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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

2009.04.26 22:2204.26



1. 그나저나 그해 겨울

그해 겨울은 귤이 풍년이었다. 가을 내내 불었던 깊고 진한 바람 덕분에 가지마다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밤이 되면 나무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은 미니스커트가 대유행이었다. 여심을 뒤흔든 미니스커트 바람은 시베리아 기단의 그것보다도 강해서 보기에도 아찔한, 하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초미니 행렬이 겨울 거리를 당당하게 누볐고, 그러므로 하여 남자들은 외투를 입지 않아도 그 겨울을 견딜만했단다. 참으로 바람직하고도 흐뭇한 유행이었다. 또한, 그해 겨울은 많은 눈이 내렸다. 스키장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모텔과 여관은 더 큰 비명을 질렀으며 세상은 그야말로  ‘러브 앤 피스’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군인, 그것도 이등병이었다.

제주도에 나가 있는 염보민 기자가 밝고도 상큼한 목소리로, “이곳 제주는 지금 황금빛 귤이 대풍입니다.”라고 말해도, 연말 시상식에서 여자 배우들이 가슴은 물론이고 등까지 깊게 파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나는 금상첨화의 복장으로 등장해도, 겨울 용품은 물론이고 콘돔 또한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기사가 스포츠 신문을 장식해도,

조까고 있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는!

나는, 군인이었고, 겨우내 하루도 빠짐없이, 참으로 규칙적으로 매일같이 눈을 치워야 했다. 이런 젠장, 우라질, 개부랄, 해삼, 멍게, 말미잘이라고 수도 없이 욕을 해봐도 세상을 러브 앤 피스로 물들이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십 년간 계속된 냉전체제는 물론이고 전쟁과 차별, 대립과 억압도 무너뜨린 러브 앤 피스 아니던가! 이등병 군바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물며 총보다 빗자루 드는 시간이 더 많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는.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 헤어져.”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해온 건 눈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그 수많은 날 중에서 딱 하루, 맑고 화창했던 어느 일요일 오전이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어이없고, 황당했다.
“혹시 착각했을까 봐 말해 주는 건데, 내가 입대한 건 가을이야. 이제 3개월 지났다고.”
그러니까 나는 ‘너무’나 ‘이제’ 혹은 ‘헤어져’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엔 3개월이라는 시간은 조금 민망하다고 에둘러서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 이제 3개월 지났지. 앞으로 21개월을 기다려야 하는데 난 자신이 없어.”
아하. 그것은 결국 관점의 차이였다. 바다를 표류하던 두 사람이 무인도에 닿게 된다. 가진 거라고는 2리터짜리 생수 한 병뿐. 물은 점점 줄어드는데 평소에도 꼼꼼하고 신경질적이며 예민하기로 소문난 A형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물이 반밖에 안 남았구나. 이젠 곧 죽겠구나!” 반면 평소에도 생각 없고 허랑방탕하며 현실감각 없다고 소문난 O형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 물이 아직 절반이나 남았구나. 언젠간 구출되겠지.”
뭐 이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관점의 차이 말이다. 그녀와 내가 생각하는 3개월은 다른 시간이었다. 하기야 러브 앤 피스로 넘실거리는 바깥세상과 구타 앤 기합으로 충만한 군대는 다른 시간으로 움직이겠지. 차라리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 친구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지금 여긴 눈 오거든. 빨리 스키 타러 가야 하니까. 그만 끊자.) 미안해.”
“(오늘은 미니스커트라도 입어볼까.)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미안해.”
그래. 알겠어. 나는 있는 힘껏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니, 전화를 먼저 끊은 건 그녀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그렇게 이별을 했다. 빌어먹을 3개월 만에.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꼴에 똥폼 잡느라 그동안 수신자부담전화로 걸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깝고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2. 데굴데굴 축구공

탈영을 했다.
역시나 그해 겨울이었다.

