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모래 기도서

2013.07.19 01:2007.19

 

 

 그것은 모래로 되어 있다. 헤아릴 수 없고, 쉬지 않고 변화하며, 멈추지 않는 갈증을 가져다준다. 얼핏 보기에 거기에는 처음과 끝이 있고 정해진 기호의 배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가지의 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이 갈라지는 갈림길들로 이루어진 정원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변화한다’는 규칙뿐이므로 결과적으로 무한하다. 유한한 사람의 이성은 무한을 다루기에는 부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상력은 날개달린 정신이기에 이성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도달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창조성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작가가 있었는데, 그는 다른 모든 작가들이 으레 그렇듯 빈 종이를 가만히 놔두질 못하는 공백 공포증과 몇 시간씩 빈 종이 앞에 가만히 앉아서 한 두 단어를 꼼지락 꼼지락 썼다 지웠다 하는 강박증을 동시에 앓고 있었다. (정상적인)작가가 되려면 이 두 가지 증상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후자가 너무 강해졌고 급기야는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책상 앞에 앉아서든 자리에 누워서든 눈을 깜빡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잠이 들어서도 빈 종이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자, 작가는 현 상황을 어떻게든 타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오랜만에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작가가 들릴만한 곳은 몇 군데 없었고 역시 몇 되지 않는 친구 중 하나가 운영하는 책방에 들른 것은 늦은 오후였다. 딸랑딸랑 작가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친구는 반색하며 상 위를 싹 밀어 치워버리고 찻주전자를 날라왔다. 맞지 않는 장부들을 대조하느라 골치를 썩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찻잔이 비워지고 과자 접시가 드문드문해지자 책방 주인이 물었다.

“또 그건가? ‘사막’이니 ‘공허한 밤’이니 횡설수설하는 것 말이야.”

“아니, 어떻게 알았나?”

“자네처럼 땡전 한 푼 없는 작가가, 우거지상을 하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갑작스럽게 몇달만에 가게에 얼굴을 내비치면 꼭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그래도 이번은 한달만에 들이닥쳤으니 상당히 빠른 편인데.”

“그래, 맞아. 점점 주기가 빨라지고 있어. 난 파멸이야! 한 달 전만 해도 이번에는 원고를 끝낼 수 있을 줄 알았지...”

“그 말까지 똑같군.”

 친구가 찻잔을 채워주는 동안 작가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절망감에 빠져 몸부림쳤다.

“정말 이번에야 말로 완벽한 착상이 떠올랐었다구! 이미 글은 완성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고, 펜으로 술술 옮겨 쓰기만 하면 될 지경이었어. 그런데 사소한 부분에서 미적거리면서 썼다가 고쳐 썼다가 하는 사이에 갑자기 그게 사라져 버렸어. 아주 가 버렸다고.”

“그게 뭔데?”

“영감 말이야!”

 작가는 팔을 극적으로 벌리면서 역시 극적으로 부르짖었다. 어찌나 극적이었는지 무대 위에서였다면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주연배우라도 된 것처럼 장황하게 독백했다.

“그게 빛나는 얼굴로 내게 미소를 보내면 내 지친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고 말라버린 구덩이엔 다시 물이 샘솟지. 하지만 그건 변덕스러워, 한 번 흥미를 보였다가도 금새 거두어가 버리고, 한번 싫증을 내면 다시 돌이킬 방법이 없어. 시원한 물 한 모금에 이끌려 숨겨진 샘을 꿈꾸면서 황야로 쫓아 나가면, 날 빈 종이 한 복판에 놔두고 포르르 날아가 버리거든. 그러면 나는 불쌍하게도 갈 곳을 잃고 사막의 밤을 헤매는 거야, 마음속에 그 미소에 대한 불타는 사랑만 품고서.”

“오, 아름다운 이의 이름은 뮤즈로구나! 그녀는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치명적이니, 사랑에 빠진 자여, 주의하라-”

 책방 주인이 친구를 흉내 냈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고 계속 주절댔다.

“하지만 다시 모래언덕 너머에서 아스라이 흔들리는 열기가 피어오르면, 다시 저 지평선 끝에는 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기고 입을 열어서 수면의 번뜩임을, 적시는 영감을 노래하는 거야-또다시 신기루에게 기만당하고 버려질 줄 알면서도, 이번만은 혹시 정말 물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희망에 매달려서 말이야!”

“흠, 나는 작가들이란 한번 영감이 떠오르면 그 때마다 글 한편씩 쓱싹 닦아내는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펜이 물 흐르듯 달리는 순간은 짧다고, 졸졸거리는 실개천이 지하로 숨어들고 나면 다시 기약 없는 사막이 닥쳐와. 깔깔한 입안은 터서 갈라지고, 머리는 열이 올라 핑핑 돌고, 버려진 황폐함과 치솟는 갈증이 밖과 안에서 동시에 사정없이 태우고, 몰아쳐서, 창조성이라는 물기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바짝 바짝 말라들게 만들고-”

 하고 작가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친구가 이마를 탁 쳤다.

“아차, 가게 문을 닫는 걸 깜빡했구만. 하지만 손님이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자네는 잠깐 새로 들여온 책들이나 둘러보고 있게나.”

 책방 주인이 손님과 수작하는 동안 진짜 손님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작가는 처량하게 서가 사이로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책방은 밖에서 보기보다 넓어서 온갖 책이 다 있었다. 더군다나 작가의 친구처럼 노련한 서적상의 서가라면 더욱 그렇다. 작가는 자기 진가를 알아볼 수집가를 기다리는 기기묘묘한 책들을 둘러보다가, 온통 책들로 가득한 미로 한 가운데에 난데없이 모래 무더기가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위에 모래투성이가 된 책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집어 올리자 우수수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작가는 그 책을 피라미드에서 파내기라도 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모래를 툭툭 털어냈는데, 이전부터 친구가 서적상이란 직업은 간혹 도굴꾼이나 금고털이 같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거니와 저번의 사막 원정 중 떠맡은 황제 전갈 새끼를 팔아치우려고 한 동안 고생하는 걸 본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책장은 사락사락 소리가 났고 빼곡하게 글씨가 들어찬 매 쪽마다 모래알갱이가 굴러 나왔다.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손님이 떠나며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책을 들고 나와서 물었다.

“이건 무슨 책인가? 글씨가 이렇게 빽빽한데 보존은 상당히 잘 된 거 같은걸.”

“그건 주문이 걸린 책이야, 함부로 만지지 않는 편이 좋아. 마법사들이랑 거래하다보면 별 희한한 물건들이 넘어오는 경우가 다 있는데, 어떤 책은 읽으면 미치는 것도 있고 갑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먹는 것도 있거든.”

