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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Sonnet)

  에크스 앙 프로방스의 중심부에 서있는 회색첨탑은 올라간 지 얼마 안 되는 신축 건물이었다. 뤼미에르 드 프로방스 백작과의 인연이 깊은 탑이었다. 처음 그 회색첨탑이 올라갔을 때 에크스 앙 프로방스의 시민들은 가게 문을 닫고 축제를 벌였다. 그저 지방으로 파리귀족들의 괄시를 받던 프로방스 지방의 상징물이 생긴 것이다. 회색첨탑은 프로방스 지방의 인지도가 그만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눈부신 성과는 뤼미에르 백작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평민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 그리고 그 회색첨탑의 꼭대기에, 뤼미에르 백작이 죽어있었다. 카트리나는 그 비참한 현장을 기억하고 있다. 생기 없어 보이는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마치 해골위에 뤼미에르 백작의 거죽만을 덮어놓은 것 같아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성당에 그를 안장 한지 일주일도 안돼서 그녀는 그의 죽음에 대해 파헤쳐야 했다. 프로방스 대주교 카트리나 카일리는 프로방스 백작가의 성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그녀는 고급스러운 장미문양이 새겨진 문을 열고 새 프로방스 백작 이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베는 그녀에게 목례로 답했다.
  “오랜만이에요. 카트리나 언니.”
  “잊지 않아주시다니 영광일 뿐입니다. 백작님.”
  이베 백작은 카트리나와 같이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 테이블에는 하녀들이 빵과 푸티푸르 따위의 간식을 꺼내놓았다. 이베는 카트리나와 같이 앉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은 작은 곳까지 라벤더꽃이 조각되어 있었다. 카트리나는 이베가 권하는 빵을 거절하다가 끝내 정중히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 빵을 조금 뜯었다.
  “안팎으로 안정이 되면 조만간 다시 수녀원에도 나갈 생각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프로방스 백작님의 도움이 되었다면 성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이베와 카트리나는 한창 수다를 떨다가 이베가 먼저 뒤에 서있는 집사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집사는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는 뒷걸음질로 테라스를 나갔다. 카트리나는 빵을 씹어 넘기면서 침을 삼켰다.
  “조사하실 게 있는 거죠? 그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능력으로.”
  카트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봐온 이베는 달라진 것 없이 컸다. 어렸을 때도 또래의 수녀와 의견이 맞지 않아서 한바탕 싸워서 뤼미에르 백작이 거듭 사과하며 빵을 비롯해서 먹을 것을 기부한 적이 있었다. 카트리나는 그렇게 말썽을 피웠지만 당당한 소백작이 귀여웠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소녀는 자라서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서 그녀의 마음마저 알아채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귀여워서 몰랐는데, 많이 자라셨군요.”
  “다 알고 있어요, 레미제라블의 쉬앙씨가 그렇게 떽떽댄다고 하던데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최소한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 백작님의 입지가 더 굳어질 것이고, 그 분들의 누명도 벗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베는 빵을 잡아 뜯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카트리나는 이베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카트리나의 얼굴을 본 이베는 샐쭉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집사를 불러 저택의 열쇠꾸러미를 넘겨주라고 일렀다.

