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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줄리엣의 언덕

2012.12.05 17:0212.05

<줄리엣의 언덕>

  내가 줄리엣을 처음 만난 것은 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그 화창한 햇살의 가치는 147억 3천만 달러의 적자였다. 당시 나는 빗물을 이용해 전기 에너지를 생성하는 기업과 그 관련주들 집중적으로 매수한 상태였고, 300일 넘게 지속된 쨍쨍한 햇살은 태양광산업의 주가만 미친듯이 상승시키고 있었다.
  대체 반등의 시기가 언제일지(이 더럽게 쨍쨍한 날씨는 언제쯤 흐려지는 것인지), 지금이라도 손절하고 빠져나와야만 하는지, 혹여 정리에 들어간다면 언제쯤이 좋을지 복잡한 계산들로 내 머리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덕분에 내 저조한 수익률에 대한 아버지의 잔소리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말 듣고 있느냐? 아들아?"
  아버지는 분명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휠체어 위에 얹혀진 좁고 굽은 등짝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전혀 내쪽을 보고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두 눈은 전 세계 기업들의 시황이 표시된 16개의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낙폭은 크지 않습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 보더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빌려온 자금들은? 신용만기가 코앞인 채무가 산더미이지 않느냐?"
  "아직 몇 주 정도는 기한이 남아있습니다. 좀 더 아슬아슬해 질 때까지는…"
  쾅! 아버지는 짧게 책상을 한번 내려쳤다. 몇 마디 말 보다 어린 아들을 겁주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들아, 이건 단순히 더 벌고 덜 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을 번다는 것은 생존과 관계된 문제란 말이다. 내가 너에게 또 한번 역사 교육을 해야 하겠느냐? 이렇게 너와 떠드는 시간이 내게 얼마의 손실인지 꼭 계산을 해주어야겠느냔 말이다."
  시간이 금이라는 말은 아버지에겐 비유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투자가였으니까.
  "아닙니다. 아버지"
  나는 반박하지 않고 수긍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실히요. 더 이상은 손실을 내지 않을 겁니다. 곧 정리할 겁니다."
  "위험하게 투자하지 말거라."
  <위험하게 하지 마라.>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말도 그것이고, 매일 듣는 말도 그것이고, 집안 곳곳의 액자에 매달아 수시로 읽고마는 말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거래를 해치우는 모습을 잠시 머뭇거리며 지켜보다, 조용히 문을 닫고 곧바로 내 방으로 뛰어가 보유한 모든 주식을 팔아치웠다. 10%대의 손해를 봤지만 더 큰 손실을 보고 아버지에게 들켜 강제로 매각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아버지의 걱정도 이해는 갔다. 만약 내가 파산하여 내 손에 한 푼의 자본금도 남지 않게 된다면 <감정사>들은 나를 '잉여인간'으로 평가내릴 것이고, 곧바로 살육기계들을 보내 내 몸을 잘게 갈아 옥수수밭의 거름이나 단백질 통조림 따위로 만들어버리고 말테니까. 현대사회에서 파산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모든 주식을 정리하는 바람에 더 이상 할일이 없어진 나는 비행정을 몰고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휴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동산 투자를 위해서였다. 대지는 풍성했고 태양은 가만히 누워 낮잠을 자기 딱 알맞은 높이였지만, 당시의 나는 조용함과 여유로움 같은 것들의 위대함을 몰랐다. 아름다운 산과 꽃과 들판도 뇌 속의 필터를 거치고 나면 가격과 가치와 세금으로만 치환되어 인식되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언덕과 언덕을 질주하며, 아직 저평가된 상태이거나, 개발하기 알맞지만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황금대지를 찾기 위해서 수십 개의 치열한 숫자들과 복잡한 알고리즘의 선들을 대지 위에 난도질하듯 그어대고 있었다.
  한참을 비행하던 나는 우연히 한 언덕을 발견했다. 그 언덕위로는 매일 이백 서른 일곱 개의 인공위성과 삼백 오십 대의 제트비행기가 지나고 있었지만 그 땅의 주인은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 한가하게 두개의 풍차와 벤치를 하나 설치해두고 나들이나 즐기는 공원으로만 언덕을 사용하고 있는듯 했다.
  이 금싸라기 땅에 에너지충전소 하나 설치하지 않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부동산 네트워크에 접속해 당장 그 땅의 주인을 호출했다.
  삼십분 뒤, 한 여자가 비행정을 타고 내 앞에 착륙했다. 경계없는 모양새를 보아 이 땅의 주인이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일주일쯤 잠만 자다 일어난 것 같은 허술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는 그녀의 방만한 자산운용에 대해서 하고싶은 잔소리가 끊임없이 샘솟았지만, 꾹 참고 용건만을 전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적이지 않은가? 서로의 재산을 뺏고 빼앗는 전쟁의 적에게 이로운 정보를 가르쳐 줄 이유가 없었다.
  "이 땅을 매입하고 싶군요. 얼마면 됩니까?"
  "네?"
  "이 언덕을 구입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대답대신 동그란 두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리둥절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 잠시 고민하는 듯도 보였으나 그녀는 금새 단호하게 대답했다.
  "팔 생각 없는데요?"
  노는 땅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보아 손쉽게 거래가 성사될 거라 믿었던 나는 그녀의 꿍꿍이를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나를 떠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되돌아왔다.
  "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필요하니까요."
  "무슨 개발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요컨데… 인공위성용 에너지충전소 같은?"
  "음… 딱히 개발하진 않을 거에요."
  나는 점점 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개발할 계획도 없으면서 필요하다니? 장기가치를 보고 묻어놓는 식의 알박기 투자를 할 생각인가? 그도 아니면 더 큰 프로젝트를 위한 선점전략인가?
  나는 더 깊게 생각하는 대신 그녀에게 명함을 건넸다.
  "제 명함입니다. 혹여라도 매각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연락 주시죠. 공시가의 세배까지 쳐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명함을 받아들고 한참 뚫어져라 보다가, 갑자기 생각난듯,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명함을 내게 건넸다.
  "참, 예의가 없었네요. 거래할 생각은 없지만 제 명함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곱씹으며 나는 비행정을 타고 날아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소유의 감시위성에 접속해 그녀가 있었던 언덕을 감시했다. 그 결과 나는 더욱 미궁에 빠졌다.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 때문이었다. 그녀는 벤치 앞에 받침대를 놓고 새하얀 종이를 얹어두고는, 앉아서 다섯 시간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멀리 떨어진 호수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가끔 펼쳐놓은 종이에 무언가 끄적이기도 했지만 내용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비행정의 의자에 누울듯이 비스듬히 앉아서 그녀의 명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줄리엣이라…"
  명함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단지 줄리엣Juliet이라는 이름만 적혀있을 뿐 직함하나 쓰여있지  않았다. 심지어 연락가능한 전자메일주소나 단말기번호 조차도.
  “이 여자, 사업을 할 마음이 있긴 있는건가?”
  다섯 시간이 더 흐르고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자 줄리엣은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종이는 새하얀 상태 그대로였다.


