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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린]

2013.07.23 16:3707.23

 

기린麒麟


 

 

 

발이 있으면 차기 마련이며, 뿔이 있으면 부딪치고자 하는데, 유독 기린 만은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이 그의 어진 성품이다. 또한 그 걸음걸이는 법도에 맞아 살아있는 벌레를 밟지 않고, 돋아나는 풀을 꺾지 않거니와, 울고 있는 삼백 예순 짐승들의 밝은 임금이라.

-광아(廣雅)

 



 

 

처음 하늘과 땅이 나뉘었을 때, 영수靈獸들은 저마다 영물靈物 품었으니, 기린은 뿔이었다. 그 뿔은 끝이 살덩이여서 아무도 해할 수 없었고, 비어 있었다. 또한 그 품에 오대양의 바닷물을 모두 모아 담아도 처음처럼 넉넉하였다.

 

또한 영수들은 저마다 일이 있었는데, 기린은 유독 한가했다. 거북은 하늘을 지지하고, 용은 비와 바람을 몰며, 봉황은 구름과 불을 다루느라 바쁘고 힘들 때, 기린은 구름의 결을 희롱하고, 뒤섞고, 법도에 맞는 걸음걸이로 땅 위를 노닐었다. 그는 털 달린 짐승들이 흘리는 눈물을 뿔에 받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늘도 땅도 아닌 어느 신비로운 곳에서, 혼자 눈물을 대속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다른 영수들은 모두 기린의 그 한가함을 시기하였으나 미워하진 않았다. 그는 잘 웃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곰살맞은 한량이었다. 그는 한가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천지를 돌아다니며 온갖 이야기를 들었고, 또 들려주길 즐겼다. 그는 세상을 휘저어 이야기를 고루 퍼트렸다. 그는 털 난 짐승들의 밝은 임금이었다. 그러하기에 영수들은 기린을 시샘하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거의 움직일 수 없었던 거북은 아무런 시샘도 없이 기린을 기다렸다.

 

하늘은 절기에 따라 숨을 쉬며 조금씩 줄거나 늘긴 하였지만 그래도 한결 같은 바, 거북의 일은 태초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그래서 거북은 시간의 흐름에서 빗낀채로, 잠과 몽상 사이의 묘한 경계 속에서 천자 사이의 모든 것을 그저 꿈꾸고만 있었다. 그렇기에, 거북이 문득 기린이 그리워졌을 때는 이미 기린이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몇 천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거북은 한쪽 눈을 완전히 감고 기린을 꿈꾸었다. 그러나 기린이 꿈꿔지지 않았다. 거북은 천지 사이의 모든 것을 꿈 꿀 수 있는데, 그렇다면 기린이 지금 천지 바깥에 있단 소리였다.

 

울고 있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기린이 찾아왔다. 그는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린은 흐린 바다의 저녁 해처럼 무겁고 지쳐보였다. 그는 거북이의 귓가에 부드러운 배를 깔고 엎드려, 자신의 이야기를 속삭여주었다.

 

기린은 세월 속에서 무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업무량이 늘어갔다. 더 많은 눈물들이 이 대지 위로 흘러내렸다. 기린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털 난 짐승의 눈물이 땅에 떨어졌던 날을 기억한다. 기린은 그 날 네 다리가 부러져라 세상을 내달았지만, 결국은 모든 눈물을 담는데 실패했다. 그 날 이후로 돌들은 눈물에 씻겨 둥글어져만 갔고, 바다는 높아져만 갔으며, 달은 한숨에 닳아 희어졌다. 기린은 자기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실수도 했었어요.

 

뿔은 눈물로 가득 차고 가슴은 아픔으로 가득해서, 기린은 언젠가 천지를 벗어나기 전에 울어버린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때 육지는 바닷물보다 짠 물로 잠기었고, 용과 주작이 역정을 내며 기린을 찾아왔다가, 구름에 늘어진 채 앙상한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는 그를 보고는 도리어 촉촉한 코로 비벼주었다. 그리고 세상의 짐승들 중 태반이 물에 휩쓸렸다고 해서 기린의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떠난 자들의 눈물은 모두 남은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도 밝은 임금일까요?

 

 거북이는, 그렇다고, 너는 밝은 임금이라고,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기린은 그의 주름진 목에 코를 묻었다.