 그 말을 듣자 작가는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 그럼 이건 무슨 주문이 걸려있는데? 이미 몇 쪽 읽었는데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읽으면 미치는 책이었다면 몇 쪽 분량 정도 돌아버렸을지도 모르지. 표지를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모래 기도서>라고 적혀 있다네. 내가 보기엔 읽을 때마다 내용이 달라지는 주문이 걸려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보다는 사막에서 신었던 신발에서는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나오는 것처럼 자꾸 모래가 나오는 게 문제지. 부지런히 쓸어냈지만 여태까지 거기서 나온 모래만 해도 벌써 작은 산은 될 지경이야. 어쩌면 그게 진짜 그 책의 주문일지도 모르겠군.”

 친구가 투덜거리는 것을 듣고 작가는 그가 이 물건을 이전의 그 황제 전갈 새끼처럼 처치곤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새끼’는 꼬리까지 길이가 거의 4m를 넘게 자라 있었다). 어쩌면 그 책에서 지금의 콱 막힌 상태를 돌파하게 해 줄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슬쩍 물었다.

“이건 얼마쯤 주고 사들인 건가? 주문이 걸린 책이면 상당히 비쌀 것 같은데.”

“사들인다고? 제대로 된 서적상이라면 사갈 사람도 없고 뭔지도 모를 걸 들여 놓을 리가 없지 않나. 어떤 놈이 이 모래투성이 책을 청소하는데 질린 나머지, 나하고 거래할 때 책 무더기 속에 슬쩍 밀어놓은 거야. 한동안 꽤 싸게 괜찮은 물건들이 들어와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 손 털고 싶은 것들도 끼워서 넘긴 거지. 어떤 놈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 놈한테 석궁 화살촉에 바른 황제 전갈 독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말겠어. 내가 왕년에 ‘요술쟁이 사냥꾼’이란 별명으로 불렸는지는 꿈에도 모르겠지!”

 하고 책방 주인은 벌컥 화를 냈다. 작가는 친구를 살살 달랬다.

“이보게, 그러지 말고 그걸 내게 넘기면 어떤가?”

“자네한테? 자네는 당장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살 돈도 없잖아.”

“우리가 알고 지낸지가 얼마나 지났는데 잠시 대금 지불일을 늦추는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는 있지 않겠나. 어차피 그냥 얻게 된 물건이라면서.”

 친구가 마음속으로 두 장사꾼-능수능란하게 물건을 팔아넘기는 쪽과 칼 같이 장부를 기재하는 쪽-의 말다툼을 저울질하느라 망설이는 걸 보고 작가는 한 마디 더 보탰다.

“게다가 더 이상 모래를 쓸어낼 필요도 없다고.”

 그 말에 책방 주인은 마음을 굳혔다.

“좋아! 그 동안 우리 사이의 거래에서 형성된 신뢰관계를 믿고 물건을 넘기기로 하지. 비록 항상 늦기는 해도, 아직까지 자네가 책값을 떼먹은 적은 없으니 말이야.”

“물론, 난 항상 믿음직한 거래상대지.”

 두 사람은 악수했다. 작가는 이제 자기 것이 된 책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내용이 계속 바뀐다는 게 무슨 얘기인가?”

“음- 나도 처음에는 그걸 일단 팔아볼까 해서 뭔지 보려고 며칠간 읽어봤는데, 내용이 종잡을 수 없이 바뀌어서 도저히 다 읽을 수가 없더라고. 일단 페이지를 넘기면, 그 페이지에 있던 내용은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네. 눈앞에서 글자가 바뀌지는 않아. 그러나 앞쪽을 들춰보고 다시 넘겨보면 이미 그 전 페이지의 내용도 바뀌어 있는 거야.”

“내용은 무슨 내용이길래?”

“뭐, 하도 뒤죽박죽이어서 이젠 기억도 나질 않네. 소설 같긴 하지만 등장인물도 계속 바뀌고 그 관계들도 계속 바뀌다보니 줄거리를 알 수가 없어. 분명히 죽었던 인물이 버젓이 등장해서 앞을 다시 찾아보면 아예 그 인물 자체가 사라져 있고 다시 돌아오면 태연자약하게 전혀 다른 얘길 하고 있거든. 난 처음에 내가 책을 너무 오래 봐서 깜빡 졸은 줄 알았지.”

 작가는 마음속에 무언가가 서서히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건 어떤 예감이었는데, 아직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희미하게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작가는 그 느낌에 집중하느라 어렵사리 말했다.

“어쩌면 이 책은 문학 직조기 같은 것일지도 몰라. 글자들을 짜 맞춰서 무작위로 의미는 통하는 글을 만들어내는 거지.”

“만일 그런 물건이 있다면 자네 같은 작가들은 죄다 굶어죽겠는걸. 물론 자네는 그런 게 없어도 쫄쫄 굶고 있지만 말야.”

 친구가 논평했지만 작가는 자기 생각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상대를 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느라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말했다.

“아니면 뭔가 특별한 사용법이 있다거나...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말이 되는 이야기들은 추려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뭔가 아이디어라도 줄 수 있을 거야.”

“이미 말했지만 마법사들 중엔 돌아버린 놈들이 많아. 엄청나게 공들여서 평생 동안 만들어낸 게 그냥 신기한 장난감인 경우도 꽤 있다구. 모든 곳에서 어떤 진지한 의도나 제대로 된 용도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말게, 그런 놈들이 바로 제가 만든 수수께끼에서 남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걸 보면서 기뻐하는 놈들이거든.”

“음... 그래, 사려 깊은 의견이야, 새겨듣도록 하지. 좋은 거래 고맙네. 앞으로도 우리 사이의 사업이 더 번창하길 바라자고.”

 작가는 자기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적당히 말이 되는 인사를 하고서는 책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책방 주인은 잠시 동안 그 책에 사람을 미치게 하는 주문도 걸려 있던가? 하고 의아해 했지만 이내 친구가 원래 충분히 돌아있었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가를 배웅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거래 계약에 지금 당장 여기 흩어진 모래를 청소하는 것을 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책 더미 틈에서 빗자루를 찾느라 헤맸다.