탈영이라는 말 앞에 ‘결국’이나 ‘마침내’ 그것도 아니면 ‘드디어’라는 말을 붙이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꽤 충동적이고 우발적이며, 눈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그 수많은 날 중에서 딱 하루, 맑고 화창했던 어느 일요일 오전처럼 다소 생뚱맞은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도 역시나 눈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그 수많은 날 중에서 딱 하루, 맑고 화창했던 어느 일요일 오전이었다. 오전부터 전투체육, 이라고 해 봐야 축구가 전부였지만, 아무튼 그런 걸 했었다. 고참 한 명이 자 버리는 바람에 새벽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 연속으로 근무를 서야 했던 나는 잠이 와서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좀 빼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딜.

고참들에게 있어 축구는 조국과 민족과 겨레를 지키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게 중에는 반대인 사람도 있었는데 말년인 최 병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제대를 해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만 할 사람. 어디서 구했는지, 등번호까지 달린 유니폼을 입은 최 병장은 시합 내내 “압박 축구를 해야지. 압박!”이라고 외쳐댔다. 하지만, 불행이도 최 병장은 혀가 짧았고, 현대 축구가 등장한 이래 가장 완벽한 작전이라 일컬어지는 압박 축구라는 말은 “아따 추구를 해따디.”라고 겨울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게 우스워 몇 번 키득거리다가 최 병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눈알이 튀어나올 듯 째려보는 그 모습 자체가 압박이었다. 그렇게 종일 뽈을 찼다. 이런 식이었다.
“점심 먹었으니 한 게임 해야지.”
“저녁도 먹고 배도 부른데 축구나 한 게임 더 할까?”
결국 하늘이 어두워지고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야 “이번이 마지막 게임.”이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들렸다. 그때 최 병장이 찬 공이 우리 편 골대를 넘어 저 멀리 안드로메다를 향해 날아가다가 연병장 뒤쪽 풀숲으로 떨어졌다.
“제가 주워오겠습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연병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리바리 서 있으면 구타 앤 기합으로 하루를 상큼하게 마무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몇 개월의 군 생활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체득. 그렇다. 그것은 그야말로 몸으로 터득하는 것. 머리로 이해하거나 깨닫기 전에 내 다리는 이미 뛰고 있었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우리 부대는 산등성이에 있었고, 연병장과 탄약고 주위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연병장 뒤의 풀숲은 3년 전인가 이등병 하나가 목을 매 자살하고부터는 잡초나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작년에 새로 부임한 대대장이 풀 좀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려서 결국 없던 일로 했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것보다는 고참들이 무서웠기에 나는 공을 찾아서 풀숲을 헤쳤다. 하지만, 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긁히는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키카’ 마크가 크게 프린트된 그 얼룩박이 축구공은 정말로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 듯 찾을 길이 없었다. 고참들의 야단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로, 가버렸나 봅니다, 안드로메다로, 녀석이.”
라고 말해봐야
“그래. 지금까지 고마웠어. 언제나 네 얼굴을 뻥뻥 차서 미안해. 내 발이 개발이라 가끔 너에게 똥볼이라는 오명을 씌워서 미안해. 잘 가. 안녕.”
이라고 답 할리도 만무한 일. 나는 공을 찬 놈보다 찾는 놈이 더 마음 졸여야 하는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현실에 분개하며 어두운 숲 속을 계속 돌아다녔다. 어디선가 키카 녀석의 더러운 비웃음이 들리는 듯도 했다. “넌 끝났어. 크크크.”

