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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세 번째 세계

2003.10.10 18:0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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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몇 몇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

닌가. 끝이 없는 세상에서, 이별이 없는 세계에서 '안녕'이란 말은 서글픈 제스처 일뿐이

다. 저기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이며 또한 사기꾼이기도 한 멀린이 막 마법의 원을 다 그리

고는 나에게 다가온다.

"자, 이제 가야할 시간이군."

"그래"

나는 대답했다.

"지금 자네가 하려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겠지?"

"물론"

멀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자네는 몰라, 모르고 있어. 지금같은 대화가 몇 번이나 오갔는지 아나? 이것이 새

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조금 주저했지만, 어쩔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망각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해도, 언젠가는 깨닫는 날이 오겠지."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깨닫는 것"

멀린은 입을 다물고 만다. 저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비난인가, 동정인가?

세계를 지우며 다가오던 회오리바람이 우리를 에워쌌다. 멀린이 손을 들어 시퍼런 섬전을

주위에 뿌리자 폭풍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멀린이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가 그려놓은 원에서 뿜어져 나오던 백색의 빛이 점점 강해

졌다.  

"     !"

"뭐라구?"

원을 향해 걸어 들어가던 나는, 멀린이 나에게 무어라 말했지만 비바람과 천둥의 소리로 묻

혀버렸기에, 되물어야만 했다.

"자네는 점점 그를 닮아가는군"

"어떤 면에서?"

무지하다는 면에서,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잔인하다는 점에서

하지만 나는 이미 원안으로 완전히 들어간 뒤였기에,

그 말도,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며 그가 내뱉은 외침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 세계의 멸망..



1. 호모 게슈탈트



케이스


나는 케이스의 머릿속에서 깨어났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는 시간이란 개념은 무의미하기에

내가 느끼는 피로감-오랜 잠을 자고 난 뒤에 오는 낯설음과 막막함 같은-을 어디까지 신뢰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당혹해하고 있었다. 어떤 은유든지 새로운 것은 당

혹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다중 인격으로서의 존재라니? 내가 누군가의 인격의 하나일 뿐이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막막함, 무기력함에 대해서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케이스는 바의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 있었다. 빨간 머리의 주인이 그에게 다가왔

다. 비대하고 기름진 배를 테이블에 밀착시키고 힘겹게 몸을 구부려 케이스를 흔들어 깨웠

다.

"이봐, 이제 문 닫을 시간이야"

나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고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들

이 내뱉고 간 담배연기와 악취를 뚫고 TV에서는 지직거리는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 ...이번 암살로 인해 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평소 유화적

인 태도를 표명해 오던 위원회는 단지 암살된 대변인의 새로운 후보를 지명했을 뿐,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암살, 전시상황...어디를 가도 기본 베이스는 동일하군.

나는 그의 세계를 점점 이해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뚜쟁이들은 언제든 바꿔칠 수 있으니까. 과연 떼거리들은 자신들 중 하나

가 죽었다는 것에 대해 혼란과 공포를 느낄까? 그 벽돌같은 평안을 흐트러트릴까?"

빨간 머리의 주인은 뉴스를 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뚜쟁이? 떼거리? 이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되었기에 일단 나는 그 말들을

여러 번 되뇌었다.

한 사나이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뉴스에서는 그가 48시간 이내에 나타나길 바란다고,

이번 선정도 역시 공정한 절차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며 보도를 마쳤다.

뉴스란 것은 동어반복적인 것이다. 모두가 아는 것으로 모두가 아는 것을 전할 뿐..나는 거

기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가 없었다.

전시상황에서는 유행하기 마련인 애절하고 불안한 노래들이 TV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술집 주인은 고약한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교활함과 의심, 선의에

서 오는 고통, 적대감에서 오는 불안함이 뒤석인채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희고 푸석푸석

한 얼굴에 박혀 있었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또한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오지 않아"

누구?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막


하나의 도시, 그의 손, 손의 손톱이 할퀴고 간 자리에 사막이 들어서고, 도시는 둘로 나뉘

고, 두 배의 몰락, 황폐하고 조그마한 두 개의 마을..이러한 단어들이 이 마을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림자, 추적자의 사명을 기억해냈고 그 수

많은 세계에 뿌려진 그의 육체-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그 육체의 조각들

중 하나의 단서를 그 단어들에서 찾아냈다. 이 세 번째 세계는 그의 '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세계의 '얼굴'과 두 번째 세계의 '눈'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그것들의 영향