 

기린은 백성들의 눈물이 이렇게 갑자기 불어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원숭이 닮은 짐승들이 유독 눈물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많다는 것은, 단순히 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기린의 뿔은 모든 강과 바다, 모든 구름과 비를 담고도 넉넉하다. 그것은 차라리 무게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기린은 선별 해야만 했다. 무슨 책을 팔아야 할지 고민하는 가난한 애서가처럼, 그는 외면할 백성들을 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많아져, 나중에 가서는 죽어가는 열 명의 아이 중 한 명만을 살릴 수 있는 어머니처럼, 눈물 거둘 백성을 골라내야 했다.

 

기린은 아이를 택했다. 그들의 눈물이 가장 무거웠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고아를 택하였다. 신묘한 일이다. 기린은 작은 뿔에 세상 물은 모두 담을 수 있는 영물이건만, 울어도 소용없단 것을 깨달은 아이가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몇 방울, 추운 밤 혼자서 제 몸뚱이만한 물동이를 들고 숲으로 물 길러 가는 아이의 눈물 몇 방울을 담고 나면, 무거워 고개도 들지 못했다. 기린은 가벼운 눈물들은 많이 담아, 더 많은 백성들을 위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천지가 처음 생겨났을 때, 기린은 발을 한 번 굴러 누리를 휩쓸고, 바깥에 나가 잠깐 울고 다시 돌아오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는 매월 두 번째 돼지날(음력 24)에만 움직인다. 그리고 남은 스물 아흐레 동안 바깥에서 운다. 눈물을 쏟기에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어떻게 우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음달 두 번째 닭 날에 돌아와, 쉴 틈도 없이 다시 백성의 눈물을 거두기 위해 그 여위고 어진 몸을 떨친다.

 

 거북은 스물 아흐레 동안 고아처럼 혼자 울고 있을 기린을 그려보았다. 기린이 말했다.

 

이제 고아 중에서도 선택 해야만 해요.”

 

그는 죽은 자식의 몸 어느 부분만 남기어 마음을 달랠 것인지 고민하는 어머니 같았다. 기린은 이제 고아들의 눈물 조차 다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린은 울며 잠드는 아이를 선택하려 한다고 했다. 처음 총을 잡은 소년병이 밤이 돼서야 간신히 흘리는 눈물은, 다만 한 방울이었지만 기린의 뿔을 가득 채웠었다. 그런 아이들의 눈물을 머금다 보면, 뿔은 안쓰러울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곤 했다.

 

 거북은 기린이 가여웠다. 그는 자기만큼이나 커다란 세상의 기둥이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떠받치고 있는 이 하늘이라는 것은 주기에 따라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했다. 용 달에 가장 두텁고, 차츰 여위면서 돼지 달에 가장 얄팍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 때에는 힘을 좀 보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거북은 1년 중 돼지 달에는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기린은 처음에는 깜짝 놀라지만, 곧 그 부드러운 뿔로 거북이의 배를 간질이며 고마워했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이틀을 일할 수 있을 거에요.”

 

모든 꿈을 꾸고, 모든 꿈을 들락거릴 수 있는 거북이가 도와준다면, 무척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거북이가 바깥까지 데려다 준다면 더 많은 눈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 아예 꼼짝도 하지 못할 때까지 머금고, 또 머금을 수 있었다. 거북은 다만 한 해의 마지막 달만이라도 그가 조금 편하기를 원했던 것이었지만,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틀을 도와주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돼지 달의 두 번째 돼지 날, 다시 말하자면 돼지가 세 마리 겹친 날, 그날은 특별해졌다. 기린은 이틀간 누리를 돌아다녔고, 그 곁엔 거북이가 있었다. 거북은 통통하고 하얀 수염이 있는 모습으로 기린을 쫓아다녔다. 그들은 울며 잠든 아이와, 잠자며 우는 아이를 찾아 다녔다. 눈물을 거두는 것은 오직 기린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라, 거북은 다만 꿈과 꿈을 오가며 기린을 데려다 주고, 이틀 밤 동안 무지개보다도 더 크게 부풀어 오른 뿔을 달고 있는 기린을 천지 바깥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때 기린은 뿔에 달린 조그만 뾰루지 같아 보였다.     

 

거북은 사실 기린과 함께 바깥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스물 아흐레 동안 백성의 울음을 홀로 토해내고 있을 기린 곁에서, 그 많은 물들을 헤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 분명 한 방울쯤은 섞여 있을 기린의 눈물을 담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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