공을 발견한 것은 삼십여 미터를 내려와 철조망 근처까지 갔을 때였다. 공은 철조망너머, 그러니까 바깥세상이라 불리는 곳, 귤이 풍년이고 미니스커트가 나풀거리고 러브 앤 피스로 들썩인다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철조망을 경계로 바깥세상은 거짓말처럼 깨끗한 시멘트 길이었는데, 공은 그 길 위에서 은은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위로 한 두 점씩 눈이 쌓였고, 공의 흰 오각형에서는 영롱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근래 몇 달간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는 공이 빠져나간 철조망 개구멍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공만 바라봤다. 훈련소에 있으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유격훈련이었다. 늦가을의 오후는 여전히 무더웠고 훈련병 모두는 반복되는 힘든 동작과 기합에 지쳐갔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바로 그때, 옆에서 훈련받던 녀석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조교와 교관이 달려왔고 의무병들이 들것을 들고 출동했다. 그 녀석이 응급조치를 받는 동안 우리는 그늘에서 쉴 수 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했다. 그토록 파란 하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늦가을의 깊고 진한 바람에 실린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햇살은 우리가 앉아 있던 나무 그늘 근처에서 찬란히 부서졌다. 그 햇살의 파편들이 떨어지는 낙엽에 맺히면서 빛 알갱이들이 자글자글 반짝이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다시 느끼지 못할 만큼.

바로 그런 평화가 공을 바라보는 내내 온 마음을 휘감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참으로 난데없는 눈물이었다. 고참들이 본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만한 일이었다. 눈 오는 밤에, 몇 미터 앞에다가 공을 놓아두고 청승맞게 눈물이나 흘리는 이등병 나부랭이라니!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개구멍 사이로 손을 뻗었다. 어깨까지 내밀면서 최대한 손을 뻗었지만 공은 닿을 듯 말 듯 잡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손이 닿을라치면 공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공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내 손을 피해 조금씩 굴렀다.

이런 건방진 공노무자식!!

조금 전까지 내 마음을 물들이던 감상적인 기운은 싹 달아나고 공을 잡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나는 개구멍을 억지로 더 벌렸다. 다행히 몇 번의 시도 만에 엎드려서 지나갈 만큼 넓어졌다. 훈련소에서 배운 건 꼭 쓸모가 있을 거라던 교관의 말을 떠올리며 낮은 포복으로 개구멍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갔다. 공은, 정말로, 진짜로, 움찔하는 것 같더니만 내 재빠른 동작에 그대로 잡히고 말았다. 나름 의기양양해진 나는 그제야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 순간, 내가 바깥세상에 나와 있음을, 구타 앤 기합이 아닌 러브 앤 피스가 통하는 바로 그 세상에 나와 있음을 깨달았다.

탈영이구나.

그렇게 나는, 탈영을 했다. 오렌지 색 활동복을 입고 흰 운동화를 신고. 참! 키카 축구공도 함께였지. 탈영 아이템치고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 와서도 말이다.



3.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거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 말을 몸소 실천하고 싶으셨던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아버지는 곧 음식점을 차리셨다. 황소개구리 전문점이었다. ‘황소’ 전문점이 아니라 ‘황소개구리’ 전문점.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과 포부를 들은 우리 가족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우리 집 강아지 복실이는 황소개구리의 우렁찬 외침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진지했다. 미국에서 들어와 우리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황소개구리들을 잡아서 식용으로 파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있다. 서울에서는 벌써 대박을 쳤단다. 황소개구리는 닭고기 맛이 난단다. 정부에서도 장려하고 있단다. 평생 건설 장비 기사로 일하셨던 아버지 입에서 ‘프랜차이즈’란 말이 생각보다 매끄럽게 나오는 걸 보면서 우리 가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뿔싸,

미국에서 들어와 우리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황소개구리는 우리 집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애초에 프랜차이즈는 사기였고 개업 준비금이다, 인테리어 비용이다, 라이센스다, 생태보호기금이다, 공무원 접대비용이다, 광고비용이다, 황소개구리 전용 그물 제작비용이다 뭐다 해서 꼬라박은 아버지의 퇴직금과 대출금은

개굴

사라져 버렸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서울역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는 시골로, 복실이는 보신탕집으로, 그리고 나는, 군대에 지원했다.