력을 생각했다. '손','손톱'에서 풍기는 강력함과 잔인함의 어감들..나는 황폐한 사막을 건너는

중이었다. 케이스가 그녀, 몰리를 만나기 위해. 모래 바람이 몇 번이고 그 거칠거칠한 손을

들어 나를 움켜쥐었고, 나는 이 세계의 황폐함, 불모함에 대해 예상할 수 있었다. 그가 세계

에 남기는 흔적들은 오로지 잔인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케이스는 후드가 달린, 발꿈치도 거의 덮다시피 하는 검정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마치 사

제복을 연상케 하는 그러한 옷이었다. 나는 얼굴에 들러붙는 모래를 막기 위해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쓰고 옷을 더욱 단단히 여미었다. 태양은 바로 나의 머리위에 있었고, 주위는 온통

반짝거리는 모래들 때문에 눈이 부셨다. 케이스 보다 훨씬 작은 그림자가 그 사이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대여섯 개의 그림자들이 솟아났다.



몰리


당연히 나는 술집을 나서기 전에 케이스의 몸을 꼼꼼히 조사했다. 빨간 머리의 주인이 술값

을 요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윈 팔과 다리, 둔한 몸의 움직임, 뇌피질 한 구석에 스며

들어 있는 강력하진 않지만 습관적인 불안, 날이 선 나이프와 소음기가 달린 작지만 묵직한

총..그 사이에서 지나치게 돈이 많이 든 지갑을 찾아냈고 그 중에 얼마를 꺼내 주인에게 내

밀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곳으로, 약속장소를 마음대로 바꾸어버린 그녀에 대한 케이

스의 반응에 대해 추론 하면서- 화를 낼까, 덤덤히 받아들일까-그곳을 나왔던 것이다. 그러

니 사막 한 가운데서 그를 적대시하는 어떤 무리를 만났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

고 그들의 몸에 총알 몇 개를 박아 넣어 준다고 해서 케이스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이다. 총을 쥐었을 때의 익숙한 느낌이 케이스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딱히 구분할 수는 없었

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막에 몇 개의 그림자와 나의 발자국을 남겨놓고 그녀가 기다리는 마

을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이라고 부를 만큼 충분히 어두워져 있었다.  

사막은 계속해서 마을로 침범하려는 듯 했다. 사막과 경계를 이루는 부근의 건물들은 잔뜩

모래로 뒤덮여 있었고 그 중 몇 채에는 사람이 살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나는 빨간 머리가

알려준 대로 길을 걸었고 곧 그곳에 도착했다. 대체적으로 작고 초라한 이곳의 건물과는 다

르게 그곳은 한층은 더 크고 깨끗하고 약간 고급스러웠다. 주민이 아닌 여행자들이 사용하

는 곳인 것처럼 보였다. 문 입구에 걸린 간판에 무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읽을 수는 있

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ㅣ이앟ㅌ"

그 건물 앞에는 몸이 붓고 손과 얼굴이 거친 여자들이 빗질을 하고, 물건을 나르고, 수다

를 떨고 있었다. 건물의 창과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노란 빛이 몇 개의 싸구려는 아닌

의자들과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3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 고급스러운 옷과 치장을 하고 있었고 비슥한 복장인 것으로 보아 일행인 듯 했

다. 남자들은 검정색, 여자는 하얀색. 아닌 순백색. 얼음 같은 얼굴과 더 차가운 눈동자. 고양

이와 같은 냉담함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그렇다, 나는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친숙하고  

아련한 느낌.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다른 곳을 보는 듯한 그녀의 눈이 나에게 향

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미티지


남자들은 검정색, 여자는 하얀색. 아닌 순백색. 얼음 같은 얼굴과 더 차가운 눈동자. 고양이

와 같은 냉담함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그렇다, 케이스는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친숙하

고  아련한 느낌. 케이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다른 곳을 보는 듯한 그녀의 눈이 케

이스에게 향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는 많은 사람을 깨웠고 끌어들였다. 일련의 사람들이 건물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

상한 것은 일을 하는 여자들, 바삐 길을 가던 주민들은 힐끗 우리를 쳐다봤을 뿐 곧 흥미를

잃고 자신들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흥미를 가지고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들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나왔다. 비명을 지르는 여

자와 일행인 듯한 그녀는 곧 여자와 함께 입을 모아 불협화음을 만들기 시작한 세 명의 남

자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인간적 어조, 감정이라곤 전혀 실리

지 않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들. 내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게이트웨이를 통하지 않으면 네트워크들은 저런 반응을 보이지요. 심하면 네트워크가 파괴

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을 아미티지라고 소개했다.

"아, 이런 게이트웨이와 네트워크는 게슈탈트들을 설명하는 공식적인 용어입니다. 뚜쟁이와

떼거리라는 저속한 말 대신에요"

동양계의 얼굴. 작고 반짝이는 검은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온다. 부드러운 말투에도 불

구하고 그에게서는 어딘지 군인의 모습이 보인다.