  며칠 뒤 폭격처럼 비가 내렸다. 빗물이 전력이 되어 팔려나갔고, 며칠전 팔아치운 주식들은 하나같이 골든크로스를 그리며 새빨간 삼각형과 함께 날아올랐다. 이미 모든 주식을 처분해버린 나는 그 모습을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해야 했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욕을 퍼부었다. 내 계좌정보를 표시하는 화면엔 여전히 새빨간 글씨로 수 조 달러에 달하는 손실액이 표시되어 있었다.
  줄리엣을 만난 뒤로 한동안 나는 그 언덕에 대한 것은 잊고 다시 처음부터 주식을 모으기로 마음먹었다. 전통적 우량주보다는 급등의 가능성이 높은 신생기업과 고성장주를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지금까지의 손해를 한방에 멋들어지게 역전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몇몇 위험을 무릅쓴 무리한 투자가 몇 배의 손실로 되돌아왔다. 당시의 주요한 테마 중 하나는 <전쟁>이었는데, 북쪽 나라의 순수기계화 로봇들과 남쪽 나라의 유기화합 로봇들 사이에서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거라는 소문을 담은 찌라시들이 증권가를 떠돌아다녔다. 나는 전 재산의 절반을 털어 군사기업들의 주식을 끌어모았다. 예감이 적중해 내가 매수한 주식들은 5일동안이나 상한가 행진이 계속되었다.
  이제 하루만 더, 딱 3%만 더 상승한다면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이 두배가 되는 시점이었다. 멍청하게도 나는 욕심을 냈다. 남은 재산을 전부 부어넣었다.
  그리고 그날 밤 거짓말처럼 평화협정이 타결되었다. 주가는 끝도 없이 미끄러졌다. 서킷 브레이크도 매매정지도 소용없이 주가하락이 12일간 지속되었다.
  나는 며칠만에 내 재산의 55%를 잃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선 한가지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언덕.