  에크스 성 후원의 지하묘지로 들어가는 관을 보면서 모두들 눈물지었다. 수녀 둘과 같이 간 카트리나는 뤼미에르 백작의 장례식의 선두에서 기도문을 읊었다. 로사리오를 꼭 쥐고서 지하로 들어가는 관을 향해 백작의 안녕을 빌었다.  무성한 소문 속에 사라져간 두 사람의 안식을 간절히 기원했다.
  “아멘.”
  수녀 둘의 아멘을 외우는 것으로 장례식은 끝났다.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 싶으면 장례식에 찾아오는 사람을 보라는 말이 들어맞는 듯이, 프로방스에서는 천연 염료로 염색한 드레스를 입고 온 귀부인부터, 깔끔한 검은 예복을 찾아입은 노신사,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마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장례식을 계속 지켜봐주었다.
  ‘신실한 어린 양이 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굽어 살피어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물러나지 않아서 그녀는 로사리오를 쥔 채로 다시 한 번 그를 축복해 주었다. 성경 구절 하나 틀리지 않은 기도에 수녀들은 흡족해 했지만, 카트리나는 묘하게 씁쓸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을 돌봐주고 친했던 지인의 죽음이 슬퍼서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말없이 손수건만 적시고 있는 이베에게 다가갔다. 프릴 하나 달리지 않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안아주고 계속 토닥여주었다. 손수건 대신 카트리나의 검은 예복이 젖었다.
  장례식만은 경건했지만 백작가는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새 백작이 될 이베의 나이부터, 브데뜨 백작부인과 뤼미에르 백작의 죽음까지 에크스 앙 프로방스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 없는 말은 달리고 달려 항구도시 마르세유까지 퍼졌다. 카트리나는 이런 일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누군가의 험담으로 누군가가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할지 알고나 하는 걸까. 그 헛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도 신뢰가 가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브데뜨 백작부인이 자주 목격되고 난 뒤부터 백작이 아팠다지?”
  “왜 심지어 백작은 해골바가지가 다름없다던데……"
  “백작이 사실 정부를 여럿 두고 있었데요."
  부모의 장례를 치루고 난 이베의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올 정도였으니, 조심한다고 한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베는 침착하게 소문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일은 삼부회에서 터졌다. 시민연합 레 미제라블의 대표인 쉬앙의 발언은 카트리나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마르세유 시장을 못 열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게 말이 됩니까? 돌아가신 백작님덕에 이 시장을 열 수 있었는데, 이젠 그 돌아가신 백작님 때문에 망하게 생겼습니다. 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이 피해를 봐야한다니요.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말꼬리를 흐리는 쉬앙을 보며 카트리나는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쉬앙도 자신이 말이 격해지는 것을 알았는지 연신 헛기침만 했다. 쉬앙은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이베를 천천히 자신이 들은 소식을 얘기했다.
  “마르세유 여관에 있는 친구가 그러던데, 도저히 무서워서 제노바나 외국의 상인들이 여기에 못 있겠다고 한다고 합니다. 죽은 시체가 걸어 다니는 지방에 누가 더 오래 있고 싶냐면서 말입니다. 심지어 떠나기를 원하는 상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마르세유의 시민들도 불만을 가지는 것 같다고 하던데…… 아마 마르세유에서 뭔가 보내오지 않을까, 합니다.”
  쉬앙은 아까랑 다르게 최대한 억양을 깍듯하게 했다. 최대한 이베와 카트리나는 존중하는 말투였다. 시민대표지만 제삼계급이고, 귀족이나 성직자의 말에는 거의 복종해야 하는 개나 다름없었다.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카트리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시선을 정면에 앉은 쉬앙쪽으로 옮겼다.
  “그 일에 시민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열과 성을 쏟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라벤더도 엄선한 최상품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구요. 하지만 뤼미에르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죽음에 석연찮은 일이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아가신 분을 추궁할 수 없습니다. 정기시가 열리지 않는 것도 따 주님이 뜻이겠지요.”
  쉬앙은 주먹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이베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원목원탁위에 잔을 내려놓으려는 쉬앙이 원탁을 내리쳤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댁들의 말을 듣고 있어봤자 도움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젠장, 귀족 나부랭이들이 우리 일을 알 리가 없지!”
  쉬앙이 나가고 집사가 따라 나가려고 하자 이베가 집사를 제지했다. 올해로 열다섯 살인 아이에게 방금 일은 꽤 충격이었을 거라고 생각한 카트리나가 일어서서 이베에게 다가갔다.
이베는 웃으면서 카트리나를 쳐다봤다. 카트리나는 이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가 아가씨가 되어가는 과정은 항상 파란만장하다고 카트리나는 생각했다.