"저는 정부소속의 학자입니다. 게슈탈트들에 대해 연구하지요. 정말 그들은 인류 진화의 관점

에서 볼 때 놀라운..."

학자라고? 작지만 다부진 몸매에 걸친 긴 검정색 코트가 마치 박쥐를 연상케 했다.

어느새 비명소리는 그쳐 있었다. 건물에서 나와 그들을 달래던 여자가 다가왔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얼굴, 전체적으로 작고 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여자였다. 물기가 많은 눈이 비난을 품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케이스"

몰리

"당신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나와 몰리와 아미타지는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히스테릭한 입술. 창백한 표정, 가끔씩 자신의 윗입술을 불안한 듯 작고 하얀 이로

살짝 깨물기도 한다. 왠지 알 수 없는 혐오감과 연민을 느끼는 케이스.

아미타지는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얘기에 열중해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지

도 않고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모습이, 정말 오랜 세월 책에만 파묻혀 지낸 사람 같기도 하

다.

"정말, 당신들은 놀라운 경우요. 학계에서도 분명 굉장한 논쟁거리가 될 거요. 물론 자료가

많이 부족하기는 합니다. 오늘의 실험으로 얻은 결과들은 솔직히 실망스러운 것이었소. 그건

아마도 당신이 참여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그러니 다음엔 꼭 당신도 응해 줬으면 하는.."

형식적인 미소를 띠며 아미타지의 얘기를 듣고 있던 몰리의 안색이 굳어졌다.

"싫어요. 저번에도 같은 얘기를 하시지 않았나요. 그리고 그에 대답은 항상 똑같아요.

그러한 요구가 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미타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하지만..모든 호모 게슈탈트들은 등록을 하게 되어 있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받는 테스트  

와 내가 하려는 것은 동일한 것이오. 다만 정확도에서 차이가 .."

애써 설득하려는 아미타지의 말을 몰리는 중간에서 끊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의 등록정보를 보세요. 당신 정도면 그 정보에 접근가능 하지 않나요. 하여튼 오

늘 저와의 얘기는 이쯤에 끝내시기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미타지는 뭔가 더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냥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뭔가를 꺼내어 몰리에게 건네줬다.

"이것은 약속한 대금이오. 그리고 언제라도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시오, 그에 대해선 충분한

  보답을 약속합니다"


이제 그녀와 나만이 남았다. 침묵을 깨기 위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장소를 바꿨지?"

몰리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그가 뒤늦게 말해주더군. 왜, 그 빨간 머리 말야. 그래서 좀 늦었어."

그제야 몰리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가 알려줬군요."

약간 자조적인 말투였다.

"그렇다면 가져왔나요?"

난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걸"

그녀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동물을 연상시키는 묘하게 검은 눈동자.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술을 너무 마셨나봐, 아직도 덜 깼거든, 분명 그가 뭔가 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 치졸하군요. 그런 식으로 해서 값을 깎으려는 건가요."

그녀의 얼굴에 일종의 모욕감과 수치심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를 찾는 사람들은 줄을 섰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하지요.

그게 싫으면 ..."

케이스의 지갑 속의 필요 이상의 돈. 이유를 알 수 없던 혐오감. 나는 케이스다운 태도로 돈

을 꺼내 테이블에 집어던졌다. 교활한 작은 짐승 같은 비굴한 미소를 띤 채 재빠르게 돈을 집

는 몰리를 보며 나도 역시 그녀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우아한 태도를 회복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케이스는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물었다.

"그런데,, 그녀를,..뭐라고 부르면 되지? 이름은?"

몰리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웃음을 멈추기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웃음은 멈췄지만 그녀는 얼굴에서 조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름이라니..가르쳐 드리죠.

그녀의 이름은.."


밖에서는 아미티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모 게슈탈트-뚜쟁이와 떼거리 혹은 게이트웨이와 네트워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다. 그 다른 사람도 다른 손으로 또 다른 사람을 잡는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원을 형성한 일련의 사람들이 호모 게슈탈트 들이다. 그들은 입을 다문

다. 손을 잡지 않은 사람들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입을 연

다. '우리는 하나야. 나에게만 얘기해, 나만 그들과 얘기할 수 있어' 그 단 한 사람이 게이트

웨이다. 게이트웨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사람들과는 얘기할 수 없다. 단지 비명을 지

르고 고통스러워하고 혼란 속에서 죽기도 한다. 사람들은 게이트웨이를 뚜쟁이라고 부른다.