  줄리엣이라는 여자가 소유한 언덕을 매입해 개발한다면 지금의 손실을 메꾸고도 남을 터였다. 투자에 실패를 거듭할수록 불안이 내 안에서 점점 자라나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했다. 나는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시야를 스스로 가로막고 점점 더 줄리엣의 언덕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 언덕만이 지금의 손해를 만회할 기회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 나는 감시위성을 이용해 계속해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알짜배기 대지를 방치하면서까지 그녀가 추구하는 투자전략이 무엇인지 꼭 알아내고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투자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과거의 학자들처럼 투자론이니 완전시장이니 하는 개념은 현대에 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이제 전세계의 자본가는 47명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투자자 한사람 한사람의 의도와 전략을 읽어내는 것만이 유일한 투자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과거 이력, 행적을 모두 조회해 보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자본을 투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태어났을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현금 37조 달러은 지금도 고스란히 민간은행에 예치된 채 존재했고, 그 예금에서 매년 발생하는 4%대의 이자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푼돈을 손에 쥐고 그저 종이에 색칠이나 하는 삶. 그런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다음날 비가 그치자마자 줄리엣은 다시 그 언덕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곧바로 비행정을 타고 언덕을 향했다. 제대로 한번 그녀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나는 비행정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로 대지를 가로질렀다. 10분도 안되어 풍차가 보였다.
  비행정이 착륙하는 모습을 본 줄리엣은 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느릿느릿한 모습에 속이 터졌다. ‘요즘같은 세상에 저렇게 느려 텨져서 되겠습니까?’ 하는 잔소리가 목젖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녀가 먼저 내게 인사를 건냈다.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 꽤나 예뻤다. 표정도 돈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표정은 동전 한개만큼의 가치도 될 수 없었다.
  "전에 뵈었던 분이시군요. 루드비히씨… 였던가요? 무슨 일이시죠?"
  "다시한번 제안하겠습니다. 이 언덕을…"
  "아뇨."
  "말을 끝까지 한번 들어 보시죠. 제가 제안하는 가격을 들으신다면…"
  "아니. 들을 필요 없어요. 얼마가 되었든 팔 생각이 없으니까."
  생글거리던 미소는 쇠붙이처럼 차갑게 식었다. 굳게 내려앉은 입술을 보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한걸음 곁으로 다가서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줄리엣은 뒤로 조금 물러서면서, 고개를 돌려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아무리 고민해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종이가 얹어진 받침대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림? 그게 뭐죠?"
  "그건… 종이에 연필과 물감을 이용해서… 아… 그러니까…"
  줄리엣은 더 이야기하는 대신 내 손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아기의 뺨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감촉이 손등에 닿았다. 그건 아버지의 손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조금 전의 생글거리던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예쁜 감각이었다.
  "자, 차라리 직접 보는게 훨씬 이해하기 쉬울 거에요."
  나는 도무지 가치를 알 수 없는 감각에 취해 어느새 종이의 앞까지 이끌려왔다. 눈 앞의 종이에는 죽죽 그어진 회색의 선들과, 그 선들 사이를 메우는 색상이 가득했다. 그려진 선과 색은 명백한 의도를 갖고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배치되어 있었다.
  "저 호수를… 베끼고 있군요."
  "예전에는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사람의 손으로 옮겨오는 걸 '그림'이라고 불렀대요. 이걸 만들어내는 행위를 '그린다'고 하고요."
  "그림? 눈에 보이는 걸 왜 종이에 베낀단 말입니까?"
  "그냥 베끼는 것이 아니네요."
  그녀가 반발했다.
  "그럼…?"
  내가 되묻자, 그녀는 대답을 망설이며 양 손 검지를 쭈뻣거렸다.
  "몰라요. 모르죠. 아무도 모르니까 지금은 '그림'이라는 것이 사라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분명 있어요. 카메라로 찍어서 출력하는 것과는 다른 뭔가가 말이에요."
  "그 기술을 보유하게 되면 이 언덕이 가진 가치 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겁니까?"
  줄리엣은 한숨을 한번 쉬고 나를 쳐다봤다.
  "저기요. 매사에 그런식으로 생각 안 할 수 없어요?"
  "뭐가 말입니까?"
  "수익이니 이익이니 그런거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본가>이지 않습니까. 투자를 통해서 수익을 내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전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태어나기보다 한참 더 예전에는, <예술가>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해요. 단지 사람들을 즐겁게하고, 무언가를 느끼도록 하는 반대급부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지요. '그림을 그리는' 건 수많은 예술기법 중의 한가지 방법이에요."
  줄리엣은 잠시 또 한번 머뭇거렸다.
  "만약 제가 <예술가>가 된다면 저는 그림을 그려주는 댓가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돈을 받고 부자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이에요. 그게 아녜요. 오히려 반대죠. 중요한건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서 제게 돈을 주게 될거라는 점이에요. 이자와 수익률밖에 모르는 그 사람들이 종이에 옮겨놓은 호수의 풍경에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해봐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지! 어떤 세상이 오게 될지! 궁금하지 않나요?"
  종이에 옮긴 호수를 보고 기쁨을 느끼고, 또 거기에 돈을 지불하게 된다… 다시한번 힐끔 그녀의 '그림'을 보았다. 내게 그건 그저 삐뚤삐뚤한 선과 색으로 베껴놓은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무언가 소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군요."
  나는 도망치듯 인사를 하고 비행정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정의 속도를 최저한으로 낮추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줄리엣의 말을 몇번이고 곱씹었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명백한 적의가 꼭꼭 숨겨져 있어서, 그 적의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컴퓨터를 켜고 정보를 검색했다. '그림'이라는 단어에서는 아무것도 건져낼 수 없었다. '예술'을 검색하자 컴퓨터가 단편적인 몇가지 정보를 화면에 출력했다. 과거의 기술이며 상세한 내용은 불명이라는 이야기. <감별사>가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사라진 직업이라는 이야기. 미술, 음악, 영화와 같은 세부적인 관련 검색어들…
  검색을 반복하다 그 중 눈에 띄는 내용을 하나 발견했다. '예술' 중 에는 '음악'이라는 세부적인 분류가 존재하는데 '음악'은 '악기'라는 기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기법이라는 내용이었다. ‘음악’은 몰라도 '악기'라면 나도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악기'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골동품 중의 하나였다. 골동품은 비정형화된 화폐의 일종으로, 이유는 모르지만 가끔 관습적으로 현금을 대신하여 거래에 이용되어지는 자산이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악기' 하나를 구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골동품은 실질적인 쓸모가 없는 자산인 만큼 자주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아마 지금도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당장 아버지에게 달려가 거래를 요청했다.
  "'악기'를 너에게 팔란 말이냐?"
  "네 아버지."
  "왜 '악기'가 필요하지?"
  "이유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값은 원하는대로 지불하겠습니다."
  '골동품'에는 정해진 가치가 없다. 하지만 거기에도 상식적인 가격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선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을 제시했다. 아버지가 '악기'를 구입했을 때의 다섯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나는 그 값을 치르더라도 '악기'를 손에 넣고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값을 받아들인다면 되려 아버지의 의심을 살테고, 그렇게 된다면 거래가 무산될 가능성이 컸다.
  "너무 비쌉니다."
  "그렇다면 대기권 방어 시스템을 공급하는 군수업체 주식은 어떠냐? 너에게라면 이익을 보지 않고 팔 생각이 있다만."
  "저는 '악기'가 필요합니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너를 믿고 넘겨줄 수가 없구나, 아들아. 또 어떤 '위험한' 투자를 벌일지 모르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이미 절반 이상의 재산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자식이 모든 재산을 잃고 <감별사>에게 끌려가 통조림이 되어버릴까 걱정하고 계셨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정 걱정이 되신다면 대여해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리스 거래를 하자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매달 10만 달러을 지불하는 조건으로요. 물론 보험에도 가입하고 손상에 대한 보상도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생각을 접고 내 조건에 승낙했다. 고작 악기 하나 빌려가서 무얼 할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듯 했다. 빠른 판단이 투자자로서 그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창고에 있으니 알아서 꺼내가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창고에서 악기를 발견한 나는 내 방으로 가져와 다시 컴퓨터의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아까 발견했던 문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누구나 50일 완성>이라는 제목의 문서는 아버지가 악기를 구입했을 때 함께 동봉되어 따라온 메뉴얼이었다. 비록 골동품이기는 하나 이것도 기계였으니까, 사용법이 담긴 문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 기계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나도 조금쯤은 줄리엣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베끼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무엇인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악기에 달린 줄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무척이나 기분나쁜 소리가 났다.
  

  "알고 있어요? 지금부터 백오십년 전엔 인류의 숫자가 100억이 넘었다고 해요."
  줄리엣이 말했다.
  "아아 <대증식>의 시대 말이군요. 꾸역꾸역 수백억이 넘는 인구를 우주선에 태워 태양계 밖으로 쫓아내고서도 남은 인구가 그정도였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날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줄리엣을 찾아갔다. 몇 날 몇일 끈질기게 그녀를 설득한 결과, 그림이 완성된다면 그때에는 언덕을 내게 판매하겠노라 약속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업을 확인하겠다는 핑계를 명분으로, 나는 매일같이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하루에 최소 세 시간 이상 호수를 노려보았고, 무언가 느낌이 들 때마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녀가 한번 한번의 붓질에 자신의 모든 정성을 다 바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눈 앞의 호수를 아득히 넘어선 무언가였다. 투자의 귀재는 화면에 펼쳐진 자산들의 가격을 넘어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들 하는데, 그녀는 물감과 호수에 관해서만은 그런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서너번의 붓질을 하고 나면 줄리엣은 거의 탈진한 상태가 되어서 비스듬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 시간동안 우리는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배웠다.
  "저희 증조 할머니께서는 그러시더군요. '사람들이 뱉는 방귀와 트림만으로도 공기가 오염될 것 같은 시절이었다.'고요."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광장에서 집회를 하면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은 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힘들군요."
  "하지만 지금은 43명 밖에 남지 않았죠."
  "<감정사>의 '선별' 때문이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었다구요? 인류가 멸망했는데도요?"
  "아직 남아 있어요. 줄리엣씨도 저도."
  "흥. 100억에 비하면 43은 없는 숫자나 다름 없어요. 인간은 이미 멸종된 거나 다름 없다구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인구가 늘 수록 노동력의 가치는 떨어져만 가는데, 물가는 오를 수 밖에 없고, 물가에 맞춰서 임금도 오르고, 오르는 인건비를 감당 못한 기업은 엄청난 숫자의 직원을 해고할 수 밖에 없었어요. 수십억명이 실직상태였어요. 그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욕하고 때리고 죽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그들 모두의 입에 쌀밥을 먹이고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던지…"
  "아니면 서로를 욕하고 때리고 죽여버리도록 놔두는 수 밖에 없었겠죠."
  "그나마 합리적인 방법이었다는 겁니다. "
  "<감정사>의 '선별'이요?"
  "인공지능은 적어도 그 사람의 혈통이나, 성별, 학벌같은 건 따지지 않았으니까요. <감정사>는 오로지 그들의 직업과 능력만을 객관적으로 평가했어요."
  "그렇게 믿고싶은건 아니구요?"
  줄리엣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일어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줄리엣이 대화를 중단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와의 대화에서 기분이 상했다는 의미였다. 내 의견에 반대하고 서로에게 불편한 논쟁을 시작하는 대신 대화를 중단해버리는 것이다.
  그로부터 네 시간이 넘도록 줄리엣은 호수를 노려보았지만, 끝내 붓은 움직이지 않았다.