  마르세유 정기시, 뤼미에르 백작의 죽음, 브데뜨 백작부인에 대한 소문, 삼부회의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픈 카트리나는 수녀원장실 책상 위에 엎어져있었다. 책상 위에는 갖가지 서류부터, 성배에 대한 전설과 소문에 대해 적어놓은 양피지들이 가득했다. 책장에는 꽤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체리목으로 된 방문에는 수녀원에서의 예절이 적혀있었다. 수녀원장 카트리나가 잠들만 했을 때 어린 수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카트리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어린 수녀를 꾸중하려고 했을 때 수녀 뒤로 한 남자가 보였다.
  검은색 튜닉을 말끔히 차려입고, 가슴팍에 하얀 십자가가 수놓여져 있었다. 카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카트리나는 책상위에 있는 하얀 접시위에 프티 푸르를 하나 집어서 수녀에게 쥐어주며 내보냈다. 카트리나는 체리목 나무를 가볍게 닫고 문을 잠궜다. 그리고 의자를 하나 꺼내 남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비뇽의 신부 데팡스가 프로방스의 카트리나 주교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로 이 곳까지 방문하셨습니까?”
  “성하께서 친서를 전하라고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사제가 꺼낸 봉투는 교황의 인장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카트리나는 숨을 고르고 사제를 쳐다봤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프티 푸르를 권했다. 하지만 사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저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밖에 같이 온 종교재판 조사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모레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진 그 능력으로 해결해 주실거라고 믿습니다. 카트리나 주교님.”
  “안녕히 가십시오. 데팡스 신부님.”
  데팡스 신부를 보내고 카트리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널브러져있던 서류들을 정리해서 다시 책꽂이에 꽂고, 서류뭉치는 다시 책상서랍에 넣었다. 카트리나는 조심스럽게 붉은 봉인을 풀었다. 양피지에는 교황의 글씨로 서신이 적혀있었다. 카트리나는 교황의 서신을 천천히 읽었다.

  뤼미에르 드 프로방스 백작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바이오. 그는 신실한 신도였고, 그 마음으로 우리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소. 나는 백작의 죽음에 대해 마음 깊이 슬퍼하고 있다오.
  듣자하니 뤼미에르 백작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몇 가지 있다고 들었소. 그리고 그 의혹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하니 이렇게 카트리나 주교에게 부탁하는 바이오. 그런 의심들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고 한다고 들었소. 비록 내가 늙어서 직접 갈 수 없음이 안타깝소. 게다가 우리 아비뇽 교황청에 반대하는 세력이 좀 있지 않소. 그들 때문에 나는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프로방스의 성녀가 되어주시오.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 프랑스 남부지방 성배의 탐색을 명하였고, 그 성배탐색에 대한 성과보고에 대해 나는 깊이 감동받은 바이오. 그리고 이젠 그 능력으로 이 의혹을 밝혀주길 바라오. 주께서 내리신 그 능력은 어린 양들을 굽어 살피시는 마음에서 나온 능력이라고 생각하오.
  그 의혹을 우리 교황청에서 해결하였을 때 신실한 신도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우리에게 반기를 들던 이교도들도 자신들이 어째서 주의 은총을 거부하는지 심히 뉘우칠 것이라고 믿소.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린 사명이라고 생각하오.
  그럼 이만 줄이겠소. 나는 공의 신실한 마음을 믿고 있소. 그리고 공의 아버님께서는 아직 건강히 잘 계시오.