 

 작가는 비오기 전 부는 바람 같은 예감에 떠밀려서 모래투성이 책을 들고 비좁은 골방으로 달려 들어와 문을 쾅 걸어 잠갔다.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니 이미 밤이 되었는데, 친구 말대로 그 책의 내용은 제대로 된 줄거리도 없고 중간에서 끊기거나 갑자기 전혀 딴 소리를 하는 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닿질 않았다. 낱말들로 된 만화경처럼 쉴 새 없이 변화하는 것만 놀라운 점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은 이미 자신이 태어날 것을 예지하고 있었기에 작가가 계속 그 수수께끼의 책에 도전하도록 부추겼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좋아! 이건 분명히 뭔가 숨기고 있어. 그 친구는 책을 사고파는 데는 정통할지 몰라도 글쟁이는 아니라서 눈앞에 있는 진정한 주문을 알아차리지 못한 거야.”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잠을 깬 옆방 사람이 얇은 벽을 쾅쾅 두들겨서 작가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페이지 수를 세어보기도 하고, 뒤에서 앞으로 읽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끼운 채 넘기다가 무언가를 끼적끼적 메모하면서 탐구를 계속했다. 한 번 본 문장이 페이지를 넘기면 사라졌다가, 다시 몇 십 페이지 후에 미묘하게 다른 형태로 나타내는데 주목하기도 했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도는 너무 커져서 종이에 더 그릴 칸이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 미로를 헤매는 것을 계속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은 채 온갖 방법으로 책을 시험해보았다. 책상 위에는 책장에서 떨어진 모래가 수북하게 쌓이고 글자들도 모래 알갱이처럼 쉴 새 없이 무너지고 뒤섞이고 다시 늘어서는 것을 반복했다. 그는 이따금 생각했다.

“내가 이미 미쳐버린 게 아닐까? 사실 이 책에 걸려 있는 주문은 책의 글자가 바뀌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붙잡고 있으면 유사(流砂)처럼 점점 더 빠져드는 것이라면? 아니, 그렇다면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겁이 더럭 났지만, 숨겨진 물이 흐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와 사막 어딘가에 샘이 있다고 속삭였기 때문에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작가는 시간 연속성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글자와 단어들은 단지 그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책을 구석구석 조사했고 모래 한 톨 한 톨도 확대경으로 관찰했는데(“혹시 진정한 문장들은 모래알에 새겨져 있고, 책은 단지 그 반영에 불과하다면?”) 물론 그건 너무 앞서나간 짓이었다. 비밀 장치를 찾아내기 위해 책장을 뜯어내려고 시도했다. 사막이 통째로 쏟아져 나올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러나 손으로는 물론이고 칼날로도 흠집을 낼 수가 없었다. 칼이 실패한 뒤 시험 삼아 불로 태워보았다. 그을음만 생겼을 뿐 책 자체는 타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자, 그을음 역시 다른 단어들처럼 모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책에 물을 한 컵 부었다. 물은 금새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졸졸거리면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책장을 넘겨보니 바로 앞 장에서 본 문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철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소리쳤다.

“모래가 무한하다고 해도, 그건 결국 분절적이고 개별적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역시 무한한 틈이 존재하는구나! 그렇다면 갈망이란 결국 그 무한하고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에서 오는 것 아닐까? 물은 연속적이고 그래서 온전하기 때문에 그 빈틈들을 모두 채워줄 수 있겠지!”

 잔뜩 흥분해서, 세숫대야 가득 물을 떠다 앞뒤 생각 않고 책상 위에 확 들이부었다.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책은 형태를 잃고 뭉그러졌다. 모래 알갱이가 낱낱이 흩어지면서 책이 가운데부터 녹아내리고 제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안은 마치 얕은 물속에서 어룽대는 빛이 수면을 뚫고 빛나는 것 같았다. 샘이 안쪽으로 터진 것처럼 주위가 그 안으로 빨려들었다. 물살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작가는 자기 머리 위로 세상이 뒤따라 쏟아져 들어오는 광경을 보았다.

 

 그 후 작가의 정신은 지상을 벗어난 영역을 떠돌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수정으로 된 천궁이 회전하고 별자리들이 살아 움직이며 항성이 운행하는 곳에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천국의 젖줄을 빨고 우유바다의 소마를 마시고 혈관 속에 신주(神酒)를 넣어 가졌다. 헤아릴 수 없는 창조의 순간에서 어떤 전능함이 그에게 속삭여 세상의 비밀과 숨겨진 힘과 진정한 이름들을 알려주었다. 다시 자신의 작은 골방으로 툭 떨어졌을 때에도, 모든 책의 도서관에 안치된 원형으로 된 책은 꿈결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책상 위에는 약간의 모래만 흩어져 있을 뿐 책도 물도 온데간데없었다. 식사를 하기는 했지만 도저히 다른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원고는 제멋대로 던져두고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작가는 탄식했다.

“내가 환영 속에서 목격한 것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성흔(聖痕)과 같군. 한 번 천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지상에 남아 있는 것들이란 모조리 모래를 씹는 것 같고 흙처럼 더럽고 먼지처럼 보잘 것 없이 느껴진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목마름 밖에 없으니, 이대로는 시들시들 말라죽고 말거야.”

그러나 그가 할 수 없게 된 것은 작가로써의 모든 활동이 아니라, 이전처럼 잠시 번뜩이는 영감에 의지해서 빛이 꺼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갈팡질팡 글을 써내려가는 일이었다. 참을 수 없는 갈망은 그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만들었고 영감 자체로부터 길어 올린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 “영감의 원천을 포획한다면, 마르지 않는 샘을 지상에 유배시키고 그 힘을 내 것으로 한다면. 언제까지고 쉬지 않고 창조력이 솟아나고, 그것을 자유롭게 펜 끝으로 옮길 수 있다면!” 이제 완전한 형태를 가진 예감은 그의 안을 꽉 채우고서, 자신을 현실로 불러낼 것을 요구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작가는 책상 위에 남은 모래를 꼼꼼히 모았고, 마방진을 그리고 주문을 짜 넣는 일에 열중했다. 모든 지식은 <모래 기도서>가 알려주었다. 사락거리는 모래들은 영원한 갈증을 가져오고, 자신을 해갈시켜줄 진정한 물을 갈구한 나머지, 그 갈망은 마침내 영원한 <샘>을, <원천>을 불러 오는 힘으로 화하는 것이다. <기도서>가 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갈망이었고, 그 모든 작가들의 고통스러운 사막, 헤매이는 미로, 공허한 밤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것을 더해서 그것들을 써내려갔다. 주문이 힘을 사로잡아 천상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유한한 것들 가운데 무한한 것을 불러오고 말라붙은 여기 이 땅의 사막에 <물>을 가져오기를 기원하면서.