  줄리엣과 만나지 않는 시간엔 틈틈이 '악기'를 '연주하기'위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악기'는 여섯가닥의 줄이 진동하면서 커다란 통을 울려 소리를 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여섯 개의 줄이 있으므로, 아무런 조작을 하지 않더라도 악기는 여섯가지의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했다.
  각각의 줄에 다른 압력을 가함으로써 차별화된 음색을 이끌어내고, 적절한 비율로 손가락을 짚어 소리에 단계를 형성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각각의 소리에는 G니 A니 BmA7이니 하는 이름이 붙여져 있어서 이들 소리의 연계를 통해 '음악'이라는 것이 완성되는 모양이었다. 음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운용되어야 한다고 메뉴얼에서 지시하고 있었다.
  여섯개의 줄이 올바른 소리를 내도록 하는 데에만 일년이 걸렸다. 제대로 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기'에 대한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구입하는 데에만 10조 달러를 소모했다. 내가 가진 현금의 3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필사적으로 투자하여 만회한 흑자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처음 올바른 소리를 냈을 때의 감정은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처음 수익을 실현했을때의 기쁨, 아버지에게 칭찬받았을 때의 감정과도 비슷했지만, 단지 성취의 기쁨만은 아니었다. 그때의 감정 속에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머지 부분들이 있었다.  
  '악기'가 들려주는 소리는 줄리엣의 미소를 닮아있었고, 손등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도 닮아있었다. 줄리엣이 말했던 베끼는 것 이상의 무언가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다.
  악기를 튕기면서 줄리엣이 했던 말을 고민해 보았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법과 제도를 방패삼아 품위있는 결단인 척 했겠지만, '선별'은 비열하고 야만스러운 과정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서로를 욕하고 때리고 죽이도록 놔둘 수는 없었으니까.
  '선별'은 인공지능의 탄생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어느 컴퓨터 회사가 발표한 신제품 <로봇>은 완전한 인공지능 로봇이었다.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보다 수백배 힘도 세고 일도 잘 하지만, 잠도 자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휴일도 없고 파업도 하지 않고 심지어 복지수당이나 월급도 줄 필요가 없는 완벽한 노동자였다.
  <로봇>의 탄생은 세상을 단숨에 변화시켰다. 경영자들은 노동자 100명의 연봉을 모아 <로봇> 한대를 구입했다. 1년이 지나자 <로봇>한대가 <로봇> 10대 분의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경영자들은 그 돈과 실적을 담보로 10배의 돈을 빌려 100대의 <로봇>을 구매했다. 노조도 파업도 의미가 없었다. 반대를 외치는 사람은 모조리 해고되었으니까.
  10년도 지나지 않아 80억이 넘는 인류가 직장을 잃었다.
  100억에 육박하는 실업자들은 순식간에 폭동이 되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모든것을 욕하고 때리고 부수고 폭파시켰다. 그것은 반란이자 혁명이었다. 신성한 노동을 되찾기 위한 전세계적 동시혁명. 사회주의자들이 목놓아 부르짖던 꿈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짖는 <혁명군>을 향해, 세계정부는 큰 결단을 내렸다.  
  거대한 부를 축적한 기업가들의 연합인 세계정부가, 자신들의 부를 포기하고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인 로봇들을 때려부수고 이익을 공유했을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같은 세상이 되진 않았을 테니까. 기록은 모호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론하기로 이후에 진행된 양상은 이랬을 것이다.
  온 인류가 평생 행복하게 먹고 일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도 남을 자금을 갖고서, 세계정부는 <혁명군>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또 다른 종류의 로봇들을 탄생시켰다. 완벽한 살육기계들. 완전한 인공지능에게 인간을 효율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폭력마저 부여한 것이다.
  전쟁은 일방적이었다. 전쟁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분류작업이고 정리작업이었다. <인류발전을 위한 선발육종법>이 발효되고, 세계정부가 만들어낸 가치평가 알고리즘 <감정사>는 100억 인류 한명 한명의 가치를 면밀히 평가했다. 그 사람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재산의 현재가치를 그의 자산으로, 식량과 자원을 소모함으로써 평생에 걸쳐 인류에 끼칠 해악의 현재가치를 부채로 사람들을 비용편익분석 모델 속에 우겨넣고 금액으로 환산했다.
  당연하지만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대부분의 인간은  0점이거나, 그 이하의 점수를 받았고, 인류사회에 부채만을 잔뜩 안겨주는 '잉여인간'으로 평가되어 언제 어디서건 급작스럽게, <감정사>의 습격을 받았다. 지네를 닮은 살육기계들은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있든 건물의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그들을 산산이 토막내고 잘게 갈아 흡입구로 빨아들였다.
  저항은 발작조차 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최초의 '정리작업'에서 90억 이상의 인구가 토양의 양분으로 산화했다. <로봇>은 인공지능 특유의 유연한 적응력과 창의력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직종에 진출해 나갔다. 산업은 급속도로 기계화되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수십개의 일자리가 자동화 설비로 대체되어갔다. 처음에는 농부와 건설노동자. 이후엔 의사와 웨이트리스를 비롯한 서비스 종사자. 종국에는 경찰과 군대까지… 하나하나의 직업군들이 죽음을 맞이해 나갔다.
  몇년이 지나고 세계정부는 육체노동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인공지능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아와 창의력을 가진 <로봇>은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과 창조력을 확보했으며, 점차 정신노동의 영역에까지 침투해갔다.
  아이러닉하게도 맨 먼저 대체당한 것은 세계정부의 정치가들이었다. <감정사>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스스로 법과 행정을 담당했다. 뒤이어 회계사들이, 사무직들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조인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끝끝내 살아남을 거라 생각했던 건축가와 발명가가 자신들의 일터를 내주었고, 마지막으로 더이상 고객을 찾을 수 없게된 보험설계사가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는 단 하나의 직업만을 갖게 된다.