  “주여, 은혜를 베풀어 저희들을 굽어 살피어 주시옵소서. 아멘”

  열쇠꾸러미를 받은 카트리나는 먼저 유품부터 영사를 해 볼 생각이었다.  곧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카트리나는 로비 청소를 하고 있는 시녀에게 뤼미에르 백작의 방을 물었다.
  “그 방은 이미 비워졌는데요.”
  “혹시 그렇다면 브데뜨 백작부인님과 뤼미에르 백작님의 유품이 안치된 방은 있습니까? 그리고 혹시 유품 중에는 백작과 백작부인께서 돌아가실 때 덮었거나 그런 담요가 남아있나요?”
  “그 방이라면 이 계단을 올라가셔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 방이에요. 아마 방문에는 이베님께서 직접 쓰신 묘비명이 둘 다 적혀있을 거에요. 이베님께서 아무 것도 버리지 말고, 세탁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고이 모셔져 있는데.
  “고마워요. 주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시녀는 하얀 대리석 계단위에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계단을 가리키며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카트리나는 허리 숙여 인사하는 시녀를 뒤로 한 채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문에는 뤼미에르 백작과 브데뜨 백작부인의 묘비명이 적혀 있었다.
  ‘당신을 볼 때는, 언제나 밤이 밝은 낮으로 바뀝니다.’1)
  카트리나는 숨을 깊게 들이 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일 정리를 하는지 먼지가 날리지 않았고, 유품도 깨끗했다. 카트리나는 유품을 하나하나 만져가며 많은 정보를 봤을 물건을 찾았다. 카트리나는 테이블 한쪽에 올려진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아서 더러워보였다. 아이보리색 손수건을 펼치자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고, 귀퉁이에 브데뜨 드 프로방스, 라는 이름이 하얀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내조를 잘 하는 여자라고, 귀엽게 생겼다고 나를 칭찬해 주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그 귀부인들은 남편 옆에 서있는 작고 아픈 나를 보면서 비웃는 게 틀림없다.
  저 여시 같은 게 무슨 방법으로 멋지고 젊은 프로방스 백작의 눈에 들었을까. 정말로 저 여자가 정실이고, 뤼미에르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뤼미에르 백작에게는 첩이 여럿이 있겠지, 그리고 저 년은 항상 혼자 방에서 수나 놓고 있을거야.
  나를 경멸하는 눈빛들이 역력하다. 애써 가리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려지진 않았다. 나는 남편을 정말로 사랑하는데 그 분도 날 정말 사랑해주시는데, 그것만으로 난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저 사람들이 하는 말 따위 중요하지 않아, 라고 되뇌었지만 그 자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후원으로 나와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 악수를 청하고 담소를 나누는 동안 어둠속에서 눈물을 찍어내야 했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자,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해. 그 사람과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나를 찾는다. 눈이 붓지 말아야 할텐데. 아마 내가 울었다는 걸 안다면 그는 당장 화를 내면서 나를 끌고 밤새 마부를 시켜 에크스성으로 돌아갈 게 틀림없으니까…….

  카트리나는 자신의 눈가에 주륵 흘러내린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안경을 고쳐쓰고 다른 유품을 찾아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방안은 햇빛을 받아 밝았다. 카트리나는 테이블에 한 손을 올려놓고 더듬어 가며 걸어가다가 뤼미에르의 깃펜을 집을 수 있었다. 깃펜의 끝은 처음부터 검은색이었던 것처럼 까맸고, 하얀 깃 군데군데에도 검은 잉크가 번져있었다.
  ‘깃펜 하나까지 모아두다니, 이베도 착한 아이구나.’
  카트리나는 깃펜을 잡고 영사를 시도했다. 그러자 뤼미에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깃펜을 들고 수많은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브데뜨는 뭘 하고 있을까?’
  깃펜을 잡고 서명을 하고,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던 뤼미에르는 깃펜을 잉크통에 넣고 양피지를 둘둘 말아서 끈으로 묶어버렸다. 아내의 내조를 잘 받고, 멋지며 사교계의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뤼미에르 백작은 갈색머리를 쓸어 올린다. 하지만 곱슬머리는 금세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뤼미에르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옆에 쌓인 양피지 더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묶었던 양피지를 풀어서 찬찬히 살펴봤다. 양피지에 적힌 민원과 다른 도시에서 온 공문을 다 처리한 후에야 그는 깃펜을 잉크통에 쳐박고 방을 나섰다. 그의 걸음은 빨랐다.

