등학교 1학년의 봄부터 지금까지의 날짜들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아주 작은 것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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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공모전에 내었던 글입니다.
환상소설도 아니고.. 그냥 연애 이야기지요.
묵혀 두려니 가슴 한켠이 막힌 듯해 올려봅니다.
미침증이 일면 또 모두 지워버릴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먼여행, 갈원경입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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