  자본가.

  내가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세계에는 43명의 자본가들이 모인 14가족만이 남아있었다.


   줄리엣을 만난 이후로도 꾸준히 자산을 관리했지만 내 총 재산은 추락 일로를 걷고 있었다. 청정에너지와 관련된 기업의 주식은 기어이 발발한 로봇들간의 전쟁으로 휴지나 다름없게 되어버렸고, 야심차게 구입한 수십개의 인공위성은 대부분 폐품이나 다름없는 지경으로, 결국 몇 대가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켜 법정에서 막대한 보상비용이 발생했다.
  성인이 되던 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00조 달러중 이제 수중에 남은 것은 30%도 채 되지 않은 셈이었다. 이렇게 코너에 몰리면 몰릴 수록 나는 더더욱 줄리엣의 언덕에 집착하게 되었다. 줄리엣이 그림만 완성한다면 나는 금방이라도 다시 재기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에 점차 깊게 빠져들었다.
  그런 내 희망에 부응하듯, 줄리엣의 그림은 점차 완성에 다가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보기 힘든 선과 색의 집합에 불과했지만, 몇번이고 새로 고쳐나간 덕분에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숲과 호수의 정경을 알아볼만큼 뚜렷한 형태를 갖추어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십여 명의 투자자가 파산에 이르렀다. 대부분 자신의 욕심과 성급한 판단 때문이었지만, 일부는 아버지의 공격적인 사업확장 때문이었다. 그들의 자본이 0에 수렴하기가 무섭게 <감정사>의 '선별'이 시작되었다. 투자자 네트워크에 로그인 된 회원의 수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일년 사이에 남은 인류는 23명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투자자들은 죽은 투자자들의 재산을 흡수하여 더욱 부유해졌고, 동시에 몇 배나 절박해졌다.
  때가 임박해 왔다는 생각에 에너지 관련 기업들과 건설 기업들을 차분히 구입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줄리엣의 언덕에 대해서 상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줄리엣이 그림을 완성한다면 그곳에서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까? 왠만하면 그 곳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사업이 좋을 것 같았다. 줄리엣이 원한다면 그 언덕에서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기다릴 필요도 없다."
  "네?"
  "그 줄리엣이라는 아가씨. 부동산 몇 개를 제외하고는 전 재산을 다 한 은행에 저축해둔 모양이더구나."
  "그렇… 습니다만?"
  "내가 가진 계열사들을 잘 조절하면 그 은행의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을 거다. 의도적으로 부실한 경영을 한다면 아마 몇 달 내로 파산시킬 수도 있겠지. 그럼 그 아가씨는 전 재산을 잃게 되는 거다. 밥 값을 벌기 위해서라도 그 언덕을 네게 팔 수 밖에 없을 거다. 그것도 매우 저렴한 가격에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무슨 반박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줄리엣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찬 줄리엣의 눈을 다시 보고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버님의 손실도 크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재산은 다른 쪽으로 빼돌릴 수 있을거다. 부도를 맞은 뒤에 빠져나오는 주식을 매입해서 다시 가치를 끌어올릴 수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도 너와 나의 재산을 노리는 경쟁자를 한명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냐."
  "하지만 줄리엣은 투자를 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나 아버지의 재산을 노릴 이유도 없구요. 가만히 이대로 시간만 흘러도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에 그 언덕을…"
  "멍청한 녀석아! 그 언덕을 노리고 있는게 네놈 뿐인줄로만 아느냐.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서 거래를 유리하게 끌고가는 건 좋다만 그 여자가 당장이라도 더 높은 값에 다른 녀석에게 넘기기라도 하면 어쩔 거란 말이냐. 이 세상에 득시글대는 녀석들은 전부 경쟁자라 하지 않았느냐. 그 여자도 마찬가지다, 아들아. 경쟁자는 전부 없애버려야만 해. 우리가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 우리의 재산을 잃어서는 안된단 말이다!"
  "그런…"
  "알고 있느냐 아들아. 네가 그 돈을 전부 잃고 나면, 당장이라도 <감정사>가 네놈을 통조림으로 갈아버리고 말 거다. 그러곤 소중한 단백질원이라며 내 밥상에다 그걸 올려놓겠지. 나는 네 살코기 따위는 먹고싶지 않다. 세상에는 네 재산을 빼앗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너를 노리는 자들이 널려있는데 너는 무얼 하느라 재산을 탕진하고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하지만이고 뭐고, 무조건 안전하게 투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 남아야 한다고 말이다!"
  쾅! 아버지는 또 한번 책상을 내려쳤다.
  "알겠느냐 아들아. 내일 당장 그 은행과 관련된 주식들을 사 모으거라. 나도 함께할 터이니. 둘이서 힘을 합쳐 일주일 내로 경영권을 확보하는거다. 알아 들었느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

  한번도 줄리엣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줄리엣은 오히려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래요. 정말로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그냥 아무도 투자같은 거 하지 않고 지금 가진 재산으로 살면 되잖아요? 어째서 위험하게 서로를 공격하고 재산을 뺏고 빼앗는 걸까요?"
  "글쎄… 남을 믿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루드비히 씨는 절 믿고 있는걸요. 재산을 뺏을 마음도 없고. 그리고 말이에요. 대체 우리한테 왜 돈이 필요한 걸까요? 먹고싶은건 언제든지 먹을 수 있고, 갖고싶은 것도, 하고싶은 것도 평생 마음대로 하고도 남을만큼 넉넉한 자원이 있는데."
  “그야 투자를 하기 위해서겠죠.”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되물었다.
  “그럼 투자는 왜 하는데요?”
  “그야...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이 왜 필요한데요?”
  그녀는 또 다시 나를 공격했다.
  “그야...”
  “생각해봐요. 루드비히. 어쩌면, 자본은... 돈이라는건 허상일지도 몰라요.”