  그 밝은 햇빛이 붉어질 때까지 카트리나는 유품을 뒤지며 보냈다. 검은 테이블보 위에 올려진 물건은 각자 봤던 짧은 영상을 보여줬다. 하지만 수사에 관련된 것은 손수건과 깃펜 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카트리나는 한숨을 쉬며 검은 카펫 바닥을 밝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뤼미에르와 브데뜨의 담요를 들었다. 깃펜 이후로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마 담요가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라벤더가 수 놓여진 담요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담요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주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저와 남편이 평생을 같이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이 제가 여태껏 빌어 왔던 제 간절한 소원이옵니다. 저희를 굽어살피어, 저와 남편 그리고 제 딸 이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브데뜨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신께 기도를 올렸다. 기침을 하면서 까지 속으로는 아멘을 수십 번도 더 넘게 외웠다.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는 싫었다. 브데뜨는 울지 않았지만 계속 울부짖었다. 카트리나는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그 때 브데뜨의 간절한 소원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가늘은 미성은 여자의 목소리 같았지만 톤이 낮았다.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러 왔느니라.”
  브데뜨는 멍하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감미로운 목소리는 브데뜨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유혹에 브데뜨는 한 번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제가, 뤼미에르님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버려도 상관없어요.”
  “너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신 대신에 내가 왔으니, 너는 내가 누구인지 의심하지 않겠느냐?”
  브데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속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브데뜨를 보았는지 그녀에게 다가왔다. 브데뜨의 볼에 따뜻하고 기분 좋은 긴 손가락이 다가왔다. 그리고 브데뜨는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뤼미에르의 품 속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뤼미에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잠들었다.

  카트리나는 흘린 눈물을 닦고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카트리나는 입가를 매만지고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침대에 잠시 앉았다가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서 왔다갔다하는 집사에게 인사하고, 열쇠꾸러미를 건네주고 성을 나왔다. 수녀원에 도착한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담요를 덮고 누워 그녀가 체험할 수 있게 물건들이 보여준 것들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그녀는 대못안경을 벗어 탁상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뤼미에르 드 프로방스 백작은 발루아 사교계의 꽃이었다. 파리에서든 샤를마뉴에서든 그가 나타났다고 귀부인들은 그의 주변에 벌처럼 몰려들었다. 퍼도퍼도 떨어지지 않는 꿀을 가진 뤼미에르 백작은 귀부인들과 항상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아내, 브데뜨 백작부인과 함께 나타났다. 귀부인과 대화는 담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을 충분히 보였으리라.
  브데뜨는 눈치 없이 뤼미에르 옆에 항상 붙어있지 않았다. 최신유행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에 비해 자신은 볼품없었다. 어딜 보나 그녀들에 비해 자신은 초라했다. 그녀들의 벨벳드레스는 부드러운 몸의 곡선을 한껏 살려주었지만, 자신의 린넨 드레스는 맵시가 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몸까지 약하지 않은가.’
  어둠에 물들어 차가운 달빛을 받고 있는 나무를 보고 있는 브데뜨의 뒤로 뤼미에르가 다가와 포도주 한 잔을 건넸다.
  “오기 싫다고 했잖아요.”
  “무슨 소리야, 당신이 안 오면 나도 안 왔어.”
  “제발 애처럼 그러지 좀 말아요.”
  뤼미에르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브데뜨는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기고 뤼미에르를 똑바로 쳐다봤다. 앞으로 파티 따위 오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지 마. 왜 당신도 알잖아.”
  뤼미에르는 브데뜨를 가볍게 안아줬다. 그리고 꼬따르띠의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파티장으로 나가 귀부인들과 인사했다. 그리고 브데뜨를 데리고 파티장을 나왔다. 둘이 마차에 도착할 즈음에 마부는 사과를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한 입 베어 물었다. 백작부부가 도착한 것을 본 마부는 사과를 마부석에 잘 올려놓고 내려와 문을 열었다.
  “그럼 곧장 에크스 성으로 갑시다.”
  “벌써 가시게요?”
  “파티는 역시 성격에 잘 안 맞는군요.”