몇 번 힘을 준 것만으로 개구멍이 넓어지는 낡고 헐거운 철조망의 ‘이편’에서 ‘저편’을 보고 있자니, 울음이 비어져 나오거나, 미친 듯이 웃음이 나오거나,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 것이 아니라 그냥, 허탈했다. 연병장 쪽에서는 여전히 함성과 고함과 욕설과 관등성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내무반과 통제실의 불빛이 초식동물의 눈빛처럼 끔벅이고 있었다. 구멍 뚫린 철조망처럼, 내 청춘도 낡고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어둠의 저편에 있는 거대하고 쓸쓸한, 한 마리 늙고 병든 코끼리 같은, 구타 앤 기합이 징징징징 난무하는 ‘그곳’을 보고 있자니 말이다. 그래서

“죽을까.”

라고 생각했다. 맹세코 나는 그전까지 탈영을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탈영을 할 만큼 주변머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하지만 다시 들어가기가 싫었다. 다시 그 개구멍을 지나 풀숲을 헤치고 뭔가 커다란 비밀이라도 숨긴 듯 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여기 공 주워 왔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싫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라며 꿀밤을 때리거나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그곳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땀이 마르면서 잊고 있었던 추위가 뱀처럼 차가운 혀를 내밀었고, 눈발은 어느새 굵어졌다. 조금 있으면 부대에서 난리가 나겠지.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도로마다 검문소가 설치되겠지. 실탄이 지급될 거야. 훈련소에서 들었는데 탈영할 때 손톱깎이 하나라도 들고나가면 무장탈영이라고 하더라. 축구공도 마찬가지겠지. 심지어 단단하기로 소문난 키카 아니던가! 세게 차서 사람을 맞추면 죽을까? 군용견을 풀지도 몰라. 뭐,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또 이런 생각도 들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죽고 싶었는데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죽지 못했던 게 아닐까. 뒤늦게 소질을 발견하는 것처럼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죽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죽는 거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는 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오갔고, 발가락은 시려 왔으며, 콧물이 줄줄 흘렀고, 비릿한 눈물이 나올라 말라 한 참에 그냥,

“죽자.”

하지만 배가 고팠다. 스스로도 생뚱맞다 생각했지만, 고추장 봉지를 좍좍 밀어 짜듯 누군가 내장을 말끔히 짜 버린 것만 같았다. 그만큼 허기가 졌다. 막대하고 절절한 허기였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기로 했다. 돈도 없으니 배가 터지도록 먹고 후다닥 도망을 쳐서 죽으면 되겠다 싶었다. 죽는 방법이야 뭐, 얼마든지 많으니 일단은 뭔가를 먹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많이 먹어 배 터져 죽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쩝.

쩝. 입맛을 다시며, 추위에 떨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디 음식점이 없나 둘러봤는데, 둘러 볼 필요도 없이, 거짓말처럼, 바로 앞에 보기에도 화려한 간판을 단 음식점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

음식점 이름이었다. 간판이, 실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대관절 내가 왜 저걸 못 봤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란한 조명과 간판이었다. 심지어는 노래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겉으로는 도무지 뭘 파는 음식점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온갖 빛깔의 전구로 장식된 외벽에는 단서가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고 창문은 김이 서려 도통 안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이 음식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랬다. 늘 굶주려 있는 이등병 군바리의 직감이라고 할까, 아무튼

쩝.

입맛을 다시며 음식점 문을 열었다. 딸랑. 방울 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은 놀랄 만큼 작았고, 밖의 요란한 분위기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으며,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계산대에는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까지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마치,

전인권
같았다.