 

 마침내 그는 주문을 완성하고, 모래로 그린 원형의 감옥 앞에 섰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작가는 황량한 세계로 되어 있는 한 음절의 단어 혹은 한 음절의 단어로 되어 있는 갈망하는 세계를 발음했다. 그러자 태초의 물이 응답해서, 수정으로 된 잔이 기울어지고, 덧없는 먼지 같은 세상 속에서 곧장 뻗어 올라간 갈망이 천상에 닿았다. 그것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러나 넘치지는 않고 원형 안에 머물렀다. 반짝이는 물방울처럼, 어른어른 흔들리고, 멈추지 않고 맴돌면서, 희구를 불러일으키는 물소리, 대대로 사막에 살아온 종족이 문득 입과 코를 가린 얼굴을 돌리고 그들의 피처럼 흐르는 것의 냄새를 감지할 때 새파란 보석 같은 눈동자가 되비치는 색채. 작가는 주문이 성공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작가가 기뻐하고 있을 때 흐름 가운데에서 사람의 얼굴 같은 형상이 떠올라, 음악처럼 울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지금 그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대는 그대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해.”

“아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지- 물론 내 앞에 있는 게 뭔지도 말야!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의 힘으로 너를 사로잡은 것이다. 영감, 원천, 마르지 않는 <샘>, 불려본 적이 없는 노래, 천국 중의 천국, 날아다니는 별이며 머물지 않는 자여!”

 작가는 흥분해서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는데,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뛰던지 그대로 영원히 심장이 멈춰버리지 않을까 염려될 지경이었다. 그는 열에 들떠서 입에서 침을 튀기며 부르짖었다.

“드디어 넌 내 것이 되었다.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 해. 내 거야. 내 거라구! 어디 다시 한 번 또 나를 빈 종이 앞에 남겨 놓고 사라져 보시지. 그 잠들지 못하는 밤들을, 원고에 단 한글자도 쓰지 못하는 공허하고 황폐한 밤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 사막을, 지상에 유폐된 채로 천상을 엿보는 슬픔을? 차라리 네 빛나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기를 바라며 돌아눕는 불면을?”

 펄쩍 펄쩍 뛰다가 탁자에 부딪히는 바람에 잉크병이 덜컥 넘어져 바닥으로 나뒹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제 그 모든 불모의 시간은 지났어. 난 너를 취해 가질 거야, 정복자의 정당한 권리에 의해서. 그러나 알아두라, 뮤즈여, 나는 어떤 지상적인 명성이나 부, 수백 통씩 쌓이는 편지, 굽실거리는 출판인이나 연이은 작가 서명회 따위를 위해서 너를 사로잡은 게 아냐. 네게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천국이 다시는 내게 마르지 않도록, 내 입이 물처럼 풀어지고, 내 말은 혀처럼 부드럽고, 목소리는 끊어짐을 모르고 내가 다시는 갈망을 알지 못하기 위해서지. 너는 사냥당할 가치 있는 사냥꾼에게 추격당한 거야, 기껏해야 고기나 잘라내고 모피와 털을 술과 바꾸려는 치들이 아니라, 네 왕관에 마땅한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사냥꾼에게. 그러므로 탄식하지 말라, 영원히 샘솟는 자여 - 만일 그리 하지 않겠다면, 그대 자신이 어째서 그토록 아름다운지를 탄식하도록! 별이여, 내게 와서 빛나라!”

 작가는 또다시 극적으로 외치고(그는 쉽게 몰입하는 성격이었다) 들리지 않는 박수갈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두 팔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 형상은 한동안 슬픈 눈으로 물끄러미 작가를 응시했다. 형상은 원 안을 떠돌면서 노래했다.

“아, 인간이여, 필멸의 운명을 지닌 자는 이 힘을 감당할 수 없다. 그 강은 너를 씻어 내리고 빠뜨려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만들 것이고, 작은 구덩이로서는 소용돌이치는 궁창의 수원에 잠든 혼돈을 담을 수 없어! 이 행동은 너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덧없고 짧은 삶을 소중히 여겨라! 너희 종족에게는 이미 다른 축복이 주어졌다. 이것은 너희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야!”

 작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주먹을 휘둘러대며 대들었다.

“덧없는! 짧은! 삶을! 소중히 여기라고! 불멸의 운명을 지닌 너는 네 것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나는지 알지 못하겠지, 황금색으로 타오르는 구름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아, 얼마나 목가적인 광경인가! 하고 부러워하며, 죽어야만 하는 운명은 어떤 것일까, 내가 그들처럼 짧은 삶을 산다면 무엇에 그 삶을 바칠까, 하고 탄식하겠지! 너는 알지 못한다, 이미 축복을 받아가진 자는! 지상적인 것이 천상에 어떤 질투를 느끼는지, 허락되지 못한 것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말라붙은 목구멍이 그 <물>을 얼마나 애타게 그리는지! 그러니 나는 한 때는 네 것이었지만 이제 내 것이 된 것을 받아 가지겠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네가 초래한 일이야.”

 그래서 작가는 몸을 구부리고, 빛나고 향기롭고 화음을 내는 것을 떠서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러자 힘은 그의 것이 되었고, 형상은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면서 휙 불려 사라졌다. 바로 전 장면까지의 대화는 마치 꿈결 같았다. 심지어 원형의 감옥마저도 없었다. 작가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마치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들을 구부려보았다. 여전히 꾀죄죄한 골방이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았다... 영감은 다름 아닌 바로 그의 속에 있었다!

 

 작가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전처럼 잠들지 못하는 괴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밤새도록 글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중간에 단 한 번의 머뭇거림조차 없었고, 바로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가 그 다음에 이어질 단어를 이끌고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환영의 말대로 그것은 멈추지 않는 강물 같았다. 작가는 도저히 쉴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의 달려가는 펜 앞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살아 숨 쉬고 있었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잠들기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모를 “그 다음은요? 그래서요?”하고 조르다 보면 목소리는 점점 쳐지고 이야기들은 뒤섞이기 시작하며 결국에는 “이제 그만 자거라.”라는 실망스러운 선고와 함께 끊겨 버리고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 스스로가 자신을 들려주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작가 혼자뿐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작가가 멈출 수가 있겠는가! 한 번도 써진 적이 없는 책들의 도서관의 기나긴 복도에 오직 그 혼자만 홀로 서서, 엷게 흔들리는 등불 아래서 늘어진 그림자처럼 가슴이 두근대고, 그 모든 꿈들이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속삭이고 있는데!

 눈에 햇빛이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 그는 겨우 눈을 떴다. 한동안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했다. 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몇 차례 깜짝거리고 나서야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써내려간 원고 뭉치가 온 방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밖에서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는 주섬주섬 종이들을 주워 모았고, 문을 열고 고개 숙여 사과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편집자에게 원고 무더기를 넘겼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서두른 것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작은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벌써부터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물 냄새를 맡으면서 흐르는 강물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잉크에 펜을 적시고 첫 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물굽이에 발을 담그고, 끝없이 반짝거리는 물살들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헤아릴 수 없고 빈 틈을 알지 못하며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물이 솟아나 그를 채우고 종이를 채우고 방 전체를 채우고도 흘러넘쳤다.