떼거리란 게이트웨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하고 게슈탈트 자체를 지칭하기

도 한다. 이런 저속한 표현에는 일종의 시기심이 들어있는데..왜냐하면 게슈탈트들은 그들

내부에서 완벽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복수형 단수. 개별적 자아가

녹아내리고 더 커다란,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그들. 게슈탈트란 '전체,형상'이란 뜻이다.

여기서 전체란 부분들의 합 그 이상을 말한다. 손에 손을 잡고 벽돌같이 단단한 행복을 맛

보고 있는 그들을 호모 게슈탈트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미티지의 말들을 종합해 본 결과 얻어낸 결론이다. 호모 게슈탈트라고? 뭔가 자폐적 냄새

가 났다. 그러나 그의 세계에는 항상 어딘가 병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

지. 완벽한 합일이라고?

"인간들-호모 사피엔스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집단도 있으니까요"

뚜쟁이니, 떼거리니 하는 비속어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아미티지가 말했다.

"저는 연구만 하다보니 호모 게슈탈트들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가 이렇게 부정적일지는 몰

랐습니다"

"그들이 진화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종개념에서 벗어나니까요. 또 100년

전부터 게슈탈트들의 생성-대륙의 학계에서는 차라리 그들에게 생물학적 개념을 벗어나서

구성적인 개념을 사용하자고 하지요-도 중단된 상황이구요"


게슈탈트들은 일반적으로 불사라고 불려진다. 손을 잡은 각각의 사람들은 노드라고 불린다.

네트워크란 노드들의 연결을 칭하는 말로서 게슈탈트에 대한 분석적 개념이다. 노드들 내부

에서의 소통 방식은 강력한 텔레파시에 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이트웨이란 특화된

노드로서 게슈탈트와 외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감각기관인 것이다. 개별 노드들

이 파괴되면 게슈탈트는 붕괴된다. 그러나 게이트웨이는 교체될 수 있다. 물론 교체될 대상

은 여러 가지 성립요건이 있는 것 같다. 게슈탈트들이 선별하는 것 같은데 그들이 정확히

어떠한 부분에서 선택을 하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텔레파시 감수성' 혹은

'텔레파시 적합성'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게슈탈트들은 여러 가지 초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알려진 능력으로서는 독심술, 엄청난

계산능력, 사전적 기억능력, 예지, 염동력도 보고 된 바 있다. 대개 한 개슈탈트들은 위 능력

중 한 가지만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며, 현재 분류에 따라 최고 레벨에서는 위의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 레벨이 높아갈수록 게이트웨이의 교체도 빈번한데, 그들이 개별 인간의 능력을

극한까지 사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게이트웨이가 되면 대게 원래의 개별성을 잃어

버린다. 그래서 게이트웨이의 교체는 네트워크의 특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현재 최고 레벨의 게슈탈트는 3개체가 있으며 그중 12명의 노드로 구성된(보고 된 노

드수의 최대치이다)게슈탈트가 이 나라의 위원회이고 나머지들도 각 나라의 수뇌역할을 하

고 있다.


게슈탈트간의 연결이 확인 된 바는 없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를 주장하면서 각 노드중

에 특정 노드가 이러한 게슈탈트간의 연결을 담당한다고,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이론화하

였다. 이 이론을 극단적으로 적용한 것이 '국가는 최고의 최대의 게슈탈트'라는 극우적 주장

이며, 그들의 말을 빌자면 게슈탈트들은 일종의 수신기이며, 모두의 뜻이 곧 위원회의 뜻이

라는 것이다.


지금까지가 아미티지와 그를 찾아온 동료학자-의 모습을 한 나와의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아미티지는 호모 게슈탈트의 인공적 생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렇게 되면 호모 게슈탈트들은 이제 생성 아니 생산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보국에 따르

면 저쪽에서는 거의 실용화 단계에 이르렀답니다."

그가 동료에게 어두운 눈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래서 몰리가 중요한 거요. 그들에게 뭔가 실마리가 있어요"

어디서나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음모들이 그의 광기를 둘러쌓고 그 광기를 자라게 하고 결국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또 다시 나는 이 가련한 세계를 두들겨 부술 꼬투리를 잡았다.

이 세계도 역시 악하므로.

아미티지가 말을 잇는다.

"정말 놀라운 사례입니다. 왜 갑자기 다시 게슈탈트들이 형성된 걸까요. 그리고 그 몰리라는

게이트웨이는 어째서 개별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

"처음에는 나는 그녀가 가짜가 아닌가 생각했었소. 하지만 곧 그녀가 변칙적이긴 하지만 정

말 게이트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한데..계속 거부하면

공안부의 힘을 빌려야겠지요. 폭력이라는 것이 때론 사태를 간단히 만들 때도 있으니까."