“어서오세요오오오오옷!!”
전인권, 아니 그 남자는 계산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머리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목에 핏대를 세워 괴성을 질렀다. 나는 그야말로 ‘흠칫’ 놀랐는데, ‘깜짝’이 아니라 ‘흠칫’ 놀란 것은 그 모습이 남자와 묘하게 어울렸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남자의 괴성과 거의 동시에  칼을 들고 어디선가 나타난 외팔이 남자에게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어땠나? 내 7옥타브 바이브레이션이.”
전인권, 아니 그 남자가 대뜸 물었다. 반말이란 걸 깨달을 겨를도 없이, 반말은 워낙 자주 들었으므로, 자동적으로 “네. 괜찮았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차렷 자세로 말이다. 관등성명을 대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아무튼 내 딱딱한 대답과는 상관없이 남자는 “아오” “이헤에” “쏴샤샤” “끼야아”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목을 풀었다.
“7옥타브는 말이야, 아무나 낼 수 없어. 그것은 에베레스트라고 할 수 있지. 옥타브계에서 우뚝 솟아 있는 최고봉. 유 아 언더스탠?”
너는 이해하고 있다, 라고 선언해 버렸으므로, 나는 언더스탠 뒤에 붙은 물음표처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말 늘어놓지 말고 손님이나 모셔.”
외팔이 남자가 바(bar) 형식의 테이블을 넘어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러곤 칼을 내려놓고, 팔이 하나였으므로, 조리용 모자를 들어, 자신의 모히칸 머리, 앗! 이건 말하지 않았었나? 남자는 외팔이에다가 모히칸 헤어스타일이었다, 아무튼 모자를 썼다. 전인권 같은 남자는 순순히 나를 외팔이 앞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뭘 드시겠습니까?”
외팔이 남자가 물었다.
“뭐가 있습니까? 메뉴판 좀 주시면 감사하지 말입니다.”
“아무거나 다 되지이이이이잇!!!”
그놈의 야트막한 7옥타브. 나는 배고픔도 잠시 잊고 밀려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전인권 같은 남자에게 물었다.
“저 실례지만 말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남자는 멀뚱히 나를 바라봤다. 이름은 왜? 이런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윤도현.”

지랄, 이라고 말할 뻔 했는데 겨우 참았다. 하지만 내 표정에는 지랄이라고 써진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지랄이라고 말해 버린 건지, 아무튼 남자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실실 웃으면서 다시 이름을 말했다.

“전잉권.”

정말로 “지랄”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외팔이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모창가수죠. 전인권씨의. 그런데 정신이 좀 이상하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네. 그렇군요.”
전잉권씨는 우리들 대화는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혼자서 “은주야”라고 중얼거린 듯도 했다. 그제야 나는 다시 극심한 배고픔을 느꼈다. 빨리 죽기 위해서는 어서 먹어야 한다. 굶어 줄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서둘러 물었다.
“정말 아무거나 다 됩니까? 자장면, 돈가스, 치킨도 됩니까?”
“아닙니다. 저희 집은 한 가지 메뉴만 취급합니다.”
그럼 뭘 드실 거냐고 묻지나 말지! 이따위로 장사를 하니까 군부대 뒤편에서 손님도 없이, 이상한 남자 둘이서 불이나 훤하게 켜 놓고 있는 거겠지. 배는 고팠고, 언제 군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그걸 달라고 했다.

외팔이 남자는 내가 보는 앞에서 굉장한 속도로 요리를 해 나갔다. 썰고, 지지고, 볶고, 무치고, 돌리고, 널고, 빼고, 뒤집고, 뿌리고, 깎고, 오리고, 꿰고, 자르고, 바르고, 굽고, 데치고, 찌고, 두드리는 일들을, 팔 하나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해냈다. 진기명기에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라면 한 그릇이 나왔다.
파도, 계란도 없는, 그야말로, 쓸쓸한 라면이었다.
“저희 집의 스페샬 메뉴, 러브 앤 피스입니다.”
그 많은 과정과 공정들은 도대체 왜 필요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한쪽 발로 바닥에 떨어진 안성탕면 봉지를 슬쩍 치우는 걸 보고는 그냥 먹자, 싶었다. 라면 봉지를 숨기는 모히칸 헤드의 외팔이 남자를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그런 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냥, 먹고, 죽자.