  인간을 발전하게 한 것은 욕심이라지만, 그것은 인간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박동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코 뇌에게 어느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뛰며, 스스로를 키워나간다. 결국 커진 욕심은 스스로를 잡아먹기 시작한다.
  “주님, 제 평생에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사오니. 그것은 제 가족들과 같이 편안히 영생을 누리는 것이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목숨은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세상보다 귀하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제 목숨을 늦게 거둬가 주시옵소서. 그것이 제 일생의 유일한 소원이옵니다. 아멘.”
  브데뜨는 매일 밤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백일이 지나도, 이백일이 지나도 주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다. 브데뜨는 천사라도 기다린 자신이 한심해져 한숨만 쉬며 매일 밤을 보낼 따름이었다.
  그녀는 나날이 쇠약해졌고, 뤼미에르는 브데뜨를 위해 백방으로 의사들을 수소문해봤다. 그 외에도 말린 라벤더 꽃잎을 태우며 나오는 향이 몸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라벤더향을 만들어 방에 피우게 했다. 하지만 브데뜨는 일어나서 빵을 한입 크기 정도 떼어내서 물에 불려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브데뜨는 카트리나에게 부탁해서 받은 은색 로사리오를 쥐고 간절하게 빌며 아멘을 외쳤다. 하지만 그 날까지 천사의 깃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귀에 들린 소리는 달콤한 커피같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빠져 마치 뤼미에르의 품속 같다고 브데뜨는 생각했다. 그리고 몽롱한 채로 예,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들었다.
  '그런데 왠지 어디선가 뤼미에르가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뤼미에르는 이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신의 자리로 와 식사를 했다. 브데뜨가 죽고 나서 뤼미에르도 이베도 식사량이 줄었다고 시녀들은 걱정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브데뜨가 충고하면서 튄 침 한 방울만도 못했다. 뤼미에르가 정치에도 관심을 잃어가고 서서히 이베가 아버지의 일을 떠맡게 된 이후에 향간에 수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죽은 브데뜨 백작부인이 밤에 에크스 성을 방황한다.’
  뤼미에르는 시신을 욕되게 하는 말이라면서 소문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문은 단지 말만이 아니라, 실재로 봤다는 사람들마저 많아지면서 서서히 물증을 만들어나갔다. 결국 그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뤼미에르는 직접 밤거리로 나갔다. 그는 머뭇거리다가도 브데뜨가목격 되었다는 언덕 위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포니테일로 묶은 브데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검은 밤이 하얀 낮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브데뜨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브데뜨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놨을 때, 통과되거나 하지 않았다. 브데뜨는 웃으면서 뤼미에르의 품에 뛰어들었다. 뤼미에르는 브데뜨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묻을 때 입힌 검은 벨벳 드레스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내가 이 여자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수많은 돌을 견뎌냈던가.’
  뤼미에르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브데뜨는 뤼미에르의 품속에 안겨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히 브데뜨의 감촉이었다. 품안에 들어오는 아담한 몸과 따스한 숨결이었다.
  브데뜨와 뤼미에르의 결혼소식이 공표되던 날, 전 프로방스 백작이었던 에스프와르는 뤼미에르와 의절했다. 브데뜨는 부유한 상인 집안출신이었고, 뤼미에르는 소백작이었다. 에크스성에 물건을 납품하던 상인의 딸인 브데뜨는 어린 시절부터 뤼미에르와 곧 잘 놀았다. 그리고 뤼미에르가 나이를 먹고 브데뜨도 나이를 먹어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녀에게 그가 대뜸 고백을 해버린 것이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평민들마저 브데뜨를 욕했다.
  “그게 무슨 약으로 백작님을 홀린 걸까?”
  “동방의 묘한 약이라고 하던데…….”
  그런 상황에서 브데뜨와 결혼식을 올린 뤼미에르를 보고 사람들을 박수를 치고 뒤돌아 비웃었다.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사랑은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아버지가 버리고 간 백작의 관을 주워 쓴 뤼미에르는 죽을힘을 다해서 프로방스를 발전시킨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도 않고, 평민 여자랑 결혼한 놈이 프로방스까지 말아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 것 밖에 없었다. 뤼미에르의 생각을 안 현모양처(賢母良妻) 브데뜨는 그런 남편을 위해 자신도 내조했다. 그 결과 마르세유 정기시라는 큰 시장을 열 수 있었고, 프로방스의 회색 탑도 올라갈 수 있었다.
  “더 즐기다 갔으면 좋았을 걸. 괜찮아. 이렇게 돌아와 줬으니까. 이제 파티도 즐기고, 예쁜 옷도 입어도 되니까!”
  죽어버린 아내를 위해 그 이후 그는 밤마다 아내를 위한 옷과 파티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애써 사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뤼미에르는 나른해지는 느낌에 숨을 쉬익쉬익 내쉬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위에 누워있는 자신 위에 올라타 있는 브데뜨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 여보……”
  “미, 미안해요.”
  브데뜨가 고개를 들었고, 뤼미에르는 자신의 왼쪽 목덜미를 만져봤다. 비릿한 냄새와 같이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도망가려는 브데뜨의 손목을 그가 잡았다.