아미티지는 자신의 말에 열중하여 그의 동료의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황이 전도되어 게이트웨이가 게슈탈트들을 조종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너무

공상적이라고 한다해도 게이트웨이가 개별성을 지닐 경우, 우리가 게슈탈트들을 통제하기가

수월해진다는 것은 당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걸요. 사실 게슈탈트들은 너무도 고고해서

-흠, 아이러니한 미소를 짓는다, 비인간적이다 라고 해야겠지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동

기화해야 하는지 난해하단 말입니다.... 잘만하면 위원회의 장악도..."

어느새 그의 동료는 케이스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케이스는 가늘지만 치명적인 칼

날로 아미티지의 목을 그었다. 아미티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목에 난 구멍으로 피와

함께 쉿하는 바람소리를 간헐적으로 낼뿐이었다.

이로써 케이스는 빨간 머리의 청부를 완수했고 나 또한 많은 것을 얻었다.

증오 이상의 것.    



몰리-게이트웨이 혹은 뚜쟁이


"당신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름이라니..가르쳐 드리죠.

그녀의 이름은.."

몰리였다.

그녀의 대답은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였지만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아미티지를 뿌리치고-그 역시 믿을 수

있는 인간 같지 않았기 때문에-갈 길을 갔다. 또 누군가 나의 팔을 잡았다. 아미티지는 아

니었다. 청소를 하던 여자들 중에 하나였다. 아직 젊고 호리호리 하고 반반한 얼굴을 가진-

자기 자신도 충분히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그런 여자였다.

"이봐요, 당신 몰리와 얘기하는 것을 봤어요."

여자는 몰리의 이름을 부를 때 경멸과 시기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당신, 여자가 필요한 거죠. 그렇다면 나는 어때요"

한껏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는 여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자신의 제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한 여자는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난 몰리보다 더 싸요. 그리고 그 떼거리들이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게 뭐예요

난 더 젊다구요. 인간이구요. 그런 괴물이 아니에요"

케이스는 여자를 자신의 팔에서 떼어낸 다음 꺼지라고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거부당한 것이 모욕스러운 모양인지 상스러운 말을 마구 뱉어냈다.

"흥, 그년은 인간이 아니란 말야. 그리고 그 뚜쟁이가 항상 같이 있을텐데!!

너도 누가 봐야 흥분하는 변태인가 보지!!!"


그렇다 몰리는 뚜쟁이였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단지 게슈탈트라는 것, 그

러한 사실 이외에는 아무런 특별한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그들. 그 특유의 자폐성 때

문에 정상적인 일도 불가능한 상태, 이런 전시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

었을까. 보통 게슈탈트들은 인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보통 게슈탈트들은 동일한 성으로

구성되어진다. 여자들 아니면 남자들. 그러나 몰리는 그렇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그리고 보통 게슈탈트들는 인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노드는 인간이 아니다. 노드들은 자

기들만의 세계에서 지고한 복락을 누리는데, 왜 몰리만 현실의 지저분한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노드들은 인간이 아니다. 몰리는 인간이다. 몰리는 배가 고프고 가난에

찌들려 있다. 그러므로...

돈 많은 여행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는 외롭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만큼 충분히 외롭다. 그러나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 몰리하고만 얘기가 된다. 그는

몰리에게 돈을 준다. 그녀는 그와 함께 그의 방에 들어간다. 물론 몰리도 함께. 몰리가 없

으면 그녀는 비명을 지르니까. 그녀는 그와 밤을 보낸다. 몰리도 함께. 몰리가 없으면 그녀

는 소리를 지르니까. 몰리는 단지 거기 앉아 조용히 보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눈을 감기도

한다. 몰리는 조용히 거기에 있다.  


몰리들은 뜨내기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들이 돈을 많이 번다. 그

러면 분명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 못마땅함을 몸소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

을 것이다. 그래서 몰리는 그들을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뚜쟁이는 기둥서방과 함께 있

어야 한다. 어디든 밤의 신사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음지에서의 일을 도와줄 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빨간 머리였다. 다정한 술집주인. 다감한 빨간 머리. 단지 존경과 몇 푼

의 돈을 건네는 것만으로 생명의 은인이 되어주고 손님도 보내준다.

몰리는 케이스에게 부탁을 했다. 빨간 머리에게 이번 달에는 좀더 정성을 보탰다고 했다.

"항상 감사드린다고 전해줘요"

그 크고 불안한 눈에 증오를 가득 담아 몰리가 케이스에게 말을 했다.

왜 케이스냐고?