 

 그 다음의 기억들은 띄엄띄엄하고 불분명하다. 아마 중간에 편집자와 만났던 것 같았다. 그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뻔하고 상투적인 칭찬들을 늘어놓으면서 그가 넘긴 원고의 독점 계약을 약속 받으려고 애썼다. 작가는 그의 번들거리는 이마가 싫었고, 계속 흘리는 땀이 싫었고, 연신 닦아대는 더러운 손수건도 싫었다. 넘실거리며 표연히 흘러가는 물이 있는데 기껏해야 잔 속의 커피, 개기름에 짠 내 나는 땀이라니! 그는 상대의 말을 끊고 선언했다.

“죄송합니다만 전 지금 다음 작품을 집필 중이기 때문에 매우 바쁩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권리들은 당신을 대리인으로 삼아 일임하겠습니다. 물론 다음 원고도 당신이 받아 갈 테니,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지요?”

 작가는 편집자와 계약서와 그 밖의 것들을 남겨놓고 허둥지둥 뙤약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지나 골방으로 돌아왔다. 비록 출판업자들이 책을 형상 짓지만, 작가에게 본질은 책이 아니라 이야기이고 본질의 본질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 안에 가득한 종이와 잉크 냄새에서, 불현 듯 달뜬 수면의 냄새가 나고, 다시금 시원하고 적시는, 메마른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속살거리고 눈으로 분간할 수 없는 흐름으로 갈래지는 것이 솟아나왔다- 그 다음에는 가끔은 종이 위에 햇빛이 떨어져서 방금 쓴 글자가 반짝거렸고 가끔은 달이 실어 보낸 바람이 불어왔는데 작가는 다시 거기서 그리운 물의 냄새를 맡곤 했다.

 그가 써낸 것들은 아주 성공적이었는데, 꽤 잘 팔렸을 뿐 아니라 평단에서도 연일 찬사가 울려 퍼졌다. 어떤 상당히 유명한 비평가는 그를 “꽃병에서 시든 꽃처럼 예술이 말라가는 시대에 새로운 물줄기이다”라고 칭찬했다(비평가들은 어렵거나 멋진 말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구든 우레처럼 울부짖으며 굽이치면서도 동시에 어떤 숨겨진 비밀에도 뱀처럼 세심하게 스며드는 양면성을 지닌 물을 그 자신 안에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꽃병이나 시든 꽃 따위에는 괘념치 않을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썼다. 몇 편이나 썼는지 그 중 어떤 것이 몇 편이나 팔렸는지는 여전히 번들거리는 이마를 이제는 비단이지만 여전히 더러운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대는 편집자가 신경 쓸 일이었다. 글을 쓰는 이가 쓰는 모든 것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다른 누가 아닌 그 스스로가 자신이 쓴 것을 보고 “보기에 그 모습이 좋았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그가 원하던 대로 그의 손은 이제 끊이지 않고, 모든 것은 하나의 글로 쓰일 수 있으므로, 그의 갈증은 해갈되었다. 글자들은 뒤얽혀서 지상적인 것을 써서 천상적인 것을 속삭였다. 서늘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평온함 속에서, 작가는 거기에 있었다.

 이 시기에 글을 계속 쓰는 동안 작가가 어떤 환희를 느꼈는지 글로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질적인 속성은 흐르는 것, 즉 멈추지 않는 것에서 오는데, 글로 옮기는 순간 마치 개별적인 모래알처럼 철자 하나, 단어 하나에 갇혀버리고 마치 물을 설명하기 위해 물방울의 수를 세려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강을 작살로 찔러서 멈추게 하려는 시도나 다름없다. 무한히 떨어진 순간과 순간 사이의 간극에서도 그것은 계속 흐른다. 수면 위에 번뜩이는 빛, 어떤 물거품의 색채, 실처럼 부드럽게 풀리는 작은 와류를 어떤 단어로 이름 지으려 하면, 그것은 이내 흘러가버린다. 똑같은 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는 없는 것은, 똑같은 물이란 없는 탓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갈망하던 <물>이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도 자르거나 토막 내거나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단어들이 표면장력을 잃고 한 물방울에서 다른 물방울로 이어질 때 거기에서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그래서 작가는 펜에 잉크를 적셔서 그것을 강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궁한 즐거움이었다.

 

 멈추지 않는 기쁨은 무시간성을 띄고 있으므로, 행복에 잠겨 있는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물살이 격렬해지는 시간으로 옮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이 될 것이고, 무한한 것이 되어 독자들을 자기 속에 가둬두려고 들 테니까. 파국은 아무 전조 없이 찾아왔다. 작가는 아직 글을 써내려가는 도중에(이미 그의 이름으로 된 전집이 출간되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또 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물은 계속 그를 불렀고 또 다른 사랑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작업량을 무리해서 늘렸고 글을 마무리 짓기 무섭게 새로운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첫 줄을 쓰는 동안, 작가는 지금 그의 펜 끝에서 일렁이는 수면이 아닌 곳에서 또 물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물이 있었다. 영감의 원천은 그가 한 가지 아이디어에 집중하고 있는 것에 불만스러워했다. 다른 이야기들이, 또 다른 이야기들이 좁은 펜 끝의 통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깊은 곳에서부터 아우성쳤다. 작가는 당황했는데, 그는 손이 두 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감에게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받아 적을 수 없으니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물에게 한 방향으로만 흘러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멈추지 않는 샘은 어떤 것으로도 멈출 수 없다(만일 멈출 수 있다면 그것을 멈추지 않는 샘이라고 부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작가가 이미 어떤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손끝에서 그 물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을 때에도, 공기 중에 흰 속살을 드러낸 물이 흩뿌리는 냄새는 참기 어려운 그리움을 일으킨다. 그것은 그 글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어떤 수를 써서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작가는 한동안 작업량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무한정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릴 수는 없었다. 궁리 끝에 작가는 좀 더 순수한 이야기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묘사나 대화, 배경 인물들을 줄이고 중심 흐름만 간추렸다. 쓸 것이 너무 많아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단편의 비중을 늘렸다. 풍부함 대신 영감에서 솟구쳐 나온 날카롭고 강렬한 인상들을 뚜렷하게 옮기는 것으로 벌충하려 애썼다.  나중에는 그 시간도 모자라서 전문 속기사들을 고용했다. 대기하고 있는 타자수들 사이를 바쁘게 걸어 다니면서 한꺼번에 두세 편씩 불러주면 양철판을 때리는 소나기처럼 타자기들이 이야기를 종이에 글자로 때려 박아 글을 형상 지었다. 그의 최고 기록은 여섯 편을 한꺼번에 쓴 것이었다. 편집자들은 기획한 전집 목록을 늘리면서 싱글벙글했다.