  “무로니인가?”
  카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일이면 아마 교황청에서 파견된 데팡스 신부가 종교재판 조사원 한명과 같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일에 대해 상세히 털어놔야 할 것이다. 카트리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웠다. 카트리나는 눈을 비비면서 긴 머리를 머리로 대충 다듬었다. 수녀가 우물쭈물 하며 방밖을 가리켰고, 카트리나는 가볍게 도리질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흠흠, 안녕하십니까. 카트리나 주교님.”
  “안녕하신가요. 데팡스 신부님. 옆에 분은?”
  “아, 소개하죠. 저랑 같이 파견된 종교재판 조사원 에테르넬이라고 합니다.”
  “에테르넬입니다.”
  데팡스의 목소리가 조금 온화하면서 정치적이라고 하면, 에테르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묵직했다. 데팡스는 말을 하는 자고, 에테르넬은 검을 쓰는 자인 듯싶었다.
  “신의 철퇴에 의해 정화될 자는 누구인가요? 아니, 어디에 묻혀있나요?”
  “무로니인 것 같습니다.”
  “그 피를 빤다는 상상의 유령말씀이십니까? 참 재밌는 농담이시군요.”
  에테르넬이 말을 받자, 데팡스의 에테르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에테르넬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뤼미에르와 브데뜨 백작 부인의 사체를 소각해야 된다고 말씀하는 거군요?”
  카트리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팡스와 에테르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행동했다. 교황성하의 친서를 들고 에크스 성으로 향했다.

  “민심을 어지럽히는 이단의 생물을 처단하러 왔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신부님! 저희에겐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저흰 주님의 이름으로 이단의 생물을 처단할 뿐입니다!”
  에테르넬과 데팡스는 일부러 크게 떠들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목소리에 하나 둘 모여들었고, 이베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단의 생물이라니. 그런게 어째서 에크스 성안에 존재한다는 말일까, 이베는 집사를 시켜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열리고 종교재판 조사원 둘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프로방스 백작가의 묘지로 향했다. 그리고 뤼미에르와 브데뜨가 묻힌 지하묘지의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베는 고개를 끄덕였고, 집사는 시녀를 시켜 열쇠를 가져오게 했다. 종교재판 조사원이 들어가서 관을 열고 시체를 확인했다. 어디 하나 썩은 곳 없이 멀쩡했다. 둘은 마주보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카트리나는 광장 한 가운데에 나무를 모으고 기름을 부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들었다. 그리고 울먹이는 이베와 집사를 필두로 종교재판 조사원 둘은 시종들을 시켜 수레에 시체 두 구를 실어 왔다.
  “봐바, 저게 바로 저주 받은 거야.”
  “그러니까 평민 따위를 백작부인으로 들이니까, 집안이 망하지. 쯧쯧.”
  종교재판 조사원 둘은 두 시체를 시종들을 시켜 장작더미 사이에 우뚝 솟은 나무기둥에 둘을 밧줄로 꽁꽁 묵었다. 카트리나는 십자가를 쥔 채 무릎 꿇고 앉아 둘의 안식을 빌었다. 기도문이 아니라 성경 구절을 짜깁기 해서 읊어줬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3)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4) 아멘.”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잠겨 눈물은 금세 말랐고, 웃음소리도 타올라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당당히 선포하였다.
  “신의 철퇴로 이 모든 악을 정화 하였노니, 주께서 어린 양들을 굽어 살피시는 것이옵니다. 다시는 이런 이단의 무리가 이 곳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겠으니, 여러분의 평화는 주께서 내리신 것이옵니다.”
  화려한 쇼의 막은 그렇게 허무하게 내려졌다.
  