  낙뢰가 번쩍 비행정을 때린 다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의 방에서 나오자 마자 나는 무작정 비행정을 타고 줄리엣의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텅 빈 머리는 심지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비가 오는 날엔 줄리엣이 언덕에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비행정이 언덕에 도착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엔진을 끄자 후두둑 비가 쇠를 때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멀리 천둥이 치며 태풍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태풍은 풍차도 벤치도, 심지어 언덕마저도 도려낼것만 같은 기세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각종 계기가 붉은색으로 위험을 알렸다. 비행불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안전조치 때문에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는 이륙이 불가능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의자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시커먼 구름이 강물처럼 빠르게 흘렀다.
  의자 뒤에 놓인 악기를 꺼내어 배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코드를 쥐고 현을 튕겼다. 잔뜩 피멍이 든 손 끝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무른 손이 쇠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몇 번씩 손끝이 벗겨지고 멍들다보면 굳은살이 생기면서 아픔도 사라지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천둥과 빗소리를 이겨내려 있는 힘껏 현을 때렸다. 몇 달째 잘 되지 않던 F코드를 쥐고 현을 튕겨보았다. 왼손 손가락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않아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한번 자세를 잡고 현을 튕겼다. 이번엔 원하던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몇 번 연주를 하는 사이 또 음이 틀어지며 연주가 잘 되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냥 빗소리가 싫었다. 비가 그칠때까지 코드를 잡고 현을 튕기고, 다시 코드를 잡고 현을 튕기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이윽고 손 끝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연주를 계속하는 사이 몸 속을 흐르는 감각이 모두 마비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윽고 비가 그치고 바람도 멎었다. 거짓말처럼 푸른 하늘이 햇살을 내려쬐었다. 찡그리며 가린 손가락 사이로 비친 하얀 구름이 줄리엣의 손바닥을 닮았다. 구름이 바람에 밀려 저편 너머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구름을 붙잡고 싶었다. 붙잡아두고 더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었다.
   다시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안테나를 올리고 화상전화를 연결했다. 잠옷을 두르고 핑크색 수건으로 머리를 말아올린 줄리엣이 화면에 나타났다.
  "지금 몇 시인줄이나 알아요?"
  "아… 미안해요. 여긴 햇살이 너무 좋아서."
  "그러시겠죠. 지구 정 반대편에 계시니 어련하시겠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했다.
  "조금 전에 예쁜 구름을 봤어요. 그런데 태풍때문에 금방 날아가버렸어요. 왠지 아쉽더라구요. 더 바라보고 싶었는데."
  "구름이라뇨?"
  "조금은 알 것 같아서요. 줄리엣씨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어머, 그렇다니 저도 기쁘네요. 그런데 태풍이라니?"
  "아아… 지금 줄리엣씨 언덕에 있어요. 잠시 맑아지긴 했는데 다시 어두워지는 게 아무래도 태풍의 눈에 있는 모양이에요."
  "위험하게 거긴 왜 갔어요."
  "그러게요. 왜 온 걸까요?"
  "어휴… 아무튼 꼼짝 말고 있어요. 바로 갈 테니까."
  무어라 말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아무래도 조난당한 것으로 오해받은 모양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굳이 올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지나가버린 구름만큼이나 그녀의 두 뺨과 미소도 아쉬웠다.
  이내 주위가 밤처럼 어두워지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다시 악기를 움켜쥐고 연주를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F코드를 성공했다. 처음으로 완성된 '음악'은 마치 소리를 도구로 줄리엣을 베껴놓은 것만 같았다.  아니, 베낀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가 그치자 마자 줄리엣의 비행정이 언덕에 도착했다. 그녀는 내 손가락에서 피가 심하게 난다며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하나하나 감아주었다. 상처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살짝 구부러진 머릿결에서 구름처럼 좋은 냄새가 났다.
  "줄리엣씨."
  "네?"
  "왜 투자를 안하죠?"
  "무슨…"
  "재산을 전부 은행에만 넣어두고 있잖아요. 찔끔찔끔 나오는 이자로 물감 값이나 충당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계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 몰라요? 그 돈 다 없어지면 어떡할려고요."
  "은행에 있는 돈이 없어지긴 왜 없어진다고 그러세요."
  "은행이 파산이라도 하면요?"
  "어휴 걱정도 많으시네요. 아무튼 전 싫어요. 귀찮기도 하고… 적성에도 안맞아요. 투자해봤자 오히려 손해만 볼 걸요?"
  줄리엣은 손사래를 쳤다.
  "그럼 저한테 투자해보는 건 어때요?"
  "루드비히 씨 한테요?"
  "절대 손실 내지 않을게요. 평생 신경쓸 일 없이 그림만 그리시면 돼요. 모든건 저한테 맞겨 두고요."
  줄리엣은 붕대를 감던 내 손을 내팽겨치며 말했다.
  "왠일로 연락하셨나 했더니 그런 이유였군요. 저는 루드비히 씨가 걱정되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기껏 분위기 잡고 한다는 소리가 그거에요? 됐네요. 그림만 완성되면 이 언덕 드릴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줄리엣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뒤돌아서려는 그녀의 팔목을 붙잡아 당겼다. 거칠게 잡아당긴 탓에 넘어질 뻔 한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뭐에요!"
  "가지 말아요. 가지 말고 내말 들어봐요. 줄리엣. 내가 아버지에게 이 언덕 이야기를 했어요. 훌륭한 투자처를 찾았다구요. 아버진 이 언덕에 대해서 저보다 더 큰 의미를 두고 계시더군요. 지금 당장 차지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요."
  "전 언덕을 팔 마음이 없어요. 당신 아버지가 아니라 누가 얼마를 준대도요."
  "아버진 당신이 예금을 맞겨놓은 은행을 파산시킬 거에요. 은행을 옮긴다면 그 은행을, 주식을 산다면 그 회사를 철저하게 망가뜨릴 거에요. 당신이 이 땅을 팔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이 언덕을 현금으로 바꾸지 않으면 당장 밥 사먹을 돈도 남지 않게 될 정도로 철저하게 당신을 공격할 겁니다."
  나는 줄리엣이 충격을 받고 주저앉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신 아버지만은 아니겠군요?"
  "그렇겠죠. 아버지가 방법을 알고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겠지요. 이 세상 누구라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줄리엣씨는 아마 몇 달도 못 버티고 파산하고 말 겁니다."
  "그리고 <감정사>에게 끌려가 통조림이 될테고."
  "그림도 완성할 수 없게 되겠죠."
  줄리엣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목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과 두 팔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입술이 내 귀에 닿을락 말락 간지러웠다. 그녀가 속삭였다.
  "고마워요. 저를 도와주세요. 나의 로미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진 자산을 전부 끌어모아 계산을 시작했다. 줄리엣의 37조 달러을 합쳐 내가 가진 자산은 70조 달러를 조금 넘는 정도였다. 아버지의 십 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규모였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먼저 아버지와 협력하는 척 나는 은행의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법한 주식들을 최대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적어도 아버지의 독단으로 주주총회 의결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의 지분은 확보해야만 했다.
  첫 일주일동안 나는 은행의 지분율 17%를 확보할 수 있었다. 37%로 최대주주가 된 아버지 다음으로 높은 보유량이었다. 그리고 선언했다.
  "뭐라고 했느냐 아들아."
  "줄리엣의 언덕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처음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고 휠체어를 굴려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일어서서 내 뺨을 후려쳤다. 나는 고개를 꺾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저는 줄리엣의 자산을 방어하는데 제 모든 능력과 재산을 사용하겠습니다."
  짝! 또 한번 손바닥이 날아왔다.
  "미친놈. 여자한테 홀린게냐?"
  "여자가 아닙니다. 아버지. 그림입니다."
  "그림? 예술 나부랭이 말이냐?"
  "알고 계십니까?"
  "그래 알고 있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골동품이다. 지극히 드물지. 네게 빌려준 악기보다도 말이다."
  아버지는 털썩, 다시 휠체어에 주저앉았다. 그의 어깨가 평소보다도 더 좁고 더 깊게 굽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 서린 주름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지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지만, 동시에 그 어느때보다도 어둡고, 두렵고, 강력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그 여자가, 그림이라는 것이 네게 빛을 줄 줄로 아느냐? 아들아. 그런 것들이 네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거라 믿는 게냐? 허. 순진한 녀석아. 아직도 어른이 덜 되었구나."
  아버지는 등 뒤의 화면을 가리켰다. 형형색색 숫자와 선들이 잔뜩 아로새겨진 차트가 시시각각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이것만이! 세계이고 전부다 아들아! 알겠느냐? 이 선들은 네 몸을 휘감고 먹이를 나르는 혈관이고, 심장이자 영혼이다! 너와, 네 아들들을 지켜내기 위한 전쟁터가 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단 말이다."
  "나머지는 다 허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생존 이외에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줄리엣은 저 밖에 있습니다. 아버지. 풍차가 있는 언덕에요. 우리가 서로의 재산을 훔치느라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이 전쟁터 바깥에 말입니다."
  "오냐. 좋다 아들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금새 평소의 냉정한 자본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 한번 보자꾸나. 그 여인이 정말로 이 전쟁의 바깥에 있는지 말이다."
  "아버지…"
  "왜 그러고 서 있느냐? 어서 지켜야 하지 않느냐? 너의 소중한 언덕을 말이다. 가거라. 가서 지키거라. 남은 스물 한명의 자본가들로부터 너와 네 아가씨를 지켜보거라. 그 아가씨가 네게 정말로 그정도의 가치가 있다면 말이다."
  나는 달렸다. 곧바로 내 방의 단말기에 앉아 차트를 훑고 시황을 살폈다. 맨 처음 아버지는 곧바로 은행의 경영권 공격에 나섰다. 더 많은 주식을 확보해서 지분으로 나를 찍어누르려는 속셈이었다.
  최대한 버텨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의 자본력은 막강했고, 줄리엣이 예금을 맞긴 은행은 너무나도 작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모든 현금을 인출하여 여러 은행에 분산하여 예치하고, 일부는 주식으로 환원했다. 결코 도산할 리 없는 대형 우량주들을 중심으로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매일같이 비슷한 싸움이 반복되었다. 겨우 십여미터 떨어진 거리를 두고, 나와 아버지는 각자의 방에서 사투를 주고받았다. 해가 뜨고 장이 열리면 아버지는 내가 가진 회사들을 도산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는 하루종일 재산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며 도피처를 찾아다녔다.
  주식 시장이 닫힌 저녁에는 틈틈이 악기를 연주하고 줄리엣을 만났다. 그녀는 그날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디를 고쳐 그렸는지 내게 기쁜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매번 지금의 상황을 알려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결국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만은 이 생존싸움의 바깥에 있어주었으면 했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투쟁은 금새 전세계적 이슈가 되었다. 전세계 인구라고 해봐야 스물 세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그녀의 언덕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 후로부터 나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모든사람들로부터 내 재산을 방어해야만 했다.
  이 세상에 투자할 수 있는 모든 자산은 점차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새롭게 건물을 짓고 사업을 펼칠 수 있는 대지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언덕이 이끌어낼 부가가치는 무한에 가깝게 커져있었던 것이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그녀의 재산을 노리는 스물 한명의 자본가들 역시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나를 파산시키고 먼저 거래를 선점하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채권을 뿌려댔고, 경제의 흐름을 거스른 후폭풍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경제란 자연과 같아서 아무리 강하게 밀어붙인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결국 스스로를 파산으로 이끌고 말았다. 지나친 욕심과 견제가 자멸을 앞당기고 만 것이다.
  한사람의 파산이 연쇄적인 도산으로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자금을 빚진 상황에서 한 사람의 위기는 공동체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다. 비상대책을 수립할 틈도 없이 십수명의 자본가가 통조림이 되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거대 자본가들만이 대다수의 계열사를 매각하며 힘겹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요동치는 시장 상황 속에서 나도 최대한의 기지를 발휘하여 자본을 불려나갔다. 그러나 힘의 불균형은 점차 심각해졌고 아버지와의 자산은 100배 이상의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윽고, 줄리엣이 그림을 완성했다.
  "봐요. 루드비히. 제가 그림을 완성했어요."
  줄리엣이 기쁜 마음으로 내게 달려와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눈 앞의 정경을 베껴낸 선과 색 이상의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이를테면 줄리엣의 생각, 감정, 그리고 에너지와 영혼같은 것들이었다.
  "예술적이네요. 줄리엣."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활짝 웃었다.
  "정말요? 느껴져요 그런게?"
  "네.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죠?"
  "그럼요. 거짓말 아니에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온기를 통해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이 서로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구름 속에 있었다.
  "고생했어요. 줄리엣. 그 그림 내가 살게요."
  "에? 하지만… 돈을 받고 팔기엔 미안한데…"
  줄리엣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냥 가져요. 선물로 줄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제대로 돈을 받고 팔아야 <예술가>니까."
  "알겠어요. 그럼 얼마 쳐줄 거에요?"
  "어 글쎄…"
  나는 주머니를 뒤지다 문득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나 지금 현금이 한 푼도 없어요."
  "뭐야 그게. 김빠지게."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대신."
  나는 비행정에서 악기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음악을 들려줄게요."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연주한 음악은 무척이나 서툴렀고, 또 긴장한 탓에 평소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실력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기쁘게 웃으며 내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었다.   
    