하지만 라면의 맛은 실로 대단했다! 아기의 볼처럼 탱글탱글한 면발은 입안에 넣자마자 살아 움직이며 입안 전체를 자극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어 본 어떤 면발보다도 굉장한 것이었다. 벽에다 던지면 붙어있다 못해 꿈틀꿈틀 살아서 기어 올라갈 것만 같았다. 혀에 감기는 맛은 또 어떤지! 한 입 씹자 면발 안 곳곳에 퍼져있던 진한 국물이 혀를 적셨고, 면발은 이내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아 버렸다. 국물 맛은 더 대단했다. 어떤 사골 육수보다도 진했으며 어떤 해물육수보다도 깔끔하고 부드러웠다. 칼칼한가 하면 삼삼했으며, 얼큰한가 하면 달고 구수했다. 국물 위에 살짝 떠 있는 기름기는 풍부함을 더했으며 국물의 적당한 온도는 속 깊은 곳까지 따끈따끈하게 만들었다. 면발을 한 번 빨아 당길 때마다 새로운 활력이 샘솟았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고 그 위에 오색 무지개가 드리웠다. 실실 웃음이 나오고 머릿속이 투명하게 맑아졌다. 국물을 한 수저씩 뜰 때마다 희망찬 미래를 꿈꿨다. 삶의 의욕이 맑은 샘물처럼 솟아올랐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 곰팡이처럼 달라붙어 있던 슬픔들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갔고 가슴 뛰는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것은 정말로,

대단한 라면이었다.
그냥 먹고 죽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나는 정신없이 한 그릇을 비웠다. 외팔이 남자는 어느새 한 그릇을 더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 뚝딱. 그리고 또 한 그릇 더. 한 그릇 더. 한 그릇 더. 테이블엔 라면 그릇이 쌓여 갔고, 주방엔 안성탕면 봉지가 쌓여 갔다. 열 그릇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입가를 훔치며 더듬더듬 물었다.
“너무 맛있습니다. 도대체 뭘 넣으셨습니까?”
외팔이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계산대에 있던 전잉권씨는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김군아. 나와서 그릇 좀 치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나타나서 말없이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라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러브 앤 피스는 그야말로 손님들께 사랑과 평화를 드리기 위해 특별히 만든 라면입니다.”
사랑과 평화.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더욱이 외팔이 모히칸 헤드 입에서 사랑과 평화라는 말을 듣는 건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 라면 면발은 아이의 웃음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 3분의 1 숟가락, 무지개를 보면서 얻는 활기 3분의 1 숟가락,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았을 때 느끼는 설렘 3분의 1 숟가락을 넣고, 웃음의 샘물을 부어 반죽했습니다.”
어쩜, 그럴 리가, 싶었지만 그 기막힌 맛을 생각하니 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아무튼 사랑과 평화니까. 외팔이 남자는 말을 이었다.
“국물은 또 어떤가 하면, 부모님이 아이를 안을 때 느끼는 애정과 말없이 안아주는 친구의 신뢰, 봄날 아침의 평화로움, 그리고 별빛이 흐드러진 가을밤의 감동을 스물 네 시간 이상 푹 고아서 육수를 우려낸 뒤 세상에 떠도는 기쁨과 희망, 친절과 배려 등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것들을 재료로 해서 만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맛이 괜찮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팔이 남자는 조리용 모자를 벗고 자신의 모히칸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다음 말했다.
“그렇다면 손님. 손님의 살아갈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실종됐다는 전화를 받은 건, 밤새 편의점에서 일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어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부재를 알렸다. 새벽녘에 이상해서 일어나 보니까 자리에 안 계시더라. 어쩜 좋냐? 독한 마음이라도 먹었으면 어쩌냐? 나는 아버지가 계실 만 한 곳을 찾아 사방으로 뛰었다. 컴컴한 새벽이었고 풍비박산 난 우리 집에서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잔 날이었다. 아버지는 약수터에도 안 계셨고, 공원에도 안 계셨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 분노, 실망 같은 것들을 동시에 느끼며 이리저리 찾으러 다녔고, 결국 아파트 옥상 위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옥상 난간 위에 앉아 계셨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생각 좀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요? 여기서 떨어지면 개구리처럼 납작해지겠지, 뭐 이런 생각. 정신 있으신 거예요?  아버지는 겨울잠에 빠진 황소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일 뿐, 끝내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나는 그날 그 옥상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향해, 사업 실패와 아집과 독단과 구부정한 어깨와 치켜 입은 바지와 주름진 얼굴에 소리치고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난간에서 내려와 내 손을 잡고는 한 마디를 하셨다.