케이스도 뜨내기니까. 그리고 그도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했으니까. 나는 케이스의 그 많은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빨간 머리가 몰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며 덧붙

여 했던 말들의 의미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한참 이상한 눈으로 울 것 같은 눈으로 케이스를 내려다보던 빨간 머리가 말했다.

"이상한 놈이 그곳에 있다더군. 이름은 모르겠어. 동양계라는데-아직도 옐로우들이 있다니!.

30년 전 학살 때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학자나부랭이라고 하고 다닌다는데 뭔가 냄새가 나.

어딘가 의심스럽다구. 마침 그가 몰리를 만나고 있다니까 자네가 가는 김에 좀 알아봐 달라

구, 만약 우리한테 위험한 녀석이면"

그리고는 빨간머리는 케이스의 어깨에 그 큰 손을 얹고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도 좋아"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마침 아미티지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나는 그를 찾아갔고 그가 잠들어 있었기에, 그리고

너무 피곤해 보여서 그냥 깨우지 않았다. 너무 피곤한 그였기에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

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기억했다. 그리고

화장실의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처음으로 나는 케이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울한 얼

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비로소 왜 사막에서 그림자들이 나에게-아니 케이스

에게  달려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찬찬히 케이스의 얼굴을 지웠다. 수염부터 시작해서 입, 코...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

했다. 나는 내가 '그의 얼굴'을 착실히 이 세계로 챙겨온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첫 번째 세계

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얻었다. 나를 죽인 사내를 죽이고 그의 얼굴에서 뜯어냈다. 눈도 입

도 코도 귀도 아무것도 없는 그런 맨들맨들한 얼굴이었다. 그 가면을 뒤집어쓰자 내 얼굴은

사라졌다. 나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 아래 있을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

한다. 눈도 없는 그 얼굴 아래에서, 그 무책임한 어둠아래에서 떨고 있을 나의 얼굴을 기억

할 수 없다. '그의 얼굴'위에 케이스의 다정한 눈만이 달려있다. 나는 그 눈도 지웠다. 그리

고 어둠 속에서, 다시 도래한 모든 세계의 밤의 장막 아래서 나는 침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미티지를 찾아온 그 남자의 얼굴을 말이다.

얼마 뒤 나는 그의 얼굴을 하고 아미티지를 찾아갔다.





케이스 그리고 케이스


아미티지는 갑자기 마을을 떠났다. 올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케이스는 아직 그곳에 있었

다. 나는 그의 머릿속에서 힘들게 둘을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의 육체에 뿌리내

린 기억들은 무분별하게 뒤섞이려 하고 있었다. 오른쪽은 나의 것, 왼쪽은 케이스의 것. 아

니 왼쪽이 나의 기억, 오른쪽이 케이스의 기억..언제부턴가 많은 세계가 있었다. 그 많은 별

들에 하나의 어둠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케이스가 있었다. 그 많은 고통 중에 단 한 명의 여

동생이 있었다. 그 잔인함에 반기를 든 사람들에 의해 그는 조각이 나서 전 우주에 뿌려진

다. 그리고 내가 그를 찾으러 다닌다. 케이스는 역시 그들 때문에 가난하게 된 사람들에 의

해 여동생과 헤어지고 만다. 그리고 케이스는 그녀를 찾으러 다닌다. 왜 내가 그를 추적하는

지 알 수 없다. 그의 파편들을 모아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온 이유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아직 완전한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은

건지, 애초에 나라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뿐인지. 케이스는 언제, 왜 이 마을로 왔는

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여동생의 많은 것이 아련할 뿐이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들도 단

지 현재에서 도피하기 위한 환상일 뿐인가. 나는 이 마을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된다. 그녀는

너무도 완벽하게 행복해서 내가 다가가면 비명을 지른다. 단지 그녀를 생각하면 숨이 가빠

올 뿐이다. 케이스는 이 마을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된다. 그녀는 너무도 완벽하게 고통스러워

서 그가 다가가면 비명을 지른다. 단지 그녀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이 나올 뿐이다. ..그리고

그리고 계속...


그래 케이스, 기억은 너의 것이다. 네가 가져가도 좋다. 왜냐하면 여기 나의 몫도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너의 것인가? 이 육체에서 생겨났

기 때문에, 너는 본디 이 육체의 주인이기 때문에 너의 것이라 말할 참인가. 그러면 나는 너

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지. 난 알고 있다고, 육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래 우리의 문제는

누가 그녀를 사랑하는가에 있지 않다. 우리라고!!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는    

존재하고 싶다고. 강렬한 열망, 혼탁한 열기, 그 욕망이라는 부분에서 나라는 현상은 존재하

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지 말자. 누구의 것이든, 누구를 사랑하든 무슨 상관인가.