  다음날 아침 비행정의 요란한 알림 소리에 깨어났을 때. 줄리엣은 이미 일어나 언덕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내게 인사했다.
  “일어났어요? 근데 루드비히, 저거 무슨 소리에요? 아까부터 울리던데."
  비행정에 내장된 금융거래 단말기에서 경고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비행정에 올라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건…"
  상황이 심각했다. 아침 장이 열리자마자 아버지는 총 공세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나와 줄리엣을 포함하여 남은 여섯명의 투자자들을 향해 대규모의 채무 상환을 요구했다.
  나는 곧바로 비행정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내가 가진 대부분의 자산을 처분했고, 만기 전까지 겨우 상환금액을 맞출 수 있었다. 오전이 지나기 전에 세 명이 파산했다. 남은 것은 나와 줄리엣, 그리고 또 한명의 투자자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서, 이번에야 말로 모든것을 끝내고 말겠다는 듯 행동했다.  
  그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다양한 거래와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기업들을 줄줄이 청산하여 정리시키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출판사가 있다면 제지업체를 없애버리고, 조선소를 갖고 있다면 철강산업을 통째로 해체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주주총회를 소집했다. 어차피 주주라고 해봐야 자신 혼자 뿐이었기에 별다른 절차조차 필요치 않았다.
  두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와 그녀, 그리고 모든 투자자들은 모든 사업기반을 잃고 말았다. 물론 아버지의 손실도 엄청났다. 그가 가진 사업체의 대부분을 현금으로 환원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업을 청산하면서 얻은, 단위로 환산하기도 힘든 막대한 현금이 있다면 이 세상을 처음부터 재창조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물론 그 돈은 그녀의 언덕을 구입하는데에도 충분할 터였다.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단말기의 전원을 끄고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무릎 위에 앉은 고양이 - 그 고양이의 척추뼈는 유기화합 로봇들의 신경부품으로 비싼 값에 팔린다고 했다. - 를 쓰다듬으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아. 이제 다 끝단다. 우리 가문을 노리는 모든 투자자들을 깨끗이 없애버렸어. 그 놈들은 이미 통조림이 되어버렸겠지?"
  "그렇겠지요."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어떠냐? 그렇게만 한다면 다시 내 재산을 떼어주마. 그 언덕도 그대로 네게 남겨줄거고. 너는 그저 그 아가씨와 같이 자손을 낳고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기만 하면 된단다."
  "거절한다면요?"
  "거절할 수야 없겠지. 네게 남은 건 그 언덕 하나 뿐이니까. 결국은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언덕을 한끼 밥 값에 팔 수 밖에 없을 거다. 언덕을 파는 순간 너는 '선별'당하게 될 거다."
  "아니오. 틀렸습니다. '선별'당하는건 아버지가 될 거에요."