사랑한다.

화석이나 불상이, 어느 날 박물관이나 절에서 “안녕, 좋은 아침이야.”라고 말해도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듣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 순간 수도관이 터지 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엉엉엉엉. 참으로 길고 긴 울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와 함께 옥상을 내려올 때, 어색하긴 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의 거칠한 손바닥이 내 손 안에서 서걱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성큼, 아침 태양이 나타났다.

보드랍고 따뜻한 햇살이 어둠을 뚫고 우리를, 아버지와 나를 비췄다.

그런 날들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침… 햇살. 아침 햇살이 살아갈 이유입니다.”
나는 외팔이 남자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침 햇살. 다음부터는 손님의 살아갈 이유도 첨가하겠습니다.”
외팔이 남자가 쾌활하게 말했다.
“아침 햇쏴아아아알!!!”
전잉권씨가 그 7옥타브 바이브레이션으로 아침 햇살을 외치며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빛이 번쩍인다고 했더니만 김군이라고 불리던 그 남자가 불을 껐다 켰다하고 있었다. 나름 유쾌하고 흥겨웠다. 사실 잠깐 박수를 치기도 했고, 살짝 머리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외팔이 남자에게 물었다.
“이렇게 솜씨가 좋은데 왜 라면만 만드십니까? 다른 메뉴도 만드시지 말입니다.”
“팔 하나로 만들기엔 라면만한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뭔가 좀 슬프기도 했지만 아무튼 또 박수, 머리 흔들기.
“그런데 여기는 어떤 곳입니까? 죄송하지만 여기 계신 분 모두 개성이 강하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곳은 손님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드리는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라고. 저는 주방장인 외팔이고 저쪽 제 정신 아닌 사람이 전잉권, 그리고 저기에 서 있는 조용한 녀석이 김군입니다. 손님과 같은 부대 출신이지요.”
“네? 같은 부대 말입니까?”
여전히 불은 깜박깜박, 7옥타브 작렬.
“김군은 3년 전 이맘때쯤 철조망 너머 부대 풀숲에서 자살한 녀석입니다. 러브 앤 피스 만드는 법을 전수해 주고 있는데, 나름 잘 따라오더군요. 녀석은 일단 팔이 두 개지 않습니까?”
순간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지난 몇 개월 간 치우고 치웠던 눈덩이들이 모두 머릿속으로 밀려온 것만 같았다.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그렇다면, 저, 저 분이 귀신이란 말씀이십니까? 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김군은 귀신이지! 잘 봐. 다리가 없잖아아아아!!!”
전잉권씨의 7옥타브가 에베레스트의 얼음이 갈라지듯 내 귓속을 파고들었고, 그러고 보니, 정말

김군은
다리가 없었다.

이런, 정말 귀신이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기절했다.