가장 강력한 감정을 따를 뿐이다. 설사 그녀가 비명을 지를지라도.



몰리 그리고 몰리


아미티지가 마을을 떠난 것으로 된지 몇 일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몇 번 몰리를 만난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는 몰리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기

도 했다. 과연 그녀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 것인가. 또 한번은 몰리를 앞세우고 그녀

를 찾아가 하루 종일 그녀를 쳐다보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몰리 앞에서 그녀에게 전해지

길 바라는 의도를 지니고 다정한 말을 몇 마디 하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녀에 대

한 나의 감정이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에?-나는 말하거니와 그것은 정말 무의미하지만 강렬

한 감정이었다. 아니면 몰리에 대한 나의 혐오와 연민이 너무도 거침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 사이에 케이스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원래의 목적, 자신의 여동생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드디어 찾았던 것이다.

내가 그 마을을 떠나오기 바로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를 만나고 있었다.

몰리는 몇 번의 만남 때문인지 어느 정도 경계를 풀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만남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러면서도 넉넉하게 대금을 치루고 있어서인지-그녀

는 가끔씩 나에게 호의적인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은 모래 바람이 그리 심하지

않아서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날씨는 되었고, 산책을 하다보면 부담스러운 침묵이 따라

오기 마련인 것이다. 나도 무언가 얘기를 시작했다.

"나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 철이 들기 전에 헤어졌었어.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젠가

잃어 버렸어, 만약 가지고 있었다면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군"

"저에게도 단편적이지만 예전의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어요. 내 또래의 남자애. 동생인

지 오빠인지. 듬직한 느낌이 같이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선 오빠 같기도 하구요"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인가? 당신의 기억인가?"

몰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마르군요. 조금만 가면 이 마을의 유일한 우물이 있지요"

나도 굳이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가 궁금해 한 것을 물

어보았다.

"게슈탈트는 완벽한 평안을 누리고 있다더군. 개인으로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그런 평화

말이야. 언젠가 게슈탈트를 신의 사자로 믿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길 그들

은 인식이 없기에 차이가 없고.."

"인식이 없기에 차이가 없고 차이가 없기에 차별이 없으며 차별이 없으므로 오해도 이해도

그 어떤 증오도 없이 오로지 무無,"

그녀가 나의 말을 이었다. 오로지 무無, 소름끼치도록 고요한 평안. 호모 게슈탈트들에 대해

얘기 할 때 주문처럼 읊어지는 말들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가 되물었다.

"난 단지 그녀가 행복한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요, 그들은 완벽하죠. 행복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녀가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악의에 찬 수많은 이야기 중에 '특별한 수술'에 대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특별한 수술'을 받으면 '텔레파시 감수성'이 훼손되어 호모 게슈탈트가 될 수 없다는 것

이다. 몰리의 관자놀이 부근에 분명 수술 자국이 있을 거에요. 항상 긴 머리로 감추고 다니

는 그곳에 말이에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행복해 하고 있나?"

"그래요. 상당히 만족스럽군요"

이번에는 그녀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인가? 그녀인가?"

결국엔 그녀가 화를 냈다.

"정말 바보 같군요. 그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요.

내가 그녀에요. 그녀가 바로 나라구요"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화가 치밀었다.

"아까 여동생에 대한 얘기를 했지, 그녀에 대한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어. 그녀가 마지막으

로 모습을 보인 곳이 여기거든"

어느새 우물에 도착했다. 몰리는 목이 마른지 물을 퍼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갈증이 났지만

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에는 매우 곤란한 일이 있었나봐. 갑자기 잘 지내던 사람

들 몇 몇이서 정신이상을 일으킨 거야. 멀쩡하던 사람이 말도 안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거지. 문제가 더 심각해 진 것은 그것이 단순한 정신병이 아니라 바로 호모 게슈탈

트가 생성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단 점이야. 한 명이 모자랐다는군. 그리고 마침 내 동생은 떠

돌이였고"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 뒤에 이야기를 알아내는데 더 시간이 걸렸지.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동생이 게이

트웨이였나 하는 거였지."

나는 조금씩 물러나고 있던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흉터

가 보였다.

"다행이 그녀는 게이트웨이였던 거야. 아니 불행이었을 수도 있군. 교체될 수 있다는 사실.

사고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게이트웨이는 소모품이므로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해서 이상해 할 수만은 없는 거야"

갈증이 심해서였을까. 숨이 가빠오고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도 숨쉬기가 어

려운지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게이트웨이이고. 그래서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것이 많아. 어떻게 당신

이 게이트웨이가 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내 동생은 어떻게 된 거지?"