  똑. 똑. 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었다. 네 개의 다리 위로 팔 하나만 달린 <로봇>이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수취인을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참지못하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나는 재빨리 소매로 눈가를 닦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무슨 편지냐?"
  "공문이에요. 아버지한테 온 거죠."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신은 사회에 부채만을 안겨주는 잉여존재입니다. 인류사회에 기여보다는 손실을 남길 가능성이 크므로 이른 죽음을 통하여 앞으로 인류에 끼칠 누를 미리 예방하시기 바랍니다. - 세계정부'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살육기계들이 들이닥쳤다. 기계들은 나를 스쳐 지나며 아버지 주위를 포위했다.
  "이, 이건 대체?"
  "여기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 언덕의 소유권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자본가는 오직 아버지 한 분 뿐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이 멍청한 기계놈들아! 나는 승리자란 말이다!"
  아버지는 겁에 질린채 뒤로 뒤로 도망쳤지만, 살육기계들은 매섭게 그를 몰아붙였다. 방 구석에 이르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모르시겠습니까? 아버지. 아버지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못미치는 숫자들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건 그냥 게임이에요. 아버지의 존재가치는 그저 게임의 상대자를 즐겁게 해주는 상대역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제는 '저것들'도 알겁니다. 아버지가 승리했지만,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감정사>는 법안을 고치고 공식을 수정할 겁니다. 더이상 투자는 경제활동이 아니게 될거에요. 거래할 수도 없고 활용할 수도 없는 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저 갖고있을 뿐인 황금이 무슨 가치를 지닌단 말입니까? 금융이 아무리 치밀해지고 복잡해진들 사람의 삶이 없는 곳에 화폐며 경제 같은 것들이 무슨 소용 있냔 말입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치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존재가치도 지워버린 겁니다."
  그럴리가. 라고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파묻으며 쾅하고 창문이 깨졌다. 창밖에서 날아온 톱날에 비명이 들릴 새도 없이 아버지의 머리가 잘려 떨어졌다. 그리고 더 많고 더 끔찍한 형태의 살인기계들이 벽을 부수고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그 끔찍한 광경 속에서 겨우 고개를 돌리고 다리를 움직여 내 방으로 향했다. 차마 아버지의 최후를 볼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찢고 부수고 용접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잠그고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끝났구나.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자에 앉은 채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살인기계가 발 소리를 죽이고 내 앞으로 살며시 걸어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계의 이마에 달린 액정 위로 글씨가 떠올랐다.
  <네 존재가치는?>
  나는 연주를 멈추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예술을 합니다."

  ●

  살육기계가 전부 사라진 지금, 나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엣을 만나러 갈 채비를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언덕에서, 그녀는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음악을 들려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그녀가 내게 그림을 보여주는 한, 우리는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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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올리는 다섯번째 글입니다. 이번에도 150매 분량조절이 아슬아슬 했네요. 몇년간 전혀 손대지 못하다가 취직하고 다시 글을 쓰고 있으니 이제 좀 숨쉬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나저나 제 반토막난 주식은 언제 오를런지 모르겠군요. 'ㅁ'
댓글 5
  • No Profile
    3.54 12.12.06 23:24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자본가만 남은 설정이 인상적이였어요ㅋ
  • No Profile
    바보마녀 12.12.07 13:36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금융과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단으로 밀어붙여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였는데, 설득력이 있었나 모르겠네요.
  • No Profile
    니그라토 12.12.08 12:49 댓글 수정 삭제
    제 글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설정이군요^^;;;
    혹시 제 글들에서 영감을 얻으신 건 아닌지...
    재밌게 글 잘 봤습니다.
  • No Profile
    바보마녀 12.12.08 15:17 댓글 수정 삭제
    3개월 전에 쓰고 묵혀두었던 글을 꺼내어 퇴고후 업로드한 것입니다. 니그라토님 글은 읽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ㅁ'
  • No Profile
    니그라토 12.12.10 08:48 댓글 수정 삭제
    하긴 어렵잖게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니까요.
    바보마녀님의 글이 제 글 보단 좀 더 극화가 잘 되어 있는 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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