 하지만 그가 갈래지는 물줄기들을 종이 위로 옮길수록, 물은 더, 더 깊은 곳에서 더, 더 많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걷잡을 수 없고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힘이 넘쳐났다. 막강하고 제압할 수 없는 홍수, 이리 저리 뒤틀며 재빨리 감돌아 급기야는 제방을 부수는 부풀은 강, 경작지를 혼돈으로 뒤덮고 마른 땅에 발붙이고 사는 주민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추수할 수 없는 범람, 베어내면 그만큼 머리가 자라나는 레르나의 휘드라 뱀. 무한이라는 속성은 그러므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고, 영감이 인간이 견뎌낼 수 없을 거라고 경고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힘이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이제 도저히 솟구쳐 오르는 모든 영감들을 일일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넘쳐난 물은 그가 기를 쓰고 펜을 놀리는 동안 하염없이 흘러서 곧장 망각으로 갔다. 비록 작가가 <샘>을 마셔서 그 스스로가 샘이 되었지만, 퍼내도 마르지 않는 원천만 얻었을 뿐 부글부글 소용돌이치며 모든 물을 담는 바다가 된 것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글 쓰는 모든 이들은 빈 종이를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한번 떠오른 아이디어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작가는 맹렬하게 작업하면서도, 그에게서 샘솟은 물줄기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흘러드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영감은 쉴 새 없이 떠올라서 웃음 짓다가 물이 점점 더 멀리 흘러가면 이윽고 고개를 돌리고(“안 돼! 제발 가지 마!”) 서서히 흐릿해지며 빛을 거둔다.

“안 돼! 기다려줘!... 조금만 기다려줘!”

 그러나 이미 또 다른 물이 있고,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광채가(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기도서>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다시 그에게 웃음 짓는다... 위대한 도서관의 사서가 다가와서 절망해서 고개를 묻고 흐느끼는 작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마세요, 죽을 운명의 인간이여,”

 하고 사서는 부드럽게 달랬다.

“도서관의 복도는 무한하니까요. 당신을 스쳐 지나간 글들을 이루는 모든 글자 수 만큼의 글들의 글자 수만큼의 글들이 당신에게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당신이 그 이야기들을 모두 펜으로 옮기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이 놓친 것은 위대한 도서관의 서가 하나도 채우지 못할 정도 밖에 되지 않거든요.”

 그 사서 역시 위대한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불멸의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에 무엇이 작가를 슬프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작가는 엎드린 채로 더 슬프게 울었다. 심지어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물방울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안에도 끝없는 이야기들이 고여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반짝임으로 빛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야기들은 눈물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깨지자 이내 사라져버렸다.

 

 작가는 <기도서>를 산 뒤 처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는 서지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가 작가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 장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런, 맙소사! 자네 꼴이 말이 아니군. 잠시만 기다리게, 차를 좀 내 올 테니깐.”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작가는 불분명하게 웅얼거렸다.

“더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다네. 무시무시한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들은 나를 꿰뚫고, 짓씹고, 갉아 먹고, 으깨고-”

 그는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친구는 그를 부축해서 의자에 몸을 기대게 하고, 장사가 끝났다는 팻말을 내걸고 문을 걸어 잠근 뒤, 찬장을 뒤져 독한 브랜디를 찾아 작가가 한 모금 들이키게 했다. 작가가 기운을 차리는 동안 친구는 찻주전자를 내 왔다.

“자, 자네를 더 쫓아올 건 없네.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더니 도끼를 든 한 떼의 출판인들이 자네를 계약서에 따라 분할하려고 쫓아오기라도 하는 건가? 어디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내가 하루아침에 온 평단의 찬사를 받으면서 연이어 다음 쇄를 찍어내는 대작들을 마구 써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온전히 내가 쓴 게 아니야. 그건 모두 자네에게서 산 <모래 기도서>에서부터 시작된 거라네...”

 작가가 그 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니 차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책방 주인은 안경을 밀어올리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출판계약이나 책보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니, 역시 자네들 작가라는 족속은 제 정신이 아냐.”

“난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니라네.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영감이 떠올라서 사라져가고 있거든... 식당에서는 식탁보에다가 쓰고, 마차 안에서는 옷소매에다 쓰고, 요양소에 끌려갔을 때는 구속복을 씌우기 전까지 온 벽에다가 썼다네. 자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그 모든 빛나는 아이디어들을 놓친다는 건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아마 자네에게 비유하자면 기원전 5세기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펼치려다 손 안에서 조각조각 으스러지는 광경을 볼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토탄 늪에서 건져 올린 <무명 제사서>가 페이지가 달라붙는 바람에 찢어졌을 때에는 3일이나 끙끙 앓아누웠거든.”

 하고 책방 주인이 동감을 표시했다. 작가는 조급하게 물었다.

“혹시 그 동안 그 <기도서>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냈나? 그게 나한테 남은 유일한 실마리야. 정신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이리로 온 거라네. 그 책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날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음, 각자의 전문 영역의 특성은 서로 존중하도록 하세, 친구.”

 책방 주인이 엄숙하게 말했다.

“알다시피 우리는 업무가 좀 과격하거든. 철퇴라든가 복면, 뒷골목에서의 급습, 역급습, 지하서고의 추격전과 매복... 최근에 자기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 솜씨가 많이 죽었지 뭔가. 석궁 한 방으로는 숨통을 끊어놓질 못하더라구.”

“뭐라고? 그 책을 쓴 사람을 죽였어?”

“아니, 그 책을 내 거래 목록에 슬쩍 끼워둔 경쟁자 얘길세. 내가 아무래도 마법사에 대해 과도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군, 서적상의 가장 위험한 적수는 다른 서적상이라는 걸 깜빡했으니. 내가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을 때 날 내려다보면서 모래의 책은 잘 받았느냐는 둥 잘 가라는 둥 떠들어 대길래 잽싸게 분노와 복수의 화살을 먹여줬지. 이보게, 우리는 민간인을 건들진 않아. 프로에겐 프로의식이 있는 거야. 하지만 내가 석궁 맛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그 작가는 이미 죽었는걸.”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친구는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이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나는 언제나 보통 사람들의 상식 부족에 놀란단 말야. 아무리 자네가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지만 종이 상태를 보면 그게 최소한 3세기는 지났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지 않나? 그 작가가 무슨 불로불사의 비결을 얻지 않았다면 살아 있을 턱이 없지.”

 작가는 신음했다.

“그렇다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자네 같은 서적상들처럼 단검과 손철퇴를 허리춤에 차고 고대 도서관의 지하 복도를 헤매면서 이 마법의 역주문이 담긴 마법책을 우연히 찾기만 바라야 하는 건가? 난 평생 내 책상 앞을 떠난 일도 없다구! 자네 혹시 다른 아는 마법사는 없나? 주문과 글 양쪽에 모두 조예가 있는 사람 말일세.”