  마르세유 정기시는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특산품인 라벤더는 불티나게 팔렸고, 그 외에 프로방스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참을 머무르다 가는 귀부인들도 있었다. 이베는 안팎으로 강해지기 위해 책을 읽었다.
  카트리나는 뤼미에르의 빈 석실앞에 섰다. 그리고 말린 라벤더를 내려놓고 성호를 그었다.
  “어찌하여 야훼께서 이 땅에 이런 일을 하셨을까. 이토록 혹심한 분노를 터트리셨을까.5) 이 어린 양들이 맘대로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지 못하시었을까. 이들에게 더 이상 물이 아니라 불로 멸망을 이르셨으니, 이들에게 더 이상의 해를 가하지 마시옵소서.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영원을 갈망할 죄밖에 없사옵니다. 신의 율법아래 이들에게 면죄부를 쥐어 주시옵소서. 그것이 저의 바램이옵니다. 아멘.”
  카트리나가 로사리오를 벗어 석실 문 앞에 내려놓고 말린 라벤더 잎으로 묻어놨다. 마르세유 정기시에서는 레미제라블의 평민들이 외국 상인들에게 손짓 발짓 다해 가면서 바가지로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각주
1)당신을 만날 때까지, -셰익스피어
2)마가복음 (8장 36절)
3)요한묵시록(5장 12절)
4)야고보(4장 14절)
5)신명기 (29장 23절)

소네트(Sonnet) : 중세 프로방스 지방에서 유행하던 14행의 정형시로, 주로 연가가 많았다.






-후기
에, 뭐랄까 지인(知人)이 한 번 해봐, 라고 알려주길래, 정말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에 글을 쓰고, 다듬어서 한 번 올려봅니다. 미숙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썼습니다. 어떻게 보이실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재밌게 봐주셨길 기도합니다.


yoyo0023@hanmai.net 메일주소입니다.
댓글 2
  • No Profile
    배명훈 06.03.27 09:34 댓글 수정 삭제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이야기가 중심에 놓여 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한꺼풀씩 벗겨나가면서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구성과 서술방식이 주는 묘미가 있었어요.
    음, 다만, 이야기가 예상대로 진행되어버려서 중간 이후가 밋밋하게 흘러간 점이 아쉬웠어요. 이베나 카트리나 같은 인물들에다 이후 이야기를 풀어갈 잠재성을 굉장히 많이 부여해 두셨는데 이용하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도 좋을 사소한 부분인데요, 여성 주교를 설정한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숙소를 수녀원으로 한다는 것이나, 사제가 아닌 수녀가 의식을 행한다는 설정은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지. 차라리 여성 신부가 의식을 행한다고 하는 게... 신부는 제사장이거든요.
  • No Profile
    06.03.30 00:40 댓글 수정 삭제
    그냥 어설프고, 역량이 부족한 따름이었죠. 게다가 생각해보니, 자료조사를 한다고 책이며,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며, 이것저것 찾아 썼는데 아직도 한없이 배경지식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호평과 비평 둘 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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