몰리는 나이 팔을 힘껏 뿌리쳤다. 그리고 간신히 숨을 쉬면서 토막토막 말을 내뱉었다.

"... 난.. 아....니에요"

난 물었다.

"자 이제 솔직하게 묻지. 당신이 그 애를 죽였나"

"그건 자살이었어요."

"자살이라고?"

"그녀가 그렇게 해주길 원했던 거에요."

나는 다시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외쳤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원하지?"

몰리의 눈이 광기를 띄기 시작했다.

"왜냐구요? 당신 저 괴물들이 어떤 상태인지 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을걸요."

그녀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지고한 복락이라고, 차별이 없는 그런 평안이라고.. 개 같은 새끼들. 저 안의 그 지독한 증

오를 당신이 알기를 해? 저 괴물들은 결코 이해도 화해도 할 줄 몰라. 그저 소리를 지를 뿐

이야. 계속해서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지. 과연 그걸 당신이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눈물로 얼굴이 뒤덮인 채 그녀가 웃었다. 남자같이 굵직하고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한 가지 더 알려줄까. 당신이 그토록 열렬히 사모하는 그녀는 단지 몸만 여자일 뿐이야. 정

신적으로는 남자라고. 알겠어? 당신이 사랑한 그녀, 아니 그라고 해야겠군. 원래 없었던 거

야."

그러면서 몰리는 나를 밀쳐내려고 했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는 뒤로 넘어졌고, 우물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곧 멀지 않은 곳에서 고통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하나의 게슈탈트가 붕괴되

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죽어 버린 것이다. 내가 죽인 것일까. 아니..나는 고개를 저

었다. 아니다. 한번 죽은 자가 다시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녀를 죽일 수 없게 되

어 있었다. 나는 원래 죽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치 않았던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막


나는 다시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그러면서 케이스를 생각했고, 케이스의 여동생을 생각했고

몰리를 생각했다. 어느 쪽 몰리든 상관없이 둘 다 말이다. 그리고 몰리의 청부를 떠올렸다.

그녀는 빨간 머리에게서 해방되고 싶어했다. 나는 그녀에게 치를 화대 대신에 그 청부를 받

아들였다. 비록 청부자가 죽었다해도 청부는 유효한 것이다. 여전히 사막은 반짝인다. 내가

지나가자 죽어있던 그림자들이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나는 보지 못한 척 하며 그들을 지나

쳤다. 그들이 내 뒤를 따라오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곧 온통 모래로 온몸이 뒤범벅이 된

채 나는 술집에 도착했다. 내가 그곳을 나올 때처럼 그곳은 비어있었다. 그 몽롱하고 흐릿한

곳으로 나는 들어갔다.

접시를 닦고 있던 빨간 머리가 내가 들어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케이스, 늦었군. 좀 오래 걸렸어"

나는 총을 겨누었지만 쏘지는 않았다. 등을 보인 사내를 쏠 수는 없다.

"일은 잘되었나?"

"그래"

침묵이 흘렀다. 접시를 다 닦은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고 나는 그를 쏘았다.

얼굴이 박살난 채 그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발길질을 해대기 시

작했고 난 빨간 머리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멀린"

그가 다시 일어났다. 얼굴의 구멍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었군. 오래 걸렸어"

흘러내리는 피를 멈추지도 않은 채 멀린은 말했다.

"자네는 점점 과격해져 가는군."

"이번 방식은 너무 괴상했어. 혼란스러웠다구."

그가 웃었다. 바람소리가 났다.

"인격의 전송이란게 매우 편한 방식이더라구. 몸을 다시 소멸시킬 필요도 없고"

나는 조심스럽게,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가지고 물었다.

"사실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내가 알려주길 바라는 건가. 그래봤자 때가 되지 않았으면 소용이 없어.

자네가 스스로 깨달아야해"

무지하게 서있는 나에게, 멀린이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일세. 그러니 시간은 충분해."

그가 턱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그림자들이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잖은가"

아아..그래 나는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 케이스는 위원회가 선택한 게이트웨이였으므로.

그림자들과 문을 나서는 나의 등 뒤에서 멀린이 외쳤다.

"멀리 나가지는 않겠네. 또 볼 날이 있을 거야"

나도 역시 그에게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침.

moodern
댓글 2
  • No Profile
    서진 03.10.11 00:54 댓글 수정 삭제
    게슈탈트 하면 자꾸 심리 치료관련이 떠오르네요. (관련없는 이야기...) 아무튼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계속 건필하시길.
  • No Profile
    아무 10.03.30 17:39 댓글 수정 삭제
    내용을 이제 따라잡았다 싶으면 다시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재미있네요, 노드, 게슈탈트, 네트워크...다른 작품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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