“내가 편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그 치들은 금화를 자루로 줘야 사들일 수 있는 시약으로 손톱만한 금 조각을 만들어내는데 광분한다든가, 불사의 비약을 만들겠다고 평생을 바치고도 늙어 죽는 순간까지도 실험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슬퍼하는 작자들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쳐 돌아가는데 거기다 작가이기까지 하면 두 배로 미치광이일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은 아는 사람도 없지만 별로 상종하고 싶지도 않군.”

 하고 그를 흘끗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이런, 미안하군. 자네가 그 범주에 든다는 걸 깜빡했네.”

 그러나 작가는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자 크나큰 절망에 휩싸였기 때문에 친구의 사과 따위에 귀를 기울일 상태가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방법은 없단 말인가? 이런 걸 어떻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어? 눈앞에서 영감들이 연이어 사라지는데 도저히 그걸 다 그러쥘 방법이 없네. 허공에서 짤랑짤랑 쏟아져 내리는 금화들을 더 이상 받을 손이 없는데도 계속 발 아래로 금화가 떨어져 내리는 거야!”

 책방 주인의 표정을 보고 작가는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금서목록>의 마지막 판본들이 자네 앞에 있는데, 이미 자네는 양손 가득히 책을 들고 있어서 무너져 내리는 지하 감옥 속으로 그 <목록>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거지.”

“이런, 맙소사!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군 그래!”

 두 사람은 충격을 받고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혹은 좀 더 단순하게는 사람 손이 두 개인 것을) 슬퍼하면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작가가 중얼거렸다.

“죽을 운명의 인간이, 불멸성을 질투해서 영원하고 지고한 행복을 손에 넣으려 애쓴 나머지 가엾게도 무한 그 전체에 짓눌려 버렸네.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한다면,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작가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을 찾는 서적상이 되었어야 하는 걸까? 어딘가에서 모든 세상을 담고 있을 원형의 책을 발견하길 꿈꾸면서-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을 펼쳐 보아서는 안 되겠지, 금지된 것을 엿보는 순간 또다시 영원이 나를 태워 버리기 직전 내 망막에 아로새겨지고 그러면 남은 생은 어둠 속에서 그것만을 그리워하다가 죽어 갈 테니.”

“자네는 미로에 발을 들이자마자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딱히 이런 직업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내 힘으로 도울 방도가 없어서 유감이네. 하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에 대적할 방법은 그 자신의 유한성뿐이지 않을까? 무한함이 말라붙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그게 있음직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야- 자신의 미약하고 짧은 생으로 퍼내고 퍼내고 또 퍼내는 거야.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도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데까지 계속 걸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책방 주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자신도 자기 말을 믿지는 않았다. 작가는 침묵을 지켰다.

“‘요술쟁이 사냥꾼’이라는 별명이 생길 때까지 상당히 많은 마법사들을-아직 살아 있으면- 원수로 만들어 버리긴 했지만, 나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네. 자네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쓸 수 있는 데까지 쓰면서 버티게. 책값은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 진정한 상인은 고객과 지속적이고 믿을 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거든.”

 두 사람은 식은 차를 가운데 두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앉아 있었다. 저녁이 저물었다. 작가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어두운 거리 속으로 사라져갔다. 책방 주인은 문간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쯧쯧 혀를 차고 중얼거렸다.

“역시 작가들이란.”

 그는 도로 들어와서 바닥에 떨어뜨린 목록을 집어 들고, 다시 장부를 정리하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망설이다가 작가에게 달려 있는 책값은 지워 버렸다. 이번에는 대금을 받아내려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어쩌면 아예 못 받을 수도 있고.

 

 그러나 아직 작가가 완전히 끝장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던 중 또 다시 뭔가 희미한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도서>를 두고 이야기하다가 처음 영감을 사로잡는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서 실마리를 잡으려고 애썼다. 스스로를 꿈꾸는 예감에게 형상을 부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며칠씩이고 어두운 방 속에서 내면의 <샘>을 들여다보며 쏟아져 나오는 아이디어들을 옮겨 적으려는 충동에 맞서 싸웠다. 인간의 이성이 보기에는 기이한 일이지만, 무한의 특유한 속성으로 인해 그 안에서는 무엇이든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영감 그 자체에서 길어 올린 지식으로 영감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스스로를 언급하는 오래된 수수께끼들과도 같이 위대한 도서관으로부터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의 다음 순간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면... 작가는 휙휙 사라져버리는 영감들 가운데서 자신이 찾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무엇을 찾는지는 아직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지만.

 어느 날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이 엄습하자 그는 숨을 훅 들이켰다가 한참 후에야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내가 영감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지도 몰라.”

 그렇게 불경한 언사를 내뱉고 나서 작가는 몸서리쳤지만, 한 번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내친 김에 마저 중얼거렸다.

“”영감이 나를 사로잡은 거야. <기도서>를 읽고 나서 나는 영감을 사로잡는다는 영감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영감이 나를 차지하도록 이 땅으로 불러내린 거지.“

 그 생각은 서서히 뚜렷해졌다. 영감이 그를 숙주로 삼았고, 작가는 그저 그 무한하게 샘솟는 것이 흘러나가는 도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짝이고 시원한 것이 그를 매혹시켜서 끝없이 목마르게 했고 그래서 물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다. 그것은 비단 그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작가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작가들이 도대체 어떻게 처음 글 쓰는 일에 빠져들겠어? 결국 우리들 모두는 영감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사로잡히고, 그 후에는 조금씩 세상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애타게 쫓는 거지. 그렇게 해서 써내려간 글들 속에 다시 그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번뜩이고, 물이 흐르는 소리 또는 물 내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낀 작가 지망생들이 다시 물에 목말라 하고, ...”

 작가는 너무 오싹해졌기 때문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마르지 않는 샘을 갈구한 것은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였지만, 다만 끝없이 갈래지는 갈림길의 정원을 헤매던 중 우연히 모퉁이를 돌자마자 영원성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그 순간 불타는 갈망이 그의 이성을 태워버렸고 영감이 그를 지배하도록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갈망이 애타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해도 거기에 닿아서는 안 되었다. 주어진 것만, 지극히 일부만 받았어야 했다. 흡사 어둠 속을 퍼득대며 날아다니는 나방이 빛을 사모한 나머지 불에 자신을 태우고 마는 것처럼, 갈망의 대상에 도달해 버리면 그것으로 갈망과 갈망하는 자신까지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 깨달음 후 그는 점점 쇠약해졌다. 남은 호흡의 수를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면서 시간도 점점 느려졌다. 소리가 아주 멀어졌다. 작가는 헐떡이면서 생각했다.