4.  두근두근 인생은 굴러 간다  

나는 다음날 아침 풀숲에서 발견됐다. 공을 찾으러 갔을 때 모습 그대로 오렌지 활동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옆구리엔 축구공을 꼭 낀 채 기절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 건, 취침 점호 때였단다. 다른 공으로 곧 시합을 재개했기에 내가 공을 주워 오건 말건 별반 관심이 없었고, 축구를 끝내고는 정신없이 내무반으로 돌아가기 바빴단다. 그리고 취침 점호 때,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탈영이다 뭐다 해서 부대원들이 죄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참에 누군가 내가 공을 찾으러 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고, 드디어 다음날 아침,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풀숲에서 미끄러져서 정신을 잃었나 봅니다.

라고 말했고, 중대장은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하며 냉동만두 하나를 사 줬다. 그 후로 몇 가지가 변했다. 고참들은 조금 친절해 졌으며, 내 밑으로 후임들이 들어왔다. 끝없이 내릴 것만 같던 눈도 어느새 그쳐 봄이 왔으며, 나는 작대기 숫자가 점점 늘어갔고, 취사병이 바뀌는 바람에 밥맛이 더 좋아졌으며, 철조망 근처의 그 풀숲을 깨끗이 정리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날 밤 일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서 가끔 그 풀숲을 거닐었다. 철조망 어디에도 개구멍 같은 건 없었다. 철조망 건너편은 그냥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 후 제대를 했고, 예쁘진 않지만 착하긴 한 애인을 만났으며 변변찮긴 하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을 얻어 근근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행복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가족들은 코딱지만큼 작은 집에서 다시 모여 살았다. 좋았다. 그렇게 매해, 살아갈 이유가 하나씩 늘어갔다.

알고 보니, 귤이 대풍이고 이상하게도 이번 겨울은 미니스커트가 유행이라는 말은 매해 겨울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콘돔은 사시사철 잘 팔리는 것이고.

안성탕면을 사서 몇 번이나 끓여 먹었지만, 절대 그날 밤의 맛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그날 밤의 비밀 하나는, 다음날 아침 정신이 들었을 때 솔직히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많았고, 그래서 그냥 꿈이었다고, 정말로 기절했는데 얼어 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무심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만져졌다. 그것은 명함이었다.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 삶에 지친 분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드립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거기에는 전화번호도 찍혀 있었다. 전화를 해볼까, 몇 번 망설였던 적이 있었는데 결국 한 번도 전화는 하지 않았다. 삶에 지쳤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고, 누구나 삶에 지치기 마련이니까, 단지 아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딱 한 번, 다시 그 휘황찬란한 간판을 가진 가게에서 외팔이 남자가 만들어 주는 환상의 라면을 먹고, 전잉권씨의 7옥타브 바이브레이션을 듣고 싶다. 다리 없는 김군이야 뭐 어떤가. 성실하게 일 한다는데.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지금껏 그 명함을 들여다보기만 한다. 다음에 그 가게를 찾을 때는 살아갈 이유를 서른 개 쯤은 준비해서 내 이름으로 된 라면을 만들게 하리라는 꿈을 가진 채. 그때는 내가 직접 너구리를 들고 갈 것이다.

참!
너구리는 라면이 아닌가?

그거야 뭐, 상관 있겠는가아아아앗!!!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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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나무 09.04.27 22:23 댓글 수정 삭제
    정말로, 진심으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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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n 09.04.29 15:03 댓글 수정 삭제
    박민규씨 좋아하시나? ㅎㅎㅎ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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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09.04.29 22:0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잘 읽었습니다. 표현력이 좋으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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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상가 09.04.30 09:29 댓글 수정 삭제
    검은나무님/감사합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den님/네. 좋아합니다. 이 글은 박민규에게 빠져 있을 때, '나도 박민규처럼 써 보자' 하고 작성하고 쓴 글입니다. 하지만 그림자도 못 따라가겠더군요...^^;;

    레이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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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인 09.05.11 22:59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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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괭이 09.06.16 15:39 댓글 수정 삭제
    참 따뜻한 글이네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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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rlei 09.10.05 17:51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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