“갈망이여, 그대의 속성은 좌절, 이루어질 수 없음. 만일 실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대를 갈망이라고 부르지 않겠지. 모래의 채울 수 없는 빈 틈으로부터 갈증이 비롯되듯 짧고 덧없는 인간에게서 갈망이 태어난다. 그러나 비어 있음을 모르는 물은 갈증을 알지 못하고 불멸하는 것은 갈망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샘>을 마시고 갈증을 잃고 말았다.”

 그는 무게를 잃고(아마 정신도 잃고) 허공으로 붕 들려 올라갔다. 은하수와 우유바다와 신주가 있는 곳으로 곧장 갔다. 천상의 액체를 들이켜고 원기를 찾은 뒤 작가는 별들에게 말했다.

“나는 <샘>을 포기해야만 해. 다시 갈망으로, 사막처럼 메마른 공허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건 단지 내가 한 일이 분을 넘치는 것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야. 영감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결국 유한성 그 자체인 것이고, 그래서 갈망을 알기 때문이야... 그로부터 그리움, 동경, 희구가 태어나고, 참을 수 없는 것은 이윽고 상상력을 낳으면, 날갯짓하는 정신은 간극을 넘어 천상까지 날아가 선물을 가져오고 그 때야 무한의 한 자락이 우리에게 와 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조각은 여전히 무한의 속성을 유지하고 있어.”

 작가의 몸은 골방에 쓰러져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상위 하늘 한가운데 아이테르의 천궁에 있었다. 천상적인 존재들이 주위에 둘러서서 그가 하는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낮과 밤을 벗어난 곳에서 삶과 죽음을 벗어난 이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모래 기도서>는 단지 <샘>을 사로잡고 그 힘을 빼앗기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야. 그건 시작과 끝이 있는 무한이다. 무한의 또 다른 양식이지. 작가가 지상적인 것을 재료로 써서 천상적인 것을 노래하고, 분절적인 단어와 단어로부터 연속성을 지닌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사람은 갈망한 끝에 유한성 한 가운데에서 또 다른 무한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허락된 불멸이야- 찰나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그러자 전능한 자들은 웃으며 온전해짐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작가는 날개달린 정신을 타고 유성처럼 지상으로 날아 내려왔다. 왕을 왕좌에, 왕좌를 왕국에, 있어야 할 것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어른거리는 물그림자가 세상에 가까워졌다. 탄생의 예감으로 술렁이는 수면을 깨뜨리고, 영감 속으로 갈망을 깊숙이 밀어 넣어, 그가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을 길어 올렸다. 그것은 마치 <샘> 전체를 퍼낸 것과 같았고, 온 세상의 물을 떠올리는 것과 같았다. 작가는 물 속을 들여다보았고 그 속에서 작가가 물 속을 들여다보았고 그 속에서 작가가 물 속을 들여다보았고... 그는 그는 그는 그것을 그것을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보았다. 그것은 세상 전체를 반영하면서 심지어 그 자신까지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두려움이나 연민도 없이 물에서 모래를 움켜쥐었다. 무한에서 유한성을, 무시간에서 시간을, 평온에서 갈망을 끄집어냈다. 죽음을 잊었던 것은 다시 죽음을 알게 되었다.  <샘> 전체를 다 써서 사막을, 고통을, 공허를 불러왔다. 무한한 힘을 그것을 더 이상 무한하지 않게 만드는데 사용해 버렸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인쇄기는 철컥 철컥 움직이면서 인쇄된 종이를 먹고 깨끗한 종이를 토해놓았다. 이제 미래로 속하게 된 책들은 팔락팔락 책장이 넘어가며 글자가 한 글자 한 글자씩 다시 잉크로 빨려 나가갔다. 편집인은 평소와 똑같이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면서 굽실거리다가 갑자기 뒷걸음질 쳐 나가서 문에서 주먹을 빠르게 뗐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친구는 장부에 이미 지웠던 작가의 이름을 써넣었다가 다시 지웠다(그러나 그는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강물이 거꾸로 흘러 샘으로 돌아갔다. 시간 밖, 아직 쓰이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의 서가에서 사서가 돌아온 책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바스락거리는 입자가 가파른 비탈을 타고 구르고, 알갱이가 섞인 바람이 얼얼하게 표면을 두드려 깎아내면, 곱게 풍화된 바위가 점점 부스러진다. 사람을 길 잃게 만들지만 벽은 없는 미로가 끝없이 늘어섰다. 방향지어지지 않는 공백에서는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아 온 사위가 적막에 잠겼다.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 정해주는 것은 전혀 없다. 어떤 도시나 야영지도 보이지 않다. 작은 도마뱀이 움찔 놀라 배를 깐 채 재빠르게 기어서 도망친 자리에는 뭔가 있었던 흔적도 남지 않았다. 강인한 가시가 돋친 덤불 속에는 달콤하지만 신 빨간 열매가 달렸다. 발이 푹푹 꺼지는 사막은 조용하게 초생달 사구들로 천천히 흘러간다.

 작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잉크에 적셨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눈을 따갑게 하고 숨을 들이쉬면 먼지 냄새가 났다. 다시 광막한 지평선이 내려다 보였다. 애타고 목메고 갈라진 입술이 물을 그리는 곳에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밤이 머리 위에 떠 있다. 발자국은 덮혀버리고, 어떤 이정표도 없고, 물이 흘러간 자국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형상지어지지 않고,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갈망으로 불타게 하는 비어 있는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사락사락 소리 내는 것이 물처럼 흐르면서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을 샘을 꿈꾼다. 작가는 그가 무엇을 써야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모래로 되어 있다. 헤아릴 수 없고, 쉬지 않고 변화하며, 멈추지 않는 갈증을 가져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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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이는 누구나 자신만의 모래 기도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읽으시는 분들 모두 밤은 길고 괴로움은 짧기를 기원합니다.

보르헤스의 <모래의 서>와 닐 게이먼의 <칼리오페>를 합친 것을 내용의 3분의 2로 삼았습니다. 처음 썼을 때는 아주 장황한 만연체로 빽빽했지만 근래 실험 중인? 대화체를 섞어 넣어서 읽기에 덜 빡빡하게 해 보았습니다.

댓글 2
  • No Profile
    티슬 13.07.19 15:58 댓글 수정 삭제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가 떠올랐습니다. 모래기도서는 초월적 존재의 프리라이팅 노트 같기도 하고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익명 13.08.07 15:37 댓글 수정 삭제

    먼지비 님의 글은 꼭 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항상 볼때마다 감탄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올리신 글들은 꾸준히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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